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329화 (329/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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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 이야기

"끄으응...."

제갈선은 허리를 펴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무림인이자 작가인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 허리를 가장 중요시 여겼다.

무림인으로서 가진 단단한 육체가 얼마나 좋은가! 아무리 오랫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해도 근육이 살짝 뭉치는 것 이외에는 크게 부담이 없다. 더군다나 내공만 조금 움직여줘도 금방 체력이 회복되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체력이 건강할수록 일도 즐겁게 할 수 있다. 바른 자세와 바른 습관은 백도 무림인으로서 가질 기본 소양이며, 제갈선은 제갈세가의 여식으로서 항상 성실하게 생활해왔다.

"벌써 새벽이네...."

하지만 지금은 제갈선이 아니다. 와백봉도 아니다.

진가장 서고에서 일하는 선화.

가주 진사월과 진짜 주인 천무명의 도움을 받아, 그녀는 낮에 서고에서 일하는 걸로 진가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되었다.

그녀의 일.

단 하나.

서고를 지키는 것.

"그런데 뭐 책도 한 권 없으니 지킬 것도 없고...."

용안을 얻은 뒤로 화장실도 갈 일도 별로 없어졌으니, 사실상 선화는 자신만의 넓은 개인 공간을 받은 셈이었다.

서고지기는 그저 명목상 주어진 이름일 뿐. 밖에 나가고 싶을 때는 서고의 문을 걸어잠그고 정체를 숨긴 채 외출을 다녀오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한다.

사실상 두 개의 작업실을 가지게 된 선화는 낮에는 와백봉이나 다른 이들의 무공에 대해 공부하고, 밤에는 무림인의 우수한 체력을 이용해 느긋하게 글을 썼다.

물론 때로는 밤늦게 갑자기 찾아오는 손님 때문에 곤란해지기도 하지만-

"......."

선화는 책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솔직히 얘기하건데 딱히 곤란하지는 않다.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면 곤란하게 되겠지만, 그가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난 뒤로 그녀의 상상력은 호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 마냥 날아올랐다.

가령, 강호의 유명 세가 금지옥엽에게 불치병을 치료해주겠다면서 색마가 의원으로 변장하여 접근했으나, 여인의 순수한 마음에 서로 사랑을 나눴다는 이야기라거나.

가령, 강호의 유명한 여자 색마가 자신을 범하게 만들었다가 역으로 범하는 이야기라거나.

가령, 소설가 여인이 새로운 이야기를 찾다가 자신의 취향을 제대로 받아주는 편집자를 만나 운명적인 결혼을....

"흠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아, 오셨어요?"

선화는 아무렇지않은 얼굴로 웃으며 방문객을 맞이했다. 여느때처럼 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는 평소와는 다소 다른 분위기였다.

"...술 드셨어요?"

"조금. 하지만 하고 오지는 않았다."

조금 마신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선화는 뒷말을 삼키며 남자를 침대에 앉혔다. 그는 자연스럽게 선화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이고 누웠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썼지?"

"복수물이요."

"복수라...."

남자는 피식 웃으며 선화의 안경을 벗겼다. 남자의 눈동자에는 선화의 금빛 눈동자가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는 사람 이야기를 잠깐 할까 하는데, 그걸 이야기로 남겨주겠나?"

"소재에요?"

"소재라면 소재고. ...그냥, 이런 이야기가 있으면 팔릴 것 같은지 궁금해서."

남자는 뒷말을 흘렸다. 선화는 남자의 앞머리를 단정하게 정돈했고, 긴 앞머리는 남자의 눈을 덮었다.

"그냥 듣고 흘려도 좋다. 이건...그냥 있을 수도 있었던 이야기니까."

"일단 듣고 판단할게요."

"그래...."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쏴아아아.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물에 젖은 나뭇잎은 바닥을 나뒹굴고 비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려 부딪혔다. 도저히 사람이 밖을 돌아다니기에 어려운 날씨였으나, 그 어둠을 뚫고 한 사내가 열심히 땅을 기고 있었다.

"커흑, 허억, 허억...!"

사내는 등이 굽은 채, 등허리에 기나긴 밧줄을 묶고 무거운 바위를 질질 끌고 있었다. 비바람에 전신이 폭삭 젖고 전신이 고통에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사내는 힘으로 바윗덩어리를 질질 끄는 미련한 모습을 보였다.

"끄, 으아악...!"

