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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 왕소현
왕소현은 꿈을 꾸었다.
주변에는 온통 하얀 안개가 잔뜩 끼어있고, 인기척은 전혀 없는 산속이었다.
무릉도원이 있다면 아마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왕소현은 천천히 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나가 어떤 장소에 도착했다.
탁.
두 선인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머리에는 둘다 방립을 쓰고 있어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으나, 옷을 입은 맵시나 모습을 보아하니 자신에 밀리지 않는-아니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여선(女仙)이 아닐까? 두 여인은 자신이 근처에 다가온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천기는 거스를 수 없다.”
탁.
검은 돌을 내려놓는 여인, 현녀(玄女)는 순리를 말했다.
“시대의 흐름이요, 역사의 흐름이다. 장강 물이 어디 역류하더냐. 이미 천기는 크나큰 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거스를 수 없어.”
“아니요.”
반대편에 앉은 붉은 여인은 현녀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탁.
붉은, 핏빛을 머금은 바둑돌이 현녀의 말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대한 용의 허리를 끊듯, 핏빛 여인-혈녀(血女)는 폭풍우 속에 떨어진 조각배처럼 위태로운 곳에 스스로 발을 디뎠다.
“천기는 다시 바꿀 수 있습니다. 역사란 결국 지상에 살아가는 인간이 주도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인간이 순리를 바꾸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천기 또한 변할 수 있지요.”
“그것을 역천(逆天)이라고 하는 것이다.”
“항상 인간은 흐름에 거스르고 살아왔지 않습니까? 나라가 뒤집힌 것도 그렇고, 인간은 변화를 추구합니다. 변혁이야말로 인간의 발전을 가져오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런 변혁이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어도?”
“당장 멸망하는 것도 아니지요. 변혁이 인류의 멸망으로 나아가는 것이 순리이며 하늘의 뜻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멸망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인생을 즐기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멸망의 날이 빨리 다가오기라도 한다면?”
“어차피 인간은 다 죽습니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사지요. 당장 내일 천지가 뒤집혀 죽든,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엎어져 죽든, 결국 죽는 건 다 똑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죽기 전에 즐길만큼 즐기다 죽자?”
“예. 한 번 사는 인생, 최소한 해볼 건 다 해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요?”
화아악.
왕소현은 혈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무책임하구나.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이 지는 것이지요. 반역을 일으킨 자들도 본인이 참수되고 시체가 오체분시 될지언정, 모두 그걸 각오하고 반역을 일으킨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너는 순리를 거스르겠다?”
“예. 그럴 겁니다. 실패한 반역은 역적으로 몰려 참수를 당하지만, 만약 승리하게 된다면....”
탁!
혈녀가 붉은 바둑돌을 놓았다. 순식간에 전세가 뒤바뀌었고, 혈녀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혁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 혁명이라. 만약 반역이 성공한다면, 그 또한 하늘의 뜻이겠지. 승리란, 끝까지 쟁취하는 것이니.”
솨아아아-
강한 바람이 불었다. 왕소현은 자신의 몸이 서서히 두 선인들에게서 튕겨나와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마지막에 이기는 자가 승리하는 겁니다.”
혈녀의 말과 함께, 왕소현은 의식을 잃었다.
* * *
찌르르르.
“.......”
왕소현은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인 듯 아닌 듯 이상한 꿈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있었다.
- 하고 싶은 대로 하되, 책임은 나의 것.
“......그래, 그렇지.”
이것이 깨달음일까.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일까.
왕소현은 주변을 살폈다. 생전 처음 보는 객잔이지만, 단정한 옷차림으로 갈아입혀진 건 분명 ‘그들’의 배려가 틀림없었다.
“일어났군.”
왕소현은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침대 바로 옆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청년은 자신을 향해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은, 복면을 벗은 채 정갈한 무복 차림으로 자신을 맞이했다.
“어...혹시....”
“반갑다. 마교 십마 중 색마, 비천색마라고 한다.”
“아....”
두근.
아랫배가 울린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였지만, 색마라는 말을 듣자마자 하단전이 뜨겁게 울리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발정하다니. 하아, 천년자패의 음기는 이래서 적절히 녹여먹여야 하거늘.”
“네?”
“반로환동...내공부족...영약...천년자패....”
비천색마는 길게 왕소현의 몸에 일어난 현상을 설명했다. 왕소현은 한 마디 한 마디 빠지지 않고 귀담아 들었다.
“...그러니까 색마께서는 제 머리를 살리기 위해 천년자패를 사용하셨던 말씀이십니까?”
“그래. 덕분에 강한 양기에 반응해서 아랫배가 조금 울릴 거다. 톡 까놓고 말해-”
“색마께 발정하는 거군요. 아, 지금 임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그래.”
