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390화 (390/568)

--------------------

날아오르라

소란을 틈타 들어온 홍화문은 평범한 무림의 문파였다.

단, 하나의 요소만 제외한다면.

"이 새끼들 봐라?"

"주공. 이건 분명…."

"미혼표식구궁진. 마교의 진법이 왜 여기에 깔려있을까?"

문파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내가 정말로 자주 애용하는 진법, 미혼표식구궁진이 깔려있었다.

"아쉽네. 이걸 밝히려면 마교의 사람인 걸 공개해야한다는 것이."

"폭로는 불가능하겠군요."

발견은 했지만 그걸 대외적으로 공표할 수 없다.

-여기 미혼표식구궁진이 깔려있어요! 이 새끼들 마교랑 손잡았어요!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앗.

마인들 중 9할 9푼이 모르는, 100명 중에서 1명 알까말까한 진법을 알고 있다면 그걸 아는 사람도 의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의심받지 않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바로 검마 왕소현.

그녀는 마교에 잠시 몸을 담았기에 미혼표식구궁진을 발견했다고 해도 크게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다.

단, 설치한 장소가 이번에는 문제였다.

"홍화문의 비급이 모여있는 비고…. 여자는 여기에 숨어있을 겁니다."

"네가 정면으로 들어와서 여기를 확인하는 게 아닌 이상, 사실상 확인은 힘들 것 같구나."

"네. 아무리 검각주라고 해도 문파의 비고를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따로 몰래 숨어들어오기를 잘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이곳에 미혼표식구궁진이 있는 것도 몰랐을테니.

"정말 눈뜨고 코 베일 뻔 했군. 천마가 이런 수작을 벌일 리가 없으니, 이건 대공자의 짓인가."

"십중팔구입니다. 뢰마가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뢰마는…."

"정면에서 무공으로 쳐부스는 걸 좋아하지."

뢰마도 어느정도는 옛날사람이라 이런 악의적인 계략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녀가 주도했던 사천당가 습격사건처럼, 뢰마는 무림인들의 힘을 이용해 무공으로 정면 승부를 선호하는 자다.

지금처럼 성추행 같은 거로 사람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짓은 오직 한 명밖에 사용하지 않는 수법이다!

"대공자 놈, 정말 질릴 정도로 악의적이군."

"혹시...조치를 취하실 겁니까?"

현검마망은 엄지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공자 주지는 내 몫이 아니야. 시아의 몫이지."

천마의 자리를 이어받기 전, 소공녀는 십마의 지지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인정할까? 아니다.

소공녀가 대공자를 직접 쓰러뜨리는 모습이 필요하다. 그래야 마교는 소공녀를 진정으로 지지할 수 있게되리라.

최소한 용봉지회 이후.

"저는 개인적으로 빨리 대공자를 처치했으면 좋겠습니다만…."

"흐흐,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놈을 가만히 두면 알아서 여자를 가져다 바치지 않느냐. 지금처럼."

나는 비고 안에서 나온 여인을 가리켰다. 현검마망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진짜였군요."

"아는 얼굴인가?"

"네. 조금 나이가 들어보이기는 합니다만...사홍 칠공주 중 한 명, <녹색공주>가 틀림없습니다."

"......별호가 왜 그 모양이야?"

"당시에는 젊었으니까요. 녹색은...일곱 빛깔 무지개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

우리는 숨을 죽인 뒤, 녹색공주의 움직임을 찬찬히 살폈다. 현철 도사와의 일이 있었던 객잔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대조한 얼굴은 큰 차이가 없었다.

머리칼과 눈동자가 녹색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요즘들어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무엇입니까?"

"강호에 특이한 모발색을 지닌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는 것 같지 않나? 그러니까 원색 계열 말이야."

백색은 그럴싸하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머리칼이 희게 물드니까.

하지만 적색부터 시작하여 금색, 심지어는 이제 녹색까지 나오고 말았다.

"이게 무림이냐. 아니지, 무림이니까 이 꼴인가?"

무공이 모발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형형색색인 건가.

"뭣 때문에 그러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사홍칠공주는 전부 염색입니다."

"...염색?"

"예. 머리칼을 그냥 염료로 물들인 겁니다. 따로 특별한 무공을 익혀서 변한 건 아닌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저 여자가 녹색머리라는 건 제보에 없었는데?"

"...이제는 무공을 익힌게 아닐까요?"

대화를 주고받다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둘 풀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녹색공주의 얼굴을 찬찬히 뜯었다.

"왕이 제법 장수하나보군. 저 얼굴로 공주라고 하다니."

"여자는 죽을 때까지 소녀이고 싶은 걸요."

"음…무슨 느낌인지 알겠다. 근데 소현아, 이건 기억해라."

