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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처선녀
최소한 밖에 불꽃이 보일 일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불꽃을 피웠고, 중려신화정의 화기를 섞어 빠르게 나무의 밑동을 불태우며 내부를 훑었다.
"미친."
그곳에서 우리는 작은 궤짝을, 그리고 궤짝 속에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소녀의 근처에는 불에 탄 나무 뿌리의 재가 묻어있었다. 아마 얼굴과 전신에 뿌리가 휘감겨있었을 터.
나는 소녀를 궤짝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저 궤짝의 덮개만 열었고, 안에 고요히 잠들어있는 소녀를 발견했을 뿐이다.
"녹림황인가…?"
"상공, 저 소녀가 정말로 녹림황이라고요…?"
"가정이다. 아닐 수도 있고, 관계자일 수도 있지. 하지만...최소한 '선녀'는 맞다."
나는 작은 선녀의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선녀가 아니라...인형? 아니군. 육체는 선녀인데 영혼이 빠져나갔구나. 이건 이미 빈 껍데기다."
내가 심장부를 건드리자, 말라비틀어진 껍질이 바스라지듯 손가락이 움푹 들어갔다.
녹림황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곳에 녹림황의 유산이 묻혀있다는 걸 생각하면, 정답은 두 가지.
녹림황이 누군가를 강제로 죽이고 선녀로 만들어 궤짝에 집어넣었거나.
"밖에서...강제로 쑤셔넣어졌군."
녹림황의 시신에 선녀가 선도를 강제로 쑤셔넣었거나.
"그렇군. 이제야 알 것 같다. ...자기가 겁간한 여자를 선녀로 만들기 위힌 안배다."
"세상에."
시신을 땅에 묻고 위에 복숭아 나무를 심는다. 복숭아 나무는 시신 위에 뿌리를 내리고, 선녀의 시체로부터 선기를 뽑아내 생장했을 터.
"보자마자 찝찝했는데 역시 태우는게 정답이로구나. 선녀의 시신을 먹고 자란 복숭아 나무야."
"우욱."
사공희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나는 급히 그녀의 뒤로 다가가 등을 토닥였다.
"죄송해요, 상공, 우웁…."
"괜찮다. 그럴 수 있지."
"구역질은, 흐읍, 임신했을 때만 하려고 했는데…."
"......."
자신이 먹었던 복숭아가 시신을 빨아먹고 자란 것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물론 '비료'도 여러가지 다양한 종류가 있다. 개중에는 동물의 사체도 있고, 인분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먹는 곡식이나 과육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란다고 한들, 모르고 먹는 것과 알게 된 것은 천지차이다.
"후우, 이제 좀 괜찮아요. 으으…."
"그럼 선녀의 내단을 꺼내도록 하마."
나는 아까 전에 만들었던 구멍에 다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선녀의 몸에 남아있는 기운을 훑었다. 아마 수백년이 지나며 대부분의 기운은 나무를 통해 선도로 맺혀 떨어졌을 터.
'선녀에게서 채음한 양만큼 남아있군.'
하지만 나름 유산이 대단하다면 대단한게, 선녀의 내단에는 아직도 막대한 양의 선기가 남아있었다.
"아주 오랜 기간동안 여기서 자란 복숭아를 먹으면 그게 곧 선도일 터. 쯧, 우공이산도 아니고 언젠가 선녀가 될 거라고 확신했나? 그렇다면 성공했군."
"...상공, 저 점점 더 모르겠어요. 선녀는 대충 알겠는데...."
"선기에 대해 제대로 깨우치려면 순수한 무공으로는 최소 화경은 되어야 할 것이다. 선기는 무공과는 결이 다른 힘이야."
무공이 지상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힘이라면, 선기는 상계의 존재들이 가진 힘이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얻지도 못할 힘이거늘…. 아무래도 녹림황은 이것을 어찌 손에 넣은 모양이로구나."
푸욱.
