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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가장의 일상
동정호의 수적들이 하나 둘 연행되는 사이, 호북성주는 호남성의 관군들을 끌고 온 이와 인근 객잔을 빌려 인사를 주고받았다.
"신궁께서 설마 도와주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소식을 듣고 찾아왔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만약 제가 없었다면...호남성주의 비위는 드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호북성주와 신궁은 쓰게 웃으며 책상 가운데 놓인 증거를 살폈다. 까딱 잘못했으면 신궁이 아닌 다른 이에게 들어가 평생 동정호 호수 아래에 가라앉았을 귀중한 증거였다.
만약 증거가 외부로 유출되었다면 분명 호남성과 동정십팔채는 호북성에 대해 역공을 펼쳤을 것이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성주."
"하하, 별말씀을. 나라의 녹을 먹는 자가 어찌 비위를 두고 모른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주께서는 이 정보를 어디서 얻으셨는지요?"
"무림입니다. 정확히는 하오문, 그리고...동정호의 수적들에 의해 가족을 잃은 이들이 모아온 것이지요."
"...과연. 알겠습니다. 하오문...항간에는 동창과 정보력에 있어서 맞먹는다는 이야기도 있는 곳이군요."
"하하, 아무리 그래도 금의위만 하겠습니까."
신궁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차, 내 정신 좀. 무당파의 무사들에게 인사를 하는 걸 잊었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무림의 도적을 퇴치하는 건 강호의 정의를 위한 일이니, 공치사를 받을 일이 아니라 하더군요."
"허어, 아무리 도사들이라고 한들 어찌...?"
"그들의 말에 따르면."
호북성주는 싱글벙글 웃으며 지도를 가리켰다.
"이제 동정호의 물길이 열렸으니, 호남의 쌀이 무당산 근처까지 유통되었으면 한다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게 없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호북보다는...호남의 쌀이 더 괜찮으니."
"허어...."
신궁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설마 쌀 때문에 도우러 왔다는 말입니까?"
"농담이겠지요. 태극화 소저가 그러더군요. 뭐라더라...."
호북성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스승님께서 호남성의 쌀이 아니면 맛이 없다고 밥투정을 부리신다는 군요. 쌀가루로 만두를 빚었더니 찌면서 만두피가 다 터진다고."
"......그냥 비유겠지요?"
"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도사 분들이 농담도 참...."
무당파가 동정십팔채 토벌에 참전한 진정한 이유는 무당파만 알 뿐이었다.
* * *
진가장에서 아침을 맞이한 나는 아침식사를 하기 전, 먼저 한 가지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선화가 여기에 왔다라."
"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독고연은 아침밥을 만들러갔고, 왕소현은 결국 천수관음봉 대신 나의 육봉에 자지러져서 깨어나질 못했다. 진사월은 조금 다리를 절기는 했지만, 내 곁에서 나를 보좌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난감하군. 다들 색마의 집이라고 아는데, 선화는 이곳을 천무명과 관계있는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검마께서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는 않겠으나, 아무래도 신경쓰면서 지내시면 주인님께서 고생하실 것 같습니다. 어쩌시겠어요?"
"...음, 내 직감에 걸어볼까."
"직감이라 하시면...?"
"정체를 밝힌다."
밝혀지면 끝장이 나니 정체를 끝까지 숨겨야 할 여자가 있고, 정체를 적당히 밝혀도 서로 모른체하고 넘어가 줄 여자가 있다.
예를들어 화산파의 선주희나 남궁세가의 남궁유린같은 경우.
아붕이나 의붕이나 둘 다 정체가 '사실은 색마였다!'하고 드러나게 된다면, 화산파와 남궁세가가 색마를 죽이는데 전력을 다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선화는 다르다.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지. 여차하면 섭혼술로 제압하거나, 색마인 걸 받아들일 때까지 범하면 그만이니."
"음...나름 산동에서 좋게 받아주신 거 아니었나요? 빙마님의 말을 들어보니 제법 아껴주신 것 같던데."
"그건 천무명이니까 그런거고. 색마는 다르지. 사월, 아붕의 옷을 준비해다오."
우둑, 우두둑.
나는 옷을 벗고 곧장 아붕의 형태로 변했다. 진사월은 내게 무당파의 옷이 아닌 어린 시종의 옷을 가져왔고, 나는 가문에서 일하는 동자가 되어 정체를 숨기기로 했다.
"견희가 보면 정말 기뻐할 모습이네요."
"견희 돌아오면 이거로 해줘야지."
