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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색마-400화 (400/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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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오르라

째액, 째액.

이른 아침.

신궁, 여옥상은 눈을 떴다.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이름을 일어나자마자 다시금 되새기며, 여옥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남장이 풀려있었다. 흉부를 거세게 압박한 붕대는 풀어져있었고, 몸의 굴곡의 보정을 위해 덧대어놓은 각반은 떨어져나갔다.

"도대체…?"

"정신이 드십니까?"

"앗…?!"

옆에서 들려온 갸냘픈 목소리에 여옥상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안 죽어요. 살았으니까 된 거죠."

살았으니까 되었다.

위험한 일은 있었다.

네가 없어서 위험에 처했다.

"당장 황궁으로 가서 목을 베어달라 청하겠습니다."

"그러지마십시오. 신궁이 없으면 금의위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단정한 차림으로 돌아간 감찰관은 자결이라도 하려는 듯한 신궁을 진정시켰다.

"여 장군이나 저나 둘 다 비슷한 상황인 만큼, 서로를 지켜줘야합니다. 걱정마십시오. 적어도 신궁이 여자라는 건 들키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감찰관께서는 들켰다는 말 아닙니까…?"

"황녀인 것만 안 들키면 되지요. 금의위 감찰관이 여자라는 건 그다지 대수가 아닙니다. 저 놈, 남자치고는 이상하게 꼼꼼하더니 역시 여자였구나 하고 넘어갈 일이지요."

"......."

생각해보면 '금의위 감찰관'이 딱히 성별을 속인 것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여인의 몸으로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구나 놀랄 일일 뿐이며, 황제를 능멸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녀의 진짜 신분인 황녀만 들키지 않으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다.

"혹시…."

"구조받는 과정에서 제 감찰관으로서의 신원은 다소 노출되었으나, 나머지는 괜찮습니다. 호북성주는...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구요."

"......죄송합니다. 제가 더 강했더라면...크윽."

여옥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감찰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뭔가...기억나는게 있습니까?"

"......아뇨. 마지막 순간 크게 머리가 다쳤던 것 같은…? 큭."

"단기기억상실일지도 모릅니다. 전투의 기억이 날아갈 정도로 격하게 싸우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완전히 날아갔을 지도 모르죠."

"그 정도로 격하게 싸웠습니까?"

"예. 장원 하나가 통째로 날아갈 정도로 격렬한 싸움이었다고 합니다. ...싸운 흔적만 봤을 때는."

"허."

여옥상은 뒷목을 긁적거렸다. 도대체 얼마나 무아지경으로 싸웠길래 적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생사결을 벌인 걸까?

"그, 그러면 사건은…?"

"말하기에 앞서. 한 가지 난감한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절한 신궁을 등에 업고 호북성으로 돌아온 청년이 한 명 있습니다."

"......."

여옥상은 사색이 되었다. 업고 왔다는 것은 신체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닌가?

"누구...입니까?"

"천무명 공자."

"...그 아미 대탈출의 장본인…?"

"예. 그 자입니다."

여옥상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감찰관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감찰관?"

"......저는 그에게 구명지은을 입었습니다."

"......."

천무명.

여인이 있는 곳이라면 소문이 끊이지 않는 모습은 마치 무림맹주 독고자영의 젊은 시절을-

아니, 그 미치광이를 닮아있었다.

유독 주변에 수많은 여자가 꼬이던 잘생긴 젊은 청년 고수를.

* * *

"보면 볼수록 조각미남이란 말이야."

"공자, 뭐하세요?"

"반갑지만 애써 정체를 모르는 듯 숨기려는 표정?"

"다 드러나게 보이시는데요…."

나는 사공희와 제갈선, 두 명과 함께 관에서 마련한 자리에 앉았다.

태극화와 와백봉. 다소 어색한 조합일수도 있지만, 와백봉은 이미 태극화와 안면이 트였다.

-태극마망유? 그게 뭐죠?

-그게 참 좋은데...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고...직접 보여드릴까요?

-......오우야.

사각, 사각. 제갈선은 우리가 상대를 기다리는 동안 수첩을 꺼내 열심히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다.

"공자, 누가 오면 꼭 얘기해주세요."

"괜히 보여줬나. 태극마망유."

"다음에는 음양이옥수도 같이 보여드리는 건 어때요?"

"가슴으로 빚어지는 온갖 성의 향연...씁."

속필로 색협을 써내려가는 이 여인을 누가 감히 와백봉이라고 생각하리!