사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밧줄을 붙잡은 두 손은 이미 밧줄에 쓸려 붉게 부르텄다. 비바람이 워낙 세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에 떨어진 빗방울에 약간의 핏방울이 섞여 떨어졌다.

"조금만...더...!"

사내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기었다. 손으로 밧줄을 잡아당길 수 없다면 몸으로, 발바닥이 터져서 걸을 수 없다면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바위를 옮기고자 했다.

"포기하십시오, 사형."

바위 위에 오른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사형이 이 바위를 옮긴다고 한들, 그런 몸으로 시련을 통과할 수 없을 겁니다."

"시끄럽다...! 다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지!"

"사형...사형의 몸을 보십시오. 이미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습니까. 남은 내공도 없이 체력만으로 옮기는 중입니다. 분명 장로께서는...인정하지 않으실 겁니다."

"크흐, 그래. 자기 시련에서 사람 죽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이거지. 하지만 사제, 나는 말이다...."

사내는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드려 포복하듯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허벅지에 걸린 밧줄 아래 무복이 쓸려 피가 번지기 시작했으나,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뒤져도 시련을 치를 것이다."

오히려, 사내는 사납게 웃고 있었다. 소년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형. 닭이 어찌 하늘을 날 수 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날 수 있지. 스승께서 말씀하셨잖느냐.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하면 이루어진다고...!"

쿵!

사내는 바닥에 엎어지듯 쓰러졌다. 누가 건드린 것도 아니지만, 그는 탈진하듯 바닥에 엎어졌다.

"노력으로도 안 된다면...될 때까지 하면 돼...!"

"......장로님께 보고는 하겠습니다. 장로님께서 오늘까지라고 말씀하셨으니, 최소한 자정 전까지 성공한다면 시련에 참가는 가능할 겁니다."

소년은 사라졌다. 사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흝탕물로 얼굴을 적시며 흐느끼듯 웃었다.

"크흐흐...그래, 자기는 어려서부터 영약 잘 먹고 다녀서 진즉에 옮겨놓았다 이거지...."

사내의 눈앞에 거대한 돌무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 몸보다 더 큰 돌덩이가 돌무덤처럼 쌓여있었다.

"...두고봐라."

사내는 거북이 기어가듯 바위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자정이 되기 일 각 전.

마지막 남은 바위가 돌무덤 위에 안착한 것을 끝으로, 사내는 시련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 * *

번쩍.

사내는 눈을 떴다. 약초향이 짙게 나는 익숙한 천장에 사내는 등허리에 식은 땀이 흘렀다.

"내가...왜...?"

"의식을 잃고 사흘을 쓰러졌다."

의관복을 입은 무인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사내에게 상황을 알렸다.

"너는...이번 시련에 참가할 수 없어."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련에 참가할 수 없다니요? 제 몸 때문입니까? 조금만 쉬면 금방 나을 겁니다! 예, 조금만요!"

"너는 이미 나흘을 내리 쉬었다. 그리고...이미 시련은 끝났어."

"네?"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사내의 눈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일대 제자가 되기 위한 시험을 위해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사형도 아시지 않습니까!!"

"알다마다. 아니까 내가 직접 와서 네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사제, 천하에는 노력만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도 있어."

"사형! 장로님을 뵙게 해주십시오!"

"이미 끝난 시련이다. 네게는 잔혹한 말이지만...2년 뒤를 기약하거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일부러 저를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이 아니었습니까. 장로님의 폐관수련 때문에 시련의 일정을 당긴다? 하! 자기네 제자가 저 때문에 한 명 떨어질까봐 두려웠던 거지요."

"사제!! 말을 삼가하시게!"

사내는 다리를 절며 몸을 일으켰다. 눈에는 독기, 아니 광기가 엿보였다.

"태사부 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곤륜의 정상까지 올라가겠다는 건가? 그 몸으로? 죽을 수 있어!"

"죽더라도...저는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을 꼭 하고 죽겠습니다. 저는...틀리지 않았습니다."

사내의 눈에는 확신이 서려있었다.

* * *

"포기하거라."

여인의 말에 사내는 표정이 굳었다. 뒤에 사내를 붙잡기 위해 급히 달려온 장로들은 굳은 얼굴로 여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너는 이미 근골이 상하여 더이상 무공을 쌓을 수 없다. 칠 장로는 너를 배려하여 시련에 도전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태사부께서는...스승님께서는...."

