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91화 (291/568)

--------------------

천년자패

검마.

추색살 호북지부 지부장.

검각주.

모든 직책을 아우르게 된 왕소현은 호북에서 ‘살 공간’이 필요했다.

얼마 전.

그녀는 추색여단을 만들어 색마를 쫓기 위한 기반은 마련하였으나, 갑작스러운 천마의 부름을 받고 천산에 올랐다.

- 강호에 다시 나가고 싶은가?

천마는 마검비의 속내를 꿰뚫어보았다. 검을 이길 수 있는 상대를 찾기 위해 마교까지 검각을 이끌고 왔던 그녀는 다시 강호로 나가고 싶어했고, 천마는 마검비의 마음을 읽었다.

- 강호에 나가도 좋다. 단, 한 번 마인은 영원한 마인. 완전히 검각주로 돌아가는 것은 금한다.

천마 이전의 천마에 의해 한 번 검마가 되었던 존재가 자기 마음대로 강호에 나간다면 천마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

마교를 마인이 아닌 일반인으로 나가는 방법은 세 가지.

죽어서 나가거나, 무공을 폐하고 팔 한 쪽을 자르고 나가거나, 아니면 천마의 인정을 받거나.

마검비는 세 번째였다.

- 그대가 다시 검마가 된다면 중원에 나가도 좋다. 단, 누구에게도 검마의 자리는 알리지 않으마. 그저 너는 검마로서 운명의 날이 되는 순간, 비천, 지린, 야인 셋 중 어디에 설지 정하면 된다.

마교십마.

천마가 지정한 열 명의 마인들은 마교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지도자를 지명하는 자들이었다.

무공의 수위와 상관없이, 마교 전체의 안녕과 발전을 생각하며 후계자 중 누가 천마가 될지 정하는 자리였다.

- 아주 오래전 그대는 내 편에 섰지. 그 공을 높이 사, 그대에게 특혜 아닌 특혜를 내려주마.

천마는 이전에 검마였던 왕소현이 자신의 편에 선 것에 보답했다.

나이는 천마가 다소 높았지만, 천마가 후계자였을 시절 왕소현은 검마로서 천마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었다. 왕소현은 당시 지금의 천마를 선택했고, 천마가 지존이 되면서 검마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 검마인 걸 숨긴 채, 검각주로서 나가라. 무림맹과 연계하여 ‘추색여단’의 기치를 내건다면 충분히 백도에서도 받아들일테지. 찾아라! 너를 검으로 이긴 자를.

- 전부 보고계셨습니까?

- 흐흐, 하늘 아래 내 눈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 그럼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 ......내 눈을 피할 곳은 없지, 피하는 사람은 있거든?

천마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천마를 지독하게 닦달한 결과, 왕소현은 자신의 짐작이 얼추 맞게 들어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색마는 호북에 있다!

바로 이시아가 숨어있는 호북 근처!

‘내가 곁에서 호위를 서야해.’

올바른 아내란 항상 남편을 옆에서 보좌하는 자.

따라서 왕소현은 호북에 터전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아비를 위해, 중원 무림에 새로이 검각을 열어 지아비를 받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

혼수!

검각!

천하에 구파일방 중 말석 수준에 이르는 문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파 전체를 혼수로 가져오는 여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지킨다.’

왕소현은 추색여단을 이끌면서, 정작 속으로는 색마를 지키려고 했다.

나뭇잎을 숨기려거든 숲에 숨기는 법.

천하가 어찌알까.

그 누구보다 색마들의 행동에 증오를 내비치고 혐오하던 여인이 사실은 뒤로 색마를 지아비로 섬기고 색마의 행적을 숨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그걸 위해서는 반드시 ‘거점’이 필요했다.

단순히 잠시 머무를 객잔이 아니라, 진짜 오랫동안 기거하면서 추색여단의 숙소 겸 차후 검각의 본거지 겸 사랑해 마지 않는 낭군님과 아이들을 가르치고 키울 신혼집이 필요했다.

이미 왕소현의 머릿속에는 소정이니 현진이니 자신의 이름 한 자를 따와 이름조차 모르는 색마의 이름과 섞은 수백의 태명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 하하, 부인. 현아는 그대를 참으로 닮은 것 같소.

- 아이, 몰라요.

- 이곳, 참으로 좋은 곳이구려. 우리, 이곳에서 백년해로합시다. 우리의 첫 만남은 비록 좋지 않았으나-

- 쉿. 지금 행복하면 됩니다, 상공. 상공께서는 저를 검으로 이기셨고, 제 처음을 가져가셨습니다. 그거로 된 거예요.

- 고맙고, 사랑하오. 부인.

!!!!

