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325화 (325/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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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에 현경이 너무 많으니

소리가 줄었다.

어둠속에 홀로 몸을 꽁꽁 숨긴 여인, 청기회주 연사는 어린 시절의 악몽이 떠올라 공포에 질렸다.

몸 하나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작은 방, 항상 숨어 지내야만 했던 자신, 언제나 술에 취해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던 수염 난 남자의 손길.

무인들의 사움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몸을 피했지만, 과거의 악몽으로 인해 점차 호흡은 가빠지기 시작했다.

“......읍.”

하지만 호흡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배의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남자들의 비명과 병장기 소리, 그리고 코를 찌르는 혈향이 느껴질 때마다 숨을 조심스레 내쉴 수밖에 없었다.

쿵!

위에서 큰 충격음이 들렸다. 무언가 찢겨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

옆으로 고개를 돌린 연사는 그만 보고 말았다. 배 옆에 살짝 난 흠 사이로, 핏발선 눈으로 동정호를 향해 거꾸로 떨어지는 흑의인의 무사를.

그는 부릅뜬 눈으로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아닌가? 우연인가?

“히이익...!”

연사는 손으로 입을 부여잡고 숨을 참았다. 방금 전에 마주친 눈이 너무나도 생생히 떠올라 눈을 감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미약한 빛무리가 무언가에 베여 강에 떨어지는 남자의 얼굴로 나타났다.

저벅, 저벅.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연사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죽였다.

저벅, 저벅.

발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연사는 품에서 작은 은장도 하나를 꺼내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펄-럭.

그리고 천막이 걷어지는 순간-

“이야아아--!!”

비명과 함께 냅다 은장도를 앞으로 내질렀다. 하지만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위험하게.”

은장도가 막혔다. 익숙한 목소리에 살짝 눈을 뜨니, 자신과 똑 닮은 여인이 은장도의 칼날을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 공격을 막았다.

“어, 어...?”

“나름 자기 몸 지킬 줄 아는 분이셨네. 다 끝났어요.”

“끝나다니, 무슨...?”

“습격자들은 다 죽였고, 지금 기절한 적 대장을 그쪽 호위무사가 취조중이에요. 하오문주가 조금 크게 다치기는 했는데-”

“네?! 아버지가요?!”

연사는 하오문주의 부상 소식에 기겁을 했다. 그에 오히려 은장도를 붙잡은 여인-연붕이 더 어처구니가 없어보였다.

“아버지?”

“아...양아버지에요.”

연사는 우물쭈물하며 위를 가리켰다. 연붕은 은장도를 회수한 뒤 연사의 손을 잡고 몸을 당겼다.

“그럼 양아버지 붕대 좀 갈아주세요.”

“네, 네!”

연사는 연붕을 따라 갑판으로 올랐다. 비릿한 혈향에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연사는 갑판에 양반다리로 앉아있는 남자를 보고 가슴이 울컥했다.

“문주님!”

“크흐...청기회주. 미안하다, 조금 크게 상처를 입었어.”

“어쩌다가...!”

“뭐, 과거의 복수귀가 덮친 거지. 무림에서 살다보면 다들 이 정도 은원은 쌓고 그러는 거야. 흐흐흐.”

하오문주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팔은 피로 철철 물들어있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크흐, 강소제일권의 이름은 허명이 아니더구나. 놈, 마교의 폭혈까지 익히다보니 조금 방심했어.”

“당장 치료를 해야-”

“그거라면 걱정마세요. 지금 다친 척하면서 당신한테 장난치는 거니까.”

“...네?”

“쯧.”

연붕의 말에 하오문주는 혀를 차며 궁시렁거렸고, 연사는 하오문주의 두 팔에 가득한 핏자국을 가리켰다.

“이건 그러면...습격자의 피?”

“아니, 이건 내 것이 맞다. 피멍도 가짜가 아니고, 팔이 부서진 것도 맞아. 단지....”

“가지고 있던 약이 내상에 좋은 약이어서 말이죠.”

연붕은 품속에 손을 넣어 주머니 하나를 흔들었다. 연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오문주를 흘겼다.

“...돌아가시면 안 돼요.”

“크하하! 누가 죽는다고 그러냐. 네 남편 될 놈이 마실 술에 소금 한 사발 태워 먹이기 전에는 이 흑화랑, 결코 눈을 감을 수 없다! 흐흐.”

