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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자를 위하여
무림인들은 누구나 문파를 떠나 강호를 주유하는 꿈을 꾼다.
때로는 의협심 강한 동료와 함께 강호의 악적들을 물리치는 낭만을 구가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이성과 사랑에 빠지는 꿈을 꾼다.
한 문파에서 오랜 기간동안 수련한 사람일수록 강호의 천하를 보고자 하는 욕구는 강하다!
그리고 나는 아미파의 마음에 낭만이라는 불을 질렀다.
젊은 청년이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아미파에 쳐들어왔다!
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짓인가!
이 얼마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행위인가!
남자들이라면 어리석다고 하면서도 응원할 것이며, 여인들이라면 무모하다면서도 질투할 것이다.
왜?
-저 미남이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자기가 그 대상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기 마련!'
내 주변을 가득 채운 사람 중 2할 가량은 유설라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내가 자신을 구하러 온 것처럼 침을 꿀꺽 삼키며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즉, 바닥부터 서서히 여론을 내쪽으로 끌어당긴다. 밑바닥에서부터 나에 대한 동정과 부러움을 끌어모아 상황을 역전시킨다.
백도 무림은 자신이 악(惡)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악은 누구인가?
무모하게 자신의 여인을 구하러 온 남자인가, 아니면 남자의 정인을 가두고 여인으로서의 미모를 지워버리려는 거대 문파인가?
이거, 우리가 나쁜 거 아니냐?
'라고 생각들 하고 계시군.'
- 상공, 그럴 때는 그냥 가만히 계셔요. 더 말할 필요 없이 상대가 먼저 말하도록 유도하는 거예요.
- 남자는 말없이 묵직해야한다.
천무명의 행동원리는 팽가의 호협스러움에 근간을 두고있다. 따라서 나는 팽가 부녀의 제안에 따라, 마치 없는 검을 들고 당장이라도 베어버릴 기세로 아미파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유설라를 내놓으라고 연신 말하는 것은 경박해보인다. 그렇다고 여기서 더 강하게 나가는 것도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그저 한 마디.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 뿐이오. 설라를 만나게 해주시오."
"아...."
여인이 가진 동정심을 자극하는 남자의 진심! 아미파라는 거대 문파를 상대로 홀로 들어올 자신감은 있지만,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한없이 약한 남자!
"왜 설라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역시...설라를 가두었기에?"
"네, 네 이놈!"
그리고 동시에 무모한 남자.
'구파일방을 악으로 보이게 해선 안 되지.'
어디까지나 '오해'로 빚어진 사태로 만들기 위해선 다소 과장이 필요하다. 즉, 내가 실수를 저질러서 틈을 보일 필요가 있다. 지금 당장은 내가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통해 아미파와 완전히 척을 지는 걸 막을 수 있다.
- 젊은 이가 흥분하여 냉철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군.
- 천무명이 그런 짓을 했다고? 허어, 사랑은 그 자도 눈이 멀게 하는 건가....
- 호호호, 젊은 시절의 상공을 보는 것 같군요. 무례하기야 하지만....
젊을 때 객기를 부리지 않으면, 또 언제 이러겠는가!
"아아, 그렇군! 아미파는 설마 설라가 문파 밖에서 무공을 익힌 여인이라고 텃세를 부리는 것인가!!"
"오만방자하구나!!"
나를 향한 호의를 가진 사람 중 일부가 적의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대부분 적반하장으로 진짜 유설라의 위치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일 터.
"보자보자하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야!"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되는 것이 아니다!"
"아미파가 그리도 옹졸하고 치졸한 문파로 보이더냐!"
다들 나를 향해 말로써 매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명백히 선을 넘었고, 그들은 나의 호기와 객기를 '건방짐'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 정도 오해는 해야 서로 얼굴 붉히며 싸우지.'
나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입꼬리를 비틀며 좌중을 훑었다.
"그렇다면 설라를 만나게만 해주시오. 만나서 얼굴이라도 보게 해준다면, 오늘의 무례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겠소."
"그, 그건...."
장로들은 당황했다. 어찌 유설라를 만나게 해줄 수 있겠는가?
지금 아미산에 없는데! 그렇다고 유설라를 다시 잡으러 산 아래로 사람을 보낼 것인가?
'어쩔테냐, 아미파.'
유설라는 아미파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누구도 유설라를 찾지 못했기에 나의 요구에 대해 애매모호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누구 하나 책임을 질 생각을 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할 대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공자는."
장문인, 멸색사태 류서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설라를 구하러 왔다. 그것이 아미파에 정면으로 검을 겨누는 행위인 걸 알고 있느냐?"
"물론!"
"그대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나?"
"물론 후회하고 있소. 내가 지금 미친 짓을 벌이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고. 하지만 설령 후회한다고 하더라도...나는 설라와 함께 후회하겠소!"
"그런가...."
류서시는 한숨과 함께 손을 들었다. 나이는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어려보였지만, 장문인의 도포를 입고 내력을 끌어올리니 장로들과 제자들은 모두 침묵했다.
