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352화 (35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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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자를 위하여

원래는 사랑의 도피만 할 계획이었다.

누구나 젊을 때 한 번 쯤은 일탈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고, 천무명이나 유설라나 20대 인생을 즐기는 신세대가 아니겠는가?

문파를 등지고 사랑을 위해 도망치는 일은 예상외로 허다하다. 그리고 문파마다 이런 이들을 추격하는 이들도 많다.

문파에 사랑이 아니더라도 온갖 이유로 도망가는 자들이 많을텐데, 당연히 추적대가 있기 마련.

행여나 무공 비급이라도 가지고 도망간다면 어찌하겠는가? 쫓아가야지.

그래서 우리는 도망쳤다. 추적대가 우리를 쫓을 수 있도록 일부러 동선을 꼬며, 사천의 지리를 모르는 것마냥 움직였다.

아미파의 추적대가 우리를 뒤쫓을 수 있게.

과연 유설라와 천무명같은 이들이 한 두명 있었을까? 사랑 때문에 문파를 등지고 도망치는 행위들, 분명 다들 암암리에 몰래 저지르고 그랬으리라.

아미파 추적대의 추적을 뿌리치고 사천에서 도망친다.

이 얼마나 짜릿한 그림인가!

문제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첩보를 입수했다는 것.

- 아니, 탈흑쌍마가 온다고? 그 개변태 화경 영감탱이들이?

대공자 주지가 분명 사천에 색마들을 보낼 것으로 예상은 했는데, 설마 화경 고수 둘을 보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탈흑색마.

합공을 펼치면 현경 한 명을 상대로도 능히 상대해낸다는 초고수들을 동원했다는 소식에 나는 바로 전략을 수정했다.

-화경 고수 둘의 포위망까지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초절정 두 명이 화경 고수 둘을 뚫었다는 건 말이 안 돼.

- 그럼 어떻게 하시겠어요? 검담을 부를까요? 와라, 검담---! 앞에 계시네요.

- 그것도 좋지만, 검담과 천무명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지 않느냐. ...사천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사천당가를 끌어들인다.

- 서희야. 쌍마를 제압한 업적을 당가에 주마.

- 어머, 저 지금 젖을 것 같아요.

이미 당문은 백도와 흑도 사이에 발을 양쪽으로 걸치고 있는 입장이었고, 당서희는 사천당문이 마교의 두 마인을 상대하는 것에 크게 기뻐했다.

-당가가 앞장서서 마교인을 상대하니, 사천 사람들은 당가가 마교의 분파라니 그런 소리는 못할 거예요!

구파일방과 무림맹의 일원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마교에 투신하기에는 사천당가라는 이름이 너무 아쉽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유설라와 사랑의 도피 계획을 세우며, 여기에 당서희를 끌어들였다.

색마들을 상대로 위협받는 젊은 남녀!

젊은 남녀를 향해 군침을 뚝뚝 흘리는 색마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여고수!

심지어 당가의 금지옥엽...까지는 아니더라도 당가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미인!

“근데 이게 어디서 과거의 인연 설정까지 집어넣어?”

“아, 죄송, 죄송해요...히힛.”

당서희는 내게 볼이 쥐어뜯기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내가 너랑 처음 만난게 은자 몇 냥 쥐여주고 하룻밤 산 거였는데,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차, 창녀 서희는 그래도 당가의 서희는 그럴 수 있잖아요. 남들은 다 신분을 갈아치우는데, 저도 과거랑은 이제 안녕하고 새신분으로 천무명 공자를...히힛.”

“비극적인 여인을 꾸미기에는 참으로 좋겠네요.”

오죽하면 설라까지 서희에게 핀잔을 줄 정도였다.

“과거에 만난 적이 있다는 설정은 제 것이었는데.”

“설라는 비교적 최근이고, 저는 완전 어렸을 때 아니에요? 후후, 서로 꼬꼬마 시절의 약속을 잊지 않고 만남을 학수고대하며-”

“응, 하오문 특급기녀.”

“......당가 안에서는 만날 수 없었으니까, 하오문의 기녀가 되어서라도 만나고자 했다고 대충 약 팔면 되는 거예요. 어차피 과거 따위보다 선남선녀의 만남, 그리고 삼각관계가 더 중요하니까!”

그렇다.

당서희는 우리가 설정한 기존 작전에 더불어, 천무명과 유설라의 사이에 끼어들어 삼각관계를 형성해버렸다.

- 뭐야, 뭐야. 빙백봉 정인이 우리네 아가씨랑 예전에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 ......드디어 당서희 출가시키는 건가?

당가의 식솔들은 당서희를 가문 밖으로 치워버리는 것에 환호했다.

방계의 여인, 더러운 과거, 그리고 당가의 무공도 아닌 사술에 가깝지만 하필 화경의 고수.

