소설리스트

비천색마-437화 (43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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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란, 탈주

도망을 가는 것도 아니고,누군가에게 쫓기는 것도 아니지만, 모용란은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상당히 조심스럽게 움직여야만 했다.

혹시나 자신의 위치가 발각된다면, 빙색마인이 나타날 수 있다!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존재!

아직까지 독고연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지 알려진 바가 없으며, 빙색마인 또한 독고연을 건드린 이후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모용란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용란은 방윤으로부터 배운 역체변용술을 사용하여 정체를 숨기고, 홀로 조용히 요동으로 오르는 여행길에 올랐다.

"소협 혼자서 여행을 하시다니, 요즘 시대에 위험한 거 아닙니까?"

쪽배 하나를 빌린 모용란은 뱃사공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자 혼자서 여행하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아이고, 요즘은 남자 혼자 다니면 색마로 몰리는 세상입니다."

뱃사공은 너스레를 떨었으나, 그의 눈에는 명백한 짜증과 증오가 서려있었다.

"저기 산서에서 있었던 일을 아십니까? 녹림황의 유산이 드러났다고 한창 난리가 일어났지만, 다들 알게 모르게 있었던 일이 하나 있었지요."

뱃사공은 목소리를 낮추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글쎄 녹림의 여인들이 자신들을 추색살로 위장하여 남자들을 색마로 몬 다음, 그들의 금품을 갈취했다고 합니다."

"뭐…? 어찌 그런 참담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제 말이 그렇습죠! 추색살을 사칭한 것으로도 모자라, 남자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려고 작정한 짓이 아닙니까?"

"남자들은 가만히 있던가?"

"이게 참 희안한게, 들을 때는 왜 다들 멍청하게 당하느냐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근데 막상 자신이 당하면 그런 이야기가 안나와요."

"자네 말을 들어보니 마치 옜날에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뱃사공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예. 저도 그런 일을 겪어봤습니다. 저는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여자 하나가 스쳐지나가면서 엉덩이를 슬쩍 문지르더이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지만, 갑자기 제 뺨을 때리면서 그렇게 소리치더군요. 이 남자가 제 엉덩이를 만졌어요!"

"...만지게 한 게 아닌가?"

"그러니까요! 그 때는 어찌나 억울하던지. 마침 곁에 다른 일행들이 있었고, 그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무사님이 있어서 망정이었습니다. 으으,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립니다."

사공은 이를 갈며 노로 강을 세게 휘저었다.

"아무튼 소협도 조심하십시오. 어디까지 가시는 지는 모르지만, 가는 길에 특히 여자를 조심하십쇼."

"...내 새겨듣겠네."

모용란은 깨달았다.

강호에 있는 수많은 색마들 때문에 고생하는 건 여인들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 * *

"아이고, 어서오십시오! 두 분이십니까?!"

"...혼자인데."

"아…."

허름한 객잔에 방문한 모용란은 노골적으로 꺼리는 남자 점소이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이쪽으로 와주시겠습니까?"

점소이는 모용란을 작은 탁자로 안내했다. 마치 1인용으로 개조된 듯한 작은 탁자는 벽을 향해 놓여있었다.

그게 마치 죄수들이 벌을 받으면서 식사를 하는 것 같아, 모용란은 허기가 싹 가셨다.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인가?"

"저, 절대 아닙니다! 우선 들어주십시오, 무사님! 요즘 강호의 정세가 흉흉하지 않습니까. 색마니 뭐니, 무고니 뭐니 아주 난리도 아니죠. 이들은 특히 혼자 다니는 무사님들을 자주 노립니다. 그래서 저희 객잔에서는 어쩔 수 없이 혼자오시는 분들은 따로 상을 내어드리고 있습니다."

"......."

혼자서 먹고, 조용히 뒷문으로 나갈 수 있도록 충분한 거리까지 벌려져 있었다.

'참 다들 살기 어렵네.'

모용란은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는가 싶었으나, 그렇지 않으면 피해를 보는 이들은 거의 다 객잔이었다.

아무리 객잔 내에서 무림인들의 소동이 일어나기 쉽다고는 해도, 무림인 중 착한 자가 피해를 보상한다고 해도 물건이 다시 복구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

'무림인들이 중원에 입히는 피해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지.'

무림인 사이의 다툼으로 식탁이 반으로 갈라지고 그릇들이 산산조각 난다면, 아무리 손해배상을 한다고 한들 그 사이에 일어나는 경제적 손실은 어찌 복구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것도 그나마 양식적인 문파나 제자의 이야기지, 사파 고수들끼리 붙게되면 손해배상도 유명무실해지기 마련이다.

