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372화 (37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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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유월

팽유월과 부부의 시간을 가진 뒤.

나는 곤히 잠든 팽유월을 뒤로 한 채 다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후우…."

팽유월을 또다시 임신시키겠다는 나의 의지가 너무 강했던 걸까?

"...안 빠지네."

머리칼의 색이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눈썹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이래서야 전생의 혈마랑 다를 게 없는데."

붉은 머리에 붉은 눈.

그냥 적발도 아니고 핏빛처럼 붉은 선혈의 색이라 더 눈에 띈다.

'누가봐도 사파 고수처럼 보이니.'

머리 색이 이상한 자, 십중팔구는 무공을 익힌 자 이리니.

그중에서도 사파의 고수로 생각하기 쉽다.

특히 머리색이 붉은색이나 회색, 백발의 경우라면 천 명 중의 한 명 빼고 죄다 사파의 고수다.

독고연처럼 선녀화와 천년자패의 영향으로 백발에 살짝 자색의 기운이 있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검은 머리 갈색 눈동자가 아닌 사람은 색목인이거나 무림인이다.

중원에 색목인이 나타날 경우가 거의 없으니, 무림인임을 숨길 수 없을 터.

특히 붉은 머리는 자고로 혈교의, 혈마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천마가 금발 적안이라면, 혈마는 적발 적안. 머리칼의 검은 색소가 전부 빠져나가고 피가 그 자리를 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가는 동안 안 빠지면 조금 난감한데."

이 꼴로 어딜 진가장을 돌아다닌단 말인가?

호북으로 돌아가면 천가장이 아닌 진가장으로 돌아가려고 했더니, 꼼짝없이 천가장에 틀어박히게 생겼다.

'용봉지회 준비하려면 검각의 도움이 꼭 필요한데.'

다음 용봉지회는 호북이 아닌 하북에서 시작한다.

용봉지회에 천무명이 참가하는 만큼, 천무명에게도 그럴싸한 뒷배가 필요하다.

'왕소현이 천무명의 배경에 대해 지지해주면 큰 힘이 될 거다.'

검각은 천무명의 배경이 되어줄 수 있는 힘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

'검각 자체로서도 썩 나쁜 일은 아니야.'

1년 뒤면 지금 왕소현이 집중해서 키우고 있는 제자들이 한창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

때마침 검각에서 제자들을 출전시키기에 딱 좋은 시기이며, 검각의 제자들을 하북팽가로 보내 그곳에 머물게 할 수 있다.

'팽유월과 월아를 지키는 자로서 활용이 가능해.'

즉, 검각의 여제자들을 팽가의 식객 겸 호위로 쓸 수 있다. 그러다가 발깃하면 간식으로 잠깐 취하기도 하고.

'검각 제자들도 제법 맛있어 보이기는 했는데.'

현모양처의 전형답게 검각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미인이었다.

하지만 나도 검각주는 건드렸을 지 몰라도, 검각의 제자들은 건드리기 미안했다.

'내가 결혼할 것도 아닌데 처녀 건드렸다가는 검각 평판이 떨어진다.'

왕소현은 처녀의 가치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그래서 검각의 여인들은 수료까지 처녀를 고스란히 간직했고, 대부분의 현모양처들은 첫날밤에 지아비에게 처녀를 바쳤다.

방중술은 전혀 배우지 못한, 남자의 손길이라고는 첫날밤에 옷을 벗겨주는 지아비의 손길 뿐.

'다들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고...처녀는 무조건이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지만,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색마도 검각은 안 건드려.'

비천색마가 아니라, 다른 색마들의 이야기다.

검각주의 진노를 살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검각의 제자로 들어가면 다들 수료하기 전까지는 건드리지 말자는 암묵적인 규율이 있었다.

'비천색마가 검각을 건드렸다고 하면 평판과 여론이 땅에 떨어진다.'

이미 바닥을 치고 있는 민심이지만, 그것이 거꾸로 튀어올라 비천색마를 찌르는 창이 될 수도 있는 셈.

'진가장에 먹을게 널렸는데 굳이 검각 꼬꼬마들 먹을 필요는 없지.'

그리고 진가장에 포진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굳이 검각의 제자들을 상대로 힘들게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주공! 제자를 범할 거라면 저를!!

...제자를 위해 대신 헌신하는 스승이 있는데, 굳이 욕을 먹어가며 제자를 건드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도 아쉬운 여자가 있다면-

'한 명 되게 괜찮은 녀석이 있기는 했는데.'

검각의 제자들 중 가장 남자답게 생긴 여자. 미청년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정도였다.

'근데 그런 놈이랑 하면 뭔가 남색인 것 같잖아.'

머리를 어깨에 닿지 않을 정도로 짧게 자른 여자다. 심지어 생긴 것도 남자처럼 생겼으니, 아기색마도 그걸 볼 때마다 흥이 식을 정도였다.

