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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처선녀
날이 밝고, 늦은 오후가 되었다.
산서성을 떠들썩하게 만든 녹림황의 유산 이야기는 금방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안그래도 뭔가 특별한 이야기가 없는 곳이라 사람들이 조용하게 지내던 찰나, 과거 수백년 전 중원을 떠들썩하게 만든 현경 고수 유품이 발견되었다는 건 구미가 당길만한 일.
거기에 녹림왕이 유산을 강탈하기 직전, 근방에서 추색살 사칭 공갈범들을 잡으려던 신창에 의해 저지당한 일화는 더욱 널리 퍼져나갔다.
관무불가침이라고 하지만, 녹림이 어디 그냥 무림의 존재인가?
녹림왕은 체면을 구겼고, 금의위는 대규모 인원을 파견하여 녹림황의 유산에 관한 것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신창 백주흔에 의해 공갈범들이 산 위에서 몰살당한 것도 확인되었고, 복숭아 집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노파의 이상성도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살았던 노인.
하지만 그녀는 자취를 감췄다. 그 누구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녹림황에 대한 단서는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아마 그녀가 녹림황의 관계자나 후손이 아니었을까.
소문은 무성하지만, 그 중 단연 압권은 역시나....
"녹림황이 여자라더군!"
* * *
산서에서 하북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멀지 않다.
태항산맥을 넘어가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거리고, 우리는 주변에 잠시 묶어둔 말을 타고 다시 하북으로 향했다.
"자네, 평요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나?"
"평요?"
"그래! 녹림황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하더군!"
우리는 주변에 함께 마차를 몰고 가는 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강호의 소문을 전해들었다.
"글쎄 평요에서 고목이 불에 탔는데, 그 안에 궤짝이 있더래! 그걸 열어보고 나니까 무슨 여인이 있었다지 않은가!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있었는데, 그 뒤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더군!"
이야기꾼은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녹림황, 이곳에 잠들다!"
"...에이, 그냥 장난친 거 아니오? 녹림황이 소녀라니?"
"그러니까! 다들 속았던 게지. 녹림황은 실은 여인이었다는 거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사공희는 웃음을 참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물론 우리가 그 시신을 방치하기는 했지만, 그게 어떻게 녹림황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녹림황인 건 확실하오?"
"모르지! 근데 그런 신기한 일이 있을 수 있겠나? 집은 멀쩡하고, 복숭아 나무만 불에 활활 타고! 심지어 수백년도 더 된 궤짝 안에 있는 시신은 구멍이 뚫린 것 말고는 아무런 손상이 없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도 아니고 어떻게 죽은 이의 몸이 그렇게 온전하겠는가!"
"......."
이게 선녀의 복수였을까. 아니면 녹림황의 업보였을까.
"크으...! 마지막에 당대의 벽력신권과 맞서 싸우며 동귀어진 했다고 하더니, 권성(拳星)의 일격이 가슴을 뻥 뚫었을 줄이야! 권성도 참 잔인하지, 아무리 녹림황이 잔악하다고 한들 소녀의 가슴에 그렇게 상처를 남기다니. 쯧쯧...."
녹림황이 실은 여자였다! 녹림황의 실체에 관한 모든 전설과 사료가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털 수북히 달린 남자가 아니고?"
"흐흐, 그거야 당대의 사람들이 사기친 거지. 녹림의 주인이 미인이라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좋지만, 황(皇)의 별호를 단 존재가 여자인 건 조금 그렇지 않나? 후대로 넘어오면서 조작된 거야. 녹림황은...지금의 녹림왕 못지 않은 우락부락한 남자였다는 걸로!"
"......."
진실을 파헤칠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전에 우리가 녹림의 사람도 아닌데 굳이 녹림황의 명예를 되돌리기 위해 애써 줄 필요가 있을까.
"저런...녹림황이 여자였다니. 정말 충격적인 말이로군."
"그렇지? 흐흐, 과거에는 여인들이 남장을 하고 다녔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죽는 순간까지는 여인으로서 죽은 셈이지. 크으, 자식은 있었으려나?"
"글쎄. 녹림황의 후계임을 주장하는 자들이 당시에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하지 않소?"
"그러니까. 녹림황이 여자인데 후계가 그렇게 많다? 흐흐, 씨를 뿌린 게 아니라 곳곳에 10개월간...크흠."
음담패설을 지껄이려는 자에게 눈빛을 슬쩍 보내니, 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나와 사공희의 눈치를 봤다.
