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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오르라
이른 아침.
호북성의 중앙관청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모여있었다. 넓은 공터 가운데에는 두 명의 남녀가 제각기 서있었다.
무당파 장문인, 현철도사.
그리고 그에게서 성추행을 받았다고 주장한 여성, 환경애.
"지금부터 판결을 내리겠소."
금의위에서 조사한 조서를 펼친 호북성주는 목소리를 높여 판결을 내렸다.
"지난 며칠간 호북성을 떠들석하게 만든 일은…."
호북성주는 장황한 사건의 개요를, 판결문이 적힌 그대로 읽기 시작했다.
무당파 장문인의 결백을 믿으며 온 이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졸이며 판결의 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환경애를 위해 온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그녀는 자수하러 왔다는 저잣거리에 퍼다하게 돌았고, 다들 판결의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여, 무당파의 장문인 중검을 무고한 환경애에게 징역 이십년을 선고하는 바이오!!"
웅성웅성.
이십년이라는 제법 긴 시간에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죽이는 게 아니야?
-자수를 했으니까 참작해주는 거겠지.
-20년이라...미묘하게 엄청 길군.
환경애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20년 동안 옥살이를 하는 건 감옥 안에서 사실상 평생을 살라는 말이었다.
죽을 때까지.
"죄인 환경애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가?!"
"인정...합니다."
환경애는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답했다. 밤 사이 모진 고문이라도 당한 건지,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칼에 허탈하게 웃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미안해요...언니들."
"연행하라!!"
철컥.
관졸들은 환경애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그녀를 이끌었다. 환경애는 끝까지 현철 도사를 향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저,저,저 고얀 것…!
-자기 때문에 사람이 돌맞아 죽을 뻔 했는데, 사과도 안하고 가?
온갖 모욕이 환경애를 향해 날아들었다. 만약 모욕이 아니라 돌이었다면 환경애는 군중이 던지는 돌덩이에 머리가 으깨져 죽었을 지도 모른다.
저벅, 저벅.
환경애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재판장에는 아무런 구속도 없는 현철 도사가 멍하니 서있었다.
"...따라서 현철 도사에게는 무죄를 선고한다."
무죄.
당연한 말이지만 왜 이렇게 들으니 눈물이 나는 걸까.
"크, 흐흡…!"
현철 도사는 차마 눈물을 흘릴 수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초절정 고수가 원통함을 이겨내고 울컥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로써 무당파 장문인의 추문 사건은 종결하겠소!"
탁!
와아아아아아아!!!
호북성주의 외침이 끝나자, 장문인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무당파 제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한 번 날개가 꺾일 뻔한 무당파의 상승은 역경에 한 번 크게 부딪힐 뻔 했으나, 시련을 이겨내고 하늘 높이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말끔한 사건의 해결처럼, 하늘은 투명하고 맑았다.
* * *
"한 건 해결이군요. 축하드립니다."
남들의 앞에서는 근엄한 장군과 선배를 연기했지만, 단 둘이 있을 때는 높임 표현이 조금 달랐다.
"고맙습니다, 여 장군."
"편안히 불러주십시오. 이곳에는 저희 둘밖에 없으니까요."
신궁은, 감찰관에게 명백히 '존대'를 하고 있었다.
"...하아."
감찰관은 척 보기에도 갑갑할 정도로 잠궈놓은 목의 끈을 풀었다. 그러자 관복의 윗부분부터 쇄골까지 천천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감찰관의 목젖은 생각보다 많이 매끈했다. 나와야 할 것이 나와있지 않았고, 감찰관은 어색한 듯 목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이상합니까?"
"원래대로, 응당 돌아가야 할 모습으로 돌아가고 계신 겁니다."
걱정하는 감찰관의 말에 신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이 자연을 거스를 수는 없지요. 아무리 약을 쓰고 한다지만, 결국 자연의 이치를 위배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장군. 저는 두렵습니다."
감찰관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만인지상에서 멀어지고자 금의위에 들어갔습니다. 싸우기 싫어서 도망을 쳤습니다. 다시 분란의 불씨를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분란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후계자 자리는 공고하기 때문입니다."
신궁은 불안해하는 감찰관을 두둔했다.
"비록 그분께서 한 때 잘못된 선택을 내리셨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여 장군. 말을 삼가하세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야…."
신궁은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자신의 가슴에 붙였다.
