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19화 (419/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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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愚功移山)

중원인들은 이야깃거리를 좋아한다.

평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비 문파의 이야기나 의협에 관한 이야기들도 좋아한다.

특히 젊은이들의 청춘과 혈기가 담긴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서서히 다음 용봉지회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강호인들은 이전 용봉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구룡육봉의 현 실태와 차기 구룡육봉을 두고 설왕설래하기를 좋아한다.

과연 누가 구룡육봉의 자리를 지킬 것인가!

과연 누가 구룡육봉의 자리를 빼앗을 것인가!

나이가 과년하여 자연히 칭호를 반납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지금, 강호는 구룡육봉 후보를 두고 정말 많은 이야기가 오고가는 중이었다.

특히 육봉에 대한 관심은 더더욱 심했다.

무림맹주의 딸, 독고연이 용봉지회에서 납치를 당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봉결정전이었지만, 그 규모는 용봉지회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니 따질 의미는 없었다.

괜히 용봉지회를 말하다가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은 육봉에서 끊이질 않고 있었다.

-그래도 용봉지회인데!

-독고세가가 안타까운 일을 당한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할 건 해야지! 그런데 지금 다른 육봉들은 어디에서 뭘하고 있다냐?

육봉의 행적은 묘연했다. 묘연한게 당연했다. 묘연했던 와백봉마저도 색마에게 납치를 당하여 큰 곤란에 처할 뻔 했는데, 어찌 묘연하지 않을 수 있으랴!

태극화 사공희, 호북성 무당파에 있음.

마교 소공녀, 소식이 전혀 없음. 그냥 천산에 있는게 아닐까.

무림맹주의 딸 독고연, 납치 이후 감감무소식.

연희봉 모용란, 출가 후 행방불명.

와백봉 제갈선, 호북 제갈세가에 있음.

산주봉 방철수, 녹림왕의 슬하에 있음.

빙백봉 유설라, 사랑의 도피 중 호북성에 있음.

그리고 중최미봉.

- 하북팽가에 식객으로 있음!!!

하북은 정체불명에 기담(奇談)만 무성하던 여인, 중최미봉의 등장에 환호했다.

-중최미봉의 이름을 들었나? 금소예라고 하더군!

-크으, 이름조차 중원 최고 미인이로다! 사용하는 무공이나 별호는 혹시 알려졌는가?

-전혀! 하북팽가에 식객으로 들어갔다는 말만 무성하지, 지금 아무도 상황을 몰라!

중최미봉, 하북팽가의 식객이 되다!

사람들은 하북팽가의 문을 두드렸다. 부활의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던 호랑이는 중최미봉에 대한 관심으로 상승기류에 타오르기까지 했다.

- 하북팽가는 좋겠다. 중최미봉이 그렇게 예쁘다면서? 그걸 직접 곁눈으로라도 보다니....

-팽가 사람들도 못 본다던데? 아주 꽁꽁 숨겨뒀다더구만.

- 왜?

- 그 있잖나. 예전에 빙색마인이....

- 앗.

팽가는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피객패를 걸었다. 사람들은 팽가의 뜻에 아쉬워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들의 선택을 충분히 이해했다.

- 괜히 팽가에서 육봉 중 한 명이 납치당했다거나 하면 난리가 나지.

팽가에 대한 다양한 관심이 혼재된 가운데, 풍문의 중심이 된 당사자인 중최미봉 금소예는 팽가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아이와 즐겁게 놀고 있었다.

"어딨게?"

"여기!"

"아닌데? 여기 없는데? 여기있는데에에?"

"으, 엄마아아!"

월아는 팽유월을 찾으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저 언니가, 언니가!!"

"그래, 그래. 착하지. 울음 뚝."

팽유월은 월아를 안고 사나운 눈초리로 금소예를 쏘아봤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장난이었는데...."

"장난으로 이형환위를 쓰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여기요."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금소예는 뻔뻔하기 이를데 없었다. 월아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난 듯, 금소예를 붙잡으려고 방 안을 달렸다.

"후후, 어딜 쫓는 거야? 그건 잔상이란다."

"아아...!"

"...어린 아이랑 노는데 상승의 무공을 쓰는 여인이 육봉 중 한 명이라니."

팽유월은 한탄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와 정답게 놀아주는 건 고맙지만, 조금 그렇지 않나싶기도 했다.

'그래도 이형환위인데.'

이형환위가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고작 어린아이와 진심으로 놀아주기 위해 사용한다니. 상승의 무공을 편안하게 사용하는 것도 놀랍지만, 그걸 사용하는 곳이 더 놀라웠다.

'꼭 상공같네.'