"아무튼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야. 요즘 하북도 떠들썩한데, 산서처럼 재미없는 동네에서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다니."
"하북이야 뭐.... 형장도 용봉지회 때문에 가는 것 아니오?"
"그렇긴 한데, 본인은 지금 하북 팽가에 가는 중이오!"
"팽가?"
나와 사공희는 동시에 움찔했다.
"그렇소! 하북팽가에...그녀가 식객으로 방문했다고 하더군!"
"그녀?"
"이름하야...중최미봉!"
"......."
잠시 뒤.
나는 말에서 내려 인적이 드문 곳에 말을 근처에 묶어둔 뒤, 사공희를 안고 전력으로 하북 팽가로 달렸다.
* * *
"음...."
두 남녀의 뒤를 쫓던 흑발의 여인은 말을 옆으로 몰아 도로에서 벗어났다.
스륵.
여인의 머리칼은 순식간에 적발로 물들었다. 산서에서 녹림왕을 상대로 칼부림을 부렸던 여인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하복부를 만지작거렸다.
"보고드립니다, 교주님."
우우웅.
여인의 하단전, 복부 위에는 핏빛과도 같은 문신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혈녀의 증거이자 음문(淫紋)이기도 한 낙인은 내공을 일으킬 때마다 밝게 명멸했다.
"주인님과 후보 4번이 함께 달려가고 있습니다. 교주님의 위치를 풍문으로 접했습니다."
[역시. 내가 알아야 할 점은?]
"녹림황의 유산에서 내단을 하나 챙겼습니다. 말씀에 따르면...선녀의 내단이라고."
[......그건 위험한데. 안 되겠다, 언니. 조치를 취해야겠어요.]
"......?"
적발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은 계속 시선을 끌어. 곧 도우미도 함께 보낼테니까, 혹시나 다른 귀찮은 놈들이 오면 둘이서 발을 묶으란 말이야. 알겠어?]
"교주님의 뜻대로."
적발여인의 핏빛 낙인이 사라졌다. 여인은 날카로운 도를 만지작거리며 기다렸고, 곧 똑같이 핏빛 머리칼을 반짝이는 여인이 나타났다.
"당신은?"
"피학마녀, 혈요선."
"......어머."
도를 든 여인은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저는 학혈마녀인데."
"......."
두 혈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 *
만반의 준비는 끝났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다면 전력을 발휘할 준비도 끝났다.
저벅, 저벅.
나는 팽가의 뒷문으로 사공희와 함께 조심스레 잠입했다. 밤에 들어오는 건 '진짜를 상대'함에 있어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으나, 어쩔 수 없이 나는 밤이라도 팽가에 잠입해야만 했다.
하필 밤이었다.
나보다 중최미봉, 혈소예가 더 강해지는 시간.
주승야패(晝勝夜敗). 태양이 떠오른 시간이면 내가 이길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음기가 가득한 밤이면 내가 질 지도 모른다.
이미 한 번 패배했기에,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견희야. 혹시나 무슨 일이 있다면...지체없이 나를 버리고 호북으로 도망가거라."
"상공."
"...알겠느냐?"
"......네."
사공희는 울것같은 얼굴로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결사의 각오를 한 나를 보며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상공은...목숨을 걸더라도 가족을 구하실 분이죠."
"그렇다."
부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까.
그냥 취한 여자라면 죽든 말든 인질로 잡히든 상관없다.
아내로 들일 여자라면, 경중을 파악하여 최대한 구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할 것이다.
하지만 내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라면....
"목숨을 걸 것이다."
"......상공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나는 사공희를 잠시 품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처럼 몸을 떨었고, 나는 등을 토닥여주며 위로했다.
"걱정마라. 아무 일도 없을 것이야. 중최미봉이 비록 나의 숙적이라고는 하지만...우연히 식객으로 들어온 것일 터."
[우연이라.]
"......!"
멀리서 들려온 전음에 나는 바로 담을 뛰어넘었다. 눈 앞에 있는 것은 익숙한 팽유월의 방 문.
끼이익.
문을 열자, 그곳에는 팽유월이 하얀 소복을 입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침대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정말로 우연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팽유월의 옆. 침대 바로 옆에는 적발의 여인이 다리를 꼬며 요염하게 웃고 있었다.
"안녕, 오빠."
"...어떻게 알았지?"
"오빠의 과거 행적을 역산했을 뿐이에요. 따님이...정말 오빠 닮아서 예쁘던 걸요."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상공...."