사내는 부모를 잃은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불초 제자에게...무공을 포기하라고 하신 겁니까?"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

"근골이 망가지기 전이라면 일류를 넘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는 늦었다. 이대로 무공을 익히려고 한들, 너만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이게 다 너를 위한 일임을 왜 모르는 것이냐?"

여인의 단호한 목소리에 사내는 더이상 반론하지 않았다.

"너에게 스승으로서 말하겠다. 무공을 포기하라."

모든 이들이 사내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단 한 명 만큼은 사내를 응원했다.

-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

-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 된다.

-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무공, 비급, 문파에서 서책을 통해 배운 모든 가르침에는 언제나 노력의 중요성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가, 누구보다도 노력하던 자에게 포기를 종용한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어찌 날개가 꺾인 새가 하늘을 날 수 있겠느냐."

"......."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감히 고개를 들고 볼 수조차 없었던 존경하던 태사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너를 특별히 여겨, 네 노력에 대하여 약간의 보답을 하고자 한다. 이곳에서 지내거라."

"무공을 익히지 말고...문파에서 일이나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놈! 감히 무슨 말버릇이냐!"

장로들이 험한 목소리로 사내를 나무랐다.

"장문인께서 기회를 주신 걸 달게 받아들이지 못할지언정!"

"네놈이 밖에 나가는 순간 무공은 폐해야 할 것이며, 그러면 몸은 더욱 망가지게 될 터!"

"전신이 망가진 놈을 허리 굽게라도 걸어다니게 해줬더니, 참으로 배은망덕하구나!!"

장로들의 호통이 사내를 등 뒤에서 쿡쿡 찔렀다. 하지만 사내는 오직 정면을, 여인을 향해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일...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여기서...농사를 짓는 건 어떻겠느냐?"

"농사."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허탈한 목소리에 장로들조차도 흠칫 놀랐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하였느니라. 내 친히 이곳의 땅을 조금이나마 네게 맡기려 하니, 그곳을 개간하고 일용할 양식으로 삼거라. 네가 살 집을 마련하여, 나를-"

"태사부."

사내는 몸을 일으켜세웠다. 감히 태사부의 말을 끊으며 일어나는 행동은 몹시 무례했으나, 누구도 이어진 사내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불초 제자가 마지막 인사를 드리옵니다."

구배지례.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사내는 태사부에게 극진한 예를 보였다. 허리가 굽어 서있는 것조차 불가했던 존재가, 다른 어떤 장로들보다 더 반듯하고 바른 자세로 아홉 번의 절을 올렸다.

"......."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사내는 절을 할 때마다 여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더욱 정갈한 자세로 절을 올렸다.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뼈가 금방이라도 빠질 것처럼 으스러지고, 상처입은 무릎이 흙바닥과 닿아 짖이겨지더라도 사내는 아홉 번의 절을 마쳤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강호 수많은 곳 중, 이 병자를 받아주신 곳은 여기가 처음이었습니다."

감히 누가 제자가 스승에게 인사를 올리는데 막으리오?

"잠시나마 행복한 꿈을 꾸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장문인."

"아."

사내는 몸을 돌렸다.

그래서 마지막 여인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사내는 그저 장로들의 험악한 눈총을 받으며 산을 내려가야했으니까.

절뚝. 절뚝.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사내는 홀로 하산했다.

어디 하나 갈 곳 없이 천하에서 유리되어버린, 하늘 아래 몸 하나 뉘일 곳 없어진 사내는 하늘을 향해 악다구니를 쓰며 울부짖을 뿐이었다.

누구도 듣지 못하는, 한 맺힌 절규를.

* * *

"...아는 사람 이야기 맞아요?"

선화는 중간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위로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냈다.

"어때? 잘 팔릴 것 같으냐?"

"너무 답답하고 안쓰러워서 흥행은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냐."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에이, 됐다. 모처럼 아는 사람 이야기를 꺼내봤는데, 역시 나는 떡이나 치련다."

"저기, 아직 이야기 안 끝났지 않아요?"

"더 듣고 싶나?"

"뭐...아예 흥미가 없다고 하면 그건 또 그런데."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선화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재미 없을 것 같으니까 얘기 안 할란다."

재미가 있을 리가 없다.

이 뒤의 이야기는 천하를 향해 복수하겠다고 다짐한 추악한 마귀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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