혈소예는 말했다.

"예쁜 여자가 어려보이게 하는 건 귀여워보이지만, 저런 애들이 어려보이고 싶어하는 건 주책이라는 것을."

"...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귀엽지."

"...흣."

왕소현은 잘게 몸을 떨며 내 등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주책부리게 만드시네요."

"주책이라고 생각안한다."

내 여자는 괜찮다. 하지만 남의 여자가, 그것도 저런 여자가 공주니 뭐니 젊어보이게 행동하는 건 주책을 넘어 꼴불견이다.

"색마가 움직일 때로구나. 가자."

나는 왕소현과 함께 미혼표식구궁진 안으로 잠입했다. 본래는 외부에서 진입하는 즉시 진법에 문제가 생기지만, 내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과거 빙마의 진법을 뚫었던 것처럼, 똑같이 하면 되니까.

"내 손을 꽉 잡아라."

"...주공, 지금 눈이…?"

"금빛으로 보이나?"

"어...그러니까."

왕소현의 눈에 비친 내 눈동자는 내가 보기에도 다소 이질적이었다.

"금안에...붉은 달…?"

"......."

어느새, 소예신공의 혈기는 용안에까지 침투해있었다. 흰자위, 금빛눈, 그리고...붉은 동공.

"주공의 천마신공은 조금 특이하네요."

"...일단 너만 알고 있어라."

나는 고개를 돌려 왕소현을 안으로 잡아끌었다.

"아직...천마신공 안 쓰고 있다."

"......!"

* * *

무당파에서 일으킨 소요는 금방 곳곳에 소식이 퍼져나갔다.

우선 한 가지를 말하자면, 호북성이나 무림 전체에서 보자면 현철 도사보다 현타 도사가 대외적으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 혈기가 다소 높지만 의협심이 출중한 사내.

-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남자! 젊은 시절 그의 태극검에 쓰러진 마인만 한 마을을 만들 것!

- 목소리 멋짐.

현철 도사가 현타 도사에게 질투심을 가지는 것도 중원인들은 대략적으로 납득할 수 있었다.

무공도 뛰어나고 키도 크고 잘생긴 사제. 당연히 질투할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니겠는가?

"......."

호북성의 한 저택에 연금된 현철 도사는 밖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전전긍긍하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나는...이제...."

이미 그의 옷은 장문인이 입는 외투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옷일 뿐이었다.

몰래 술을 마시러 나왔으니 장문인을 알리는 모든 것을 두고 나왔고, 결국 현철이라는 별호 하나에 의지하여 장문인임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 여기 이 남자가 자기가 무당파 장문인이라고 주장하는데요.

- 그래? 내가 뭐 현기 도사 돌아가신 이후로 얼굴을 봤어야 알지. 높으신 분 불러와볼까? 크흐흐. 대장님! 여기에 자기가 장문인이라고 떠드는 놈이 있습니다!

- ...이게 왜 진짜 장문인.

다행히(?)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있어 감옥안에 계속 갇혀있는 일은 없었지만, 호북성주의 배려 덕분에 따로 별채에 머물게 되었지만, 이미 그는 모든 것이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 무당파 장문인의 명성도 땅에 떨어졌군. 여자 엉덩이나 만지고 말이야.

"나는...만지지 않았어!"

현철 도사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통곡했다. 밖에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만 없었으면, 부모님이나 현기 도사가 죽었을 때보다 더 서럽게 울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진심으로 억울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초절정 고수가 사람을 건드려놓고 모른다는게 말이 되지 않았다.

- 그럼 왜 순순히 잡혔대?

- 본인도 찔리니까 잡힌 거 아니냐?

'흐름이 그랬다고!'

뭔가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니, 어버버 하다가 그만 그대로 관아에 끌려가고 말았다. 술에 취해 있으니 제대로 상황판단을 내리기도 어려웠었다.

좆됐다, 라는 것을 깨달은 건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현타 도사와 철창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맞았을 때였다.

그리고 때는 이미 늦었다.

'사형. 내 최대한 노력해보리다. 사형의 무죄를 밝혀보겠소.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

현철은 아무 말도 없이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 내 모든 무공을 걸고 천명하노니, 현철 도사는 결백하오!

- 현철 도사는 무당파의 수치요. 제명을 하지. 장문인 대리는 다음 배분인 내가 하겠소.

과연 전자일까, 후자일까. 현타 도사가 자신에 대해 그간 보여온 불만을 생각하면 후자였지만, 아무리 도사라고 해도 사람은 이기적인 심정이 가득했다.

"미안하다...현타야...!"

현철 도사는 현타 도사가 자신의 무죄를 밝혀주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 그거 들었나? 현타 도사가 글쎄, 홍화문에 가서 난동을 피웠다더군.