"...알겠소. 소면 하나와 만두 한 그릇을 주시오."

모용란은 다 먹지도 못하면서 일부러 많은 양을 시켰다.

소면 한 그릇이면 충분하지만, 어디 성인 남성이-특히 무인 중에 소면 한 그릇만 먹고 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존재는 이미 이전 객잔에서 식사를 거하게 하고 몇 시진을 여행하다가 간식으로 소면을 먹는, 아니 마시는 존재이리라.

"......."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존재이거나.

모용란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혼자서 소면을 먹으로 온 이들과 거리를 벌린 채, 조용히 소면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미묘한 적막감.

주변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전부 다 자신을 음해할 것 같은 이상한 기분.

만약 '모용란'이라는 본 모습 그대로 돌아다녔다면 전혀 다른 시각으로 봤을 터.

"언니, 저기…."

"쉿, 혼자 다니는 남자는 위험해."

심지어 같은 여자들마저도 자신을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모용란은 자신이 너무 사내답게 변장했나 씁쓸해하며 점소이가 가져온 식사를 가볍게 마쳤다.

"......."

다 먹지 못할 것 같았지만, 꾸역꾸역 다 먹는데 성공했다. 모용란은 다시 갓을 눌러쓰고 값을 치른 뒤, 길을 떠났다.

"......."

객잔을 나오는 순간부터, 누군가가 뒤에서 따라오기 시작했다. 모용란은 정체를 숨기듯 숨기지 않는 정체불명의 존재들과 전투를 상정하며, 인적이 드문 대나무숲으로 향했다.

"누구냐."

설마 이런 말을 자신이 할 줄은 몰랐는데. 모용란은 자조하며 칼에 손을 올렸다.

"호호호, 눈치는 좋아서."

"우리 해우응파(解羽膺派)의 추적을 눈치채다니, 역시 보통 놈이 아니야."

모용란을 둘러싼 다섯 여인은 사나운 얼굴로 모용란을 향해 입맛을 다셨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바지 벗고 누워라. 안 그러면 네가 우리를 범하려고 했다고 밀고할테니."

"하, 미친."

강호가 아무리 정세가 어지러워졌다고 한들, 어찌 이런 자들까지 나오는 것일까?

"네놈들은 제정신인가?"

"제정신이지. 우리는 말이야, 너처럼 잘생긴 남자를 보면 자궁이 떨려서 견딜 수가 없는 여자들이라고."

"색마에 남녀는 없는 거 몰라? 키히힛, 빨리 안 오면 관아, 아니 추색살에 신고를 해버릴 거다?"

"...이 건방진."

모용란은 칼을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모두를 베어버릴 기세로 칼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서걱!

모용란을 덮치려던 색마들이 모두 머리카락이 잘렸다. 흑발이 뒷덜미는 커녕 뒷등까지 잘려나간 모습에 여인들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씨발, 누구야?!"

"추색살을 위장하다니. 간이 배밖으로 나온 여자들이군."

저벅, 저벅.

대나무숲에서 걸어나온 남자는 손에 검을 든 채 으름장을 놓았다.

"네놈들은 모두 잡아다가 추색살에 인계하도록 하겠다."

"네, 네놈…!"

"언니, 저 놈은 설마…!"

쾅! 남자는 진각을 밟으며 한 걸음에 여인들의 뒤를 덮쳤다. 주먹과 검집으로 여인들을 순식간에 기절시킨 뒤, 가벼운 발놀림으로 모용란을 지키듯 착지했다.

"괜찮소?"

"...괜찮습니다. 형장은…?"

"본인은."

남자는 갓을 들어올리며 시원하게 웃었다. 모용란은 너무나도 맑은 미소에 가슴이 순간 두근거렸다.

"천붕이라고 하오."

* * *

"혼자서 돌아다니면서 겪는 적막함과 외로움은 나도 잘 알지. 용 형은 어디로 가는 거요?"

"...용 모는 요동으로 갑니다."

모용란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성도 '용'으로 거짓을 말했다.

"그렇소? 별나시군. 요동까지 가려고 하다니. 용 형은 용봉지회에 참전하려고 하북에 가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천붕은 '용 형'이라고 모용란을 존칭했다.

모용란은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으나,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천 형은 하북에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찾고자 하는 여인이 있소."

"여인이요?"

