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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에 현경이 너무 많으니
쾌진난격이 폭혈을 터뜨린 이후, 배 위의 상황은 급변했다.
“크윽!”
하오문주를 향한 노도의 맹공은 끊이지 않았다.
“크오오오오!!”
쾌진난격은 핏발 선 눈동자로 얼굴, 가슴, 허리, 허벅지 등 타격을 넣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하오문주는 수세에 몰렸고, 좀처럼 제자리에서 반격을 하지 못했다.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 구나!”
“영리한 거지!”
피하고, 또 피하고. 쾌진난격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지만, 피하느라 제법 넓은 공간을 써야하는게 하오문주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크윽?!”
“......!”
하오문주는 공격을 피하다가 뒤에 있던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워낙 경황없이 피하다보니 하오문주가 올라선 곳이 배의 갑판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말았다.
“크아아아!”
쾌진난격은 높이 뛰어올라 주먹을 맞잡으며 내려찍으려했다. 하오문주는 빠르게 옆으로 굴러 피하려고 했지만, 아래에서 느껴진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바로 아래 층에는 창고의 틈에 바짝 숨어 벌벌 떨고 있는 청기회주가 있었다.
“우오오오!”
하오문주는 내공을 끌어올려 머리를 보호했다. 십자로 교차하듯 두 팔로 머리를 가로막아, 쾌진난격이 아래로 찍어내리는 주먹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문주!”
쿠----웅!!
옆에서 누가 도울 새도 없이, 하오문주는 쾌진난격의 공격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품에 품고 있던 자개함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크, 크아아...!"
우두둑거리는 소리는 분명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였고, 쾌진난격은 광소를 터뜨리며 다시 주먹을 들어올렸다.
“크하하! 등 뒤에 뭘 숨겨놓았기에 피하지도 않고 그러고 있나!”
“크윽...!”
“어디 한 번 네가 그렇게 지키고자 하는게 무엇인지 볼-”
파바바밧!
쾌진난격의 머리를 향해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그는 고개를 급히 아래로 젖히는 것으로 공격을 피했다.
사라락.
검은 머리칼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쾌진난격의 꽁지머리를 스친 검날은 쾌진난격의 목을 베지는 못했으나, 그의 머리깃을 베는데 성공했다.
“이...가만히 두고보니까...!”
“더이상은 용서 못해요.”
사공희는 회수한 두 개의 검을 양손에 각각 움켜쥐었다. 어검술로 펼치던 검을 쌍검으로 움켜쥔 사공희의 검에 각기 흑백의 용과 봉황이 검기처럼 깃들기 시작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퍼---억!
길쭉한 봉이 쾌진난격의 배를 가격했다.
“커억?!”
쾌진난격은 피를 토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순식간에 배의 끄트머리까지 나뒹군 그는 검붉은 피를 토하며 괴로워했다.
“카악, 흐윽, 이...괴물딱지들이...!”
하오문주의 옆으로 활의 끝을 움켜쥐고 봉처럼 휘두른 궁사와 쌍검을 움켜쥔 사공희가 호위하듯 앞을 지켰다.
“이미 100명 넘게 죽었다. 포기해.”
“더이상의 공격은 무의미합니다.”
“크흐흐, 어디서 나타난지도 모르는 괴물같은 궁사...초절정 주제에 화경 고수에게 일격을 먹일뻔한 검사.... 크흐흐, 하오문주! 그래! 아주 복 많이 받으셨군!”
파바밧.
배 위로 검은 그림자가 뛰어올랐다. 사공희와 궁사의 견제 때문에 미처 갑판위로 승선하지 못하던 마인들이 결국 갑판 위에 발을 디디는데 성공했다.
그 수가 무려 50.
화살에 바람구멍이 뚫리거나 이기어검에 후퇴한 자들이 벌서 100이 넘는데도, 무려 50명에 이르는 고수들이 무기를 겨누며 에워싸기 시작했다.
“고작 이 정도의 수로 우리를 도모할 수 있을 것 같나?”
“인해전술도 모르느냐?”
“...이 새끼가.”
궁사는 입술을 깨물며 울컥했다. 하지만 좀처럼 쉽게 화살을 쏘거나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크흐흐, 너희들은 거기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쾌진난격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흑의인들은 저마다 손에 움켜쥔 단검을 언제든지 던질 수 있도록 전신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대공자께서는 말씀하셨지. 포위된 적을 상대로 검을 겨눌 바에는, 차라리 마비독이 발려있는 단검을 던지라고.”
쾌진난격은 옆에 있던 부하들로부터 단검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손잡이 부분을 고리처럼 움켜쥐며 하오문주를 향해 겨눈 뒤, 단검의 끝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하-앗!”
파---앗!
주먹을 앞으로 뻗기 무섭게 단검이 직선으로 날아갔다.
“어림없어요!”
사공희가 회수한 또다른 쌍검이 십자로 교차하며 투검을 막았다.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단검은 바닥에 떨어졌고, 사공희의 쌍검 또한 함께 바닥에 꽂혔다.