-여자가 단발인데 예쁘면 그건 진짜 예쁜 거지.

혈소예는 말했다.

-단발이 어울린다는 건 기본적으로 얼굴이 받쳐준다는 얘기거든. 근데 그거 알아? 단발이 예쁜 여자는 무슨 머리를 해도 예쁘다는 거. …...아니, 대머리는 머리가 없는 거잖아. 그냥 예쁜 여자가 하는 단발이 예쁜 거라고. 알겠어? 이렇게.

'혈교주, 역시 당신이 옳소.'

단발인 여자와도 하고 싶다. 중원 여인들은 하나같이 죄다 장발이라, 머리를 짧게 자른 여인들과 할 때 어깨와 목덜미가 전부 드러나는 걸 자주 보지 못해 아쉬웠다.

그런 욕구가 어느정도 살짝 있었지만, 그래도 검각의 제자들은 건드리는 게 아니다. 차라리 고관대작의 여식을 건드리고 말지.

'지금 보면 조금 다르겠지만.'

두근, 두근.

팽유월의 안에 사정하면서 다행히 성적 욕구는 가라앉았다.

한 번 세우면 만족할 때까지 싸지 않고는 가라앉지 않는 만큼, 팽유월은 진짜로 임신한 것 마냥 배가 살짝 부풀 때까지 내 씨를 받아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기가 남아있는 것은 사실.

'진정해라. 이미 하북팽가에 피를 뿌리지 않았느냐.'

팽유월에게 씨를 뿌렸다. 과연 이 씨가 제대로 싹을 틔울지, 아니면 나중에 또다시 씨를 뿌려야 할지는 염마와 빙마의 경우처럼 미지수.

'시기는 애매한데...뭐 생기면 운명인 거지.'

둘째가 생기든 어떻든, 월아를 통해 하북팽가에 뿌려진 나의 피는 이제 대대로 전해지리라.

설령 팽유월이 가주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월아라면 충분히 팽가 최강의 무인이 될 수 있다.

'무인이 아니어도 월아는 대성할 거다.'

악기를 다루면 천하제일악사가 될 것이고, 검각의 제자가 되면 누구보다도 예절바른 현모양처가 될 것이고, 그러면 누군가의 아내로서-

"......크흠."

갑자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뺨을 스스로 때리는 것으로 내 잡념을 날려버렸다.

'머리나 생각해.'

혈마의 기운을 과연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이래도 안 빠지네."

내공을 최대한 사용하며 호북으로 달려도 머리칼은 여전히 붉었다.

'시간이 더 늘어나는 건가?'

아무래도 지난 번 복호보살과의 전투 이후, 소예신공을 해제하고 난 뒤의 부작용이 발현되는 시간이 길어진 듯 하다.

약에도 내성이라는 것이 생기듯, 소예신공으로 성욕을 억누르는 것도 점차 내성이 생기는 걸지도 모른다.

만약 소예신공이 강제로 풀리게 된다면….

"...어후, 무섭군."

분명 성욕에 미쳐서 천하 곳곳에 피를 뿌리고 다니리라.

구파일방과 팔대세가에서 내 자식들이 하나씩은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안 될 건 없는데…."

다음 용봉지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사실상 그곳이 대륙 전체에 내 피를 뿌릴 절호의 기회다.

용봉지회란 원래 수많은 젊은 남녀가 눈맞으러 가는 곳!

'천무명으로 이름을 날리고 오는 여자 다 취한다.'

범하는 것이 아니다. 화간이다.

천무명의 얼굴과 몸, 그리고 무공 실력이라면 누구나 마음과 몸과 입과 다리를 열 것이다.

천무명은 여러 여인들을 상대로 육체적 관계를 맺으며 상당히 문란한 모습을 보이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진중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

그 차이가 비로소 중원 여인들에게 크게 먹힐 것이다. 일단 얼굴과 몸이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도록 만들어놓았으니, 열에 아홉은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할 게 엄청 많군."

그걸 위해서 나는 정말로 중요한 한 가지 일을 잘 마무리해야한다.

류서시의 일? 아직도 숨겨진 몇몇 보검? 영약? 아니다.

생사결.

나는 다음 용봉지회가 오기 전에 한 명의 남자와 싸우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그 때부터 나는 그를 '혈마'로서 상대하기로 크게 마음먹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혈마의 전력이 아니면 이길 수 없는 상대다. 나의 전생 업보와도 관련이 있는만큼, 나는 꼭 그로부터 승리를 따내야만 했다.

"......정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강호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하는 건지."

나는 그저 내 여인들과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며 자식을 키우는 재미로 살아가고 싶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마교 대공자의 위협.

혈교주의 광기.

그리고 미래 혈교주-혈소예의 혈겁.