나는 선녀의 가슴에서 옥색의 단환을 끄집어냈다.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단환은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가히 심상치않았다.
"나무 뿌리가 시신에서 선기를 흡수하고, 그게 열매로 맺혀 선도가 되었다는 거지. 그걸 여인이 계속 먹고 선녀가 되었고. 쯧, 어쩐지 자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더니."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선녀가 되었을 것이다.
그저 마당에서 자란 복숭아를 먹었을 뿐인데, 설마 그게 몸이 선녀가 되는 힘이 있는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처음에는 좋았겠지.'
선녀가 되면 젊음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영생에 가까운 긴 수명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말했듯, 자식을 먼저 가슴에 묻어야 한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으리라. 그걸 수십, 아니 수백년 동안 품고 죽지도 못한 채 살아와야했다니.
"......나무아미타불."
나는 어쩌면 그녀를 색으로 구원했을지도 모른다. 색마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결국 나는 한 명의 여인을 영생의 굴레에서 벗어나 제 2의 인생을 살게 만들어줬다.
녹림황의 배려 아닌 배려는 결국 선녀에게 상처만 가득 남겼다.
하지만 그가 정말 선녀에게 상처만 주려고 이런 짓을 벌였을까?
"......."
"상공. 그…."
"녹림황 말이다."
나는 녹림황일지도 모르는, 아니 녹림황일 가능성이 높은 선녀의 시신을 가리켰다.
"어쩌면…사랑의 표현 방식이 다소 멍청했던 걸 지도 모르겠구나."
"겁탈에…강제로 선녀로 만드는 거요?"
"자기중심적으로 여자를 사랑한 거지. 여자의 의견은 일절 묻지 않은 채."
나는 선녀의 내단에 채음보양으로 취한 선기를 불어넣었다.
고오오.
흩어진 힘이 하나로 합쳐지듯, 내단은 금방 영롱한 녹색빛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손으로 감싸 내단에서 기운이 새어나오지 못하게 만든 다음, 그걸 사공희에게 건넸다.
"이래도 이걸 취하겠느냐?"
"상공."
"나도 녹림황처럼 언제 갈 지 모르는 놈이다. 다른 둘은 강제로 선녀가 되었다고 하지만...이걸 취하면 자의로 반선이 되는 것이다. 타의와 자의는 엄연히 달라."
"저는 상공의 뜻에 따를 뿐이랍니다. "
사공희는 고집을 부렸다.
"상공께서 선녀가 되라고 하면 선녀가 될 것이고, 선녀가 아닌 상태로 살라고 하면 인간으로서 살아가겠어요."
"......알겠다."
나는 선녀의 내단을 품에 집어넣었다. 여러모로 위험한 물건이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상공. 근데 선기를 약간만 빼내면 되지 않아요?"
"응?"
"그...뒤만 선녀로 만들어주시면 되잖아요. 다른 선녀들처럼."
"......뒤로 하는 건 임신 안 되는데?"
"상공."
사공희는 내 손을 자신의 엉덩이에 닿게 만들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제가 선녀에 욕심을 낸 건 선녀가 되고 싶은게 아니라…상공과 더 즐겁게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요."
"......."
선녀가 다 무슨 소용이랴.
여기 진정한 선녀가 옆에 있는데.
"견희야."
"네, 상공."
"팽가에 가면 뒤만 선녀로 만들어주마."
못하는 건 아니다. 단지 선녀의 내단에서 막대한 선기가 소모될 뿐.
'어차피 소모는 해야해.'
어떤 한 남자를 살리기 위해, 내단에서 선기를 뽑아 일정량을 비워야 했다.
선녀의 내단이나 선도 따위를 통째로 흡수를 하게 되면, 분명 몸이 '강제'로 선녀가 될 터.
그 선기를 흡수할 수 있는 일종의 흡선구(吸仙球)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인어른을 장모님으로 만들 수 없지.'
다음 회차 용봉지회.
