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310화 (310/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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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소?”

나는 자색의 독기가 바짝 빠져 영롱한 흑색으로 빛나는 인면지주의 내단을 건넸다. 안에 있던 내공은 독기와 함께 중려신화정의 열기로 전부 불타버렸다.

“...나참. 미친 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약선은 궁시렁거리며 인면지주의 내단을 받았다. 아직 내단에는 마비독이 잔뜩 남아있지만, 이제는 약선이 칼을 대고 자르거나 막자로 빻아도 독기가 흘러나오지 않는 수준이었다.

“마비약가지고 뭐하게.”

“점혈로 사람을 제압하니까 혈맥을 뒤틀어 점혈을 풀어버리더라고. 그래서 이제는 마비약도 조금 같이 사용하려고 하지. 마비약에 더불어, 이것들도 준비해주시오.”

나는 약선에게 내가 필요한 약의 목록을 건넸다. 약선은 목록을 보자마자 종이를 찢어버렸다.

“미친놈. 나보고 미약을 만들라고?”

“어허. 미약이라니? 성기능 강화와 신체의 활력 증진을 위한 것이오. 사람을 구하기 위한 약이거늘 어찌 미약이라고 하는가?”

“얘끼, 이놈아. 내가 너를 모를 줄 아느냐?”

약선은 나를 향해 약초를 태우던 곰방대의 끝을 겨눴다.

“분명 이 약이 필요한 한 명에게는 잘 쓰렸다. 하지만 어디 한 명에게만 사용할 것이냐? 아니지, 너는 이걸 사방으로 퍼뜨릴 것이다. 나는 약을 이용해 악행을 저지르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건 편견이오.”

나는 당당히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미약이 필요하지 않소. 왜? 남근 하나와 허리힘만 있으면 미약 따위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니까. 자꾸 미약이라고 칭하니 어감이 이상한데, 우리 정정합시다. 발기부전 치료제라고.”

“이 놈이 진짜...!”

약선의 안그래도 험상궂은 인상이 야차처럼 찌그러졌다.

“강제로 혈기를 북돋아 하초에 피가 몰리게 하는 것이 무슨 치료제란 말이더냐! 자칫 잘못하면 혈맥에 큰 무리가 올 수 있다!”

“그런 방법으로도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면 어떻소?”

“......누구냐? 네놈이 도대체 그걸 누구에게 사용하려고 하기에 그러는 것이냐?”

나는 약선에게 입모양으로 투약 대상을 밝혔다. 약선은 입을 쩍 벌리며 한탄했다.

“세상에....”

“이제 내가 왜 그게 필요한지 아시겠소? 설마 내가 그거로 큰 돈을 만지려고 한다거나, 사람을 해하는데 사용한다면 내 약조하리다. 천환단의 제조법을 공개하도록 하겠소.”

“...뭐라?”

약선의 귀가 쫑긋 섰다.

“천환단은 청낭신공으로부터 파생된 단약이지, 신의 개인의 물건이 아니오. 내가 청낭신공을 알고 있으니, 제조법을 타인에게 알려주는 건 내 마음이지.”

“...사기 아니지?”

“물론. 하나쯤은 해부해보지 않으셨소? 하지만 천환단의 구조를 밝혀내지는 못했겠지. 이미 가루로 빻아진 재료도 많고, 배합법도 잘 모를테니.”

“.......”

약선은 곰방대를 툭툭 허공에 치며 고뇌에 빠졌다. 나는 그에게 다시 내가 필요한 약의 목록을 적어 건넸다.

“내 결코 사람을 해하는데 사용하지 않을 것이오. 내 아기색마를 걸고 약조하지.”

“...진작 그렇게 말하지.”

자존심과 별호, 무공보다 더 나의 존재를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이 바로 아기색마다. 나는 좆을 건 만큼, 약선이 만들어주는 물건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사용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디서 난동을 부릴 생각인가?”

“난동을 부린다는 표현은 다소 그렇지만...나도 모르오.”

“모른다?”

“기다리고 있는 중이거든.”

연락이 오기를. 아마 지금쯤 하오문에서 긴급 소집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조만간 나와 접촉하기를 바라고 있으리라.

‘하오문주와 직접 만나야 해.’

근간이 정보집단인 만큼 천무명으로서 가식을 떨 필요도 없다.

비천색마로서 정체를 드러내는 건 다소 위험부담이 있으나, 내 입막음 비용으로 좋은 물건 하나가 있으니 무림맹에 나의 인상착의가 넘어갈 일도 없을 것이다.

