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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날승격(先捺承擊)
“아아....”
사공희는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검게 물든 세상 위로 기억이 눈앞의 광경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목걸이.
여인의 손에는 끝이 제법 뭉툭한 목걸이가 들려있었다. 커다란 가슴 안에서 꺼낸 목걸이는 안에 금창약이 들어있는, 제법 크기가 큰 목걸이였다.
그리고 그 끝은 남자의 눈을 찔러버렸다. 여인을 향해, ‘자신의 딸’을 향해 목을 조르려고 했던 남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던 딸에 의해 눈이 찔리고 말았다.
“큭, 으악, 아아아악!”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눈이 찔리며 터진 피가 아래로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아아...!”
여인은 충격에 빠져 목걸이를 떨어뜨렸다. 가슴 아래로 떨어져야했을 목걸이는, 바로 옆에 있던 또다른 여인에 의해 피묻은 장식 부분이 떨어졌다.
파지직!
여인, 사월은 단번에 장식 부분을 떼어냈다. 그리고 장식부분을 단도처럼 움켜쥐고 남자를 향해 겨눴다.
“미쳤어?! 이게 무슨 짓이야!”
“씨발, 씨바아아알!”
남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에서 피를 흘리며 고통에 괴로워하다가 철창에 부딪혀 나자빠졌다.
“이 개같은, 아아악!”
누구도 쉽게 상황을 판단할 수 없었다. 남자가 진짜로 딸을 죽이려고 한 건지, 딸이 과잉반응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사공희는 분명한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성인 남자가 자신의 목을 조르려고 하는데, 누가 저항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운이 없었을 뿐이야! 미친 거 아니야?!”
사월은 남편을 다그쳤다. 그녀의 말대로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하필 휴가가 그 당시였을 뿐이고, 하필 장소를 무당산으로 정했을 뿐이고, 하필 무당산에서 내려가기 직전 천화가 터져서 산이 봉쇄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하필 천화가 사공희에게도 옮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역시 천화에 중독된 자들이었군...!”
“사형!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럴 필요없다! 천화에 걸린 이상 이미 죽었다고 봐야지. ...장로님 말씀대로 하도록 하자꾸나.”
병자를 치료해야할 무당파의 무사들은 오히려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사공희는 당시에는 잘 보지 못했던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빤히 잘 보였다.
“...괜히 우리가 건드렸다가는 역병이 옮을 수 있다. 빨리 나가지.”
그들은 자신들이 가둔 외인들을 역병의 근원처럼 여기고 있었다. 사공희 일가가 역병을 가져온 것도 아니건만, 그걸 알면서도 처음부터 역병에 걸린 것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살려, 살려줘...! 의원, 의원을 불러주시오!!”
“의원까지 역병에 중독되게 생겼건만...닥쳐라!”
도사들은 황급히 떠나기 시작했다. 사공희는 답답해진 가슴을 두드리며 도사들을 노려봤다.
“여기서...걸렸는데...!”
억울했다.
사공희는 처음부터 천화에 걸렸던 게 아니다. 최소한 무당파 내의 식객들이 먹고 자는 곳에서 격리되어있었다면 천화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쓴 인피면구 때문에 따로 격리되고 말았다. 인피면구를 벗으려고 하기도 전에 그만 감옥으로 수용되고 말았다.
그저, 운이 없었다고밖에 할 수 없-
“...마공?”
사공희는 무사들이 복도를 지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내려앉았다. 지아비와 이시아를 통해 마공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눈썰미가 생겼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무당파 무사들의 걸음이 마교인들의 보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무당파의 무사들이 마인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마교의 첩자들이 무당파의 무인들처럼 꾸며서 들어왔다고 하는 편이 더 바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공희는 감옥을 떠난 무사들을 무당파에서 본 적이 없었다.
자세한 건-
“다 너 때문이다! 네가 그 쓸데없는 젖탱이와 얼굴로 남자들이나 홀리고 다녔으니까, 얼굴에 인피면구를 써서 이런 일이 생긴 거 아니냐!!”
“으윽...!”
사공희는 철창을 손으로 붙잡았다. 눈에 피를 흘리며 처절하게 외치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증오와 울분이 가득했다.
“듣지마라, 아가! 저놈이 지금 미친 거다! 제정신이 아니야!”
사월은 여인의 귀를 손으로 막았다. 그러나 남자의 목소리는 감옥 전체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컸다.
“죽여, 죽여버리겠어...!”
남자는 품에 손을 집어넣고 무언가를 꺼냈다. 손가락보다는 긴 칼날이 남자의 손에서 부들부들 떨렸고, 사월은 눈을 찡그리며 사공희를 보호하듯 나섰다.
