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370화 (370/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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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유월

비색선녀들을 취하기에 앞서, 나는 독고연에게 엄포를 놓은 대로 호북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 하하하, 인형을 사가다니. 누구에게 주려고? ...딸? 딸이 있소? 나보다 어려보이는데?

- 형장이 많이 나이들어보이는 건 아니고?

- 뭐? 야, 내가 올해 스무셋인데-

가는 길에 월아에게 줄 선물도 좀 사고, 나의 선녀를 위한 물건도 조금 준비했다.

가문에 방문하는 건 당연히 월담. 마침 월궁 항아와 그 딸은 손을 잡고 천천히 장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아빠!"

월아는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걸어와 다리에 붙었다. 다소 뒤뚱거리는 했지만, 벌써부터 걷는 솜씨가 커서 보법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할 것 같았다.

"오랜만이구나."

나는 월아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약속대로 왔지? 이번에는 열 밤 지나가기 전에 왔단다."

"응!"

호북과 하북을 오가는 기준은 이제 월아에게 맞춰져있었다. 비록 일곱 밤 이하로는 힘들지 몰라도, 월아는 열 밤 까지는 참아줄 수 있었다.

'이게 조기교육이지.'

뛰어다닐 정도로 활기찬 아이가 열 밤을 헤아릴 줄 안다? 보법의 천재가 아니라 학사로 키워야 하는 게 아닐까?

"월아."

월아의 엄마, 팽유월은 엄한 눈초리로 월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빠 멀리서 오셔서 피곤하셔. 내려와."

"시러!"

월아는 어미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눈에 쌍심지를 켜는 팽유월도 놀라웠지만, 며칠 만에 만났는데도 나를 반기는 월아의 마음에 조금 놀랍기도 했다.

'천마대팔식으로 하늘을 달려온 보람이 있군.'

전속력으로 달려오느라 내공의 3할이 줄었지만, 이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면 내공 따위 아깝지 않다. 어차피 이곳에서 채울 수 있으니까!

"...너."

"괜찮아, 괜찮다. 천하제일이 이 정도로 피곤할 리가 없지 않느냐."

"그치만 상공."

"오히려 너희를 보니 피로가 날아가는구나. 아니, 채워지는 느낌이야. 하하하."

팽유월을 보자마자 하북까지 달려온 피로가 씻은 듯이 내려가고, 월아를 보자마자 체력이 다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랑 놀면 피곤하지 않냐고? 천만에.

"하아암...."

월아는 내 품에 안기기만 하면 잠들었다. 나는 월아를 토닥이며 팽유월과 함께 가문 내의 장원을 걸었다.

...조금은 아쉽게도 월아는 내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예전에 한 번 팽유월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둘이서 있고 싶었으나, 월아는 귀신같이 다른 이의 품인 걸 알아채고 통곡하듯 울어버렸다.

"요즘 빠져나오기 힘들지 않으세요?"

"그럴 리가. 다들 내가 밖에 나가면 색마짓하는 줄 알고 있다니까. 하북에 다녀오는 것도 모르고."

"중간에 오다니면서 일각 정도 색마짓 하기는 하시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그보다 유월아. 내가 말이다...."

나는 지난 날 내가 겪은 일들을 시시콜콜 모두 팽유월에게 말했다.

천가장의 부엌이 터지는 일상부터 시작하여 누군가의 무공이 더욱 강해진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기본이었고, 팽유월은 내 이야기에 웃거나 황당해하고, 때로는 질투를 보이기도 했다.

"강호의 미녀들은 전부 다 취하시네요."

"제일 먼저 취한 미녀가 너인 것에 정말 감사하고 있단다."

"......그래서 동정은 누구?"

"흠흠."

동정은 비밀. 팽유월에게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 팽유월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수 있을만한 화제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니, 지난 열흘 사이에 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 건 단연 두 악동이었다.

"비색선녀요?"

"그래. 독고연과 제갈선이 자청선녀와 금환선녀라는 이름으로 색마들을 제압하고 다니더구나."

정체불명의 2인조? 팽유월의 앞에서 비밀은 두 개 밖에 없다. 팽유월은 하북에 있으면서 천가장과 진가장의 숟가락 갯수까지 알고 있다. 내가 다 얘기해주니까.

"살짝 떠보기는 했는데, 둘 다 색마에게 겁간당하기를 바라는 눈치야."

"...그걸 좋아한다니, 걔들도 참."

팽유월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입꼬리를 비튼게 나를 향한 불만인 것 같았다.

"당하기 전까지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운데."

"크흠. 그것 참...미안하군."

"괜찮아요. 그게 다 월아를 만나기까지의 성장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팽유월의 첫경험은 내게 겁간을 당했다. 그것도 뒤통수를 얻어맞고 형틀에 묶인 다음 교배천근추로 박혔으니, 여러모로 첫경험이 다사다난 했다.

"그래도 너는 꽤 좋아하지 않았나?"