사공희는 뒤에서 네 개의 칼을 벌써부터 띄운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저 자가...."
"그래. 중최미봉.... 혈교의 소교주다. 나의 숙적."
"후후, 그렇게 소개해주시면 고마울 따름이죠."
혈소예는 팽유월의 허리에 손을 휘감으며 몸을 붙였다.
"월아는?"
"옆방에서 자고 있어요. 걱정마세요. 제가 언제 오빠 괴롭게 한 적이 있던가요?"
"......."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팽유월과 월아의 목숨을 움켜쥐고 있는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안녕하세요, 태극화. 용봉지회에서 스쳐지나가면서 만난 이후로 처음이죠?"
"......당신이 상공에게 무슨 감정을 품은 지는 모르겠지만."
사공희는 내 옆에 당당히 서며 검을 움켜쥐었다.
"그 어떤 연유로도 상공을, 그리고 상공의 가족을 건드리는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어머. 연적이라고 해도?"
"...상공을 모시는 영광을 함께하는 여인들이 서로 헐뜯고 싸우는 건 상공이 원치 않을 테니까."
"......."
혈소예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아마 다소 진취적인, 이 시대와는 맞지 않는 관념을 가진 그녀가 보기에는 놀랍기 그지 없을 터.
"정말...이 시대 전형적인 부인상이네요."
"네가 특이한 것이다."
"알아요. 후후, 하지만...조금 질투가 나네요."
혈소예는 손을 위로 들어올리더니-
"비천혈세."
"!!"
비술의 주문을 읊었다. 나를 순식간에 무력화시키는 주문.
"하압!"
나는 내력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처음부터 용안을 열고 들어왔기에, 지금은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희아연월, 참!"
서걱!
순식간에 만들어낸 푸른 검강은 허공을 갈랐다.
아니, 나를 향해 달려오는 보이지 않는 선(線)을 갈랐다.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미세한 선은 머리카락보다 얇았고, 혈소예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한 번은 막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바로 알아채실 줄이야."
"한 번 당한 걸 또 당하는 게 바보지."
"그거 아세요? 세 번 당하면-"
"전설이 된다."
혈소예는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래요. 두 번을 당하면 바보가 되지만, 세 번을 당하면 전설이죠. 그런데 이제 전설이시네요."
"...뭐?"
"혼자 오셨으면 안 당했을텐데."
"......!!"
와락.
뒤에서 끌어안는 강력한 힘에 나는 오한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공격을 하려고 했지만, 등 뒤에 닿는 익숙한 감각에 내 몸이 절로 반응을 멈췄다.
이 여자는 공격해서는 안 되는 여자다.
아기색마의 외침에, 나는 그만 뒤에서 나를 제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여자를 가격하지 못했다.
"사, 상공?!"
사공희는 놀란 목소리로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 힘이 감히 내가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크윽, 혈소예!!"
"상공, 저, 손이 제 멋대로 움직이는...!"
꾸우욱.
사공희는 내 손목을 내 하복부로 모았다. 두 개의 손목을 한 손으로 꾹 누르며, 남은 손으로는 내 양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렇게 예쁜 언니를 데리고 다니시다니. 질투가 나네요...."
혈소예는 한쪽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침대에 있던 팽유월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팽유월의 머리칼이나 눈에는 붉은 기운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가만히 둬서는 안 되겠네요. 언니도 가서 색마를 제압하세요."
"유월아!"
"소용없어요. 지금은 제가 움직이고 있으니까."
혈소예는 한쪽 손을 악기 다루듯 움직였다. 팽유월은 마치 실에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내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제 주특기, 아시잖아요?"
"큭...!"
혈강시를 다루는 힘.
그 비결은 바로 혈선(血線)이었다.
"오늘, 이곳이 오빠를 위한 젖무덤이 될 거예요."
"너...!"
"천하삼젖 중 두 명에게 따먹히다니, 호상이네요. 후후."
"!!"
나는 앞뒤로 나를 압박하는 사중결계에 갇히고 말았다.
"........"
"사, 상공?! 몸이,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앞에는 팽유월. 뒤에는 사공희.
"사랑하는 부인들에게 따먹힌다...색마에게 있어서 가장 큰 굴욕이죠?"
"혈소예-------!!"
"어허억...!"
뷰릇.
[작품후기]
평범한 무협이라면 인질을 구하기 위해 주인공이 목숨을 걸겠지만
여기는 떡협지니까 색공과 방중술로 싸웁니다.
주인공의 정자를 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