“하오문의 문주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하오문주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광동성 아닌가?”

광동.

호북에서 호남을 거쳐, 남쪽으로 쭉 내려가 해남과 맞닿아있는 곳이다. 동정호의 물길도 이제 열렸으니, 배를 타고 남쪽으로 쭉 내려가다가 육로로 산만 조금 넘어가면 하북보다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오문의 본거지는 광동에 있지. 하지만 문주는 분타를 계속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얻고다니느라 위치가 불분명하오.”

본거지는 가만히 있더라도, 하오문의 우두머리는 중원 곳곳을 떠돌아다닌다.

그래서 나는 하오문주를 찾아내기 위해 미끼를 던졌다.

공자주지 일촌남근이라는 정보가 진짜인지 아닌지, 그걸 판단하기 위해서는 나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후우, 알겠다. 나도 옛날에 하오문에 잠시 신세를 진 적이 있으니, 그 보답을 지금 한다고 생각하지. 만들어주마. 단.”

약선은 나를 향해 신신당부했다.

“......진짜로 이상한데 쓰면 안 된다?”

“아 글쎄, 나를 너무 믿지 못하는 구만. 내 절대 사람을 해하는데 쓰지 않겠소!”

사람한테는 쓰지 않는다.

사람한테는.

* * *

하오문.

도둑, 점소이, 기녀 등 거지를 제외한 모든 사회 하층민들이 모여 만들어진 조직으로, 사람들의 대외적인 무시와 차별에 대항하고 자신들이 누릴 최소한의 인간다운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기녀를 향해 남자가 행패를 부릴 때, 기녀를 보호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홍루에는 소위 ‘어깨’라고 표현하는 떡대가 있기 마련이지만, 하오문에 소속되게 되면 기녀들은 우선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가장 쉬운 길이 무공이고, 스스로 삼류 인생을 살아간다고 자조하며 대부분 삼류 무공을 익히고 살아간다.

삼류무사도 잠깐 방심하면 칼침 맞고 죽는 건 똑같지만, 적어도 칼침에 즉사를 피하고 급소를 빗겨맞는 수준으로 힘을 기를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하오문에는 정말 많은 이들이 모여 거대한 세력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들 중 여러 곳에서 빛을 보지 못하다가 하오문에서 재능을 발견한 이들이 더러 있었고, 그들은 하오문 소속의 직업을 대표하는 ‘OO회’의 회주로서 하오문주의 아래에 모였다.

가령, 몸파는 기녀가 모인 홍기회와 음악을 파는 기녀가 모인 청기회같은 식으로.

그리하여 각 회의 회주들이 모여 하오문주와 회합을 나누며 무림 전역에 눈과 귀를 뻗치고 있는 조직을 이끌어나갔다. 무림 전역에서 정보를 듣기에, 때로는 알면 큰코다치는 시시콜콜한 소식까지 알게 되고는 했다.

공자주지 일촌남근.

이걸 들을 바에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겠다 싶을 정도로, 심각한 정보였다. 그래서 하오문주는 급히 회주들을 소집했다.

“홍기회주가 산하 지부의 기루에서 얻은 정보요. 어떻게 생각하시오?”

“거짓입니다.”

“진실일지도 모르지요.”

“누가 가져온 정보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마교의 대공자를 음해하는 정보입니다.”

“그냥 뜬소문 아니오? 빙색마인이 실은 독고연을 납치한 게 자기 부인 삼으려고 한 소아성애자였다거나, 무림맹주가 실은 아내에게 역강간을 당해 임신공격을 당했다거나, 태극화가 실은 가슴 뿐만 아니라 얼굴도 천하일색이라는 소문이 사실이라거나. 강호에 어디 그런 소문이 한둘이오?”

“악의적인 소문입니다. 홍기회주는 이 정보를 팔아치운 자를 추적해야합니다.”

“어디 저 혼자 하나요? 이걸 알려준 남자, 제가 아끼던 아이를 따먹고 그냥 튀었단 말이에요!”

하오문은 무림의 집단이나 여느 문파나 세가처럼 체계가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냥 장난이라니까! 홍기회주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야! 어떤 미친 놈이 마교 대공자를 걸고 넘어지면서 질싸튀 한 거라고!”

“어떤 미친놈이 마교 대공자를 상대로 자지가 작다는 정보를 팔고 가요?! 만약에 마교 대공자가 당신보다 거근이면 어쩔 거야?”