"상공 덕분에 좋아진 거지, 누가 그걸 처음 당할 때 좋아하겠어요?"

두근.

"너도 참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구나."

"그저 본심을 말할 뿐이에요. 그 아이들도 상공이 해주니까 좋은 거지, 상공이 아닌 자에게 진짜로 겁간당하는 거였으면 색마의 목을 자르거나 자진하려고 했을 걸요."

"...그런 건가."

유설라나 왕소현 같은 경우를 주로 생각하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상식이 뒤틀린 듯 했다.

"당장 상공이 범한 중원의 여인만 세 자리 정도 되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

살을 섞은 사람의 수만 따져도 바로 세 자리는 훌쩍 넘겠지만, '범한 사람'의 수도 상당히 많으리라. 해남에서만 서른 명 넘게 채운 적이 있기도 하니, 직접 헤아리지는 않았지만 세 자리는 훌쩍 넘어갈 것이다.

혈마 시절을 포함하면...아마 네 자리는 거뜬히?

'이번에는 양보다 질이다.'

100명의 여자를 취해도 한 명의 여자를 취한 것만 못하다. 100명의 여자를 100일동안 한 명씩 취하며 갈아치우는 것보다, 1명의 선녀를 100일동안 함께 뒹구는 것이 더 좋더라.

'바로 팽유월처럼.'

아무리 강호에 아름다운 여인이 많다고 한들, 팽유월만큼 아이를 낳게 하고 싶은 여인은 또 없다.

"유월아."

"네."

"둘째 생각...혹시 있나?"

"......."

팽유월은 가만히 멈췄다. 나는 왠지 모르게 팽유월을 직접 눈으로 마주하기 껄끄러웠다.

"언제요?"

"언제든지."

내 말에 팽유월은 제법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고, 팽유월은 옅게 웃기만 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둘째를 가지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해주실 건가요?"

"물론."

팽유월이 바란다면 응당 그럴 수밖에.

"팽도황과 잘 이야기를 하면 너를 진가장으로 출가시키는 방법도 있겠지. 그곳이라면...팽가보다 더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둘째를 낳기에도 환경적으로 나쁘지 않고."

"후훗, 둘째를 명목으로 저를 팽가에서 꺼내려고 유혹하시는 거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

빙마와 염마를 진가장으로 들인 순간부터, 나는 나의 여인이 내 눈밖에 있는 것에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탈흑쌍마를 상대하고 나니 걱정이 되더구나. 아무리 팽도황이 반로환동을 하며 강해졌다고 한들, 네가 네 한 몸 충분히 건사할 수 있다고 한들, 혹시나 현경 급의 미친 놈이 팽가를 습격하면 어쩌나하고 말이야."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걱정은 접어두셔도 돼요. 지금으로부터 최소 1년간...하북은 안전하니까."

"왜?"

"천무명 공자가 명성을 쌓을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팽유월은 편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나는 편지의 발신처에 한 번 놀라고, 내용에 한 번 더 놀랐다.

"이게 설마...."

"네. 이번에는 하북이에요."

용봉지회.

"...허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아닐 수 없다.

"노린 건가?"

"글쎄요. 호북에서 하남으로, 그리고 하북으로 이어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 같기도 해요. 어쩌면 노린 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팽유월은 싱글벙글 웃으며 건물 한켠을 가리켰다. 기존의 집을 개조한 곳과 달리,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짓는 작은 건물은 서너명이 살기에 딱 좋은 구조와 크기였다.

"이곳은 뭐지?"

"의붕 어르신을 모실 객식입니다. 뭐...의붕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월아 아버님이 기거하실 곳이니까요."

"......하, 하하."

팽유월은 벌써부터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아니, 하북팽가 자체가 하북에서 열릴 큰 사건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후의 용봉지회.

미래에는 평화로운 중원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비무대회로, 용봉지회가 흐지부지 끝나는 것을 계기로 중원은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다.

'정마대전이 시작된다.'

무림맹주 독고자영, 독살(毒殺).

무림맹주의 죽음을 시작으로 구파일방, 팔대세가 등 중원 수많은 문파들의 장문인이나 장로, 원로들이 몰살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죽어나갔다.

바로 대공자 주지에 의해.

"...무림맹도 주시하고 있겠지만, 마교도 눈독을 들이겠군."

"네.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예요. 물론...팽가는 괜찮아요. 상공께서 주신 팽가의 유실된 비급들, 모두 아버님이 정제해서 무사들을 키우고 있으니까요."

나는 팽가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무당파에 태극혜검을 찾아준 것처럼 하북팽가의 무공들을 복구했고, 하북 일대에 이름난 낭인들이나 무사들을 찾아 하북팽가에서 영입하도록 만들었다.

못해도 현재 하북팽가는 팔대세가 중 3위권 정도는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리라.

"나는 하북팽가의 식객으로 있으면 되겠군."