동자로 모습을 바꾸는 동안, 나는 진사월과 사공희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사공희는 현재 태극화로서 동정호의 수적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중이리라.
무당파의 움직임. 색마의 움직임. 그리고 호남성주가 동정십팔채와 연계했다는 소문.
그 정보는 다른 곳도 아닌, '하오문'에서 얻은 정보다.
"사월아. 고맙다."
"별말씀을요. 주인님께서 제가 있던 곳에 크게 베풀어주신 덕분에 지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걸요."
엄밀히 따지면 진사월은 하오문 소속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일했던 곳은 하오문과 어느정도 손이 닿아있었고, 나는 하오문을 통해 동정십팔채와 호남성주의 야합에 관한 정보를 사들였다.
물론 천년자패의 비밀은 나만 알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하오문이 전복희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본인들이 어떻게 해보려고 했으리라.
"이번 일로 견희에 대한 명성도 높아지겠지?"
"네. 동정십팔채의 잔존세력이나 녹림의 무리가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이미 색마부인으로 녹림왕의 딸을 겁탈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니 은원은 이미 생겼다. 애초에 무당파의 무인이 녹림의 무리를 퇴치하는게 나쁠 리가 없지."
"그렇죠. 후후. 견희가 어디가서 당할 아이는 아니죠."
사공희는 강하다.
이시아나 독고연에 비하면 성장이 다소 느리기는 하지만, 무공을 익힌 기간을 생각하면 둘의 성장속도를 진즉에 제쳐버린지 오래다.
"다음 백도제일화의 명성을 지키려면 최소한 초절정은 되어야 할텐데. 녀석, 은근히 승부욕이 강해서 지면 상당히 속상해할텐데."
"어머, 합법적으로 백도제일화에서 물러나게 하는 법이 있는데요?"
"무엇이냐?"
"임신이요."
"......."
나는 진사월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진사월은 싱글벙글 웃으며 내 변장의 마무리를 도왔다.
"많은 안주인 분이 계시지만, 저는 역시 견희가 행복해졌으면 좋겠거든요."
"완전히 네 딸처럼 생각하는구나."
"어머, 모르셨어요? 돌아가신 분 묘비 앞에서 부탁을 받았거든요. 같은 사월이라는 이름을 쓰는 만큼, 견희를 제가 딸처럼 챙겨주기로."
진사월은 내 머리를 옷 안쪽으로 말아넣으며 쓰게 웃었다.
"제게 딸이 있었다면 아마...견희만큼 자랐을 거예요."
"딸이 있었나?"
"네. 낳자마자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하고 헤어져야만했죠."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찾아보도록 하지."
"어머, 어떻게요?"
"엄마는 딸 닮지 않았겠어?"
나는 진사월의 하복부를 가볍게 쓸었다. 진사월은 웃으며 내 어깨를 툭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살짝 웃는 웃음에서 나를 향한 감정이 느껴졌다.
"크흠, 미안하다. 네 딸이라 예쁠 것 같아서."
"모녀가 한 남자를 섬기는 것도 좋지만, 혹시나 찾는다면 주인님께서 보시고 판단을 내려주세요. 그곳에서 행복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지만...."
"진가장에서 사는게 더 좋다면, 내가 꼭 데려오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주인님."
나는 진사월과 약속을 마친 다음 밖으로 나섰다. 진사월은 내가 담판을 지으러 가는 동안 자지러진 왕소현을 단정하게 보듬어줄 것이고, 나는 그동안 손님과 이야기를 나눠야만 했다.
"...어머."
마침 내가 들어가려고 한 방 앞에는 백발의 여인이 소복 차림으로 방을 나오는 중이었다. 나는 잠시 객실을 살핀 다음, 밤을 지새운 듯한 백발 여인을 향해 추궁했다.
"빙백봉 유설라 님이 아니십니까."
"어...너는?"
다소 피곤해보이고 몽롱해보이는 그녀는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푸른 눈동자에는 수면기가 가득해보였고, 나는 그녀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진가장에서 일하는 빙붕이라고 합니다."
".....붕?"
유설라는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눈동자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유심히 살폈다.
"어, 설마...."
"잠깨라."
찰싹!
나는 그녀의 가슴을 가볍게 좌우로 때렸다. 유설라는 기겁을 하며 몸서리를 쳤으나, 나를 향해 바로 무릎을 꿇으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오, 오해세요...!"
"뭐가 오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를 바로 알아본 건 합격이구나. 상으로 오늘밤 진사월의 방으로 들어와라."