"저는 언제나 황녀님의 편이니까요."
"......."
감찰관은 천천히 손을 턱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뚜둑, 뜨드득.
인피면구가 뜯겨지자, 안에는 무림의 여느 미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아니 보기에도 부귀영화가 넘쳐나 보이는 여인이 있었다.
"여 장군."
"네, 황녀님."
"만약 인피면구를 뒤집어 쓴 자가 환경애로 변장하여 거짓으로 자백을 했다면, 그건 무림인의 시각에서 가능한 일입니까?"
"......이론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거의 불가능해요. 저의 기감을 뚫고 그런 짓을 할 자는 천하에 몇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감찰관, 황녀는 한탄하며 머리에 눌러쓴 관모를 벗었다.
관모에 일체형으로 달린 머리칼이 떨어지자, 안에서 기다란 묵빛 머리칼이 살랑거리며 흘러내렸다.
"...정돈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남자로 살아온 지 너무 오래되어…."
"걱정마십시오. 제가 금방 빗어드리겠습니다."
신궁은 더할 나위 없이 밝은 미소로 황녀의 머리칼을 정돈했다.
"천환단 덕분에 다시 되찾은 여성성을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황녀님."
"......저는 아버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남아로 키우고 바꾸려고 하신 건, 그만큼 제게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겠죠."
여인으로 태어난 자를 강제로 남아로 둔갑시킨다.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
"그래도 저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제게 자유를 주셨으니까. 다만…."
황녀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요즘...조금 두렵습니다. 이번 환경애의 사건처럼, 중원 여인들이 힘을 얻기 시작하는 이 시대에…. 만약 그분께서 제 성별에 신경쓰지 않고 후계자 구도를 바꾼다면?"
"그럴리가요. 이미 약조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말이 곧 약조이며 뜻인데, 번복하신다 한들 제가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누구보다도 현명한 판단을 내리실 분인데."
"그러니까 문제인 겁니다. 만약...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는 선택을 내린다면. 저는…."
황녀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제 동생을 죽이고 피묻은 옥좌에 앉게 되지 않겠습니까…."
"......."
감찰관.
이자, 대 제국의 황녀.
그녀는 여인이라는 요소만 아니었다면, 황위 계승의 서열에서 가장 빠른 존재였다.
"천환단이...제게 너무나도 큰 시련을 주는 듯 합니다."
황녀는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 * *
"느그아아아앗!"
기합과 함께 역체변용술 해제. 나는 환경애를 사칭하던 모습을 풀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읍, 으읍, 으으읍!"
"잘했다."
간수들을 기절시키고 들어온 유설라는 내 앞에 환경애를 집어던졌다. 알몸으로 잡혀온 그녀는 차가운 밤공기에 전신이 불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런. 추울텐데 옷을 입혀야겠어."
나는 그녀에게 즉시 내가 벗어둔 죄수복을 입혔다.
죄수가 죄수복을 입어야지, 나처럼 선량한 색마가 어째서 죄수복을 입어야하겠는가?
"설라, 내 옷을."
"여기있습니다."
나는 유설라가 가져온 외투를 걸쳤다. 혈교 특유의 선이 진하고 각진 무복은 이국적인 향이 강했고, 나 또한 혈강시가 입고 다니던 옷을 비슷하게 입었다.
"정식으로 소개하마. 나는 비천색마다."
덜커덩! 환경애는 내가 아까전부터 묶여있던 것과 똑같이 묶인 상태로 몸을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네가 과연 이번 기회를 바탕으로 딸을 낳을 지 안 낳을 지는 모르지만, 복수를 원한다면 비천색마를 찾아라. 그리고 네 자식에게 말해. 네 어미는 비천색마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크르르…."
환경애는 나를 향해 살기어린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나는 그녀를 비웃었고, 그녀는 나를 향한 적의를 끝까지 숨기지 않았다.
"기대하고 있으마."
캉.
나는 철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긴 뒤, 유설라를 데리고 감옥 밖으로 빠져나왔다.
"끄으응."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싸지도 못하고 감옥에 갇혀있다보니 몸이 찌뿌둥했다.
무엇보다도 아랫도리에 쌓인 양이 엄청 많았다.
환경애로 변장하여 지금까지 한 번도 빼지 않았으니, 최근들어 이렇게 쌓인 건 혈소예에게 착정당한 이후에 휴식을 취하던 때 만큼이 아닐까.