천붕은 애틋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실수로 인해 색마에게 납치당한 여인이요. 그녀에 대한 실마리가 하북에 있다더군. 그래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하북에 가는 중이오."

"색마요…?"

"그렇소. ...자세한 건 미안하오. 용 형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용 형에게 민폐를 끼칠 것 같아 걱정되어 그렇소."

말해야 할까, 아니면 말하지 말아야 할까.

-이것도 인연인데 어찌 이리 매정하시오? 이 용 모, 비록 아직 실력은 부족하나 색마로부터 납치당한 여인을 찾는 협행을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소?

"...그렇소이까."

모용란은 속에서 차오르는 말을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다른 이를 도와주기에는 제 코가 석자였고, 천붕도 충분히 이해하는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강호를 여행 중이오."

"......."

모용란은 남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 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녀를 구할 것이외다."

눈앞의 남자의 목소리에는 거짓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수에 젖은 눈빛과 속에서 끓는 차가운 분노에 모용란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만약 이것이 자신을 범하기 위한 색마의 연기라면, 천하 누구라도 당하기 마련이리라.

'내 잘못이 아니야.'

색마 잘못이다.

* * *

"객잔에 방이 하나 뿐이라고?"

"그렇습니다. 다른 방은 지금 다 찼습니다."

모용란은 낭패감이 들었다.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둘이서 하북으로 올라온 것 까지는 좋았는데, 하필 묶고자 하는 방에 방이 하나 뿐이었다.

"다른 객잔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최근들어 용봉지회가 하북에서 열린다고 하니, 벌써부터 장기투숙으로 지내는 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럼."

모용란은 천붕을 눈으로 흘겼다.

"어쩔 수 없나. 용 형, 본인은 다른 객잔을 알아보도록 하겠소."

"예?"

"여차하면 노숙이라도 하면 될 터."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천 형."

붙잡아야 하나, 아니면 그냥 떠나보내야 하나.

모용란은 정조의 위협이 될 지도 모르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이 익히 알고있는 '의협의 상식' 사이에서 갈등했다.

"침대를 하나 더 들이면 될 일입니다. 어찌 방을 두고 홀로 이슬을 맞으며 밤을 지새우려고 하십니까?"

"하지만…."

모용란은 철저히 의협이 되기로 했다.

"주인장, 혹시 침대가 남는 것이 있소? 만약 인부가 필요하다고 하면 내가 옮기리다. 나는 무인이오."

"있기야 한데…."

객잔 주인은 노골적으로 모용란과 천붕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겠지. 음, 아닐 것이야. 알겠습니다. 남는 침대가 하나 있으니, 그것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래도 되는데…."

천붕은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처음보는 의협에게 실례를 할 수는...하지만...돈이...끙…."

"......훗."

모용란은 전낭에서 동전과 은화 하나를 꺼내 객잔 주인에게 건넸다.

"좋은 방으로 부탁드리오."

* * *

"...내가 미쳤지."

모용란은 홀로 방에 남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무슨 생각으로 남자와 둘이서 같은 방을 쓸 생각을 한 것인가. 모용란은 자신의 행동을 곰곰이 되새겼다.

하나. 검각에서 있던 시절부터 방윤과 함께 '둘'이서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혼자서 다니는 것에 몹시 어색했다는 것.

둘. 혼자서 지내면서 받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함께 다닐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

셋. 여인들을 일거에 제압하는 실력자가 함께 있다면 자신도 안전하다는 것.

물론 그 실력으로 자신을 범하거나 하면 대처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럴 사람은 아니야.'

모용란은 직감했다. 자신의 느낌과 감각을 믿었다.

남자는 결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만약 그런 존재라고 한다면, 모용란은 그냥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나도 색공을 연마했다 이거야...!'

검각주가 가르쳐준 '양물 터뜨리는 방법'을 사용하여, 색마로부터 벗어나리라.

"...그런데 좀 늦네."

잠시 산책을 나간다던 남자가 왜 이리 늦는 것인가. 이래서야 자신이 안심하고 잘 수 없지 않은가.

"......."

모용란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나무 숲 사이를 뛰어다니는 검은 인영 둘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어...?"

남자, 천붕은 팔다리를 전부 드러낸 음란녀에게 검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여인은 얼굴에 여우와도 같은 가면을 쓴 채, 천붕을 검으로 위협하며-

"오호호! 얌전히 내게, ....따, 따먹혀라!"

천붕의 정조를 위협하고...있었다!

[작품후기]

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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