그녀의 청사진은 완벽했다. 예전에 중원을 한창 활보할 때 곳곳에 검각을 옮길 ‘터’를 알아보고 다녔고, 호북에는 아래에 기맥이 흐르는 아주 좋은 터가 네 개 있었다.

하나, 호북성의 성도.

둘, 제갈세가의 본가.

셋, 무당산.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그녀가 장원을 통째로 구매하려고 했던 곳, 현재 이름 진가장.

“......내 신혼집을 사들인 사람 얼굴 좀 봐야할 것 같은데.”

늦은 밤.

투기(鬪氣)를 잔뜩 머금은 왕소현은 진가장으로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꽤 늦은 시간이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고, 앞에는 무당파의 무사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당파?”

왕소현은 무당의 도사들이 진가장을 지키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잔뜩 성을 내며 왔더니 무당파가 있다?

혹시, 무당파는 도시 아래에 도장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닐까?

‘그럼 안 되는데.’

무당파와 척을 지기에는 부담이 크다. 무당파도 나름 이유가 있어 진가장을 호위하고 있는 것이리라. 무당산에 역병이 돌며 큰 낭패를 봤던 적이 있으니, 무당산 인근 도시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는 것도 썩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끄응....”

왕소현은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숨겼다. 복면과 갓으로 정체를 숨긴 만큼, 남들에게 ‘검각주가 나타났다!’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보았는가? 약선 어르신이 아직도 진료하고 계시더군.”

“에잉, 쯧쯧. 이래서 외지인들이 문제야. 약선 어르신을 이리 밤늦게까지 괴롭혀서야 쓰나?”

지나가면서 들려오는 소리에 왕소현은 귀를 쫑긋 세웠다.

“되게 예쁜 소저들이던데?”

“아 예쁘면 괜찮지. 약선 어르신, 예뻐서 봐줬구만 그래.”

“.......”

왕소현은 전해들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진가장의 담벼락을 따라 달렸다. 확실히 ‘약선당’이라고 하는 곳은 아직도 불빛이 켜져 있었고, 안에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

어디선가 느껴본 듯한 기운이 가득했다. 왕소현은 안으로 들어가기 전, 호흡을 크게 가다듬었다.

드르륵.

“실례하오.”

왕소현은 문을 열었다. 약선당의 안에는 정말 ‘형형색색’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여인들이 ‘약선’으로 추정되는 노인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잠시 용무가 있어서...?”

왕소현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이들과 확연한 차이가 나는 백발의 여인은 붉은 눈동자만 제외하면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존재였다.

“그쪽은...?”

“어, 저는, 그러니까....”

“에잉, 어째 오는 사람들이 죄다 미인이구만. 이러면 남들이 오해하잖나. 약방 늙은이는 해 지면 칼같이 문 닫더니 미녀들이 오면 문 안 닫더라고.”

왕소현은 입발린 소리에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무림인들이 와서 그런게 아니겠습니까.”

이미 밖에 있는 사람들은 멀리서 구경만 할 뿐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있었다. 그들은 미모의 여인들을 보며 그 정체를 충분히 가늠했고, 괜한 시비에 걸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쪽은....”

“아.”

왕소현은 셋 중 가장 어려보이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풋풋함이 느껴지는 여인의 모습은 왕소현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미봉?”

한 때, 자신과 함께 육봉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던 아미파의 여고수.

소녀는 아미봉이 어렸을 때의 모습을 쏙 빼닮아있었다.

“소, 소녀는-”

“되게 닮았지? 나도 젊은 시절에 지나가면서 봤는데 너무 닮아서놀랐소.”

약선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몸을 일으켰다. 세 여인의 앞에는 제각기 흰 봉투에 담긴 약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달이 차오르기 전에 차와 함께 마시면 훨씬 좋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어르신.”

“뭘. 나야 제값받고 파는데 감사인사를 들을 게 있나. 그래서 그쪽은 무슨 일로 오셨소?”

“진가장의 주인을 만나러 왔습니다.”

왕소현은 갓을 벗었다. 그러자 얼굴에 색안경을 쓴 여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거, 설마 신성봉(新星鳳)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 이름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 줄 몰랐군요. 대부분은 저를 검각봉으로 기억하던데.”

“아무렴 내가 그대처럼 유명한 분을 모를까. 무려 세 번이나 육봉의 별호를 갈아치운 여인을. 그런데 끄응, 다른 자들이라면 몰라도 검각주를 내치기에는....”

약선은 몹시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안쪽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열었다.

“잠깐 확인을 좀 하겠소. 이 상자 안에서 무슨 냄새가 나지?”

“...냄새요? 향기가 아니고요?”

소녀 검사가 말했다.

“꽃향기인가요? 풀냄새 같기도 하고....”

