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377화 (377/568)

--------------------

혈교 소교주, 금소예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모종의 사태에 대비해왔다.

바로 현경급 고수의 천가장 습격.

호북은 나름 안전한 곳이지만 천하에 미친 놈들은 많고, 천가장에 있는 여인들의 위치가 노출되어 현경급 고수가 쳐들어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령, 독고자영이 독고연의 위치를 발각한 경우.

딸의 생사를 파악하고 위치까지 특정했는데, 과연 하남성에서 가만히 있을까?

선발대로 혼자서 달려오는 한이 있더라도 천가장을 들쑤실 것이다.

또다른 경우, 천마가 갑자기 호북에 나타날 경우.

천마와 나의 관계는 다소 특별하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나는 그에게 자신의 딸을 데려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만약 천마가 미쳐서 '너같은 사위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처음에는 단순히 비천색마로서 이시아를 위한 순애보인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여러 여자 건드리는 난봉꾼이었다면?

물론 천마도 나에 못지 않은 난봉꾼이었다.

하지만 자고로 사람이란 자기가 할 때는 사랑이고 남이 할 때는 불륜 아니겠는가?

'월아 가져보니까 알겠어.'

딸 가진 아버지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시아를 건드린 이상, 나는 천마와 치고 박고 싸울 운명이었다.

단지 호북이 아니리라고 예상했는데, 그게 호북이 되면 여러모로 큰 난리가 일어날 터.

또다른 경우.

검선 적성자나 아미신녀 복호보살처럼 내가 파악하지 못한 현경 고수가 호북을 쳐들어오는 경우.

호북에는 현경 고수가 없다.

무당파의 현경 고수는 없었고, 마찬가지로 제갈세가에도 현경 고수는 없다. 현경이 될 자는 있지만, 아직은 아니다.

즉, 호북성에는 현경 고수가 나 한 명 뿐이다.

성 전체에 대략적으로 기감을 널리 퍼뜨려놓았으니, 현경 고수가 진입하면 바로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전에 용봉지회가 있었던 때와 달리 나는 중원 전역을 돌아다니며 막대한 힘을 손에 넣었고, 소예신공의 금제를 해제하고 혈마를 불러낼 정도로 강해졌다.

그래서 느낄 수 있다.

지금 호북성에 진입한 현경 고수의 힘을.

정체 불명의 존재는 나의 전력에 준할 정도로 강력한 자이며, 어쩌면 지금 당장 나와 생사결을 나누면 둘 중 하나는 죽을게 분명한 싸움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후우."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아직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유언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는데.

만약 염마나 빙마나 팽유월이나, 다른 여인들이 혹시나 임신했다면. 그리고 다른 여인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평생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를 두고 어떻게 살까.

평생을 독수공방하게 될까, 아니면 수 년 뒤에 다른 남자의 여인이 될까?

'절대 안 돼지.'

결코 그럴 수 없다. 폭혈을 이용해 몇 달간 요양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결코 죽을 수 없다.

내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서 교성을 흘리는 꼴은 결코 두고볼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목숨을 걸고 '적'을 상대할 것이다.

"후우…."

이곳은 호북성에서 호남성으로 내려가는 경계. 제법 유명한 객잔.

나는 방을 하나 빌린 뒤, 술과 음식을 주문한 채 침대에 앉았다. 어디까지나 형식상으로 주문한 것이며, 다가올 전투를 위해 조금도 손대지 않았다.

"오는 건가."

저벅, 저벅.

객잔 입구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보법에 있어서 최강이라고 하는 신승에 버금갈 정도로 가벼운 발놀림이고, 은신술에 있어서 최강이라고 하는 살왕에 버금갈 은형술이다.

"......설마."

나와 척을 진 존재가 한 명 더 있다.

혈교주. 광마.

나의 기억을 읽고 미래에 자신이 광폭화되고, 월녀강림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걸 알아버린 남자.

분명 그걸 보고 납득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듯 하다.

'광마가 아니면 이 정도로 조용할 수 있나?'

절로 손이 떨린다. 나를 제외하면 천하 4강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가 광마, 혈교주다.

무림맹주, 독고자영.

마교 천마.

곤륜파 장문인.

...그리고 혈교의 교주, <혈우성>.

"......어쩌면 그걸 사용해야 할 지도."

혈교주와의 만남 이후, 내가 새롭게 연마하고 갈무리한 무공.

그것의 힘을 빌린다면 나는 능히 혈교주로부터 이길 수 있으리라.

'반드시 살아남는다.'

나의 아이를 위하여. 나의 여인들을 위하여. 앞으로 태어날 나의 아이들을 위하여.

저벅.

상대가 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퇴로를 확인한 뒤, 입을 열려고 침을 삼켰다.

똑, 똑, 똑.

"......."

젠장.

예상은 최악의 가정이 되고 말았다. 밖에 있던 자는 손등으로 문을 두드렸다.