"와봉 선생, 이번에는 무슨 주제인가?"

"평소에는 옷 때문에 가슴이 작은 줄 알았던 여자가, 옷을 벗으니 엄청 크더라? 거기서 태극마망유를 하는 거죠."

"......."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나는 등 뒤에서 느껴졌던 감촉이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

현타 도사가 온 시점에서 나는 신궁을 업고 관아로 갔고, 누구에게도 인계하지 않고 감찰관에게 직접 인계했다.

'알아챘겠지?'

천무명이 신궁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알았으니까 같은 금의위 사람인 감찰관에게 직접 양도했다.

감찰관은 분명 알아챌 것이다. 내가 신궁을 배려한 것을. 내가 남장을 한 두 여자의 실체를 파악한 것을.

그래서일까?

타닥, 탁.

나는 가볍게 발로 땅을 굴렀다. 한창 집필에 열을 올리던 와봉 선생은 인상을 찡그리며 수첩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두 명의 여인, 아니 남장여인이 들어왔다.

모르고 보면 조금 예쁘장한 남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알고 보니 화장과 인피면구 따위로 정체를 숨긴 여인이라는게 확연히 드러났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금의위의 감찰관입니다."

"태극화는 지난번에 봤고, 이쪽은 처음이군. 만나서 반갑소. 신궁 여옥상이오."

"태극화 사공희입니다."

"와백봉 제갈선이어요. 그리고 이쪽은…."

"천무명."

신궁이 먼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대는 나와 따로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지."

나는 신궁에 의해 호출을 받았다. 나를 향해 걱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셋(...?)에게 가벼이 고개를 끄덕인 뒤, 나는 신궁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시게."

"네, 알겠습니다."

나는 신궁이 부르는대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는 굳이 그라고 부를 필요도 없었다.

끼이익.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쪽방은 가운데 놓인 책상에 호롱불 하나가 덜렁 놓여있었다.

흡사 취조실을 연상케하는 분위기.

철컥.

신궁이 문을 잠궈버렸고, 나는 신궁과 단 둘이 남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압니까?"

"죄송합니다. 알게되었습니다."

괜히 빙빙 돌리며 상대를 열받게 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죄송하다고 한 건, 천무명이기 때문.

"알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단지-"

"염치가 없지만 부탁드립니다. 죽을 때까지 꼭 함구하여주십시오."

"제 입은 누구보다도 무겁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감찰관의 경우도 정체를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숙지하겠습니다."

"음…."

내가 너무 협조적으로 나오는 것에 신궁은 미심쩍은 눈치가 강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여인이 왜 남장을 하고 금의위에 있는지."

"제가 모르는 모종의 사정이 있었겠지요. 타인에게 알려도 되는 것이라면 제게 말씀해주셨을 것이고, 몰라야한다면 제가 함구하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이유야...사람인 이상 궁금하기야 하지만."

나는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관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무림의 일로 곤란을 겪었는데, 어찌 그것으로 사사로이 이익을 추구하겠습니까?"

"......."

"저는 무림의 사람이지만, 기본적으로 이 중원의 아버지이신 황제폐하의 백성일 뿐입니다. 나라의 녹을 먹는 분들께 적극 협조하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지요."

황궁의 사람들을 위해 금칠 한 번.

"관의 분들께서 힘을 써주시고 계시기 덕분에 중원이 평화롭고, 또 무림이 평화롭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천 소협. 이 여옥상, 그대의 충정은 잊지 않겠소."

"그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흠."

신궁은 잠시 침묵하다가 나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황룡을 모실 생각은 없소?"

"......금의위에서 일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좋은 징조다. 신궁이 직접 나를 추천하려고 하니, 이 얼마나 좋은 계기란 말인가?

"그렇소. 그대의 무력이라면 능히 금의위의 높은 자리를 노릴 수 있을테지. 어떤가? 내 추천서를 써줄 수 있네."

"......."

남의 천환단이나 훔쳐가는 도둑에게 추천서를 받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나는 애써 끓는 속을 달래며 쓰게 웃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제게는 개인적으로 해결해야할 은원이 있습니다."

"허어…. 복수인가?"

"예. 돌아가신 부모님과 스승의 복수입니다."

중원에서 누구도 의지를 꺾을 수 없는 두 가지 복수를 읊자, 신궁은 바로 쓴웃음을 지으며 영입을 포기했다.

