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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날승격(先捺承擊)
사공희의 성장은 분명 빠르다.
하지만 성장이 빠르다고 해서, 원래부터 출발선이 느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거로 돌아가 아기 때부터 벌모세수를 하여 성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지금부터라도 사공희를 성장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왕소현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겠군.'
나는 왕소현을 통해 한 가지 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실험의 결과를 바탕으로, 나는 사공희의 속에 들어가 그녀와 심검비무를 나눌 것이다.
"귀접검담. 지금부터 나는 네 속에 들어갈 것이다."
"......."
"자지부터 집어넣겠다는 게 아니라."
나는 사공희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사공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말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강호에는 수많은 악인이 있지. 살다보면 사람을 죽이지 않는 무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있단다."
"네. 상공께서 말씀하셨죠. 애초에 칼을 드는 자가 무인인 만큼, 칼을 든 이상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고."
"그래. 검이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도구. 사람을 살리는 경우도 있지만...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이를 죽이는 검이 되기도 하지."
"상공께서는 제게 태극혜검을 가르쳐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사공희는 자신의 곁에 놓인 네 개의 검을 쓰다듬으며 옅게 웃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상공께서 다 해결할테니, 너는 너와 내 아이를 지킬 힘을 연마하라고."
"......."
내가 적들의 모가지를 따는 동안 혼자서 몸을 지키라고 했던게 왜 아이까지 추가되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나는 사공희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제 검은 무언가를 지키는 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하지만 적을 죽여야 할 때도 있지. 언제겠느냐?"
"저를 범하려고 하는 자가 있거나, 상공의 아이를 해하려는 자가 있거나."
"이제는 아예 임신을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구나. 그래, 좋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면 최소한 화경은 되어야겠지?"
사공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술잔에 직접 내가 술을 따르고 약선에게서 받아온 또다른 약을 가루로 술잔에 태웠다.
"네 어미, 사월이 말했었지. 천하제일인의 여인이 되어 천하제일인을 휘어잡으라고."
"......들으셨어요?"
"네가 무안해할까봐 모른척 했을 뿐이다. 이제는 서로 숨길 것도 없으니, 마음 편히 이야기를 해도 되겠지."
나는 밖을 슬쩍 훑었다. 내가 따로 사공희를 내 방으로 초대한 것에 다른 둘은 전전긍긍하며 안의 상황을 살피고 싶어했으나, 불행히도 기막 때문에 소리는 밖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네가 생각하기에 천하제일인을 휘어잡는 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방중술로도 이길 수 없는데, 어찌 밤일로 천하제일인을 치마폭에서 가둘 수 있겠어요. 하지만 저는 깨달았답니다. 천하제일인도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면 달라진다는 것을."
사공희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상공과 낳은 딸의 어머니가 된다면, 저는 천하제일인을 비로소 제 품에 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진정한 부부이기 때문이지."
사륵.
나는 중려신화정으로 붙여놓은 호롱불을 꺼뜨렸다. 사공희를 밝게 비추던 불빛은 사라지고, 창호지 너머로 새어들어오는 달빛만이 그녀를 비췄다.
"단순히 내 여인이 아니라, 내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면 더이상 너를 견희라고 부를 수도 없겠구나."
"저는 그거 좋은 걸요."
"아이 교육에 좋지 않아."
사공희는 손을 강아지처럼 얼굴 앞에 대고 끔뻑거렸다. 나는 그녀의 땋은 머리를 한 올 한 올 풀어헤치며 볼을 쓰다듬었다.
"화경까지 갈 길이 멀다. 초절정...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하는 거죠."
사공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상공을 믿어요."
"나도 너를 믿는다."
부엌에서 수많은 실패를 겪을 지언정, 사공희는 침대에서만큼은 실패한 역사가 단 한 번도 없는 여자다.
"간다."
스륵.
나는 사공희와 입술을 맞췄다. 처음에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던 사공희는 점차 눈을 감으며 나와 혀를 섞기 시작했다.
성교를 위한 입맞춤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사공희의 등을 받치고 그녀를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시작하마."
스르르.
사공희는 서서히 눈을 감았고, 나는 그녀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실패의 위험도 있고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손실될 가능성도 있지만....