당가의 가주 자리를 물려받기에는 여러모로 하자가 많은데다가, 병약하여 일류 고수도 되지 않는다고 한들 ‘적자’를 제치고 가주가 되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 아파서 언제 가버릴지 모르는 당건면보다 건강한 당서희가 훨씬 가주 자리에 적합하지! 화경 아닌가!

- 근데 쟤는 맨날 가버리잖아.

- 좋아 죽어도 죽지는 않으니까 괜찮지 않나? 그냥 가주 자리만 차지하고, 나머지 실권은 우리가 챙기는 거로....

차기 가주 자리를 병약한 당건면이 이어받는 것에 알음알음 내부에서 이런 저런 소리가 나오던 와중이었다.

그러던 찰나에 당서희가 한 남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다...?

“당서희라는 불안정한 요소를 당가에서 치워버릴 절호의 기회! 천무명 공자, 저를 책임져주세요!”

“책임이야 언제든지 지고 있지만, 일에도 순서가 있는 법. 진가장의 첫 번째 부인은....”

팽유월.

"저기...주군?"

아차. 말 실수를 할 뻔.

“...아직 미정. 좋다, 기회는 주도록 하지.”

“중려신화저어어어엉!!”

화르르륵!

당서희는 중려신화정을 전력으로 일으키며 가버렸다. 본인도 당가 안에서 나름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을테니, 당가를 나와 내 품으로 들어오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리라.

“진가장으로 가면 드디어 주군과 주기적으로 교접할 수 있는 기회가!”

“너, 나랑 결혼하는 목적이 자지 때문이냐?”

“그럼요.”

너무나도 당당한 말에 유설라마저 입을 쩍 벌리며 놀랐다. 당서희는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뒤, 내 고간에 얼굴을 문질렀다.

“저는 주군이 어느날 갑자기 크게 다치셔서 사지를 잃더라도 여기만 살아있으면 평생 충성을 바치겠어요.”

“내가 누구처럼 일촌남근이 되면?”

“...어, 음, 충성심과 쾌감은 비례한다고 해야하나? 일촌이 되어도 이전처럼 쾌감만 주신다면...? 주군이라면 그것도 가능하실 것 같기도...히힛.”

“얼씨구.”

참으로 당서희다운 말이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상당히 건방진 발언이었지만, 당서희는 당서희대로 색다른 맛이 있었다.

“괜찮아요. 주군의 물건은 제가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몸을 바쳐서 지킬테니까. 죽으면 저 찹찹 못하잖아요.”

‘맵다.’

이게 사천의 맛인가. 역시 마인다운 발언과 마인다운 행동이었다.

“어휴.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네가 혼인을 원한다고 해서, 어디 인륜지대사가 쉽더냐? 가문의 허락을 받아야지.”

“제가 사천당가고 사천당가가 전데, 감히 누가 제 말을 무시해요? 주군, 내기 하나 하실래요?”

“무슨 내기?”

“설라는 잠시 여기 두고 가주님이랑 잠깐 독대하고 와주세요. 가주님이 주군, 천 공자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시니까.”

“......서희, 가주라면 당오독을 말하는 거지?”

“네. 왜요?”

“아무것도 아니다.”

혈마강림으로 기감이 조금 높아져서 그런가? 당가 안에 또다른 괴물이 숨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주도 아니면 도대체 누구지?’

아기색마가 조금도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최소한 여자는 아닌데, 은밀한 곳에서 나를 쳐다보는 초고수의 기운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적은 아니니까 딱히 상관은 없지만.’

시선에는 나에 대한 적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적의보다는 경계심이 더 커보였다.

천무명이라는 존재에 대해 과연 믿을만 한가.

“그럼 잠시 다녀오마. 그런데 서희. 가주님 말이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대충 장인어른 같은 느낌으로 대하고 오면 되는 건가?”

중려신화저어어엉.

서희는 말만으로 가버렸다.

* * *

“결혼은 언제 할 건가?”

“.......”

만나자마자.

나는 대뜸 물어오는 당오독을 앞에 두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혼인이라고 하면....”

“물론 빙백봉과의 혼인 이야기일세.”

“......설라와는 아직 혼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로 결혼하자고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나는 허리를 바로 세우며 당당히 선언했다.

“사천에서의 일이 잘 마무리되면, 결혼하자고 고백할 겁니다.”

“으하하하하!!”

당오독은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다.

“보통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은 죄다 안 좋은 미래를 겪던데, 그대는 그럴 일이 없어보이는구만!”

“칭찬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당오독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나 또한 그의 기세에 맞상대하기 위해 기를 끌어올렸다.

그의 경지는 이제 초절정. 천무명으로서의 나와 거의 맞상대가 가능한 수준. 비무를 한다면 분명 종이 한 장 차이로 승패가 갈릴 정도.

“실례지만 말하겠네. 자네, 혹시 한 명 더 들일 생각은 없나?”

“.......”

이게 본론인 건가. 나는 당오독이 보이지 않게 중려신화정을 일으켰다.