그곳에서 무림맹주 독고자영은 독살당하고, 폭살당한다.
어떻게?
인간이 선녀가 되고, 육신이 붕괴되며, 선녀가 된 증거를 없애기 위한 벽력탄에 산산조각나서 승화하게 된다.
'의도치 않게 보험을 얻었군.'
용봉지회.
우리는 정마대전의 시발점이 되는 독고자영의 독살을 막기 위한 좋은 패를 손에 넣었다.
* * *
화르륵.
불길이 치솟는다. 마을에서 제법 유명한,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킨 복숭아 나무가 불에 타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걸 어떡해?!"
이웃 사람들이 하나 둘 급히 뛰쳐나와 불을 꺼뜨리려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불길은 너무나도 거셌다.
복숭아 나무를 완전히 태우기 전까지 사그라들지 않겠다는 듯, 주변에 불씨를 뿌리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막아세웠다.
"으, 으아아!!"
인파의 사이로, 다소 나이 든 남자가 달려왔다.
"어머니!"
"이, 이봐?!"
"정신차려! 지금은 늦었어!"
불구덩이를 향해 뛰어들려던 남자를 주변에서 뜯어말렸다. 남자는 악다구니를 쓰며 불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머니가 안에 계실 지도 모르오!!"
"아무도 안 돌아왔어! 당신 어머니, 안 돌아오셨다고!"
"......저, 정말이오?"
남자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누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남자의 근심걱정은 심했다.
"어머니는…."
"찾았나?"
"아니, 아직 찾지 못했소…."
풀썩.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미 평요 곳곳을 뛰어다니느라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고, 남자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불행의 연속이었다. 마치 지금까지 있었던 불행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듯, 남자에게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었다.
"어머니께서 나를 거두어주신 집이…."
"거두어주셔?"
"아…. 사실...친모가 아니시오. 고아가 된 나를 먹여주시고 재워주시어, 어머니로 모시고 살았소."
남자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들…! 아들이니…?!
양친을 잃고 혼자가 된 소년을 향해 떨리는 손으로 꼭 안아주던 여인.
갈 곳 없이 버려진 소년은 자신을 아들로 착각하는 여인의 아들처럼 지냈다.
하지만 그간, 수많은 시간을 지내오며 그는 느꼈다.
어느새 그는 여인의 아들이 되어있었고, 여인 또한 아들에게 있어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을.
"어머니…."
남자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머니와 살던 집이…."
"이, 이보게! 갑자기 불이?!"
화르륵.
불길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남자는 급히 집 안으로 달려들어갔고, 내부 상황을 본 남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도대체?"
집은 멀쩡했다. 하지만 복숭아 나무만 불길에 타올랐다.
사람이 두 팔 벌려 안아도 한 사람이 안지 못할만큼 굵었던 복숭아 나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아래에는 깊은 구덩이가 나타났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여기 나무 수백년은 된 거로 알고 있는데…뭔가 이상한 징조 아니오?"
"이보게, 저기 아래에 있는 거 뭔가…?"
남자는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아 나무 구멍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갑자기 불길이 치솟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일단 도웁시다. 지금 안에 뭐가 있을 지는 모르지만, 분명 보통 일은 아닐 것이오."
남자와 이웃들은 조심스럽게 제법 넓은 물건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사람 한 명이 들어가기에는 조금 좁은 궤짝이었다.
"문이...열...히익?!"
궤짝의 문을 살핀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사, 사람?!"
궤짝 안에는 아주 작은 소녀가 눈을 감은 채 잠들어있었다. 백옥같은 피부에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은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소녀의 가슴, 심장부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안쪽은 불에 타오른 것처럼 숯검정이 되었고, 소녀는 반듯한 자세로 누운 채 가만히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이보시오! 이걸, 이걸 보시오!"
이웃은 궤짝 안쪽에 적힌 문구를 가리켰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선녀의 인형 뒤로, 거친 문구가 적혀있었다.