“큭...!”
사공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비틀거렸다. 원격으로 조종하던 이기어검과 사공희의 연결은 끊겨버렸고, 그로 인한 두통에 잠시 틈이 생기고 말았다.
“모두 쳐라--!”
“와아아아-----!!”
흑의인들의 고함소리가 동정호 전체에 울려퍼졌다. 단검을 던지는 소리는 고함에 파묻혔고, 서로 제각기 다른 때에 날리는 바람에 보고 대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큭...!”
무엇보다, 일방향으로 화살을 날리는 궁사에게 있어 전방위 공격을 막아내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젠장-!”
궁사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하늘을 향해 활을 겨눴다. 그의 화살에 깃든 푸른 화살은 마치 새가 날아갈 것처럼 날개를 펄럭거리다-
“어림없지---!!”
멀리서 들려온 여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바로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셋의 앞에, 갑판을 떠날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여인이 살포시 내려앉으며 손을 휘저었다.
“뭣?!”
그녀, 연붕의 손에는 음소색마의 채찍이 들려있었다.
퍼버버벅!
무언가 번쩍거린다 싶더니, 마비독이 묻은 단검들이 갑판에 우수수 쏟아졌다. 착지한 자세 그대로 채찍을 움켜쥔 연붕은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찍을 든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 너 어떻게...!”
“늦어서 미안해요. 조금 제압하느라 늦었어요.”
“허....”
내상을 입은 하오문주는 실혈과 함께 실소를 터뜨렸다.
“음소색마...현경 고수를 제압하는데 조금 늦었다...?”
“생각보다 강하더라고요. 후훗. 이건 전리품.”
연붕은 채찍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가죽 채찍에는 상처가 하나도 없었고, 푸른 강기가 표면에 단단히 맺혀있었다.
“지금부터는 제가 제압할게요.”
“자, 잠깐! 혼자서는-”
“희, 뒤에서 저를 지탱해줄래요?”
연붕의 말에 사공희는 검을 바닥에 꽂고 연붕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이 어깨에 눌릴 정도로 바짝 달라붙는 모습에 하오문주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어우야....”
“움직이지말고, 그대로 있어요.”
연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오문주는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연붕이 번쩍 들어올린 채찍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흐느적거리며 먹이를 찾는 듯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고작 이정도로 우리를 도모하려고 하다니...대공자의 배포는 참으로 작네요. 마치 놈의 남근처럼.”
“네, 네 놈...!!”
“폐월경-편(鞭).”
연붕의 눈이 사납게, 반달처럼 휘었다.
“난비풍파(難飛風波).”
푸른 강기를 머금은 채찍은 마치 신경질적인 바람을 연상케했다.
그리고.
“아아아악!!”
채찍은 마치 날카로운 검처럼 사방에 펼쳐진 마인들을 베어버렸다.
“...후우.”
눈 깜짝할 새에 50명에 이르는 마인들을 전부 쓰러뜨린 연붕은 채찍을 아래로 가볍게 튕기며, 뒤로 몸을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또 쓸데없는 것을 베어버렸군....”
연붕의 압도적인 무위에 동정호에는 정적이 가득 내려앉았다.
* * *
강호에는 다양한 무공을 쓰는 자들이 많다.
그리고 무공의 종류도 다양한 만큼, 무기도 아주 다양하다.
검을 쓰는 자들이 많고, 그 다음으로 도, 창, 권, 봉, 부, 침, 독 등 ‘무기’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많으나, 특이한 무기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예를들어 부채라거나, 실이라거나,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채찍(鞭)이라거나.
‘채찍만큼 왕소현의 무공과 잘 어울리는 무기가 또 없지.’
검마의 월영성희검은 휘두르고 베는데 특화되어있다. 검이 아닌 도로 검법을 펼쳐도 크게 무위가 떨어지지 않으며, 휘둘러 벨 수 있는 모든 무기가 월영성희검을 사용할 수 있다.
채찍은 검마의 무공, 특히 후대에 발전한 폐월경파의 경지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무기다.
검이나 활과 달리 사방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이며, 날카롭게 휘두르면 베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강력한 무기다.
‘학혈마녀의 무기가 도와 편이었지.’
혈신혜에게는 두 가지 무기가 있다. 하나는 최소한의 몸보신을 위해 휘두르는 칼이며, 다른 하나는 고문실에서 휘두르는 채찍이다.
사람을 괴롭히고 다치게 함에 있어서, 혈녀들의 무공만큼 철저하고 확실한 무공이 또 없다. 그것을 폐월경파의 검리를 담아 휘둘렀으니, 일류 고수 50명이고 나발이고 전부 일격에 쓸려나갈 수밖에.
‘그러니까 조금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당연한 것을 했을 뿐이다. 사공희야 나를 사랑과 걱정으로 바라보지만, 다른 둘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사뭇 달랐다.
“...이거, 구명지은을 입었군.”