'내공 한 번 더럽게 빨리 회복하는군.'
복호보살의 내공을 채음하며 류서시의 내공도 빼앗았을텐데, 어느새 그녀는 내공을 온전히 회복했다.
"그대의 혈기는 이해하나, 이는 아미파의 권위에 대한 도전. 한 명의 여인으로서는 그대의 젊음을 응원하지만, 나는 아미파의 장문인으로서 그대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네."
"......."
아.
뭔가 등골이 서늘하다.
"아미파의 법도과 규율, 그리고 그대와 설라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이지. 여봐라, 천 공자의 검을 돌려주거라!"
"장문인?!"
'친구, 왜 이래?'
나는 류서시를 향해 의문을 담은 눈빛을 보냈으나, 류서시는 오히려 더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무림인이면 무림인답게 무공으로 해결해야지."
앗.
'좆됐다.'
"공자는 무공에 자신이 있어보이는데, 좋소. 아미파에서 빙백봉을 취하고자 한다면, 우리 아미파를 상대로 이겨보시오."
나는 간과했다.
류서시가 나와 색으로 맺어진 친구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나부터 상대할까?"
또 한 명의, 나이 어린 여인을 상대로 질투심을 가질 수 있는 한 명의 여인이라는 것을.
'너 진짜 이러기야?'
류서시는 유설라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젠장.
* * *
천무명에 대해 누가 무림인의 선배로서 '가르침'을 줄 것인가!
아미파 내부에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았다.
- 천무명,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초절정이라고 하더군.
- 그럼 장로들이 나섰다가 괜히 지는 거 아닌가?
- 그렇다고 제자들을 내세우기에는 질 게 뻔한 것 같고....
아미파는 천무명을 상대로 무조건 승리해야한다. 나도 아미파를 상대로 이길 생각은 없었다.
당돌하게 나선 놈이 아미파를 상대로 이기는 게 아니라, 선배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다.
'류서시 나오는 줄 알고 식겁했잖아.'
나는 비무장 한 가운데 선 채, 멀찍이 나를 노려보는 류서시를 향해 눈짓으로 인사했다.
"...흥."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내 인사를 피했고, 대신 나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나선 무인을 향해 격려했다.
"선배님, 부탁드립니다."
"오호호, 강호의 도리를 위해서 이 몸이 나서야겠군.... 후후."
아연 사태!
삼존녀의 한 명이자 반로환동을 하게 된 젊은 미녀 비구니. 무공의 수위는 대략 초절정.
"본녀의 소청검법을 상대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거라, 아이야."
아이라니. 어젯밤 자신을 반로환동 시켜준 색마가 누군지 알기나 할까?
하지만 나는 지금 천무명이다. 아기색마는 지금 소예신공의 힘으로 봉인되어 있고, 절찬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선배님을 상대로 이기면 설라를 볼 수 있는 겁니까?"
"호호호, 선배를 이길 생각부터 하다니. 맹랑하구나! 선수는 양보할테니 어서 오너라."
"그럼...!"
나는 바로 기수식을 취했다.
"희아연월검."
"호오, 그것이...."
이미 천무명에 대한 정보는 아미파 모두가 알고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아앗!"
나는 기합과 함께 앞으로 내달려 검을 대충 찔러넣었다.
"아름다운 검법이구나...!"
아연 사태는 검을 빙글 돌리며 내 공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검에 힘을 대충 실었으니, 당연히 쉽게 막혔다.
"하지만 본녀의 소청검법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하다!"
아연 사태는 검을 움켜쥔 손을 빙글 돌리며 검을 움켜쥔 손을 노렸다. 나는 빠르게 검을 회수하며 검을 튕겨냈다.
"호호호! 본녀의 검을 받아보아라!"
아미의 검은 빠르다. 그리고 아미의 무사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삼존녀 중 한 명인 아연 사태의 검도 몹시 빨랐다.
그러나 류서시 수준인가? 아니다. 복호보살 수준인가? 아니다.
사천에서 무공의 수위로 줄을 세우면 20명 안에 들어갈 수준의 무공으로 대단하지만, 사천제일을 논하자면 당연히 손에도 꼽히지 않을 검이다.
강한 건 분명하지만, 그녀의 검 실력은 딱 천무명 수준이었다.
초절정.
분명 강한게 분명한데, 화경이나 현경 고수들 앞에서는 청년의 재롱처럼 보일 뿐인 수준.
'더럽게 힘드네.'
"크으윽...!"
나는 아연사태의 공격을 받아내며 전력을 쏟아내 휘둘렀다. 솔직히 말해 마음을 제대로 다잡기 힘들었다.
"호호호! 느리구나,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밤에 올 걸.'
하늘은 청명하고 햇빛은 반짝이며, 아연 사태의 머리도 반짝였다. 중간에 힘조절에 실수하여 머리쪽에 유효타를 넣을 뻔 하는 바람에, 아연 사태의 두건은 바닥에 떨어졌다.