왕소현은 그저 자신의 몸 상태를 사실대로 말했다. 하지만 색마는 다소 떨떠름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년자패의 내공 덕분에 네 배는 무언가를 꼭 감싸쥔 형태가 되었다. 마치 진주가 옥구슬을 품듯, 네 몸은 언제든지 양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언제든지 임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 임신하기 전까지 최소한 하혈할 일은 없겠구나.”
조개는 입을 꾹 다물고 품에 진주를 품는다. 그리고 자신의 배는 조개가 되었다. 왕소현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즉, 제가 품은 진주는 제 아이...!”
“남자의 정기가 없는 반쪽이지만. 그래. 너는 이제 누구에게든 질내사정을 받으면 임신하게 생겼다.”
“......!!”
왕소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그럼 이제 아이 만들기를!!”
“한 가지 착각을 하는 듯한데, 나는 네게 정기를 사정했지 정액을 사정한 게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남자는 말이다....”
색마는 성리학을 읊었다. 자연의 이치와 인체의 신비에 대해 지식이 쌓인 왕소현은 결론을 금방 알아냈다.
“그러니까 상공을 상대로 정자라는 걸 얻어내려면, 상공을 상대로 방중술을 이겨야 한다는 건가요?”
“그래. 아니면 최소한 화경...중반에는 들어야하겠지.”
화경 중반.
반로환동을 했을뿐 화경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녀는 고질적인 내공부족 때문에 초절정의 끝자락에 걸쳐있었고, 이제 다시 내공을 쌓아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네 하단전은 천년자패처럼 되었으니, 막대한 음기를 쌓는데 최적화 되었다. 기존의 그릇에 더하여...최소 삼갑자는 무난히 쌓을 수 있을테지.”
“삼갑자...!”
흔히들 화경의 경지에 오르는 자들의 최소 내공이 삼갑자라고 하더라.
“즉, 제가 내공이 삼갑자에 이르면 색마님의 아이를 임신할 수 있는 거군요!”
“왜 전부 다 임신으로 귀결되는지는 차치하고, 일단은 그렇다. 나는 화경 아니면 임신시키지 않아.”
“......?”
왕소현은 눈썹을 찌푸렸다.
“거짓말...같으신데요.”
“허, 거짓말이라?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 있다고.”
“제 기감은 그렇게 말하는데....”
왕소현은 눈썹을 으쓱였다.
“좋아요. 상공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제가 어찌 추궁할 수 있겠어요? 오랜만에 목표도 생겼으니, 따르겠습니다.”
왕소현은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이전보다 살짝 위로 올라온듯한 가슴은 반로환동의 흔적이었다.
누구처럼 양심이 없다고 할 정도로 어린 소녀가 되지는 않았지만, 20살 중반 전후의 육체 나이는 여자 무인으로서 최전성기를 자랑하는 수준이다.
“저, 꼭 화경이 되어서 상공의 정자를 가지겠어요.”
“......그래. 할 수 있다면 해봐라. 모두에게 기회는 동등해야하니.”
비천색마는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추색살 호북지부의 장을 맡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당분간 머무를 공간이 필요할테지.”
“아, 그거라면....”
“무당산 인근에 진가장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 내가 연통을 넣어둘테니, 진사월을 찾아라. 그곳에서 지내면 될 것이다.”
“.......”
두근.
왕소현은 아랫배가 연신 쑤셨다.
“이건...운명인가보네요.”
“뭐?”
“실은.”
소곤소곤.
왕소현의 말에 색마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더냐.”
“아, 그거라면....”
왕소현은 입꼬리를 도무지 내릴 수 없었다.
“하늘의 뜻이 아니겠어요?”
“.......”
* * *
“이야기는 잘 해결 되셨나요?”
“아아. 잘 해결되었다. 네 덕분에 다행히 이야기는 편했단다.”
왕소현이 호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사이, 나는 다른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독고연과 짐을 챙겼다.
“네가 정실이라고 하니 순순히 포기하더구나. 아니, 포기한 건 아니지.”
“네. 분명 끝까지 도전할 거예요. 검으로 저를 이기고 가가까지 이긴다면...어쩌면 정실 자리가 위협받을 지도 모르죠.”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건 여느 문파에서나 분란을 일으키는 불씨가 된다. 아무리 나이라는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고 한들, ‘나를 상대로 이긴다’는 조건에는 나이가 아무 상관이 없다.
성년이 되기 전의 존재라고 한들, 혹은 수백 수천 살을 먹은 존재라고 한들 나를 상대로 이긴다면 나는 순순히 바지를 벗을 각오가 되어있는 몸.