“뭣? 나의 암흑마창보다 대공자의 물건이 더 크다고? 그럴 수 있지! 천마의 자식 아닌가!”

“...확실히 천마는 거근이라는 정보는 확실하오. 호부견자일 경우는 극히 드물테니.”

“워낙 신비주의가 강한 인물이라 자지 운운하기 전에 그의 이름과 실체, 무공의 경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자지가 1촌이니,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으니 마니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회주끼리의 이야기는 사실상 도떼기 시장을 방불케했다. 제대로 이야기에 끼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각 회주들은 저마다 정보가 사실이네 아니네를 두고 이견이 생겼다.

“...네 생각은 어떠냐.”

하오문주는 가만히 있던 여인을 향해 물었다. 머리를 단아하게 묶어 비녀를 끼운 여인은 하오문의 분위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았다.

“......시험이 아닐까요?”

“시험?”

여인의 옥구슬같은 목소리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홍기회주 님, 그가 서찰을 남기고 갔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뭔가 장황하게 적어놓아서 파자를 했더니, 우리 문에서 쓰는 암어였어. ...건방지게도 열흘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더라? 싸고 튄 주제에...!”

“암어가 유출되었다고? 씨발, 그거 또 만들어야 해? 아니, 미치겠네 진짜....”

“문주님, 그는 문주님을 찾는 게 아닐까요?”

“......이목을 끌었다?”

하오문주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거짓 정보로 나를 꿰어내려고 하는데...내가 굳이 나설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한 번 나서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귀인이라면 응대하시고, 만약 거짓을 말하는 자라면...응당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호오, 그래? 그러면....”

하오문주는 흥미로운 눈으로 여인을 향해 웃었다.

“네가 한 번 나서보겠느냐, 선영아.”

“......제가요?”

여인, 선영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 * *

약선으로부터 약을 얻은 나는 집, 천가장으로 돌아왔다. 잠시 외유를 다녀오며 얻은 은자로 제법 큰 닭 두 마리를 잡아다가 손질하여 몇 가지 향신료와 함께 챙겨왔다.

“다녀왔다.”

나는 천가장의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공터 가운데에는 이시아와 독고연이 오랜만에 무공을 겨루고 있었다.

“오셨어요?”

사공희는 나를 맞이하며 내가 건네는 닭 정육을 받았다.

“이거 제가 구우면 되나요?”

“아니. 이번에는 내가 할 것이다. 너는 부엌에 두고 오기만 하거라.”

“네....”

사공희는 실망한 목소리로 부엌으로 사라졌다.

사공희를 위해 닭 쯤이야 몇 십 마리고 연습을 위해 희생할 수 있지만-아무리 망쳐도 뼈를 바르고 끓이면 육수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함께 들어있는 재료는 연습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값이 나가는 물건들이었다.

“아, 왔어?”

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흔드는 이시아는 상당히 개운해보였다. 이시아의 상대를 한 독고연도 제법 호흡이 흐트러져있었다.

“초절정끼리 싸우니까 어때?”

“말도 마. 예전에는 아예 몰랐으니까 상관없었는데...이제는 아니까 더 무서워.”

“그런 분이 검기를 주먹으로 깨뜨리셨답니다.”

“...확실히 강해졌군.”

독고연이야 원래부터 강했지만, 둘 몰래 섭취한 천년자패의 내공 덕분에 검기가 더욱 단단해졌다.

그리고 해남에 다녀오며 초절정의 문을 두드렸던 이시아는 이제 어디가서 스스로를 초절정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강해졌다.

아마 둘의 성장은 앞으로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남은 건 이제....

“견희야.”

“네, 부르셨어요?”

“오늘 밤,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내 방으로 들어와라.”

나는 사공희를 호출했다.

공평하게 서로 한 번씩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셋 중 누구라도 상관없었지만, 나는 사공희를 보자마자 그녀를 선택했다.

‘계기만 주어지면 이제 사공희도 흐름에 타게 되어있어.’

초절정.

사공희는 단 한 걸음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살해.'

태극검후.

그녀는 태극혜검으로 수많은 혈교의 무사들을 죽였다.

지금까지 내가 죽인 사람의 수와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많은 수를 죽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공희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가?

'아니지.'

사공희.

그녀는 누군가를 죽인 적이 있다.

'존속살해.'

나는 그녀가 기억속에서 지워버린 살인의 악몽을 되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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