검은 색안경을 쓴 여인이 말했다.

“......나쁜 냄새는 아닙니다.”

손으로 얼굴을 덮은 백발의 여인이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어머, 이거 되게 향이 좋네요. 무슨 꽃이에요?”

왕소현은 상쾌한 듯한 향에 눈을 반짝였다.

“.......”

약선은 진심으로 짜증이 난다는 듯한 얼굴로, 욕지기를 턱밑까지 차오른 듯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세상 한 번 더럽게 불공평하군.”

“어, 어르신?”

“아무것도 아니오. 온 천하 사람들이 이 약을 두고 냄새가 좋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리 맡아도 거지같단 말이지.”

약선은 다소 해탈한 듯한 얼굴로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명패가 붙은 문을 가리켰다. 상자에는 천야화(天夜花)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내 선에서 보낼 분들은 아닌 듯 하고, 어서 들어오시오. 그쪽도...소개장을 들고 왔다고 했지?”

“아, 네! 소녀, 선화라고 하옵니다.”

색안경의 여인은 품에서 다소곳이 서찰 하나를 펼쳤다. 약선은 서찰을 자연스레 받아 펼쳤고, 스스로를 선화라고 부른 여인은 화들짝 놀랐다.

“저, 저기요!”

“그놈 필체가 확실하군.”

약선의 한탄은 더욱 깊어졌다.

“안쪽으로 오시오. 진가장의 가주께 안내하리다. ...네 명 모두 오시겠소?”

약선은 연신 ‘썩을 놈’을 중얼거리며 넷을 진가장의 안으로 초대했다.

* * *

"정말 엄청 비싼 물건이었네요, 가가."

"당연하지. 잠깐이라도 너를 치장하는데 내가 허투루 물건을 쓰겠느냐."

"후훗, 예쁘네요. 저 멀리 북방의 겨울을 깎아 만든 것 같아요. 꼭...빙정 안에 설원이 펼쳐져 있는 느낌?"

"......예쁘면 됐다."

독고연은 자신의 몸을 꾸민 보석들에 한껏 기뻐했다. 전복희가 보석상으로 올 때까지 보석상에서 자리잡았던 우리는 보석상 주인을 섭혼술로 제압해 납치 거점을 마련했다.

새근, 새근.

혈이 눌려 완전히 잠에 빠진 전복희는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나와 독고연은 전복희에게 구속구를 채운 다음, 돌돌 말아 인적이 드문 곳에 숨었다.

우리가 전복희를 납치한 지도 어느덧 세 시진.

보석을 보러 갔던 여인이 해가 중천을 지나가도 돌아올 기미가 없으니, 분명 누군가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리라. 또는 보석상을 찾은 손님이 보석상 내부의 상황을 보고 관에 신고를 했을 지도 모른다.

"연아, 관아의 여인을 납치했을 때는 관무불가침이라는 말이 통용될까?"

“어렵죠. 관가의 여식을 무림인이 납치한 이상, 관에서도 무림인을 동원할 수 있어요. 까딱 잘못하면....”

“금의위나 동창이 파견 나와서 우리를 추적할 지도 모르지.”

여인을 납치했다.

당연히 색마가 의심되며, 추색살 호남성 지부에서 본격적으로 냄새를 맡아 움직이기 시작하리라.

“우리는 정의를 행사하고자 하거늘, 어찌 사람들은 이리 몰라주는 걸까.”

“겉으로 보이기에는 여인을 납치해서 범하는 거니까요.”

“그렇긴 하지. 흐흐, 그러니 아주 만천하에 알리는 거다. 전복희를 동정호에서 발견되게 한 다음....”

“동정십팔채와 연계한 실상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자?”

“그렇지.”

여인이 납치된 것을 추적하고 들어갔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동정십팔채의 수적 무리와 호남성주가 야합을 벌였다니!

“눈가리고 아웅해도 결국 수적 무리와 혼인을 맺는 셈인데,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게 용하네요.”

“대외적으로 보이는 요소라고는 강을 중심으로 한 ‘무림세가’의 청년과 혼약을 맺는 셈이니까 말이야.”

강가장(江家場).

강탈해를 비롯한 동정십팔채는 무림세가인 척 신분을 숨겼다. 아마 동정십팔채의 소채주와 강가장의 후계자가 같은 존재라는, 강가장이 곧 동정십팔채인 걸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가, 어떻게 하시겠어요?”

“네 제안을 따르마.”

나는 독고연의 제안에 따라, 정의를 실현하기로 했다.

“예비신랑의 앞에서 놈의 여자를 범한다.”

색마의 행보를 멈추게 하는 자가 나타나지 않는 한,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

[작품후기]

야화!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