흑화랑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 연사야, 걱정마라. 이 정도 상처는 현역 시절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치만....”

“그치만이고 자시고. 이미 상처는 다 나았다. 그러니...청기회주. 걱정은 그만하고 안심하라.”

흑화랑은 하오문주로서 지시를 내렸고, 연사는 고개를 푹 숙이며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이것 참, 실례가 많았소.”

“갑자기 존대?”

“원래 나는 강약약강이라, 나보다 강한 이에게는 깍듯하게 대할 뿐이오. 씁, 그나저나 현경급 고수가 굳이 힘겹게 나와 이런 식으로 접촉을 하다니....”

흑화랑은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뒤에 따로 객잔에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지금은 저 놈에 대한 추궁을 해야하오.”

“물론.”

털썩.

연붕과 하오문주의 사이로 한 남자가 엎어졌다. 밧줄에 전신이 묶인 쾌진난격은 죄인처럼 갑판 위에 무릎을 꿇었다. 저항할 수 있는 힘은 이미 폭혈로 인해 다 소진되었고, 그는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알아냈습니다.”

궁사는 담담한 얼굴로 쾌진난격의 등을 짓밟았다.

“장강선공(船工)회주, 그가 뒷배입니다.”

“...그 놈이?”

장강 일대의 모든 뱃사공들을 아우르는 직책의 하오문 간부. 동정호에 하오문주가 대담을 나누기 위해 배를 띄우는데 도와준 자도 선공회주였다.

“정말 그 뿐이었나?”

“적어도 이 남자의 입에서는 그 이름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흠, 꼬리 자르기인가. 설마 선공회주 따위로 이런 대규모 마인들을 동원할 리가 없으니.”

하오문주는 혀를 차며 쾌진난격의 어깨를 짓밟았다. 고개를 아래로 떨군 그는 입과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말해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마.”

“...키힛, 이미 끝난 목숨이다. 네놈에게 할 말은 없다.”

쾌진난격은 피를 뚝뚝 흘리며 하오문주를 노려봤다.

“내 평생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네놈을 진작에 죽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게 진작 죽이지 그랬나. 지금까지 후회할 거였으면.”

하오문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으로 크게 휘파람을 불었다.

펄럭, 펄럭.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밤하늘을 뚫고 하오문주를 향해 다가왔다. 비둘기는 하오문주의 팔 위에 앉으려다, 잠시 펄럭거리며 하오문주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옳지, 그래.”

하오문주는 품에서 작은 서책 하나를 꺼내 빠르게 피묻은 손으로 휘갈긴 다음, 그걸 비둘기의 다리에 묶어 남쪽으로 날려보냈다.

“쾌진난격. 네놈에 대한 일은 잊지 않으마. 내 반드시...하오문에 자리잡은 마교의 손길을 뿌리뽑으리라!”

잠시 뒤.

작고 허름한 쪽배 하나가 동정호 가운데에 도착했다. 사람 다섯을 실은 배는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동정호를 떠나기 시작했고, 배 위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휘리릭-

기름을 잔뜩 먹인 불화살 하나가 갑판 위에 떨어졌다. 불길은 금방 주변으로 번지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갑판에 엎어진 시체들을 하나 둘 불태우기 시작했다.

“크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원통하도다!”

쾌진난격은 불길 속에서 광소하며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거늘, 어찌 결말이 이 모양이란 말이더냐!”

화륵.

불길은 배를 전부 휘감았고, 다 타버린 재와 잔해만 동정호 바닥으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 * *

늦은 밤.

동정호 인근, 하오문 청기회에 소속된 객잔은 늦은 밤인데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몸 파는 여인들이 드나들 일도 없는 건전한 객잔인데도 밤늦게 불을 켜게 만든 이들은 하오문의 주인과 손님들이었다.

“먼저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연붕. 그리고 태극화. 두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 크게 낭패를 볼 뻔 했을 것이오.”

“아니에요. 제가 괜히 복잡하게 만남을 요청해서.”

나는 최대한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따지고보면 하오문주가 마교 첩자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배신을 당할 뻔 한 것이 문제의 근원이지만, 일단 사과를 해서 썩 나쁠 건 없었다.

“하하, 고맙소. 역시 실력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우시구려.”

