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90화 (290/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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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자패

호남성이 성도는 장사(長沙)다.

남쪽의 산지에서 흘러들어오는 물길이 길게 북으로 이어져 흘러내리는 곡창지대로부터 장강으로 합류하는 물길에 위치한 이 도시는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다.

형주 남부의 사군 중 하나로, 위촉오 삼국의 이야기를 아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얘기하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황충이 처음 등장한 도시.

적벽대전 이후 형주 남부의 4군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유비가 황충을 얻은 바로 그 도시가 장사다. 호남성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호남성주 또한 이 장사에 살고 있다.

전복희도 마찬가지.

과거 신화 속 존재인 여와와 복희 중 복희의 이름을 따온 이름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필 성이 함께 붙어서 여러모로 슬픈 이름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바꿨겠지?’

희라는 여성스러운 이름만 남겨두고 성과 이름을 갈아버린 혈자희의 심정이 대략 이해는 간다.

새근, 새근.

나는 내 품에 지쳐 쓰러진 독고연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배에 묶인 끈을 풀었다.

우리가 탄 아주 작은 쪽배를 동정호에서 장사까지 이끌어주던 상선에 이어진 천잠사는 중려신화정에 의해 아주 쉽게 끊어졌고, 우리는 느긋하게 강 위의 밤을 만끽하며 휴식을 취했다.

“가가.”

“깼나?”

“아니에요. 충분히 잤어요.”

내게 조갯살을 대접하느라 한창 힘을 쓴 독고연은 옅게 웃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는 그녀의 기특함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맞췄다.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냄새라고는 전혀 없으니.”

내 정기를 입에 한껏 머금고 삼키기까지 했으니, 구취가 날 거라고 생각하며 걱정하는 모습이 여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그녀의 입속으로 검지를 밀어넣었다.

“정 신경쓰이면 한 번 소독하자꾸나.”

“소독이요?”

“그래. 정확히 얘기하자면...불로 씻어내는 거지.”

“정말 그게 되나요?”

“지금 의심을 하는 거냐? 나는 네 십팔음뇌절맥을 치료한 사람이 아니더냐.”

독고연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정말 살짝 열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 안으로 검지를 쭉 밀어넣은 다음, 혀를 간질이며 중려신화정을 일으켰다.

화륵.

불꽃이 타오르기는 하지만, 결코 인체에 해를 끼치는 불꽃이 아니다. 독고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고-

츄릅.

내 손가락을 마치 작은 양물마냥 다루기 시작했다. 그 사이를 못 참고 유사성행위를 하는 모습에 나는 어울려주기로 했다.

츄릅, 츄릅.

“동정호에서 장사까지 오려면 제법 거리가 멀지. 동정소패왕 강탈해는 동정호에서 지낼 것이고, 혼약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둘의 만남에 관한 정보를 한껏 모았다. 그리고 지금 전복희가 최대한 자신의 몸값을 비싸게 끌어올리기 위해, 혼인 전까지 단 한 번도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이런 경우는 두 가지. 숫처녀라서 부끄러워하거나.”

“츄릅, 하아. ...이미 처녀가 아니라서, 낙장불입의 상황까지 몰고가거나.”

멀리서 본 모습이 충분히 미인이라 고작 비처녀라는 이유로 혼인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겠지만, 이후의 혼인 생활은 결코 순탄하다고 할 수 없으리라.

“강탈해, 엄청 실망할테지.”

“근본이 수적인 만큼...처녀를 빼앗아 간 자를 찾아서 죽이려고 들지 않을까요?”

“그래. 자기와 혼인하는 자는 꼭 처녀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지. 어찌보면 환상을 가지고 있는 셈인가? 양갓집 규수는 무조건 처녀일지도 모른다는.”

시대가 성에 관대한 시대도 아니고, 겁간을 당했음에도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는 보수적인 시대에 비처녀로서 혼인을 한다?

“쯧, 불쌍한 녀석. 몹시 실망하겠군.”

“비처녀랑 결혼해서요?”

“그래.”

만약 전복희가 비처녀다? 그럼 내가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전복희가 처녀라면, 강탈해만 실망할 것이다.

그녀의 처녀는 내가 취할 것이니.

“몰래 밤에 들어가서 금방 천년자패를 훔치고 오자꾸나.”

“흠...가가, 그래도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다녀가면 섭하죠.”

독고연은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동정소패왕, 나쁜 사람 맞죠?”

“물론이지. 동정호를 점령한 놈들이 설마 통행세만 내놓으라고 하겠니?”

나름 별호는 그럴듯하게 지어놓았지만, 결국 본질은 수적이다.

“녹림의 무리가 죄다 그렇지. 시아와 해남에 갔을 때 만난 해적들이 있었단다. 그들은 같은 사람을 노예로 부리며 써먹었지.”

도적은 도적일 뿐이다.