화륵, 화륵, 화화륵. 아주 짧게 여러번 몰아치며 불꽃이 틱틱거리듯 타오르게.

“그 말씀은....”

“솔직히 얘기하겠네. 서희를 데려가게.”

“.......”

아아, 이것이 사천당가의 기문진식인가. 나는 아미파에 다녀오는 동안 당서희가 펼쳐둔 당가의 함정에 점차 발밑에서부터 잠식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천은 위험한 곳이야. 자네가 정말로 빙백봉을 아낀다고 한다면, 그에 걸맞는 호위가 필요할테지. 자네도 알다시피, 당장은 쌍마가 사천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야 합니다만....”

“그리고 아미파의 이야기도 들었네. 아미파를 상대로 여인을 납치해 도망간 혈기는 인정하지만, 역시 아미파와 척을 지는 건 부담이 크지. 그러니까 당가가 그대를 돕겠네.”

“........”

뱀덫이다.

독이 바짝 오른 뱀이 아래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 발목부터 칭칭 휘감아 올라오고 있었다. 위로는 전신을 마비시키는 안개가 흘러와 내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막았다.

이미 내가 당서희를 끌어들인 순간부터, 당서희는 모든 함정을 준비해뒀다.

결혼이라는 덫을!

“저는....”

“자네, 그 말을 알고 있는가?”

“무슨...?”

“자고로.”

목소리를 낮게 깔며 조용히 입을 연 그는-

“영웅은 삼처사첩일세."

나는 당오독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

* * *

아미파에서는 급히 무사를 파견했다.

장문인이 직접 장로들을 이끌고 아미산을 내려와 유설라와 천무명의 도주로를 추격했다.

"성도로 향했다고 합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들은 어느 동굴 속에 틀어박혀 젖은 옷을 말리며 애틋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사천의 지리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급히 지도를 구하고 다니더군요."

"다른 문파에 의탁할 것 같지는 않았으나,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은 확인하더군요. 그게...호남이었나? 에잉, 난 또 지난번에 주문하고 간 가발을 찾는 줄 알았더니...."

"응? 왔었지. 마차를 빌리려고 하다가 누가 '빙백봉이다!'하고 소리를 지르길래 돈만 남기고 떠났소. ...혹시 마차를 빌리게 되면 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알았소."

곳곳에 들어온 목격정보에 따르면, 그들은 사천의 험한 산세를 맨몸으로 넘어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기나긴 추격전에 대비하여 물자를 비축하는 것도 모자라 마차까지 빌리고 변장을 시도하는 등 그들의 움직임은 용의주도했다.

"음...."

성도에 있는 아미파 임시 분타에 거점을 둔 류서시는 고뇌에 빠졌다.

유설라. 빙마.

천무명. 색마.

"......."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는 가운데, 그녀의 머릿속에 상념이 들게 하는 것이 생겨났다.

- 당장 가서 검을 휘두르자, 후배여!

"...하아."

류서시는 머릿속을 향해 손을 지긋이 누르며 중얼거렸다.

"꿈인 줄 알았는데."

- 꿈이라니! 후배여, 나는 아미파의 시조와도 같은 자. 나에 대한 공경심을 보이거라!

"...제 몸을 빼앗아 패배한 것도 모자라, 색마에게 범해지게 놔둔 분 말씀이십니까?"

- 크흠!

영(靈)은 헛기침으로 답을 얼버무렸고, 류서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복호보살.

아미산의 지박령으로 아미파 내에서는 전설로만 내려오던 그녀가 류서시에게 깃들었다.

- 자, 가자! 당장 가서 그 색마 놈에게 복수를 하는 거다!

"복수가 아니라 한 번 더 범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 아니야!

복호보살은 빽 소리를 질렀지만 류서시는 믿지 않았다.

- 내, 내가 왜 그놈에게 범해지기를 바란단 말이더냐!

"한 번 맛보면 계속 먹어보고 싶어지는 맛이죠."

- 그건 그렇...에, 에잇! 네게 힘을 빌려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게 복호대라검을 가르쳐줄테니, 그놈을 복호대라검으로 꺾는 것이다!

"...하아."

류서시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후배에게 검을 가르쳐 이기게 만들겠다?"

-물론! 이대로는 억울해서 성불하지 못하겠다! 본녀의 복호대라검이 패배하다니, 이는 아미의 수치!

"...범해지는 건 제가 되도 괜찮지요?"

-.......

-그, 반반으로…?

자고로 몸에 좋은 건 나눠먹으라고 하였으니.

"...좋습니다. 어디...현경의 무공, 배워보도록하죠."

멀리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류서시는 몸을 일으켰다.

"색마는 이 멸색사태 류서시가 제압하겠습니다. 설령 다시 한 번 색마에게 범해진다고 해도...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할짝.

"저는 색마에게 범해지면 범해질수록 강해지는 여자니까요."

류서시는 입맛을 다시며 문을 나섰다.

"9:1"

6:4!!

지분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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