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여자를 위하여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천무명과 유설라는 사라졌다.
"어, 어떻게 그런 속도를...!"
류서시를 비롯한 아미파의 모든 이들이 넋을 잃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와도 검을 휘두를 것 같았던 청년은 유설라를 안고 도주했다.
그것도 이른바 호위무사가 아가씨를 안는 듯한 모습으로, 그는 사라진 것이다!
"아...부럽다."
누군가가 흘린 말에 아미파 무사들은 이를 갈았다. 부럽기는 하지만 이는 아미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
아무리 천무명이 초절정 고수라고 한들, 아미파를 면전에서 모욕하고 비무를 방폐하고 도망친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문인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류서시가 검을 아래로 그으며 선언했다.
"지금부터 문파의 체벌을 피해 도주한 빙백봉 유설라, 그리고 그녀를 납치한 천무명을 추격하겠습니다. 정식으로."
"네? 하지만-"
"이대로 저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겁니까? 장로분들은 다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류서시의 말에 모두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멸망사태의 일을 잊었습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있기는 했다. 아미파에는 장로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져 남자를 쫓아 문파를 떠났다가 실종된 여인이 있었다.
- 공자, 밤의 동굴은 춥습니다. 어서 이리로 오셔요.
- 크흠, 그럴 수 없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곳에서-
- 이런 곳이니까요. 지금 여기...아무도 못 봐요.
쿵떡 쿵떡 쿵 떠러덕 떡!
눈만 맞아도 정분이 나는게 무림 강호의 일상이다. 그런데 서로 마음이 확실하게 통하는 이들이 손을 잡고 도망친다?
어디 손만 잡겠는가? 손이 깍지를 끼고 서로 몸을 붙이며 입술도 붙이고 음양합일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장문인."
성난 류서시의 앞에 장로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과거의 잘못을 생각해보자면, 저들의 도피를 조금이나마 허락해줘도 되지 않겠습니까?"
"천하에 막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젊은 시절의 사랑이겠지요."
"지금의 경험이 다 훗날 자신을 참선하고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너무...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장로들은 하나 둘 유설라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다소 어이는 없었지만, 모두들 사랑의 도피를 저지른 두 남녀에 대해 약간이나마 손을 들어주고자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저도 저들의 관계를 인정해주고 싶습니다. 벌이라고 해봐야 장문인의 훈계 정도로 끝내고 싶은 생각도 있구요. 허나!"
류서시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장로들의 앞에 폭탄선언을 남겼다.
"삼존녀께서 아미파 젊은 여인들의 머리를 발모한 이유가 있습니다! 현재 사천에는 어떤 늙은 마인들이 몰래 들어왔다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류서시는 몰랐다. 폐관수련이라는 명목으로 참회동에서 나오고 나니, 삼존녀가 반로환동 사태를 겪으며 사천에 드리운 그림자에 대해 그제서야 밝혔기 때문이다.
"탈흑쌍마(奪黑雙魔)!"
"히이익!"
별호만으로도 몇몇 제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사천에는 쌍마가 숨어있다고 합니다. 그들...머리 긴 여인들을 노려 머리를 잘라가는 변태같은 족속들이 지금 사천에 있단 말입니다!"
"왜,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분명...둘이서 현경 한 명의 힘을 낼 수 있다는 악인들이 아닙니까!"
"...이보세요, 2장로."
류서시는 울분을 가득담아 주먹을 움켜쥐며, 삼존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
"본인도 오늘 새벽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삼존녀.
그들은 쌍마에 대한 소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 * *
"형님. 아무래도 대공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백발이 지긋한 노인이 흑발의 중년 사내에게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당연히 노인 쪽이 많아보였으나, 실제로는 중년 사내가 노인의 형이었다.
"낙장불입일세."
중년 사내는 수염을 손가락으로 정돈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어. 우리의 손녀가 대공자를 선택했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손녀가 선택했다고 해도.... 그 아이, 솔직히 남자 보는 눈은 없지 않습니까?"
"크흠. 그래도 동생, 그 아이가 '할아버지, 제발요!'하면서 부탁하는 걸 거절할 수 있나?"
"...끄응. 난감하군요. 이거 소공녀에게 너무 큰 선물을 받았건만."
사내와 노인, 탈흑쌍마라고 악명이 자자한 두 마인은 동시에 턱수염을 쓸었다. 둘의 턱수염은 색이 다를 지언정, 둘 다 기름을 먹인 것처럼 여인네의 머리칼보다 훨씬 찰랑거렸다.