- 자기는 현철 도사가 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던거? 크으, 정말 좋은 사제를 뒀구만.

"크윽...!"

울컥.

현철 도사는 주먹을 입에 넣었다. 주먹을 깨물고 강한 잇자국에 피멍이 들 정도로, 그는 울음을 참았다.

- 그런데 망했지. 쯧, 하루만 더 참지 그랬나.

- 그랬으면 개쪽은 안 당했을텐데.

"...응?"

- 증인이 나왔다고 하더군. 무려 세 명이나.

"........"

현철 도사는 털레털레 걸어가 침대에 얼굴을 묻고 좌절했다.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봐도 자신이 만진 기억은 없지만.

당시, 자신을 바라보던 수십 개의 눈동자는 아직도 눈에 선했다.

* * *

홍화문 내부 비고.

그곳에는 한 명의 여인이 칼을 갈고 있었다. 여인은 머리칼이 대나무와도 같은 녹색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30대 중반을 향해가는 나이의 여인은 차가운 얼굴로 조용히 앉아있었다.

서걱, 서걱.

아니, 칼을 갈고 있었다. 칼을 가는 행위 자체가 도사가 도를 닦는 것처럼 단정했고, 너무나 조용하고 규칙적이라 그냥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녹색공주, 환경애.

독특한 성을 가진 그녀는 사홍칠공주라는 조직의 일원이었고, 나이 순으로 적색부터 자색까지 칭하는 과정에서 '녹색'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별호가 녹색이라고 머리를 녹색으로 염색한 걸까?

아니다.

그녀는 무당파 장문인에게 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여인이다. 환경애는 대외적으로 자신이 무인이라는 것도 알리지 않았고, 그저 흑발의 일반인이라고 자칭하며 홍화문에 몸을 의탁했다.

끼이익.

비고의 문이 열렸다. 한참 무당파의 손님들과 입구에서 드잡이질을 하던 남자, 홍화문주는 비고에 들어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이모님, 무당파의 놈들은 물러났습니다."

"고마워요, 문주. 당신이 아니었으면 무당파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없었어요."

"조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제 어머님과 막역지우 아니셨습니까."

"하지만 제가 감히 어찌 큰언니의 아드님에게 하대를 할 수 있겠어요. 저희는 일곱 자매였지만, 사실상 큰 언니를 모시는 사람들이었는 걸요."

"하하, 괜찮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이모님들을 제게 의탁하고 먼 곳으로 떠나셨으니까요. 아니면...조카라고 불리기 싫으신 겁니까?"

홍화문주는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녹색공주의 어깨를 짚었다. 녹색공주의 눈이 파르르 떨렸으나,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아녜요. 그저...너무 고마워서 어떻게 답례를 해야할 지 모르겠는 걸요."

"괜찮습니다. 이모님. 차근차근 한 단계씩 밟아나가지요. 마침 마교의 도우미들도 적절히 증인으로 나섰답니다. 이제...그 분께서 지정하신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홍화문주의 눈에는 강한 열망이 스쳤다.

"제가 이곳 호북의 배후성주가 되어 홍화문의 세를 더욱 키울 것입니다. 그 때,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 이모님?"

홍화문주는 뒤에서 강하게 녹색공주를 끌어안았다. 젊은 청년의 강렬한 구애에 녹색공주는 좀처럼 난감한 반응을 보이다가-

"...츄릅."

어쩔 수 없다는 듯 홍화문주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 * *

"충격적이군."

"그러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놈들도 떡치니 우리도 떡이나 치자."

"......네? 어, 주군? 지금 저기 떡치기 일보직전인데, 안 빼앗으세요?"

"처녀면 몰라도 닳고 닳은 여자는 구미가 잘 당기지 않는구나. 소현아. 지금 나의 양물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느냐?"

"......저네요."

"그래. 걱정마라.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나는 왕소현을 탐하며, 무당파 장문인 성추행의 조작범들이 나뒹구는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다.

"녹색공주가 처녀였다면 당장 홍화문주 모가지를 잡고 집어던졌겠지만, 벌써 몇 번이고 한 것 같잖느냐."

"그럼 어떻게 하실 거죠?"

"어떻게 하긴. 색마답게 해결해야지. 암컷은 강한 남자에게 끌리는 법."

자연의 섭리대로.

"귀두에 왜 갓이 달려있는 지 아느냐?"

긁어내기 위함이다.

[작품후기]

당분간 평일 2편입니다. 안 그래도 잘 알 써지는데 생각할 것도 복잡해져서.... 수정작업 하고 난 뒤에 여력이 되면 3편으로 할게요.

혈세...!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