“당신!”
“이걸 보라고!”
남자는 자신의 옷을 세로로 길게 찢었다. 그러자 그의 옷에는 붉은 기운이 가득했고, 사월은 큰 충격에 빠졌다.
“저 것이 무당산에 가자고만 하지 않았어도!!”
“개소리하지마! 당신이 무당산이랑 화산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희에게 제시했잖아!”
“그럼 화산을 골랐어야지!”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사월은 한 때 사용하지 않기로 한 무공의 자세를 갖추며 남자에게 대항했다. 하지만 남자의 눈은 사월 뒤의 여인을 향했고, 손에는 살기가 가득해보였다.
-수십 년을 쌓아올린 공든 탑이 자식 때문에 무너진 가장의 모습이라. 추하군.
“!!”
사공희는 점차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벽 너머, 허상 뒤에는 기절한 자신과 전신의 피부가 붉게 타버린 사월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가 아는 것은 이게 전부이옵니다. 희에게는....]
[언젠가 알려줄 때가 되면 알려줄 것이다. 큰 충격을 받았으니, 당분간은 모른척해야할 수밖에 없겠지.]
[...제 간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둘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공희는 잊혀져있던 기억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봐야한다.
이 광경이 만약 그가 말한 ‘알려줄 때’라고 한다면, 결코 외면해서는 안된다.
“비켜! 안 비키면 너부터 죽여버릴 거야!”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사월의 눈은 슬픔으로 짙게 물들었다. 남자는 사월에게 있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게 만든 존재였고, 사공희는 남자와 맺은 사랑의 결실이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
둘 사이에서 사월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쨍그랑.
사월이 실수로 목걸이를 떨어뜨렸다. 사랑하는 남편이 자신의 딸을 향해 증오를 내비치는 모습에 그녀는 땀에 젖은 손에서 미끄러지는 목걸이를 붙잡지 못했다.
“크아아악!”
목걸이가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게, 남자는 사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사월을 밀치고 목걸이 끝을 잡아, 아래를 향해 강하게 내리찍었다.
“.......”
사공희는 몸을 일으켰다. 세계는 갑자기 모두 회색으로 물들었고, 남자는 여인을 죽이기 일보직전이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만 할 거야?”
옆에는 자신과 똑 닮은 소녀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사공희인 듯, 그녀는 아무 표정없는 얼굴로 앞을 가리켰다.
“알잖아. 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래, 알고 있지.”
사공희는 앞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태극혜검의 어검술을 날리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을 향해 죽이려드는 자의 등을 향해 정확히 ‘검’을 겨눴다.
“잊고 싶었어.”
어린 자신은 손을 들어 급소를 막으려했다. 하지만 눈이 이미 찔린 바람에 남자는 방향감각을 잃고 미끄러졌고,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세계는 점점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분명 남자는 사공희를 찌르려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만...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왜?”
“나를 죽이려고 드는 사람을 해하는게, 결코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 그거야. 색마의 부인이 되기에는 너는 너무 착했지.”
소녀는 씩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사공희는 전방을 향해 ‘검’을 쏘았다.
“으아악!”
남자는 미끄러지듯 옆으로 굴렀다. 목걸이는 손에서 놓치고 바닥을 굴렀고, 남자는 벽에 머리를 박고 목뼈가 부러졌다. 검에 맞아 쓰러진 건 아니었지만, 그는 마치 뒤에서 날아온 검에 쓰러진 것처럼 보였다.
“너...때문....”
풀썩.
목이 기형적으로 꺾인 남자는 끝까지 사공희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사공희는 철창을 가르고, 손에 움켜쥔 무형의 검으로 앞으로 나아가 남자의 목에 칼을 겨눴다.
“시끄러워요. 왜 이게 나 때문이야. 나는...잘못이 없어요.”
자기합리화.
“나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정당방위.
“...당신이 생각하던 말 잘듣는 착한 아이 사공희는 이제 없어요.”
서걱!
사공희는 어린 자신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공포에 벌벌 떨고 있던 어린 사공희는 입에서 피를 왈칵 쏟아내며 씩 웃었다.
“그래....”
사공희는, 사공희를 향해 사납게 웃었다.
“사람이 적당히 이기적으로 살 줄 알아야지.”
사아아악.
사공희를 뒤덮은 햐얀 세상의 빛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고, 사공희는 부유감 속에 몸을 맡겼다.
* * *
“...가가.”
사공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청년을 향해 옅게 웃었다.
“저, 아무래도 사람을 죽인 것 같아요.”
“사람이 아니다.”