'중원 전체에 저걸 하는 사람이 혈교주 말고 더 있을 리가 없지.'

나는 일부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나는 숨을 죽이고 입맛을 다시며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혈마, 강림.

사아아.

전신에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기는 이미 준비해둔지 오래.

흐.

밖에서 미약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게 이상하리라.

혈교주가 혈교의 무공을 모른다면, 어찌 혈교주라고 할 수 있을까?

철컥, 철컥.

문고리가 여러 차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문은 잠겨있다. 문을 쉽게 열지 않는 건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들어올테면 부수고 들어오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내 의사는 전달되었으리라.

서걱!

문고리가 잘렸다. 문 너머에서 붉은 강기가 칼날처럼 번뜩였고, 나는 눈앞이 아뜩해졌다.

조혈(造血).

혈맥에 흐르는 내력을 바탕으로 피를 체외로 흐르게 하여, 피를 무기로 만드는 능력.

간단히 말해, 피에 강기를 두르고 그걸 무기처럼 연성한다.

단순히 혈교의 내공심법이었던 능력을 당대의 혈교주, 혈우성이 무공으로 승화하면서 만들어낸 힘이다.

그 힘은 여느 보검이나 무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준!

끼이익.

문이 좌우로 열렸다.

나는 혈교주를 상대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어떤 기습이라도 대응하기 위해-

"...어?"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어머. 잘생겼네."

내 방문을 연 현경 고수는...여자였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여자'.

* * *

무림맹은 추색살을 무림 전역에 퍼뜨려놓았다.

물론 이들은 일류 이하-그러니까 시정잡배라고 할 수 있는 색마들을 제압하라고 배치한 셈이지 탈흑쌍마같은 자들을 잡기 위한 건 아니다.

신속한 보고.

각 추색살 지부에서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튀어나오면 바로 무림맹에 보고가 들어가도록 체계가 잘 갖춰져있다.

그리고 이들은 비단 '색마'만을 대상으로 정보를 수합하지 않는다.

강호에 크나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자들.

그들을 상대로도 어느정도 정보를 수합하고 있고, 때마침 무림맹은 엄청난 첩보를 입수하고 말았다.

하남성에서 안휘로 향하는 방향의 객잔.

"......."

한 명의 사내가 소면 한 그릇과 죽엽청 한 병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흑의에 색을 맞춘 검은 죽립의 중년 사내는 묵묵히 배를 채우고 있었다.

단지 그의 곁에 수많은 무사들이 칼을 겨누지만 않았다면, 더할 나위없이 평화로운 식사였을 것이다.

뚜벅, 뚜벅.

무사들의 가운데, 한 남자가 나타났다. 객잔 안에 있던 자들은 모조리 사태를 파악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림맹주, 독고자영!

그는 흑의인의 앞에 아무 말 없이 착석했다. 흑의인은 소면을 먹다가 슬쩍 무림맹주를 보고는 손을 들었다.

"이보시오, 점소이."

"네, 네!"

직업 의식 때문일까, 아니면 무림맹 사람들이 지켜줄 거라는 믿음 때문일까? 점소이는 자신을 부른 흑의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죽엽청 한 병 더. 그리고 잔 하나 더 주시오."

"필요없소."

무림맹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문을 방해했다. 흑의인은 뚱한 얼굴로 죽엽청을 한 잔 말끔히 비웠다.

"섭섭하군."

"중원에는 무슨 일이지?"

"일이 있어야 꼭 나오나? 여행 중이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해남에 있던 자가 갑자기 안휘에서 나타났는데, 그게 여행이라고?"

"이런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조용히 다니던 것 뿐이오."

"그런 자가 하남 근처에서 이렇게 기를 뿌리고 다니나?"

"그저 내 물건들을 노리던 자들을 쓰러뜨린 것일 뿐."

흑의인은 무림맹주와 무림맹 무사들을 앞에 두고도 당당했다.

"그거 아시오? 식사 중에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거."

"그런 예의를 차릴만한 존재는 아니니까."

"쯧. 아쉽군. 같은 처지에 놓일 사람끼리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것을."

흑의인은 죽립을 벗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썹, 그리고 핏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혈교주…!"

"호오. 남궁 부총관아닌가. ...지금은 총관이랬나? 오랜만이오, 가주. 여동생은 잘 지내시오?"

"닥쳐라, 미치광이!"

"사람을 대놓고 모욕하다니, 유감이군. 무림맹은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와서 사람을 겁박하는게 전통인가?"

스륵.

혈교주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나갑시다. 괜히 객잔에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소."

"네놈이 이곳에 들어온 것 자체가 피해인 것을 모르느냐!"

"조용히 밥만 먹고 나가려는 사람을 굳이 식탁 옆까지 와서 칼을 겨눈 놈들이 이상한 거지. 이거 엄연한 영업방해요."

"닥쳐라, 이 놈!"