"녹림황…. 이곳에 잠들다?"
"녹림황이 왜 여기서 나와?"
"아니, 잠깐. 녹림황이라고?"
저벅, 저벅.
밖에서 거구의 남자가 사람들을 밀치고 단숨에 들어왔다.
"비켜라! 녹림왕의 어전이시다!"
"히이익?!"
무림, 그것도 녹림의 사람이 으름장을 놓자 사람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녹림황의 유산이라는 말을 듣고 달려왔다! 어이, 내놓아라!"
"...그럴 수 없소."
남자는 두 팔을 벌려 소녀의 앞을 막아섰다.
"이것의 진실이 무엇이든, 당신에게 건네줄 수 없소!"
"크하하! 개나소나 본좌를 아주 좆으로 보는 구나! 두말 하지 않는다! 셋을 셀 동안 비키지 않으면 베겠다. 셋, 둘, 하나."
녹림왕, 방득패는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눈을 질끈 감을 뿐, 물러서지 않았다.
"흐하하, 강단은 있구나! 그럼 죽어라!"
방득패는 망설임없이 도끼를 아래로 휘둘렀고-
카---앙!
"크윽…?!"
강력한 충격파에 의해 뒤로 크게 물러나야만 했다. 남자에게는 상처가 일절 없었다.
"이게…."
"무림의 존재가 민간인을 습격하다니."
"아…!"
남자는 자신의 앞을 보호하듯 선 청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색마로 몰려 잡혀왔던 이였으나, 실은 고강한 무공을 가진 존재로 공갈범들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했던 존재였다.
하지만 방득패를 일격에 물러나게 할 정도라니?
"네놈...누구냐!"
"설마 내 정체를 눈치채지 못할 줄이야. 본좌 운운하기에는 아직 부족하군."
"뭐…? 이 새끼가…?"
"아버님! 저 창…!"
뒤에서 방철수가 급히 봉을 들어올리며 방득패의 옆에 섰다.
"저 기수식...신창이에요!"
"뭐…?"
"호오. 그래도 딸은 조금 눈썰미가 있군."
웅성웅성. 주변에 몰려있던 이들이 전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물러서라."
"크윽…! 녹림황의 유산은 자연히 녹림왕의 것이다! 감히 어딜 넘보는 것이냐!"
"개소리. 정체가 무엇이든 집주인이 이렇게 버젓이 눈을 뜨고 있는데 감히 그걸 훔쳐갈 생각을 해?"
신창은 비릿하게 웃으며 창끝을 앞으로 겨눴다.
"관무불가침 모르나? 만약 평요성에서 행패를 부린다면 용서치 않겠다. 도적 놈."
"이, 이…!"
"아니면, 무림의 법도대로 힘으로 해결해볼까?"
"비겁한 놈…! 현경이나 되면서 사람을 겁박하다니…!"
"큭, 뭐라고?"
신창은 진심으로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도적 따위가 어딜 사람이라고 칭하느냐? 일각을 주마. 평요, 아니 산서에서 꺼져라."
"......오늘의 수모는 잊지 않겠다!"
방득패는 부하들을 데리고 떠났다. 신창은 창을 거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싸우면 주변이 다 파괴되었을텐데. 다행이…."
우와아아아아아!!!
신창! 신창! 신창!
관운장이 재림한 줄 알았소!
역시 신창이야! 대단해!
"......."
백주흔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몸을 돌렸다.
"이보시오, 형장."
"예, 예!"
"사안이 사안인지라, 부디 협조해주시겠소?"
"...조건이 있습니다."
청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당당히 입을 열었다.
"저희...어머님의 행방을 찾아주시겠습니까. 그분이라면...이것을 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노인을 찾지 못했다.
[작품후기]
무협 TS 국룰=규화보전
왜 안 규화보전이냐고 한 분 정도는 말할 것 같았는데....
이것이 젊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