색마는 단호한 목소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 어느 아비가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는 이유로 딸을 죽이려고 든단 말이더냐. 그자는 너를 짐덩어리로 생각한 짐승이었을 뿐이다.”
“...그래도 제게 패륜의 업이 있는 건 변하지 않아요.”
“아니.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내가 만든 허상일 뿐이니.”
사공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색마의 배려는 고맙지만, 진실은 변하지 않았다.
“정당방위라고 한들...결국 이 손에 피를 묻힌 건 마찬가지니까요.”
사공희의 반격에 의해, 남자는 과다출혈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 다른 모든 가정을 차치하더라도, 사공희의 반격에 남자가 죽었다는 건 불변의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제 업에 대해 더는 외면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을 거예요. 누군가가 저를 죽이려 든다면, 저를 해하려 든다면 그때도 검을 들 거예요. 저는...당신의 것이니까.”
“그래. 그 마음가짐이다.”
색마는 사공희의 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대신 약속해다오. 네가 만약 죽여야 할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너와 ‘우리’의 아이를 해하는 자여야 한다고.”
“......우리, 군요.”
사공희의 입속에서 같은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녀는 색마가 쑥스럽게 이야기한 말에 그저 웃기만 하며 손을 뻗었다.
“화경 전에 아이 낳게 해주실 것도 아니면서.”
“조건이야 같아야 하니까. 다만...나는 시아나 연보다 네가 제일 빨리 화경에 닿을 것만 같구나. 시아가 어려서부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고, 연이는 타고난 재능도 있었지만 선녀화라는 특이체질임을 감안한다면...네가 셋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나단다. 이제야 새삼 알게 된 거지만...네가 아마 순수한 재능만 따지면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농담이시죠?”
“농담아닌데.”
색마의 눈은 진지했다. 사공희는 입술을 뾰루퉁 내민 색마의 볼을 쓰다듬으며 옅게 웃었다.
“믿을게요. 후후, 혹시 저 이제 엄청 빨리 성장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죠?”
“모르지. 순식간에 초절정을 뛰어넘어서 화경이 되면 너 백도제일화 반납해야한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를 가진 여인이 처녀들이 가지는 칭호를 유지하기는 힘드니까.”
“후...그거라면 얼마든지 반납할 수 있어요.”
사공희는 다리를 뻗어 색마의 허리 뒤로 휘감았다.
“그때 즈음이면 저는 천하제일인의 아이를 가졌을 테니까요.”
“그래. 그걸 위해서라도...지금은 아무나 다 죽일 기세로 몸을 써보거라.”
“알겠어요, 상공. ...그런데 그러려면 이제 무공 연마를 하러 가야하는 거 아닌가요?”
찌걱.
사공희는 아직도 자신의 안에서 빼낼 생각을 하지 않는 색마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다.
“몸을 쓰라는 게 무공을 쓰라는 게 아니라.... 하, 이미 심검(心劍)의 실마리를 잡은 거로 초절정에 들어갔는데 무공 연마가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그게 심검이었어요?”
“그래. 너는 네 과거의 악몽을 죽이는 것으로 심검을 터득했다. ...솔직히 조금은 부럽군. 남들은 현경 즈음은 올라야 간신히 실마리를 잡는 경지인데. 누구는 그걸 초절정부터 깨닫고 말이야. 남들에게는 화경이 네게는 절정이고, 현경이 초절정이구나.”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제가 상공이 부러워할 정도로 재능을 가지고 있다니. 뭔가...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그러게. 이게 재능 주머니인가?”
찰싹, 찰싹. 색마는 사공희의 가슴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재능과 중단전이 비례하는 것도 아닐텐데, 나도 참 어이가 없구나.”
색마는 사공희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한탄했다. 사공희는 쿡쿡 웃으며 색마의 목 뒤로 손을 뻗었다.
“상공. 저 아직 진정한 재능이 남아있는데 확인해보시겠어요?”
“무슨 재능?”
“상공의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는 재능이요.”
꽈아악.
사공희는 슬며시 뒤로 물러나려는 색마의 허리를 다리로 눌렀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졌다.
“저를 임신천재라고 불러주시겠어요?”
사공희는 색마가 사정할 때까지, 다리의 힘을 풀지 않았다.
“...흐흐흐, 견희야.”
색마는 사공희의 위에서 본격적인 자세를 잡았다.
“그럼 어디, 색마 자지를 얼마나 잘 요리하는지 볼까?”
“그, 그건 임신이랑 다른-”
찔컥.
“임신한 것처럼 보일 때까지 안에 싸주마.”
색마의 선전포고와 함께, 열락의 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