미염신공.
비록 천마신공을 익힌 십마 출신의 마인은 아니지만, 은퇴십마로부터 알음알음 퍼져나간 미염신공은 마교의 공용 무공이 되었다. 천마도 딱히 미염신공의 전파를 막지 않았고, 마교인들은 마공보다 우선 미염신공부터 배웠다.
대세는 대공자라고는 하지만, 마교의 일부 밑바닥 민심은 또 다른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만약 두 남자의 손녀가 대공자의 새로운 십마에 발탁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대공자의 편보다 중립에 섰을 것이다.
"...쯧, 손녀가 십마 하고 싶다는데 어쩔 수 없지."
"슬슬 때가 된 듯 하오. ...마침 저기 전령이 오는구만."
두 마인은 마기를 뿜어내며 전령을 맞이했다. 흑의인은 쌍마의 앞에 부복하며 아미파의 상황을 알렸다.
"호오. 그러니까 천가의 젊은 놈이 빙마를 납치했다?"
"...빙마라. 형님, 우리 딱 마지막으로 담그는 건 어떻습니까?"
"빙마를?"
두 남자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그러지. 어디 십마가 마인들에게 따먹힌다고 천마께서 뭐라 하실 것도 아니고."
"약육강식 아니겠습니까. 흐흐흐."
두 마인은 남쪽을 향해 내달렸다.
* * *
"크하하! 짜릿하구나! 이건 진짜 할 때마다 기분이 짜릿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여자를 납치한다!
색마가 하는 짓이지만, 그걸 천무명으로서 하니 짜릿함이 배가 된다.
지금까진 나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여인을 수도 없이 납치했다. 청성파의 여제자로 변장한 이시아를 납치했고, 하남 무림맹에서는 독고연을 납치했다.
물론 후자는 남들의 눈을 피해 납치했지만, 전자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이게 중독될 만큼 기분이 좋았다.
황당함, 분노, 허탈함 등이 담겨있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남자들의 눈에는 대부분 순간적으로나마 그런 기운이 담겨있었다.
"설라야, 봤느냐? 다들 너랑 나랑 그렇고 그런 짓 할까봐 아주 눈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거!"
"네, 봤어요. 이걸로 다들...유설라가 누구를 좋아하는 지 알게되겠죠."
내게 안긴 유설라는 내 목에 팔을 건 채 고개를 묻었다. 남들의 앞에서는 백발벽안이었던 그녀는 지금 적안을 반짝이고 있었다.
"주군, 그런데 너무 약한 모습 보이신 거 아니에요?"
"뭐가?"
"삼존녀를 상대할 때요. 아무리 천무명이라고 해도, 삼존녀 정도는 이길 수 있잖아요."
유설라의 말대로 나는, 천무명은 삼존녀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연사태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로환동을 해서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초절정은 초절정. 손대중을 하기에는 은근히 강하긴 하더구나. 확실히 셋이서 화경급 전력을 낸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야."
삼존녀가 셋이 함께 묶이는 이유는 그들이 만드는 진법에 의의가 있다.
"실제로 너와 서희도 제법 고전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고전하지는 않았어요."
"흐흐, 내가 복호보살 다 먹어치울 때까지 싸운 게 고전한 거다."
나는 비록 직접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유설라는 삼존녀와의 비무에서 깨달음을 얻어 화경에 이르렀다. 화경으로 이르는 시간이 제법 길었지만, 덕분에 나도 마음 편히 복호보살을 채음할 수 있었다.
"천무명이 삼존녀 중 한 명에게 패배한 이유는 하나다. 도망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얻기 위함이지."
"...아. 그렇네요. 이겨버리면 또 이겨야 하고, 계속 싸우다보면 아미파를 봉문시키겠네요."
"그래. 그리고...다른 이유가 두 가지 있다."
"두 개나요?"
내가 유설라가 오는 때에 맞춰 곧장 도주를 선택했던 이유.
"하나는 류서시 때문이다."
"언...니요?"
"그래. 네 언니. 그녀가 아주 네게 깊게 질투하고 있더구나. 흐흐흐."
"......하긴, 저도 반대 입장이었으면 확실히 그럴 것 같아요."
유설라는 순식간에 류서시의 질투를 이해했다.
"거기서 삼존녀를 이겼으면 언니가 검을 들고 나섰을 거예요."