"남궁세가는 꼭 말문이 막히면 입닥치라고 하더군."

"이 놈이!!"

총관이 검을 출수하며 앞으로 날렸다. 번개가 번뜩이듯 빠른 검기는 제왕검형을 담고 있었다.

"흥."

하지만 혈교주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검을 막았다. 혈교주의 손은 핏빛처럼 물들어있었고, 혈교주는 총관의 칼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공격을 막았다.

"여전하군. 어깨부터 베려고 하는 습관은."

"혈영귀수(血影鬼手)!"

"조심해라! 저것이 다 강기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호신혈강(護身血罡)이라고 하는 건데…."

혈교주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른 중원인들과는 달리,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듯한 짧은 머리칼이 달빛에 반짝였다.

"가급적이면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는데 소용없겠군."

"헛소리마라. 일부러 내 이목을 끌려고 이곳에서 시위를 벌인 걸 누가 모르는 줄 아느냐?"

"...흐, 역시 똑똑하셔."

혈교주는 입꼬리를 비틀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내가 왜 네 이목을 끌려고 했을까?"

"그건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겠지. 모두 들으시오! 이 자를 절대 살려보내선 아니되오!"

독고자영의 사자후에 무인들은 하나 둘 내기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대화를 들을 생각도 없는 건가? 낭만이 없군."

"강호의 낭만을 죽인 장본인이 할 소리는 아니지!"

"인정하오. 하지만 썩 나쁘지는 않더군. 무와 협이 가득하던 세상...비록 고리타분했지만 그것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었어."

스륵.

혈교주는 양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그의 양손 사이에 핏빛의 칼날이 길게 만들어졌다.

중원의 것과는 다른, 조금 특이한 칼날이었다.

"삼척서천, 산하동색(三尺誓天, 山河動色)."

"큭?! 모두 숙여!!!"

"일휘소탕(一揮掃蕩)."

혈교주는 어깨 너머로 넘긴 핏빛의 검을 수평으로 그었다.

"혈염산하(血染山河)."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객잔이 반으로 갈라졌다. 무인들은 굳은 얼굴로 머리 위를 스친 검기에 사색이 되었다.

맹주의 지시가 조금만 늦었어도, 분명 목이 달아났으리라.

"이건...도대체?"

"그냥 수평베기다."

"방금 그건…?"

"존경하는 분의 말씀이지."

혈교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동시에.

스르르.

객잔 전체가 갸우뚱 거리며 기울기 시작했다. 혈교주는 수염을 쓸며 천장을 가리켰다.

"안 피했으면 안 무너졌을텐데."

타-앗!

혈교주는 천장을 뚫고 날아올랐다.

"전원-쫓아라!!"

무림맹주의 사자후와 함께, 무림맹 무사들이 일제히 혈교주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 *

"안녕하세요?"

나의 예상과 달리, 눈앞에 나타난 여인은 흑발의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검은 외투. 하얀 웃옷. 의상의 형태를 비유하자면, 월녀복과도 같은 형태-

"으음…. 역시 '나'야. 선구안 확실하네."

여인은 붉은 입술을 할짝이며 조용히 웃었다.

"항상 궁금했어요. 도대체 '미래의 나'는 뭐에 그렇게 홀려서 추하고 못생긴 남자를 선택했을까. 도대체 왜…."

스르륵.

여인이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자, 그녀의 머리칼이 핏빛처럼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자신이 아니라, 죽어가던 걸 강제로 숨을 붙여놓고 데리고 다니던 혈강시를 위해 사용한 걸까."

"!!"

가슴이 철렁내려앉았다.

"얼굴보니까 알겠네요. 우리, 초면이라고 해야하나요. 아니면 구면이라고 해야하나요?"

"......소예?"

"흐흥, 목소리도 합격."

혈교주는 혈교주가 왔다. ...소공녀 시절의 혈소예가.

"만나서 반가워요, 혈마."

...미래의 혈교주가 될 여자.

"우선 내 남편 될 자격 있는지, 무공부터 확인해볼까요?"

저벅.

"저는 금소예라고 한답니다?"

"...김소예 아닌가?"

"어머."

금소예, 아니 김소예는 방긋 웃으며 손에서 붉은 칼날을 만들어냈다.

"숨길 생각 없어서 좋네요. 중원 천하에 유일하게 과거로 돌아온 남자를 찾느라 진짜 애먹었는데...진작 만났으면 그 개고생을 안 해도...후훗."

김소예는 칼을 빙글 돌리며 내게 겨눴다.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비천색마? 혈마? 아니면 미래의 혈교주가 부르던대로...."

김소예는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씩 웃었다.

"오빠?"

"......."

너무나도 치사한, 사술의 울림에 나는 영혼이 구속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품후기]

사술(진)

아래는 일러 썰

지금은 김소예 양입니다.

혈교 교주 혈소예 님은 현재 제작 중입니다.

너무 예뻐서 저만 볼 거예요

하하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