하오문주, 그는 나를 향해 어느새 신뢰가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천기를 읽는다라...과연. 현경 여고수 즈음 되면 미래가 보일 법도 하지. 본인이 오해를 했구려. 미안하오.”
나는 나의 힘을 보이는 것으로 대공자에게 내가 범해졌다는 오해를 풀었다. 다행히 하오문주와 괜찮은 관계를 형성한 것 같아 나는 안도했다.
“......이토록 강한 자가 있다니.”
그리고 이 남자.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대련을...?”
아니 이 여자, 현경이다.
“좋게 봐주신 건 고맙지만 죄송해요. 몰래 움직이고 있는 터라.”
“아...그렇군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입맛을 다시며 투쟁심을 보이는 모습이 조금 익숙한 듯 낯설었다.
‘도대체 누구지?’
활을 쓰는 여고수라면 내가 알고 있는 사람만 대략 셋.
그 중 현경이 둘. 한 명은 나라의 장군이요, 한 명은 사파의 고수다.
전자라면 당장 눕히고 범해야 할 미녀이고, 후자라면 음소색마처럼 양물로 혼을 내줘야하는 존재인데....
‘지금 전력으로 싸우려면 역체변용술 또 풀어야 해.’
내가 만약 정체를 밝혀 범하려고 든다면-
- 으악, 현경이나 되어서 여장이나 하는 변태라니!! 내 눈이 더러워졌으니 동정호의 물에 내 눈을 씻어버리겠다!
풍덩.
- 여자가 남장하는 건 그러려니 해도, 남자가 여장을 하다니...이건 변태가 아닌가?
철컹.
‘그럴 순 없지.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그 때는 연붕이 아니라 비천색마로서 조우하기를 나는 학수고대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현경, 더럽게 많네.’
강호에 현경이 너무 많다.
‘이 정도로 많지는 않았는데.’
도대체 이들은 죄다 혈겁난세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 * *
그 시각.
곤륜산에는 두 여인이 다시 검은돌과 붉은 돌을 놓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의 옆에는 각자 마실 차와 다과가 놓여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빨리 얘기를 해주면 어디 덧나냐 이거야.”
“이 대담만 벌써 300번이 넘었다.”
“그래? 천번 채우지 뭐. 천번으로도 부족하면 만번.”
“하, 그러다가 십만번도 넘게 채우겠군.”
탁.
현녀가 마지막 돌을 놓았다. 붉은 여인, 혈녀는 다과를 향해 손을 뻗어 한 입에 삼킨 뒤, 다과의 가루가 묻은 손으로 돌을 만지작거렸다.
“...너.”
“왜?”
“...하아, 아니다. 그보다 한 가지 물어보도록 하지.”
“뭔데?”
“만약 내가 지금 알려준다면, 너는 그를 바로 찾아가 혈겁난세를 일으킬 건가?”
“.......”
붉은 여인은 돌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차를 홀짝인 뒤, 고개를 살포시 가로저었다.
“그를 찾아가는 건 맞지만, 내가 혈겁난세를 일으키지는 않을 거야.”
“뭐? 그럴 리가. 혈겁난세가 일어나지 않으면 네 아비는....”
“아버지도 구하고, 내 남편도 구하고. 이 비극의 재생을 막기 위해서는 흐름에 거스르는게 아니라, 흐름에 타올라서 극적인 역전승을 일구어내는게 맞지.”
붉은 여인은 돌을 만지작거리며 바둑판 위에 올렸다.
“정해진 순리대로 따를 거야. 어차피 강호가 떠들썩해지면, 그쪽이 꽁꽁 정체를 숨기고 있는 내 남편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을테니까.”
“...그래서 그 때까지 여기서 죽치고 앉아있겠다?”
“그럼. 내가 머저리인줄 알아? 지금 나가면...어디보자.”
붉은 여인은 손가락을 접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선에 독선에 신승에 현마에.... 어우, 현경만 벌써 몇 명이야?”
붉은 여인은 머리칼을 손으로 튕기며 비웃었다.
“최소 15...아니 10년만 기다리면 다 늙어서 뒈질 놈들인데, 뭐하러 힘들여서 투닥거리면서 싸우겠어.”
“너....”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지.”
붉은 여인은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며 선언했다.
“자신의 자아와 존재를 유지하며 승기를 잡을 때까지 버티면 승리한다.”
“......무슨 말이지?”
“나도 몰라.”
붉은 여인은 다시 한 번 입꼬리를 비틀었다.
“일단 10년만 기다려보고, 현경 최소 30명 다 뒤지면 그 때 슬쩍 나가볼까 해. 10년 기다려도...나는 서른이 아니거든. 히히힛. 아, 누구는 벌써-”
“......네 차례다.”
탕-----!
바둑판이 박살날 기세로, 검은 돌이 바둑판에 내려앉았다.
“아, 삼삼은 아니지.”
“네가 하자고 한 규칙이다. 그럼 알려줬어야지.”
검은 돌과 붉은 돌은 서로 딱 달라붙어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다.
[작품후기]
그가 해남에 있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