녹림왕 본인도 대외적으로는 그저 산의 주인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아래에 있는 부하들은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도적에 불과하다.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그럼 가가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나? 당연히 비천색마지.”

적어도 지금은.

“하지만 언젠가 천무명으로서 살지도 모르고...또 ‘이름’을 받으면 그 때는 모르겠구나.”

“그래요? 저는 비천색마인 천무명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천무명으로 그렇게 날뛴 이유가 없지 않니?”

“후훗, 그러게요. 다들 알면서 모른척하는 세상이 온다거나?”

독고연은 몸을 일으켰다. 나 또한 그녀와 함께 배에서 일어났다.

“해, 정말 예쁘네요.”

“그래. 밤이 끝났군.”

드디어 장사에 도착했다. 나는 역체변용술을 이용해 몸을 바꾸었고, 독고연은 미리 준비한 옷으로 환복하며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찰랑거리는 ‘백발’을.

“가가,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뭘. 이건 일종의 시험이다. 우리가 추색살이 돌아다니는 와중에 얼마나 확실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있지.”

과연 무림맹주 독고자영의 움직임은 얼마나 빠를 것인가.

“가시지요, 아가씨.”

“네, 무사님.”

독고연은 여느 명망깊은 가문의 여식이 되었고, 나는 그녀를 지키는 호위무사가 되었다. 대외적으로 색마부부단에 대한 정보는 어느정도 퍼져있기는 하지만, 다행히 널리 퍼진 정도는 아니다.

‘적어도 독고연이랑 나랑은 걸리지 않았지.’

색마부부단으로 활동하던 때, 독고연은 흑발로 머리를 물들이고 다녔다.

이렇게 백발로 대놓고 돌아다니는 건 아마 처음이 아닐까.

“무사님. 어서 저한테 그걸 끼워주세요.”

독고연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왼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물건을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 하얀 보석이 잘 세공된 만년한철의 가락지 위에 박혀있었다.

“정말...예쁘네요.”

“아무렴. 내가 직접 세공한 건데.”

검술로 현경 고수 정도 수준에 이르면 세공 실력도 어지간한 장인 수준이다. 천하제일급은 아니더라도 여느 성내 수준급은 되리라.

“가가, 그런데 이거 말고 더 있지 않아요?”

“물론.”

나는 물건들을 모두 꺼내 독고연을 한껏 치장했다. 귀걸이, 목걸이, 머리장식, 그리고 팔찌까지.

중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영롱한 보석으로 장식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감히 천년자패 따위가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미인이었고, 선녀같았다.

“후우, 이제 미끼를 던지면 되는 건가....”

“가가, 저만 믿으세요. 저 원래 유명세가 금지옥엽이에요.”

독고연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허리를 폈다. 방금 전까지 청순하고 요염했던 소녀는 사라지고, 다소 차가워보이기까지 한 여인이 가라앉은 눈으로 도시를 가리켰다.

“가죠.”

“예, 아가씨.”

독고연에게서 마교 소공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순식간에 표변한 그녀의 뒤를 따르며 속으로 감탄했다.

‘진짜 많이 자랐네.’

천하를 주유하며 여러 곳을 돌아다닌 결실일까? 미성숙한 소녀와도 같던 독고연은 이제 더이상 소녀라고 부를 수 없는, 여인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히 성장했다.

“어이쿠, 남매지간인가? 여동생이 참으로 고우시구만.”

“씨익, 씨익....”

“.......”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보다.

* * *

이른 아침.

“아가씨, 이건....”

“졸부같아. 다음.”

“그럼 아가씨, 이쪽은 어떻습니까?”

“촌스러워. 다음.”

“...다 떨어졌습니다.”

절그럭!

여종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석함이 바닥을 굴렀다.형형색색으로 반짝이는 보석들은 바닥에서 서로 뒤섞였고, 보석함의 주인은 씩씩거리며 보석들을 발로 짓밟았다.

“이깟! 장물들! 어떻게 하나도 예쁜 게 없어!”

전복희는 분통을 터뜨리며 이를 갈았다. 동정소패왕이 엄선하여 선물한 보석들은 하나같이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죄다 동정호에서 수적질을 하며 빼앗은 물건이었다.

살인, 약탈, 인신매매 없는 깨끗한 수적? 차라리 색마가 미녀를 두고 지나친다고 하지. 보석함에서 빠져나온 보석들은 죄다 장물이었고, 주인들은 아마 지금쯤 발목에 돌덩이가 묶여 동정호 바닥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복희는 동정소패왕이 장물을 선물로 준 것에 분개하는가?

아니다.

“내 결혼식에 어울릴 보석이 어떻게 하나도 없냐고!”

전복희는 보석이 순수하게 ‘예쁘지 않아서’ 분개하고 있었다.

“일생일대, 단 한 번 밖에 없는 결혼식이잖아! 그런데 왜 내 미모를 돋보이게 해줄 아름다운 보석이 안 들어오는 거야?!”

