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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神弓)
"하아, 하아…."
몽롱했던 정신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신궁, 여옥희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한 기분에 더할 나위없이 만족했다.
"최고야…."
처음 현경에 다다랐을 때 느꼈던 기분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랫배, 하단전에 뜨겁게 차오르는 감각은 마치….
"......?"
"......."
여옥희는 보았다. 눈앞에 옷이 넝마가 된 남자가 붉어진 얼굴로 침묵한 채 눈을 감고 있는 것을.
그의 얼굴, 목, 쇄골에 가득한 입술자국은 금방 생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내리니-
"......어?"
기록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궁이 떨려서, 더는 못참고 천무명을 겁탈했다.
천무명의 위에 올라타며 기승위로 박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크윽...신궁, 정신차리시오…!
-나 지금 제정신이야…! 하아, 이 좋은 걸 여태까지 안 하고 살았다니…! 인생 싹 다 손해봤어…!
-크아앗…?!
"......내, 내가 무슨 짓을."
"......그."
천무명이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록 내가 겁탈은 당했을지언정…. 혹시나."
"어, 그, 그러니까…."
"...아이가 생긴다면, 내 책임지리다."
"......."
주룩.
여옥희는 자신의 뱃속에서 흐르는 뜨거운 정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그 시각.
"...하아, 하아, 하아."
혈요선은 안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급히 몸을 돌렸다. 다행히 동굴을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호법은 성공적이었다.
"교주님!"
"...괜찮아. 조금, 심하게 운기조식 한 것 뿐이니까."
혈소예의 전신은 땀으로 축 젖어있었다. 안그래도 몸에 달라붙는 옷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마냥 축 절어있었다.
"온 사람은 없지?"
"네. 아무도 없습니다."
"다행이네. 혹시나 누가 올까봐 걱정했는데. 역시 혈요선. 당신을 호법으로 세운 건 틀린 선택이 아니었어."
"아...."
혈요선은 울컥했다.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어진 자신에게 힘을 준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정인을 상대로 복수를 꿈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해볼테면 해봐라'는 배포, 그리고 모두에게 버려진 자신에게 쓸모를 준 존재!
"교주님...!"
혈요선은 이런 교주가 매달리는 남자가 더욱 미워졌다. 도대체 그가 뭐가 그렇게 좋길래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또...지병이 도지신 거였습니까?"
"지병이라...지병이라면 지병이네. 후후. 걱정마. 아직은 버틸만 해."
혈소예는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자신을 다독였다.
"가자. 아직 갈 길이 멀어."
"네!"
혈소예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리를 저는 것 같기도 하고, 부들부들 떠는게 허리가 아픈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객잔에서 할 걸 그랬나."
혈소예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걸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혈요선은 절뚝거리며 걷는 혈소예의 모습이 낯설고 안타까웠다.
어째서일까.
외투 사이로 비친 그녀의 엉덩이는, 이상하리만큼 붉어져있었다.
"...동굴 바닥에 얼마나 길게 앉아계셨길래...!"
혈요선은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 * *
잠시 정리가 된 뒤.
나는 찢어진 옷을 옆으로 두고, 상반신을 탈의한 상태로 여옥희와 마주 앉았다.
"........"
처음에는 나를 취조하기 위해 데려왔겠지만, 그녀는 내게서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애초에 얻은 거라고는 파과의 고통과 쾌락, 그리고 나를 겁탈했다는 전과 뿐이다.
혈옥희는 질내사정을 받고 즐길만큼 즐긴 뒤에 여옥희의 속으로 쏙 사라져버렸고, 결국 여옥희는 마치 술에 취하여 남자를 겁간한 것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미안하오. 이런 말 하면 믿지는 않겠지만, 나도 모르게 그랬소."
여옥희는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혼란스러워했다.
상식적으로 혈소예의 피에 잠식되어 금제가 걸려 혈옥희라는 또다른 인격이 태어나 나를 겁간했다.
이것이 말이 되겠는가? 그냥 자기가 미쳐서 나를 겁탈했다고 생각하는게 더 상식적이지.
'그만큼 혈교가 무서운 거야.'
현경 고수조차 혈소예에게 당하면 꼼짝을 못한다. 나는 당황해하는 여옥희를 상대로 답답함을 느껴, 금단의 주문을 읊었다.
"혈소예 따먹고 싶다."
화륵!
여옥희의 머리가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저기?"
"여옥희보다는 이쪽이 더 대화가 잘 통할 것 같아서."