역체변용술로 몸을 바꾼다거나, 삼매진화로 여인의 몸에 묻은 더러움을 씻어낸다거나, 천근추의 수법으로 위에서 찍어누른다거나....

"월아야, 언니 어딨게?"

"여기! 꺄아아!"

"아아악, 머리는 당기면 안 돼...!"

그래도 처음보는 여인과 이리도 정답게 노는 월아를 보니,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어 속으로는 내심 기뻤다.

"휴...."

육아란 고되고, 아이가 점차 부모와 놀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쉴 틈 없이 놀아줘야 한다. 부모에게 있어 휴식시간은 아이가 자는 시간이며, 팽유월의 모든 시간은 월아에게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금소예에게 고마웠다. 차 한 잔 마실 여유로운 시간을 줄 수 있-

"월아야!"

순간, 월아가 금소예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다가 그만 손을 헛디디고 말았다. 월아가 넘어지기 직전, 팽유월은 급히 몸을 일으켜 앞으로 달렸다.

"걱정마세요."

금소예는 허공섭물로 월아를 붙잡았다.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한 월아는 눈을 깜빡이며 놀랐다.

"허공섭물...?"

"후후, 허공섭물까지는 아니에요. 그냥 저만의 무공일 뿐."

금소예는 월아를 안아 등을 토닥였다.

"놀랐지? 으응, 언니가 미안해."

한참동안 어르고 달래는 과정에서 월아는 조용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 팽유월은 금소예의 품에서 잠드는 월아를 보며 입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자장, 자장.... 아가...."

그리고 월아는 금방 잠들었다. 팽유월은 그 모습에서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마치 딸을 빼앗길 것만 같은-

"걱정마세요. 그럴 일 전혀 없으니."

금소예는 팽유월에게 순순히 월아를 넘겼다. 월아에게는 그 어떤 위해도 없었고, 특별한 뭔가가 작용된 것 같지도 않았다.

"...무슨 속셈이죠?"

"뭘요?"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 모를 것 같아?"

"......."

금소예의 표정이 변했다. 예상치 못한 일격을 받은 듯, 혹은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설마 당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는 듯.

"중최미봉이잖아요."

"혈교 소교주, 맞지?"

"......."

그녀의 표정은 울 것 처럼 일그러졌다.

"그는...그만큼 당신을 신뢰하고 있는 거군요."

"아이의 엄마니까."

서로 앞뒤를 잘라먹으며 말했지만 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신뢰하는 여인에게 혈교 소교주 금소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무리 팽신혜의 일이 있었다고는 한들, 팽유월이 혈교의 '소교주'에 관한 것까지 알고 있는 것은 명백한 의미가 있었다.

"...정말. 아이를 낳은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었구나...후후...."

금소예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몸을 잘게 떨었고, 팽유월은 주먹을 움켜쥐며 발로 슬쩍 바닥을 눌렀다.

사아아.

"그럼 연기할 필요도 없겠네요?"

금소예가 손으로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자, 그녀의 머리칼은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맑은 피가 하얀 종이에 퍼져나가듯, 일순간 변모한 모습에 팽유월은 침을 꿀꺽 삼켰다.

"너는...."

"긴장하지 마요. 알고 있다면 대화하기 더 편하겠네. 반가워요. 저는 당신의 말대로 혈교의 소교주. 굳이 부르자면...혈소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혈소예는 손을 가슴에 올리며 조신하게 고개를 숙였다. 팽유월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동자는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헤칠 생각도 없고, 혈녀로 만들 생각도 없어요. 이미 혈녀는 팽가에 만들어뒀으니까."

"...역시. 무슨 짓이지? 분명 그이는...."

"월아의 호위무사. 팽신혜는 그 역할을 받아들였어요. 이제 그녀의 제 1 목적은 월아와 당신의 보호예요. 약하지만."

"......."

팽유월은 눈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이 왜 나를...?"

"신뢰를 얻기는 힘든 법이죠. 특히 한 남자를 두고 서로 정을 다투다보면."

연적(戀敵). 둘의 관계는 이렇다 정의하기는 어려웠지만, 팽유월은 눈앞의 여인이 너무나 크고 거대한 산과도 같이 느껴졌다.

다른 여인들이 아무리 아이를 가질 것을 졸라도 여유로웠지만, 이 여자만큼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너를 어떻게 믿고."

"막무가내로 믿으라고는 하지 않겠어요. 다만 조금씩, 대화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제 진심을 아시는 날이 있으시겠죠. 제가 결코 당신을 해치려고 하는게 아니라는 걸."

"......."

팽유월은 월아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탁자에 다시 앉아, 잔에 차를 조심스레 따랐다.

"먼저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나는 물러설 생각 없어."