"다들 걱정하고 있을테니 빨리 돌아가자꾸나."
"네. 천가장과 진가장...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 흐흐, 뭘 그렇게까지 걱정을. 만약에 정 아니다 싶으면 탈옥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자수는 하더라도 탈옥은 할 수 있다. 환경애는 앞으로 영영 쫓기는 지명수배범이 되겠지만, 죄를 저지른 자의 업보일 뿐이다.
'빨리 돌아가서 생각을 정리해야해.'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낯선 이에게서 내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
감찰관.
내가 죽였던 자에게서 내 천환단의 향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것도 하오문주를 위해 준비했다가 신궁으로 추정되는 자가 들고 도망갔던 그 천환단 속 만리추종향이!
"뭐 특별한 일은 없었나?"
"그, 그게."
유설라는 조금 당황하며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왜? 혹시 누가 발정나서 자위라도 했나?"
"무당파 장문인 현철 도사 말입니다."
"그래. 무죄 판결을 받고 남들 앞에서 눈시울 붉힌 양반."
"......장문인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지금 악을 쓰고 있습니다."
"뭐? 이 씨…."
나는 절로 튀어나오려는 쌍욕을 간신히 참았다.
"왜?"
"그게…."
유설라는 너무나도 황당한 얼굴로 무당산이 있는 북쪽을 가리켰다.
"자신은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은 자신을 쓰레기 보는 것 같다면서 충격을…."
"......."
언제나 그렇지만, 자극적인 거짓이 기억에 박히면 소위 재미없는 진실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기 마련.
현철 도사는 법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이미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성범죄자로 낙인이 찍혀있었다.
"뭐...그건 어쩔 수 없군.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거 말고는 또 없나?"
"있습니다. ...폭주문을 아십니까?"
"뭐?"
나는 절로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 폭탄광들?!"
"예. 대공자를 지지하는 자들 중 한 세력으로 벽력탄을 개발해낼 수 있는 자들 말입니다."
유설라의 표정은 점차 굳어가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 사이, 폭주문의 사람들이 홍화문에 다녀갔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최악의 경우."
나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벽력탄이 터지겠어."
정마대전의 시작.
그것은 무림맹주의 독고자영의 폭사로부터 시작되었다.
* * *
"관무불가침이라. 흐흐, 참 허울좋은 말이로군."
홍화문주는 손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냈다. 그의 눈에는 짙은 살기가 가득했고, 연무장에는 겁먹은 문파의 제자들이 괜히 피해를 입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제자들이여. 사천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네."
홍화문주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손에 뚝뚝 흐르는 피는 바닥에 쓰러진 총관의 피였고, 총관의 명치에는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대 아미파의 제자를 상대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납치를 감행한 청년이 있었다네. 얼마나 낭만적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꼴아박을 각오로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다니."
홍화문주의 눈에는 광기가 넘실거렸다.
"제자들이여. 너희들은 이미 한 배를 탄 몸이다. 내가 문주로서 저지를 각오가 된 이상, 너희들은 홍화문 출신이라는 걸 알리는 것 만으로도 큰 낭패를 보게 되겠지."
홍화문주는 제자들을 협박했다.
"걱정마라. 너희들은 내게 협박을 받았다고 하면 된다. 실제로 그렇지 않느냐? 홍화문주가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돼! 흐흐흐."
제자들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부하면 진짜로 죽여버리니, 죽고 싶지 않으니 말로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내 자식의 어머니가 될 여인, 나의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겠다. 아미파의 장로들을 앞에 두고 사랑을 쟁취한 청년처럼."
턱.
홍화문주는 품에서 큼지막한 구형의 물체를 꺼냈다.
바로 저것. 저것 때문에 제자들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에서 구한 건지도 모를 물건은 그 어떤 무공이나 무기보다도 더 확실한 협박재료였다.
"지금부터 나를 도와라. 안그러면 여기서 다 터질테니."
홍화문주는 광기어린 눈으로 구형의 물체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것은 벽력탄이다. 하나만 있어도...산 하나를 뒤흔들 무기지. 감옥 부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문주님. 설마-"
"나는 이것으로 내 아내될 여자를 구하겠다."
사락.
"천무명이라는 자가 그랬던 것처럼."
[작품후기]
낭만파 롤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