그 조건은 독고연에게도 왕소현에게도 동등하다.
“연아.”
“네.”
“...이거, 분명 두 개면 싸움 나겠지?”
나는 남은 천년자패의 진주를 꺼냈다. 하나는 완연한 내공을 가진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절반이 미처 채워지지 못한 불완전한 진주였다.
“가가, 원래는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너 하나, 시아 하나, 견희 하나. 하나가 다소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제가 호남 다녀온 동안 가가한테 가가의 씨를 받았으니 괜찮아요.”
“너, 왕소현이 임신을 채근한다고 너도 은근히 채근하는구나.”
정기가 아니라 씨라는 노골적인 표현을 할 줄이야. 나는 독고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렇게 하면 공평하게 나뉘어지겠지. 느긋하게 영약을 흡수한다면, 부작용도 없이 아주 편하게 내공만 흡수할 수 있을테고.”
“어쩐지 쪼개면 안 될 것 같네요.”
“그래. 이거 쪼개면 망가진다.”
이미 빙정으로 가둬 한 개의 진주가 되어버린 영약이다. 이걸 나누겠다고 빙정을 녹여 내부의 기운을 쪼개기라도 했다간, 분명 엄청난 손실이 일어날 게 분명하다.
“그래서 말인데, 이건 팔아치우는게 좋을 것 같다.”
“네? 들키지 않을까요?”
“괜찮아. 이거 천년자패는커녕 백년자패, 영약으로 치지도 못하는 수준이란다.”
완벽이 아닌 불완전한 상태의 영약일 뿐. 한 움큼 크게 퍼낸 것이 아니라, 바닥에 있던 것을 손으로 긁어모은 셈이라 불순물도 제법 많다.
“천가장에 남은 네 개 건물을 마저 지어야지.”
“아...역시 정하셨군요!”
“아니, 그런게 아니다. 미리 집을 지어놓으려고 하는 거야.”
식객으로 잠깐 있더라도 그들이 머물 공간이 필요했다. 빈 터를 계속 놔두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천가장 개축공사로 하자꾸나.”
“그럼 나머지는요?”
“......연아. 천년자패의 내단은 두 개가 나온 것이다.”
펄럭.
나는 독고연의 엉덩이를 붙잡고 침대에 집어던졌다. 독고연은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고, 나는 그녀의 치마를 단번에 허리로 넘겼다.
“역시 선녀는 이래서 좋아.”
“아이 참....”
그녀의 고간은 방금 씻고 온 것처럼, 사람 특유의 바다에서 나는 듯한 샅내가 전혀 없었다. 나는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고간을 쓸었다.
“연아. 그거 아니? 내공의 흡수는 사실 앞보다 뒤가 더 효율적이라는 거.”
“...네?”
꾸우욱.
나는 진주를 독고연의 구멍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히끅?!”
“천가장에 들어갈 때, 안에 잘 숨겨놓아라.”
“아흐, 앞으로 넣어주셔도 되는데...!”
“어허. 빨리 내공 흡수해야지.”
나는 독고연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골반을 타고 내려가 그녀의 열기 가득한 고간을 향해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그래야 화경 되어서 임신하지 않겠느냐?”
“...가가, 그거 잊으시면 안 돼요.”
독고연은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흘겼다.
“저희는, 화경되면 바로 임신시켜 주시기로.”
“물론이지.”
정실과 첩이 어찌 같은 조건이랴.
나는 왕소현이 떠날 준비를 마칠 때까지, 독고연과 내공 수련에 몰두했다.
* * *
“천기를 거스르는 것 조차 인간의 강인한 의지라...인정하마. 그렇다고 돌을 두 번 연속으로 놓는 건 안 된다.”
“아잇, 언제 봤대. 노안이라 안 보일 줄 알았는데.”
“나는 다 보인다. 모든 것을 보는 힘을 이어받은 내가 어디 못 보는 게 있을 줄 아느냐?”
“내 낭군님의 정사 장면? 지금 뭐하고 있대? 순진한 처녀 꼬셔서 뒷동굴 개발이라도 하고 있나? 혼자만 보지 말고 나도 좀 같이 보자 이거야!!”
“.......”
“참 웃겨. 안 보는 척 하면서 다 보고 있으니. 아, 빨리 얘기해요. 생리혈 아깝게 지금 뭐하는 거야. 배란손실 어쩔 거야. 당장 애 생기면 생리도 안 하는데! 내가 왜 지금 이 육체 나이로 고정하고 있는지 몰라?!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낳아야 애가 건강하게 나온다고!”
“나는 그런 거랑 관계없다. ......그리고 꼬우면 이기시든가.”
“아아아악!!”
곤륜산의 하늘은 오늘도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