세 가지를 막지 못한다면 나는 내 여인들과 아이들을 피로 물든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도록 만들 것이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행복한 천가장과 진가장의 미래를 위하여.'

거창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매일 매일 주지육림 즐기는 게 최고지."

나의 꿈.

그것은 바로 기둥서방이다.

천하제일에 세상을 구했는데,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색마지만!

* * *

그 시각.

하북팽가의 가주, 팽도황은 잘벼려진 도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용봉지회라."

팽도황도 한 때, 젊은 팽이왕 시절에는 구룡 중 한 명이었다.

구파일방과 팔대세가의 장문인이나 가주 정도 되면 다들 과거에 구룡육봉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팽도황은 그중에서도 도로 으뜸이 되는 남자였다. 하북팽가는 도를 사용하는 이들의 자존심과도 같았고, 팽도황은 도가의 으뜸으로서 몹시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의 구룡은 어떠한가!

도객이 한 명도 없다!

죄다 검객 뿐. 특이한 병기를 쓰는 이들이 두세명 있었지만, 그들은 도를 쓰지 않았다.

구룡육봉으로 넓히면 도객은 단 한 명.

연희봉 모용란!

지금은 비록 소식이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녀는 현재 도객들의 유일한 희망과도 같은 여성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유월이가 등장한다면?"

팽도황의 머리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팽유월.

과연 유부녀도 용봉지회에 나설 수 있을까? 육봉에 이르기 전까지 그녀가 듣게 될 모욕이나 성희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리라.

"팽유월은 무조건 나간다."

가주의 지시가 아니다. 본인의 선택이다.

팽유월은 이미 팽가의 소가주였고, 팽가의 방계 사람들은 팽도황에 의해 서열이 정리되었다.

단순 무공만 따져봐도 팽유월을 이길 자가 아무도 없었다.

가문에 젊은 후기지수가 마땅찮은 것에 팽가의 몰락처럼 느껴져 조금 슬펐지만, 외부에서 영입한 무사들이 우수한 실력을 뽐내는 것이 나름의 흥복이었다.

팽가의 중흥을 위해, 팽유월이 나서서 도객들의 희망이 된다.

'남자 놈들은 죄다 글러먹었어.'

남녀에 대한 차별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현세대의 무인들은 여성 후기지수들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만약 구룡육봉이 아니라 남녀의 구분이 없었다면, 천하제일룡인 남궁패는 5~6위 선으로 밀려났을 것이다.

"진짜 희안하게 여자들만 재능이 넘치는 세대가 되었군."

팽도황이 한창 현역일 때는 주변에 남정네들밖에 없었다.

함께 여행을 하면 대부분 남자들 뿐이었고, 함께 천하를 협행하며 강호의 어둠에 맞서 싸웠다.

그 때도 아주 즐겁게-

"......."

팽도황은 슬며시 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하북팽가에 펼쳐진 진법-비천색마가 깔아주고 간 진법이다-은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어디에 나타났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침입자는 팽도황을 찾으러왔다.

"누구냐."

"오랜만이군, 팽 형."

"......너, 너는…?!"

흑의인은 검은 갓을 벗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십년만이군. 십상련을 무너뜨리던 그 날 이후 처음인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한 가지 물어보도록 하지."

철컥.

팽도황은 남자를 향해 도를 뽑아들었다. 도신에 맺힌 강기는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베어버릴 것처럼 서슬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누구를 찾아왔느냐. 유월이냐, 아니면 신혜냐? 어느쪽이든 해코지를 하려고 한다면, 내가 목숨을 걸고 막을 것이다."

"둘 다 아니오. 팽신혜 쪽은...내 사과하리다."

"......사과는 받아들이겠다. 신혜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 허나, 신혜를 다시 데려가겠다고 한다면-"

"그런 일 없으니 걱정마시오. 교인들에게 하북팽가는 결코 건드리지 말라고 엄명을 내려놓았으니."

"......."

팽도황은 슬며시 도를 내려놓았다.

"그럼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지? 네가 나를 찾을 이유가 없는데."

"팽유월의 남편, 비천색마를 찾고 있소."

"!!"

팽도황은 정신이 확 트였다. 남자의 붉은 눈동자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는 사실을 말했으니까. 찔러보는 말이 아니라,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온 남자였다.

"어떻게 알고 있지?"

"본인이 알려줬으니까."

"...그가 너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글쎄. 장인?"

"......."

팽도황은 도를 순간 떨어뜨릴 뻔 했다.

"혹시나 비천색마가 온다면 전해주시오."

남자, 혈교주는 너무나도 진지한 목소리로 전언을 남겼다.

"혈귀의 주인이 비천색마를 포착했으니, 또다시 금제를 해제하지 말라고."

"혈귀의 주인...?"

"그렇게 말하면 바로 알아들을 것이오."

혈교주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걸리면 평생을 잡혀살아야 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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