“그, 그게...값이 워낙 비싸서....”

“아버지께서는?!”

“이번에 표국에 투자를 하셨다가 큰 낭패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걸 채우느라....”

쾅!

전복희는 주먹을 쥐고 침대를 내리쳤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여인이라 그리 힘은 강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분노는 확실히 드러났다.

“씨이, 한 번 더 나갈 거야! 채비해!”

“네....”

여종들은 지친 얼굴로 전복희의 외출을 도왔다. 그녀는 전의를 불태우며 보석상 전체를 헤집어놓을 것 마냥 씩씩거렸다.

“흥...! 내가 고작 왈패들 무리의 결혼식보다 못할 줄 알고...?”

전복희는 호남 일대 무가 여식들을 향해 시기하고 있었다. 호북성주의 딸로서 그들의 결혼식에 참여할 때마다 휘황찬란한 장신구에 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공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는 문파나 세가와 달리, 성주의 딸이기는 해도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자금에는 한계가 있었다.

부친이 호남성주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름칠을 했던가? 까닥 잘못하여 동정호의 수적 무리와 혈연을 맺게 되었지만, 호남성주도 전복희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관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정파인이나 사파인이나 죄다 사고만 일으키는 왈패 집단에 불과하다.

아무렴 동정호의 수적들과 혼약을 맺는 것보다 명문세가의 자제와 혼인하는게 훨씬 보기에 좋겠지만, 전복희 부녀는 굳이 말하자면 회색에 가까운 자들이었다.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범법이라도 서슴지 않는 이들. 그렇기에 그들은 호남성주와 그의 여식임에도 불구하고 동정호의 수적들과 손을 잡았다.

저벅, 저벅.

전복희가 길을 걸을 때마다 사람들은 고개를 넙죽 조아렸다. 전복희는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사람들의 틈을 지나, 보석상에 발걸음을 옮겼다.

“이리 오-”

“...그래서 여기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시죠?”

“예. 죄송합니다. 여기서는 도저히 취급을 못하는...헉.”

보석상은 전복희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전복희는 보석상이 움켜쥔 보석과 보석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누구신지...?”

“호남성주의 금지옥엽, 전복희 님이십니다.”

호위무사로 보이는 청년이 전복희를 바로 알아채고 소개하자, 백발의 여인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전 소저. 저는 천고 상단의 시희연라고 합니다.”

“아, 네....”

전복희의 눈은 시희연이라고 소개한 여인에게-정확히는 그녀가 착용한 장신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만년빙정을 보석처럼 세공하여 깎아 만든듯한 장신구.

‘갖고 싶다.’

전복희는 손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시희연이라고 불린 여인은 겉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보석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으나, 의복은 최고급이라고 할 수 없는 중상품-소위 가성비가 높은 듯한 연분홍색 천이었다.

“어머, 혹시 그걸 감정하려고 오신 건가요?”

“...예. 정확히는 팔러 왔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처분을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시희연은 다소 씁쓸한 눈빛으로 보석상의 앞에 놓인 장신구를 품에 넣었다. 한 쌍으로 보이는 아리따운 보석에 전복희는 눈이 뒤집혔다.

“어머, 왜요?”

“최소한 호북, 아니 그 위로는 올라가야 대금을 치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아, 곤란하네요.... 뱃삯을 구해서 장강으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아...그래요?”

전복희는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사람좋게 웃었다.

“그 문제라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희 아버님께서 호남성주시거든요.”

“네? 아...하지만 어찌....”

“아가씨.”

호위무사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시희연을 진정시켰다.

“호의를 받으시지요.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네, 알겠어요. 잠시 신세를 져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자, 어서 가요.”

전복희는 싱글벙글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몸을 돌린 순간.

퍼-억.

호위무사가 단걸음에 전복희의 뒷목을 손날로 내리쳤다. 전복희는 뒤에서 느껴진 강한 충격에 눈을 부릅뜨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째....?”

“소문대로네요. 혼인 패물을 구하느라 정신이 없다더니.그렇게 예쁘게 보이고 싶으셨어요?”

퍽, 퍽퍽.

보석상 안에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기절했다. 전복희는 자신을 향해 쪼그려앉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희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 이....”

“남의 결혼반지를 빼앗으려고 들다니. 건방지네요. 가가, 다 됐나요?”

“섭혼술 걸어뒀다. 나중에 깨어나도 이상한 놈이 납치했다고 증언하겠지.”

호위무사는 시종과 보석상을 옆으로 치웠다. 그 사이 시희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소개하도록 하죠. 저는 색마부인입니다.”

시희연, 그녀는 스스로를 색마부인이라 칭했다.

"당신의 정조를 범하러 왔습니다. 제 남편이."

"나다."

호위무사가 바지를 내렸다.

뿌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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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희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작품후기]

색마!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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