"아니, 잠깐만. 그렇게 떡치고 끝났으면 최소한 몇 달 뒤에 다시 만났을 때 해야하는 거 아냐?"
"혈소예 따먹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이다."
전생부터.
"너, 여옥희에게 들어갈 기억과 지식 대충 조작할 수 있지?"
"그럼. 여옥희가 나고, 내가 여옥희인 걸. 나는 그냥 여옥희의 정신에서 조금 욕망에 충실한 사람일 뿐이야."
"완전한 이중인격은 아니라는 건가?"
"혈선녀에 대해 완전히 모르는 구나. 자세하게는 말 못하니까, 그냥 너 편한대로 생각하렴."
혈옥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렸다. 의자를 뒤로 젖히는게 이제야 좀 취조를 하는 사람같아보였다.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뭐야? 진짜로 답답해서 그랬다고?"
"여옥희에게 대충 네가 둘러둬라. 천무명은 겁간을 당했지만, 여 장군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다고."
"...아하,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색벗이라는 거지?"
"물론."
혈옥희는 깔깔 웃으며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보지가 좋았어?"
"현경을 취하는 건 좀처럼 쉬운 경험이 아니니까."
내공은 많이 취하지 못했을지언정,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두 가지나 손에 넣었다. 하나는 여옥희의 처녀고, 또다른 하나는....
"좋아. 그러면 대충 정리해둘게. 여옥희는 너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고, 그걸로 네 편의를 봐주려고 한다는 거지?"
"어디까지나 '천무명'에 대해서."
나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비천색마와 천무명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존재다. 금의위에는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까지 구분해야할 이유가 있나? 흐응, 나야 좋지만."
혈옥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검지로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렸다.
"좋아. 어차피 이거, 빡통이라서 이미 그렇게 파악하고 있거든."
"...응?"
"혈선녀가 되면서 지적 능력이 상당히 높아진 건 사실이거든. 물론 혈옥희 상태일 때는 그렇고, 그냥 평소에는 애가 맹탕이야."
"......."
아무래도 무능삼장군은 거짓이 아닌 실제였나보다.
"왜지...?"
"궁술이랑 무공 하나 만으로 금의위 장군에 오른 걸. 나는 지략을 짜내고 정치를 하고 그런 쪽이 아니야. 압도적인 힘으로 싸우는 사람이지."
혈옥희는 입맛을 다시며 눈을 살짝 치켜떴다.
"나, 너랑 진지하게 싸우면 최소한 혈마는 뽑아낼 걸?"
"...거기까지 안다 이거지."
"후후, 걱정마. 이미 색공으로 졌으니까, 패배자는 유구무언. 빡치게 하면 자지 안 박아 줄 거 아니야. 그건 내 손해인 걸?"
"......."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더 열받는다.
'혈교 애들이랑은 이래서 싫어.'
내가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데, 주도권이 항상 빼앗기고 주도 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싫다. 그나마 음양합일을 할 때는 반격을 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애초에 무공도 뛰어난데 머리까지 좋은게 특출난 거야. 내가 장군인데 뭐하러 지력까지 글월문 읊는 분들 수준을 맞춰야해? 전쟁나면 책사들한테 다 맡기고 나는 활만 쏘면 되는데."
"혈선녀 되는게 정답이군. 여옥희면 이런 대답 안나왔지."
"후후, 나도 좋게 생각해. 덕분에 천하제일인이랑 한 번 했잖아?"
"한 번만 할 생각인가?"
"...어머나."
혈옥희는 눈웃음을 살랑거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좋네. 다음에 만나면 더 질펀하게 할 거야."
"흥, 중간에 엎어질 생각하지 마라."
"...응? 엎어져?"
"......."
여옥희가 혈옥희를 모르듯, 혈옥희도 그녀를 모르는 걸까. 나는 어깨를 으쓱인 뒤 손을 휘저었다.
"됐다. 여옥희나 불러."
"흥, 두고봐. 다음에는 절대 안 봐줄테니까."
사아아악.
혈기가 내려가자, 다시 여옥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고개를 한 번 푹 숙인 뒤, 잠시 고뇌할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천무명 공자."
"예."
"...그, 이런 관계는 처음이기는 하지만."
방금 전까지 색기발랄하던 요녀는 사라지고, 이제 막 풋사랑을 깨우친 소녀처럼 여옥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앞에서는...여옥상이 아니라 여옥희여도 괜찮은 겁니까...?"
"물론입니다, 여 장군."