"아...헤헤...."
천마신공을 일으키고 있어도 좋은 건 좋은 건지, 유설라는 내 말을 바로 알아듣고 겸연쩍게 웃었다. 나는 바로 손 앞에 있는 유설라의 가슴에 각각 손을 올리고 주물럭거렸다.
"류미아."
"앗."
유설라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상냥하게 웃으며, 가슴을 마구 쥐어뜯었다. 손이 크지 않으니 아이가 장난을 치는 수준이었고, 솔직히 얘기하면 그냥 애무였다.
"감히 나를 상대로 진실을 숨겼겠다?"
"아, 아니, 아얏.... 자, 잠시만요. 사실대로 말씀드릴게요...!"
"뻔하지. 류미아가 색마 찾으려고 너를 협박했고, 너는 정체가 안 들키려고 류미아에게 협조한 게 아니더냐?"
"그, 그렇긴 한데...!"
유설라는 울상을 지었다.
"사, 산동에서 말씀드리려고 그랬는데, 그랬는데에에...."
"그랬는데?"
"이, 일단 이거 좀 놓고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왜? 너도 누구처럼 어린 색마보면 정신을 못차리는 그런 취향이냐? 내가 이런 식으로...."
나는 표정을 바꾼 채, 유설라의 가슴을 아래에서 받치며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올려다보며 달뜬 표정을 지었다.
"헤으으...설라 누나...."
"!!"
"이러면 뭐 아주 심장이 두근거려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갑자기, 손가락이 습해지기 시작했다. 유두 근처를 간질이던 소복이 축축해지기 시작했고, 안에서 향긋한 빙정의 향이 내 코를 간질였다.
"너...진짜구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유설라는 눈동자처럼 피부가 붉어진 채, 방 안을 가리켰다.
"방금 전까지 보던게...그러니까...."
"보던 거?"
"그, 선화가."
"!!"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리고 유설라에게 양해를 구한 뒤, 선화가 있는 방을 가리켰다.
"선화 지금 깨어나있냐?"
"아뇨. 잠깐 잔다고 누웠어요."
"그래?"
나는 유설라의 손을 잡고 방 안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나 혼자 들어가는 것 보다는 유설라의 도움을 받는 쪽이 훨씬 나아보였다.
사락.
문이 열리자, 안에는 먹 냄새가 가득 울려퍼졌다. 책상 위에는 벼루 위에 먹을 잔뜩 먹은 붓이 올려져 있었고, 침상에는 소복 차림의 선화가 조용히 엎어진 채 자고 있었다.
"...저러고?"
"그, 한 편 다썼으니까 쉰다고...."
"허어."
신작!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었다. 집필을 마친 선화가 깨지 않게, 나는 내공을 극성으로 일으키며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걸었다.
"...월영귀신보에 허공답보까지...."
유설라가 다소 어이없어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마침 책에는 1편 完 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장편!'
단편집도 아닌 장편이다. 이제 1편을 썼으니, 앞으로 우후죽순으로 쏟아질테지. 나는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어우야."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정말 많은 여인을 범하고 다니는 쓰레기였다.
혼약을 맺기 전 남편을 죽이고 남편으로 위장하여 여인을 임신시키고 도망간다거나, 고아인 여인을 데려다가 키우며 먹는다거나, 유명 세가의 금지옥엽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즐긴다거나....
"응?"
마지막.
1권의 마지막에는 주인공의 첫사랑으로 보이는 여인과 운명적인 만남이 그려졌다.
세가에 호위무사로 들어간 주인공은 스스로를 '진우영'이라고 칭했고, 주인공의 첫사랑은 설가장의 금지옥엽 '설유화'라 하더이다.
"......."
나는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동시에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으으으.... 설라, 거기 있어요...?"
선화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침상 근처에 놓아둔 검은 색안경을 손으로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름 말이에요, 설유화보다는 그냥 선화로 그냥...."
끔뻑끔뻑.
선화는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몽롱한 금빛 눈동자가 나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특히 그녀의 눈동자는 내 아랫도리를 향했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자?"
스스로도 말하면서 어이가 없을테지. 나는 선화가 적은 '색마비행록(가제)'라는 책을 들어올렸다.
"이게 뭐죠?"
"......."
선화는 가만히 눈만 끔뻑이더니, 나와 유설라를 번갈아보고는-
"제 처녀보지는 천무명 공자의 것이에요!"
하고, 침상 위에서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작품후기]
??? : 만두피의 복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