나는 평범한(?) 현경 고수이나, 상대는 개방에 맞먹는 거대세력의 수장이다. 그런 존재를 내가 저자세로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니, 하오문주로서도 내게 크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연 대인 덕분에 하오문이 크게 은혜를 입었소. 사사로이는 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부터, 하오문 전체로 보면 마교의 끄나풀을 잡았다는 것까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하오문주는 잔에 술을 채웠다.

“동정십팔채의 몰락에 따라 뱃사공들의 일은 더욱 많아졌지요. 물길이 트였으니 이제 장강으로 나가면 되는데, 설마 이전까지 암암리에 불만이 쌓여있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소이다.”

하오문은 거대한 조직이지만 대부분 각자 생업을 가지고 종사하는 이들이다.

장강의 뱃사공들은 심심하면 동정십팔채나 장강수로십팔채에 의해 습격을 당하기 일쑤였을테니, 그들의 고충은 나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오문주를 배반하고 마교에 달라붙어 차기 하오문주로 거듭나려고 한 행동은 괘씸하기 짝이 없지만!

“장강사공회주라는 자는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하들을 칼받이로 내몰고 홀로 도망쳤소이다. 하지만 어딜 가든 하오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없으니, 곧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배신자는 처단해야지요.”

하오문주의 눈에 짙은 살기가 스쳐지나갔다.

“부디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 잘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하, 물론이지요. 연 대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하오문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오문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까지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이 흑 모, 연 대인이 찾는 정보의 대금은 3할 싸게 해드리겠습니다.”

“...보통 이럴 때는 공짜로 몇 개 찾아준다거나 하던데.”

“하하, 제가 그 정도로 대범하지는 못해서.”

스스로 좀생이라고 강짜를 부리는데 내가 어찌 공짜로 해달라고 닦달을 할 수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그러면 3할 깎인 대금을 치르도록 하죠.”

“아, 소급 적용 안 됩니다? 태극화 소저를 음해한 마교의 첩자, 그리고 처음 요청하신 멸색사태를 겁간한 자들에 대한 정보는 이것으로 정산이 끝났습니다.”

“와.”

하오문주는 사공희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허탈해할 정도로 지독했다.

“좋아요. 우선 나머지 두 정보에 대한 대금은 그걸로 치뤘다치고, 세 번째 의뢰를 하도록 하죠.”

“말씀하시오.”

“중최미봉. 지금 어디에 있죠?”

내 생각이 맞다면, 하오문이라도 분명 그녀의 소재를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중최미봉.

용봉지회 당시, 내가 아무리 찾으려고 해봐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던 그녀를.

“중최미봉이라...후후, 그녀에 대한 정보는 나도 묻고 싶을 정도로군.”

하오문주는 느긋한 손길로 자개함을 열었다.

“그녀에 대한 정보는 정말이지 알아낼 수조차 없소. 어디에 사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느 문파에 소속되어있는지. 하지만.... 그녀의 정보에 대한 가치는 이거로 확인할 수 있지.”

딸칵.

천년자패가 들어있던 바닥이 쑥 안으로 들어가며, 함의 내부가 위로 솟아올랐다.

“바로 이 천환단! 이 정도 수준의 물건이 아니면 그녀에 대한 정보는....”

하오문주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갑자기 표정이 굳는 그의 상태에 의아함을 느꼈다.

‘계속 들고 있었을텐데?’

다른 것도 아닌 발기부전을 평생 치료할 수 있는 영약이 천환단이다. 그걸 어디 하루 한 번 먹는 약처럼 함부로 사용하거나 잃어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용안.’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용안을 켰다. 함에서 흘러나온 천환단 특유의 기운, 청낭신공의 힘은 함에서 동정호 밖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사공희의 물음에 하오문주는 자개함을 닫았다. 그리고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의뢰를 하나 받아주겠소? 도둑을 잡는 것이오.”

“도둑이라니, 설마....”

현재 이곳에 없는 존재는 오직 한 명.

그 남장여자 궁사.

“아무래도 천환단을...도둑맞은 것 같소."

영구 발기부전 치료제를 잃어버린 하오문주의 표정은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천리추종향 넣어두기를 잘했군.'

하오문주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천환단 안에 천리추종향을 섞어놓았는데, 예상외의 존재가 천환단을 들고 도망쳐버렸다.

[작품후기]

??? : 호위대금 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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