"...쉿."
여옥희는 검지를 내게 뻗으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둘이 있을때는 장군은 싫어."
"그럼 어떻게?"
"...여희라고 불러."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나는 침이 꿀꺽 넘어갔다. 혈옥희가 여옥희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것 같았다.
"공자가 보는 앞에서는...한 명의 여인이고 싶으니까."
'첫눈에 반해서 강간했으면서.'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나는 따지고 싶었지만-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으니까, 더 알아야겠어."
"모르는 거라니, 있는 그대로 다 말했는데-"
"아직."
여옥희는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르는 게 더 많으니까."
"......."
사실, 세뇌에 가깝게 보내진 여자다. 언젠가 범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떠먹여지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하지만.
- 주절먹이라고 알아?
'혈교주, 역시 당신이 옳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들, 일단 선물을 받았으면 그냥 고맙다고 절하면서 먹어야 하는 법.
혈옥희와 여옥희, 몸은 같지만 서로 다른 여인을 취하는 것 같아 아기색마가 절로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는대로 모두 실토하겠소."
자지로.
"그런데 슬슬 위험한 거 아니오? 시간이-"
"원래 취조는 길어지면 한나절도 걸리고 그런 거야."
여옥희는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천천히 다리를 당겼다.
"...빨리 바른대로 말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뱉어내리다."
찌걱.
아 글쎄.
취조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천무명, 무죄.
사실 죄가 있어서 취조를 당한 것은 아니다. 천무명이 왜 하필 호북에 있었는가, 그리고 호북에서 뭘 하다가 갑자기 튀어나왔는가 하는 조사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호북성에 잠시 은거하고 있었소.
-제갈세가와 인연이 있어, 와백봉 제갈선이 마련해준 모처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소.
-그러다가 갑자기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 뛰쳐나오니 홍화문의 무사들이 폭주하고 있더군.
-그 뒤는 몸이 알아서 움직였소.
완벽!
의협 천무명의 행동 원리는 '오지랖'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
아미파의 추격? 마교의 추격? 그런 건 '눈 앞의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 앞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제법 오래 걸렸습니다, 신궁?"
"...이야기가 조금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취조를 하다보니."
감찰관의 말에 신궁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거의 두 시진 가까이 따로 둘이서 있었으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지는 건 당연지사.
"그가 저를 업고 도시로 오기까지의 일에 대해서 추궁했습니다."
"아...하긴, 그 때는 아무도 못봤으니까요. 혹시나 뭔가 엄한 짓을 했을 수도 있으니."
"......."
엄한 짓은 이쪽이 했다. 자신도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를 정도로, 신궁은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어때요?"
"뭐, 뭐가 말씀이십니까?"
"금의위. 예전부터 좋게 보셨잖아요."
"아...."
신궁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금의위, 천무명.
산동에서의 일을 멋지게 해결하고, 아무런 공과도 받지 않고 홀연히 떠나는 모습에 금의위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
뛰어난 실력자가 물욕없이 청렴한 모습을 보인다? 금의위로서 제격이다.
그리고 가장 우수하게 평가하는 분야는 그의 의지.
모종의 길을 통해 파악한 '복수'에 대한 강렬한 의지에 대해 금의위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합니다."
"네? 왜요?"
"그는 야인(野人)으로 살아갈 자. 감히 관이라는 틀에서 묶어둘 만한 자가 아닙니다."
"엄청 고평가 하시네요. ...하긴, 그렇긴 하죠."
감찰관은 붓 끝을 살랑살랑 움직이며 슬며시 웃었다.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황녀님, 혹시?"
"......아, 아녜요! 부마감으로 생각한다건나, 아버님의 기준을 충족한다거나, 잘생겼다거나 그런 건 저어어언혀 생각안했어요!!"
황녀는 손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부채질했다.
"휴우, 그보다 알아보라는 건 알아보셨어요?"
"알아보라고 하신 게 천 공자에 관한 것이라면-"
"아니요, 모용세가의 사건 말이에요."
"...그 문제라면 아직."
"그럼 무당파의 문제가 정리되는대로 바로 움직이도록 하죠. 남 일 같지가 않아서."
황녀는, 감찰관은 빈 종이에 빠르게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모용세가, 어쩌면 소가주가 바뀌어야 할 지 모르니까."
황녀가 쓴 종이의 서두에는 '모용세가 소가주 음독 자살 미수 사건'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연희봉 모용란, 호북에서 찾아야하니까."
[작품후기]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