"...응원하지. 다만 관에서 출동할 일은 없기를 바라오. 우리를 도운 이를 우리의 손으로 잡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

"알겠습니다. 설령 추후 제가 살인 혐의로 감옥에 가더라도...그저 공명정대하고 지엄한 판결을 바랄 뿐입니다."

나는 팽유월조차 입맛을 다시는, 더없이 순수한 미소를 활짝 지었다.

* * *

누군가를 위해 천명을 바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눈앞의 청년은 바보같이 어수룩하고 정의로웠다.

신궁이 바라는 인재. 대화를 하면 할수록 천무명이라는 청년에 점점 매료되어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좋다. 인간성이 좋다. 무공도 뛰어나다.

'지휘사가 좋아할 법한 청년이야.'

금의위는 현재 차기 수장이 될만한 자가 없다. 만약 이런 자가 금의위에 들어온다면, 신궁과 신창이 선배로서 키워 황제를 위해 충성을 바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두근, 두근.

천무명을 본 순간부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조금씩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여 장군?"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한 공간 안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꿀꺽."

훤칠한 외모. 날렵한 턱선. 무복 사이로 살짝 비치는 목선과 쇄골.

"여 장군…?"

"......."

신궁, 여옥희는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지 않고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까? 아니다.

하단전이 욱씬거리고 있다. 당장이라도 이 남자를 가지게 해달라고 아우성거리고 있다.

굳이 지금의 몸상태를 금의위 남자들의 속어를 빌려 비유하여 표현하자면….

"장군?"

장군으로서는 하등 쓸모가 없는, 자궁이 떨리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천 공자."

"네?"

신궁, 여옥희는 눈을 찔끈 감은 채 천무명의 뒤를 덮쳤다.

* * *

"흥, 흐흥, 흥."

혈소예는 콧노래를 부르며 품에 한아름 안아든 바구니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물론. 하아, 지난 번에 혼자서 갔을 때는 덤은 커녕 빨리 먹고 나가라고 하던데. 이거 봐, 둘이 가니까 덤으로 소롱포도 주고 말이야!"

"좋으시겠습니다. 그런데 소교주, 정말 신궁을 그대로 둬도 되는 겁니까?"

"여옥희?"

혈소예는 걷다가 말고 눈을 깜빡이며 몸을 돌렸다.

"왜?"

"그렇게 힘들게 제압하셨으면서, 어째서 그냥 금제만 걸어두셨는지…. 혈선녀로 만들 생각이 아니셨습니까?"

"만들기는 할 건데, 그 여자는 곁에 두면 오히려 속이 답답해져서 안 돼."

"그건 처음 만났을 때 말씀하셨던 무능삼장군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런 셈이지. 평소에는 잘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큰 실수를 하는 쪽이거든. 그래서 그냥 금제만 걸어둔 거야."

혈소예는 손가락을 허공에 휘적거리며 웃었다.

"금룡신공의 양기를 전부 긁어냈으니, 분명 강력한 양기에 끌리게 될 걸? 천하에 오직 한 사람만의 양기에 말이야."

"그 분이군요."

"그래. 그렇게 금제를 걸어두면 나머지는 알아서 다 해결될 걸?"

혈소예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듯 활짝 웃었다.

"내 남편한테 알아서 다리 벌리면서 박아달라고 할 거야. 자궁 떨려서 어떻게 참겠어? 후후, 어때? 괜찮지?"

"...정작 그분이 모르면 어떻게 합니까?"

"에이, 척보면 알지. 내가 자기를 위해서 처녀 하나 발정시켜놓은걸."

혈소예는 눈을 찡긋였다.

"아마 함정이고 나발이고, 좋다고 자지부터 쑤셔박을 걸? 이른바, 이런 거지."

혈소예는 한쪽 손으로 이마를 쓸며 검지를 튕겼다.

"저쪽의 미녀분께서 사는 겁니다."

"......."

자신이 쓰러뜨린 여고수에게 금제를 걸고 처녀를 범하라고 자객으로 보낸다.

"...그냥 본인이 가서 벌려주면 정말 좋아할텐데."

혈요선은 도무지 혈소예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흐흥, 지금쯤 맛있게 먹고 있으려나~"

너무나도 삐뚤어져있지만, 혈소예는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정말 행복해한다는 것.

"아니면 따먹히고 있으려나?"

"......."

혈요선은 비록 자신에게 있어 복수의 대상이지만, 비천색마가 조금은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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