반짝반짝.
"...크흠."
나는 시각을 교란하는 아연 사태의 사술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검을 다시 회수하여 그녀를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희아연월, 서화중려!"
"호오!"
검기에 뜨거운 열기가 깃들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걸 정면을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강하긴 하구나! 하지만!"
카---앙!
"아직 미숙하다!"
"크윽...!"
검신을 때리는 강렬한 검기에 나는 뒤로 크게 물러났다.
'진짜 더럽게 힘드네.'
조금만 실수해도 검강이 튀어나올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
'복호보살이랑 비교하면서 싸우니까 더 힘들어.'
머리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몸은 복호보살의 검기를 떠올리느라 본능이 먼저 움직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내 진면목을 숨기느라 진땀이 나왔다.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은 하나 뿐.
"하아앗…!"
"호호호! 전력이라! 그렇다면 본녀도 전력으로 상대해주마!"
내가 검기를 일으키자, 아연사태도 극강의 초식을 준비했다.
"하압!"
나는 일부러 빗맞혔다. 그리고 틈을 만들었고, 아연사태는 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앗-!"
아연사태가 나를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직전.
"설화난영!"
고운 미성과 함께 한기가 비무장에 내려앉았다. 아연사태의 검을 정면에서 맞받아내며, 힘겹게 한쪽 무릎을 꿇는 백발의 여인은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검세를 막아냈다.
카가강!
"너?!"
카--앙!
아연사태의 일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틈을 보인 나를 지켜준 여인, 빙백봉 유설라는 나를 지키듯 검을 아연사태에게 겨누며 당당히 비무장에 섰다.
"네, 네가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아미산에 숨어있었을 뿐입니다."
"그럴 리가! 아미산을 이잡듯이 뒤졌는데...!"
"목숨을 걸고 숨어있었죠."
당사자가 들키지 않고 숨어있었다고 하는데 누가 더 추궁하겠는가? 유설라는 눈을 가볍게 감았다 뜨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공자...미쳤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짓을!!"
"미친 건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나는 설라의 옆에 검을 들고 섰다.
"가만히 숨어있지 그랬어. 그랬으면 내가 다 알아서 해결했을 건데 말이야."
"공자, 지금 이 상황을 두고도...!"
"설라."
파바밧.
비무장에 수많은 여인들이 검진을 펼치며 우리를 포위했다. 검진의 중앙에는 류서시를 비롯한 아미파 초고수들이 모두 검을 겨누며 우리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았다.
"사랑하는 정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이곳에 들어온 용기는 가상하구나. 하지만 너는 아미파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지?"
"...예, 장문인."
일개 문도가 문파 전체의 권위에 도전했다. 여기서 류서시가 유설라를 가만히 넘어가게 되면 앞으로 제 2, 제 3의 유설라가 범람하게 될 것이다.
"네가 천 공자를 따르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너는 다시는 이곳을 들어올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괜찮겠느냐?"
"각오는 굳혔어요. 저는 아미파의 검사이기 이전에...한 남자의 여자가 되기로."
조금은, 그녀의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졌다. 적어도 이 말만큼은 진심이리라.
'진정해라, 아기색마.'
나는 지금 천무명이다. 아무리 유설라의 말이 기특하고 당장 양물로 칭찬하고 싶다고 해도, 지금은 세워선 안 될 곳이다.
"아미파를 그냥 나가게 할 수는 없다. 최소한 참회동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어요. 천 공자의 복수를 위해, 저는 천 공자와 뜻을 함께 하기로 했으니까! 그 어떤 길이더라도, 저는 이 남자와 평생을 함께 하겠어요!"
기특해서 화가 난다. 어째서 유설라는 이렇게 남근으로 칭찬하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하는 것인가?
'안되겠다.'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36계로 간다. 나는 설라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작전의 변경을 알렸다.
"여기서 있다가는 평생을 아미산에 갇혀 살겠군. 아미파의 장문인이시여! 그리고 여러 선배님들이시여! 불초 소생의 잘못은 추후 반드시 부처님의 앞에서 용서를 빌겠습니다!"
"뭐? 공자!"
나는 설라를 안아들었다. 한손을 그녀의 등허리에 받치고, 다른 손은 그녀의 허벅지를 붙잡으며 내 가슴에 끌어당겼다.
"본인 천무명, 내 여자를 데려가겠소!"
"고, 공자?!"
설라는 붉어진 얼굴로 당황했고, 나는 설라를 안고 바로 앞으로 뛰었다.
"미안합니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신속!
"!!"
가장 포위가 옅었던 곳을 향해 돌진했다. 내 급발진에 미처 대처하지 못하는 두 장로의 사이를 파고든 뒤, 나는 비무장의 담벼락을 향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흐아아앗!"
나는 기합과 함께, 아미파로부터 설라를 납치해 도망쳤다.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시오!!"
바야흐로, 사랑의 도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