"저도 그래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더 억울한 입장이죠. 일단 말하기에 앞서서...그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전생(前生)."

팽유월은 인상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

"전생에 인연을 쌓은 사람이 한 명 있는데, 현생에서도 자신을 쫓아올 수 있다고 했어."

"그게 저예요."

혈소예는 시원시원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전생...에서부터 그를 구했던 여자. 그와 반평생을 함께한 여자. 그와 마지막을 함께한 여자. 우리의 인연은 마치 태극이며, 천살성과 자미성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요. 이 땅에 반려가 정해져있다면, 그와 저는 이전 생애부터 함께 연을 이어온 사이랍니다."

혈소예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래서...현생에도 그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죠."

"......듣던 거랑 조금 다른데."

팽유월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너...설마?"

"무엇을 상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겠어요? 현실적인 이야기만 하자구요, 후후."

혈소예는 차를 들어올리며 멎쩍게 웃었다.

"앞으로 같이 한 침대에서 지아비를 모실 사이인데."

"웃기는 소리."

팽유월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는 자기가 범한 여자든 사랑을 속삭인 여자든,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나한테 얘기해줬어. 그런데...그는 '너'를 범했다는 얘긴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지. ...모신다? 말에 어폐가 있는데."

"그럴 거예요. 말하기 부끄러울테니까. 제가...."

혈소예는 손을 비스듬히 세우며, 위아래로 짧게 탁탁 움직였다.

"따먹었거든요."

"따먹...?!"

순간, 팽유월은 차를 뿜을 뻔 했다.

"그게 무슨...?"

"말그대로 범했다는 얘기예요. 나중에 만나면 직접 물어보세요.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던가요? 비무로 자신을 이기는 자가 있다면, 자기도 언제든지 범해질 각오가 되어있다고."

"그, 그거야 그렇지만!"

팽유월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가 질 리가...!"

"강호에 가장 일곱 명을 꼽으라고 한다면, 서로가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가정하에, 제가 3등이랍니다. 그래요. 천하제삼인. 그리고 그를 상대로는 '무조건' 이길 수 있는 상성을 가지고 있죠. 후후."

"...미친."

팽유월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설마.... 진짜로 그 이를 범했다는 거야?"

"잘 먹었습니다. 미리 얘기 못하고 먹어서 죄송해요. 후훗."

"...이...."

만약 곁에 월아만 없었더라면, 상대가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라고 한들 팽유월은 도를 휘둘렀을 것이다.

"너무 그러지마요. 그냥 남근동서가 되었을 뿐이니까. 아, 아직은 이쪽으로만 그런가...?"

혈소예는 손으로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보다도 그분과 인연이 깊은 분을 만나고 싶었어요. 이 세상에서 그분에게 처녀를 다 바친 여인은 많지만...그분의 아이를 가진 사람은 당신이 유일하니까."

"그건 알려줘서 고맙네. 매일 혹시나 누구 애 생겼다고 말하지 않을까 두렵거든."

"후후,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사정통제를 조금 할까 했는데...그러면 또 싫어하실 거니까."

혈소예는 눈을 찡긋였다.

"저는 그분이 싫어하는 거 하기 싫거든요."

"그런 것 치고는 엄청 싫어하는 행동을 벌써 저지른 것 같은데?"

"음...살아남기 위한 불가항력이라고 해야하나.... 이게 사람이 참 그런게, 때로는 의도치 않게 미움을 받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거든요?"

혈소예는 잔을 들어올렸다.

"그러니까 우리, 동맹을 맺죠."

"동맹?"

"저는 말이에요. 최소한 그분의 아이를 가진 여인이 아니면 같은 침대에서 함께 손을 잡지 않을 거예요."

"...그건 무슨 기준이야."

"이거, 꽤 중요한 기준이랍니다? 언젠가는 알게 되시겠지만, 그분의 아이를 가진다는게 결코 원한다고 다 되는게 아니거든요?"

"......정말, 짜증나게하네."

팽유월은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돌려말하는 거 싫어해. 톡까놓고 다 말 안하면 동맹이고 뭐고 없어. 나 팽가의 사람이야. 팽신혜처럼 당해서 네 인형이 될 바에는...."

팽유월은 스스로의 목을 손가락으로 겨눴다.

"내 스스로 모가지 잘라서 상공에게 복수해달라고 할 거야."

"그런 무서운 말 하지마요. 후우.... 알았어요."

팽유월의 단호한 기세에, 혈소예는 눈을 지긋이 감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저는 말이에요."

혈소예는 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른 여인들이 그분의 아이를 가진다고 싫어할 수 없는 몸이에요."

"왜?"

"......할 수 없으니까."

뚝. 혈소예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은 새근새근 잠든 월아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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