"그래. 진심을 담아서 나를 검으로 후두려팼을 것이다. 색마의 본색을 드러내면 막을 수도 있지만...그건 피해야지."
여자의 질투가 담긴 검은 무섭다. 경파만월이라고, 천하에 대한 여인의 질투와 증오가 담긴 검이 얼마나 무섭던가!
"그리고 또다른 이유가 있는데."
"뭔데요?"
"...머리가 너무 반짝거렸어."
"풉!"
유설라는 내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몸을 벌벌 떨었다.
"너, 너무 하신 거 아니세요?"
"농담하는 거 아니다. 나 진짜 싸우다가 못볼 것 같아서 눈 감고 싸우려고 했다니까? 젠장, 중간에 나도 모르게 검을 휘둘러서 두건을 날려버리는 바람에...에휴."
새삼스럽지만 대공자 주지의 계략이 얼마나 치밀하고 악독한가 깨닫게 되었다.
"설라,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문파가 어딘지 아느냐?"
"대화의 흐름을 생각하면...숭산?"
"그래. 소림이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반짝이니까.
"이게 나름 진정하려고 해도 쉽게 진정할 수가 없구나. 특히 남자가 아니라 여인이 반짝거리니까...정말 등에 오한이 날 정도야."
태양빛이 검에 반짝이는 것 뿐만 아니라 머리에도 반짝이면서 그게 검신에 반사되는데, 내가 어찌 정면으로 눈을 뜰 수 있으랴!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했거늘, 머리를 밀어버려 자신의 두피를 공격수단으로 삼는 자들은 정말이지 지독하고 상대하기 까다롭기 그지없다.
"생각해보면 머리 벗겨진 놈들이 죄다 강하단 말이야."
"네?"
"...크흠. 그냥 머릿속에 생각나는 자가 있어서."
소림 최강의 무승이라거나, 가발이 금빛으로 변하는 존재라거나, 앞의 두 사람을 언급하면서 자기도 아래가 대머리니까 대머리가 기본적으로 강한 존재라는 건 귀납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말하는 혈소예라거나-
"만약에 말이에요."
설라는 자신의 백발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제가 천마신공의 부작용으로 머리가 빠지게 된다면, 그 때도 저를 이렇게 챙겨주실 건가요?"
"의미없는 질문이군."
진실로 의미없는 질문이었다.
"바라는 대답을 해주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내 품에 안을 것이다. 단순히 내 여자라면 조금 멀리 두겠지만...내 아내라면 고작 머리카락 따위야 아무래도 좋을 뿐."
"...정말 바라는 대답을 골라 해주시네요. 그래서 속마음은요?"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가정하는 건 의미가 없지."
나는 유설라의 이마에 가볍게 이마를 맞대었다. 서로의 머리카칼을 비비며 눈을 마주했고, 살살 눈웃음을 치며 웃었다.
"내가 이시아와 천마를 꼬신 결정적인 계기가 뭔지 잊었나?"
"...그거 농담 아니었어요?"
"설마 농담일까봐. 내가 대공자와 척을 질 생각을 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방법이 그건데."
발모제.
"네가 머리가 벗겨지면 내가 전력을 다해서 다시 머리를 심어주도록 하마."
"...그럼 벗겨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해야겠네요.
나는 유설라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성도(成都).
사천성의 중심이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곳에는 '그 자'들이 있다.
"지금부터는 미안하지만 걸어가야겠다. ...아니, 겠소."
"후훗, 벌써 시작인가요? 알겠어요, 천 공자. 그럼...사랑의 도피, 잘 이끌어주세요."
"아아."
나는 유설라의 손을 꾹 잡고 당당히 대로로 합류해, 사람들의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어디로?
정처없이.
"꺄아악! 누, 누구-"
"빙백봉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자아, 오너라.'
네가 놓친 빙마가 정체불명의 남정네 손에 잡혀 성도 일대를 달리고 있지 않느냐?
'안 나오면 어떻게 되는 지 알지?'
천무명이 유설라를 취할 것이다.
그리고.
유설라의 북해빙궁은 비천색마의 것이 되리라.
"유설라의 북해빙궁...."
"...공자, 의미심장하게 그렇게 제 하단전을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시면 오해하거든요?"
"오해 아닌데."
"........"
유설라의 북해빙궁은 이제 공식적으로 천무명의 것이 될 것이리라.
그리고 잠시 후.
우리가 성도의 북문을 빠져나와 산길을 지나가기 무섭게-
"기다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강해보이는 노인 둘이 나와 유설라의 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