"네. 제 이기심이기도 하지만...다른 분들은 각자 자기 문파나 세가에서 객잔을 잡을 거잖아요? 하지만 천무명 공자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죠."

팽유월은 빈 집을 등지며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했다.

"이곳이 공자님을 위한 곳이랍니다."

"천유일룡(天唯一龍).... 좀 그렇지 않나?"

"왜요? 좋기만 한데. 괜히 복잡한 별호보다는 확실하게 이목을 끄는 이명이 중요하다고요."

팽유월. 그녀는 확실히 하북팽가의 사람이었다.

"구룡 중 으뜸, 아니 무림 최고의 무사 정도가 되어야...하북팽가의 금지옥엽을 데려가실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다.

용봉지회에서 우승하는 날.

나는 천무명으로서 즉시 팽유월에게 구혼할 것이다.

"상공. 그러면-"

"하아아암…. 아빠…."

"......."

***

속았다.

인간이 휴식을 취하는 것은 그 뒤에 더 활발하게 움직이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함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빠아-!"

"월아 어딨지??"

"여!"

"여기있네!!"

아, 아하하, 하하하하하.

"상공이 오셔서 그런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즐거워하는 것 같네요."

월아를 내게 맡긴 팽유월은 차를 홀짝이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월아와 방 안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대략 한 시진 가량 서로 찾고 숨고 하기를 반복했다.

"아이고, 자네 왔나. 흐흐, 월아야. 할배랑 산책 갈까?"

"할배! 조아!"

팽도황의 구원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녹초가 되었을 것이다. 월아는 열흘 동안 나와 보지 못했던 순간을 압축하여 즐기겠다는 듯 행복하게 놀았다.

"미안하다, 유월아."

"뭐가 미안하신데요?"

"그냥, 모든게."

육아라는 것이 물론 중원 무림의 상식에 따르면 여인의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내 성리학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육아는 공동으로 해야 아이의 발달과 정서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괜찮아요. 이렇게 가끔 와주셔서 얼굴 비쳐주고 가시는 것 만으로도 제게는 큰 도움이 된답니다."

가끔. 말에 뼈가 있다.

"그런데 상공, 슬슬 시간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끙."

시간은 어느덧 늦은 밤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미리 예정된 시각보다 이미 충분히 늦었고, 지금 떠나지 않으면 분명 천가장의 여인들은 의심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뭘하고 왔길래 이렇게 늦은 것이냐.

외박은 보통 안하지 않느냐.

갈 때는 그냥 산책 나간다고 하지 않았느냐.

"상공."

팽유월은 나를 자신의 가슴에 끌어안았다.

"상공은 너무 걱정이 많으세요. 그냥 편안하게 생각하세요. 의심한다고 한들 어쩌겠어요? 남자가 바깥일을 좀 한다는데 늦을 수 있지."

"...그거 보통 나같은 사람이 변명할 때 하는 말 아닌가?"

"상공은 그래도 돼요. 후후."

팽유월은 내 외투를 단단히 여몄다. 손가락 끝에는 미련이라고는 전혀 없어보였다.

"안녕히가세요, 상공."

"......조만간 또 오마."

나는 팽유월과 손을 맞잡아 인사한 뒤, 바로 팽가를 떠났다. 마침 팽가 입구로 무림맹의 무사들이 하나 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총관도 왔군.'

현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무림맹의 총관으로 올라간 자. 분명 용봉지회의 운영을 위해 팽가의 도움을 얻고자 팽가에 왔으리라.

'저 놈만 아니었어도.'

무림맹에서 오는 손님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몰래 도망나오는 일은 없었을텐데.

"젠장.... 저 놈들만 없었으면-"

앗.

* * *

쪼르르르.

무림맹의 사람들이 나가고 난 뒤.

팽유월은 달빛을 벗삼아 술을 들이켰다. 잔도 없이 술병째로 들이마셨다.

이미 바닥에는 술병이 여럿 나뒹굴고 있었다. 술이 제법 강한 팽가의 여인 답게, 수 병을 마셔도 그리 심하게 취해보이지는 않았다.

"...후우."

딸은 옆방에서 자고 있다. 애초에 이 방은 그녀의 방이 아니다. 아이가 자는 방에서 술을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마실만큼 그녀는 막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술 맛...별로네."

팽유월은 탁자에 엎드렸다. 의자를 뒤로 쭉 빼는 바람에 가슴은 아래로 툭 떨어졌고, 팽유월은 술잔의 끝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이번에는 몇 밤 자면 오시려나...."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다니. 유감이군."

코를 찌르는 육향. 팽유월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과 함께, 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술병을 흔들었다.

"무림맹 놈들 갔다. 생각해보니 아빠 노릇은 조금이라도 하고 간 듯 한데, 남편 노릇은 못 하고 간 것 같아서."

"......하."

팽유월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남자를 향해 한 마디 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 월아 자요."

남자의 말대로, 부부의 시간을 가질 때가 되었을 뿐이다.

[작품후기]

잠깐 팽유월 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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