'꼭 성공할 거야.'
그래야 나의 아이를 가질테니.
"그럼...방해를 해볼까."
사공희가 역경을 견뎌낼 수록, 그녀의 성장은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리라.
사락.
나는 사공희의 치마를 걷어올렸다. 이시아나 독고연이 부러웠는지, 그녀는 아래에 월녀복을 입을 때 입는 얇은 하얀 속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걸 엉덩이 뒤에서부터 잡아당겨 허벅지에 걸쳤다. 순식간에 사공희의 음부가 드러났고, 나는 속옷을 사공희의 발목에 걸고 바지를 벗었다.
"어휴, 귀신같은 녀석."
귀접검담으로 자기 속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바로 눈치를 채더라. 나는 사공희가 얼마나 나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지 괜히 소름이 돋았다.
"내가 네 곁에 있어주마. 그러니 안심하고 과거를 마주하거라."
사공희는 내 말에 응답하듯 아래를 조였다.
* * *
"......?"
낯선 공간이다.
사공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공간에서 눈을 떴다.
"...아니."
익숙하다. 알고 있지만 기억에서 지워버린 공간이다. 너무나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서 잊어버리고 싶었던 장소다.
아아아악!!
비명소리가 가득 울려퍼진다. 사공희는 그 끔찍한 비명소리가 다시 울려퍼지는 것에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하아...!"
숨결은 거칠어지고 점점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풍경이 정확하게 떠오를 때마다 사공희의 숨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무공을 익히고 나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갑자기 호흡하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과거, 인피면구 위에 고름처럼 만든 돼지기름을 붙이고 다니던 때 처럼...!
"......!!"
사공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랑하는 지아비가 준 네 자루의 검을 찾았지만, 검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다, 다른 검은...?!"
보검이 아니더라도 일반 철검이라도 좋다. 사공희는 검을 찾기 위해 주변을 훑었다.
사공희가 갇힌 곳은 철창.
무당산을 덮친 천화에 고통받던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감옥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던 바로 그곳.
사공희에게는 운명이 하루 아침에 뒤바뀐 장소였다.
"여기는-"
저벅, 저벅.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무당파 무사들의 복장에 사공희는 철창을 두드렸다.
"저기요!"
그러나 두 무사는 사공희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아예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공희는 철창 너머로 손을 쭉 뻗었으나-
스륵.
무사들은 그저 스쳐지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사공희는 당황하여 철창을 붙잡은 채 마구 흔들었다.
"안 돼! 그 안은...!"
사공희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안에 무엇이 있길래?
도대체 저 안에 누가 있길래 무사들을 자신도 모르게 붙잡으려고 한 것인가?
"......해야돼?"
"그럼. 안 그러면 우리가 죽어."
무사들의 목소리는 멀어질수록 더욱 잘 들렸다. 마치 자신의 혼백은 지금 밖에 빠져나와있지만, 귀는 저 안쪽에 있는 것처럼.
쿵, 쿵쿵!
사공희는 몸을 철창에 부딪히며 밖으로 빠져나가려고했다. 하지만 철창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사공희는 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혹시...."
사람에게 손이 투명하게 스쳐지나갔다면, 자신의 몸도 투명하게 스쳐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순간, 철창이 아닌 옆의 벽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사공희는 단단한 벽을 향새 손을 뻗었고, 몸이 벽 너머로 쑥 들어갔다.
'허상!'
마치 안개가 벽처럼 형상을 갖춘 것처럼.
"......!"
사공희는 달렸다. 무작정 앞으로 달리고 달렸다. 벽을 넘어가는 동안 보인 시체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분명 기억에 따르면, 여기서 세 칸만 더 지나가면-
"아이고, 어르신!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는 관리입니다! 제발요!!"
"아."
사공희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앞으로 방 한 칸만 더 지나가면 정면에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사들은 소리가 나는 철창을 향해 위협적인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닥쳐라! 병자인 딸을 데리고 온 네놈들이 역병의 근원이렸다!"
"아닙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제 딸은 역병에 걸린 게 아닙니다!"
절박해보이는, 동시에 비굴해보이는 남자의 목소리. 사공희는 한 때는 의지해마지 않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듣기 싫은 목소리에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귀를 씻어내리고 싶었으나,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었으나, 사공희는 아랫배를 강하게 손으로 붙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스륵.
마지막 벽을 허물고 넘어가자, 눈앞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 보였다.
"제 딸은 천화에 걸린 게 아니라고요!"
절규하는 남자.
"......."
천화에 걸린 듯 얼굴에 고름이 가득한 여자아이.
"괜찮다, 괜찮아. 이 어미가 지켜줄게...."
그리고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한 여인.
역병에 걸리지도 않았으나 역병에 걸린 것처럼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는 이유로, '사공희'를 비롯한 세 가족은 무당산의 감옥에 갇혔다.
무당파 내에서 죄를 지은 무사들을 벌주기 위한 참회동이었으나, 천화에 걸린 이들을 임시로 수용하던 바로 그곳.
천화에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이유로 제대로 병자들을 관리하지 못하여, 사람들은 하나 둘 죽어나가고 있었다.
"아, 아으...."
사공희는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잊혀져있던 기억을 강제로 꺼낸 듯한 충격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봐야...해."
사공희는 벌벌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을 치켜떴다. 이 날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자신에게 준 시련일 것이다.
절정 고수.
책을 좋아하는 힘없는 소녀가 아닌, 무림 여느 곳에 가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절정의 여고수가 되었다. 비록 지금은 검이 없으나, 사공희는 마음을 다잡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네 딸이 천화에 걸리지 않았다? 그걸 어찌 믿어!"
"얼굴에 저렇게 고름이 가득한데, 이것이 어찌 천화에 걸리지 않은 증거란 말이더냐!"
"이건 천화가 아닙니다!"
"여보!"
여인, 사월의 비명에도 남자는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그의 눈빛에는 여인조차 감당해낼 수 없는 광기가 엿보였다.
"나는 돌아가야해...!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부모님 돌아가시면서까지 내게 책 읽히고 붓 잡게 하면서 얻은 자리라고...! 고작 이런 일로 잃어버릴 수는 없어!"
"당신, 미쳤어요?!"
"미치지 않았어! 정상적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남자는 관료였다.
그다지 높은 직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말단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제법 높은 직위의 관리였다.
그런 관리가 휴가철에 일가족과 함께 역병이 든 산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장 돌아가서 해명해야해...! 나는 천화에 걸린 게 아니라고!"
남자의 눈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평생을 바쳐서 일구어낸 직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충격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다, 당신...! 제발!"
사월은 절박한 눈으로 남자에게 애원했다. 힘으로 분명 제압할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믿음'으로 남자에게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그러나.
부우욱!
"!!"
사공희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붙잡았다. 마치 발가벗겨지는 듯한 수치심이 전신을 가득 채웠고, 새록새록 떠오르는 광경에 손발이 굳어버렸다.
"......."
지금보다 훨씬 어린, 사공희는 인피면구가 떨어져나갔다. 무공을 익히기 전이라 젖살이 조금 남아있는 것을 감안해도 그녀의 미모는 아름다웠고, 무당파 무사들은 사공희의 진짜 얼굴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오...."
"보십시오! 이건 가짜입니다! 천화에 걸린게 아닌-"
남자는 사공희의 인피면구 아래, 진짜 피부 위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씨...발...."
"......!!"
어린 사공희는, 자신을 향해 적의와 증오를 내비치는 남자를 향해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 * *
귀접검담이라고 말은 했지만, 섭혼술은 상대의 정신을 다스리는 효과도 있다.
과거에 묻어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을 꺼내는 힘도 있다.
"직접 마주해야해."
진실을 외면한다면, 평생 사공희는 더 높은 곳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 날 있었던 일.... 나와 만나기 직전에 일어났던 일. 너는 분명히 떠올려야한다."
그 날.
나는 사공희를 잠시 재우고, 사공희의 모친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공희가 잊어버렸던,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것을 꺼내려고 했다.
인피면구를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히 막 천화가 진짜로 발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바람에, 가족은 감옥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죽여, 죽여버리겠어...!]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한 남자는, 딸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그리고.
[아, 아...?]
그를 죽인 자는, 다름아닌 죽음의 공포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작품후기]
ㄴㅇ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