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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색마-287화 (28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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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곳도 찾지 못해 나는 피하려고 애써 봐도 거부조차 할 수 없는

추색살은 무림맹의 단체다.

하지만 무림맹 안에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경우, 지역에서 크게 활약하는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고는 한다. 곤륜에 추색살 지부로 곤륜파의 운룡을 선정한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그러나 무림맹의 영향력이 충분히 미치는 곳이라면 추색살의 구성은 사뭇 달라진다. 무림맹이 추색살 부대원에 누구를 파견하느냐에 따라, 무림맹이 생각하는 중요도가 갈리는 것이다.

특히 무림맹에서 세번째로 입지가 높은 존재, 무림맹의 군사 제갈길의 본가인 제갈세가라면 더더욱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 추색살 호북 지부의 수장으로 당연히 무당파가 나서야 하지 않겠소?

제갈세가는 호북에서 큰 역할을 맡기를 원치 않았다. 따라서 자연히 추색살 호북 지부장에 대한 제안은 무당파로 넘어갔다.

- 정중히 거절하리다.

무당파에서는 일언지하에 추색살 호북지부장의 자리에 누군가를 추천하기를 거부했다.

무당파 내에서도 현타도사 사정후, 태극화 사공희 등 추색살 후보로 정말 많은 이들이 올라갔으나, 장문인 현철 도사가 직접 나서서 자리를 거부했다.

- 현타 도사는 무당파의 장로로서 무당파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쁘며, 태극화를 추색살 호북 지부장 따위로 두는 건 격에 맞지 않소. 둘을 제외하면 무당파 안에서 누구도 추색살로 나설만한 이가 없으니, 무당파는 지부장 자리를 포기하겠소.

물론 현철 도사는 아주 정중하고 예의 바른 말로 돌려 말했다.

무당파에 아무런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 장문인이 직접 나서서 무당파 내부를 단속해 추색살 호북지부장 자리를 맡지 않게 되었다.

팔대세가의 제갈세가.

구파일방의 무당파.

두 세력에서 호북지부장 자리를 사양했는데 그 누가 감히 지부장 자리에 나설 수 있으랴?

한 문파의 수장급 되는 자가 아니라면, 호북에서 색마가 나타났을 때 두 세력에 대해 지원 요청-이라는 이름의 명령-을 하기 상당히 난감할 것이다.

한창 무림맹에서도 골머리를 썩히던 가운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 하나가 뻥 뚫렸다.

- 그 자리, 제가 맡지요.

마검비 왕소현!

검각주 왕소현은 백도에 몸을 걸쳤다 흑도로 넘어갔으나, 그 이후의 행보는 딱히 흑도 스럽지 않았다.

중원 누구도 마검비로서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천산마교 내에서도 딱히 다른 마인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섬서에서 활동하는 동안 크게 유명세를 떨쳤고, 백도에서도 마검비에 대해 딱히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 마인이었어도 색마 잡는 마인은 다르지!

- 마검비 덕분에 섬서는 아직도 색마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군! 아예 씨가 마른 셈이야!

- 마검비가 호북에 기거를 한다고...? 혹시 마검비가 추색살 맡은 거 아니야?

사람들의 예상은 딱 들어맞앗다. 색마전선은 흑백을 가리지 않았고, 검은색보다는 회색에 가까웠던 마검비는 다시 백도 무림인들의 긍정적인 시선을 받으며 호북성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검각, 호북분파.

다시 그녀는 <검각주(劍閣主)>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녀가 왜 마교를 벗어나 호북성에 검각의 분파를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호북의 색마들이 그 소식에 몸이 달아올랐다는 것이다.

- 나를 이기는 자, 나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니.

검각주는 색마들에게 선전포고를 날렸다. 색마들은 마검비가 오기만을 기다렸고, 호북성으로 넘어오는 산맥을 넘어오자 마자 색마들은 검각주를 습격했다.

- 이 정도로?

월영성희검!

검각주의 진신 무공은 몹시 날카로웠다. 호북성 안에서 그녀와 감히 검을 맞댈 존재는 없어보였고, 사람들은 하나 둘 그녀의 검기에 대해 새로이 평을 내리기 시작했다.

- 혹시 화경 아니냐?

왕소현.

마교에 잠시 발을 담갔던 그녀는 이전보다 더욱 실력이 일취월장해있었다.

이미 검술'만'으로는 어지간한 화경-아니 현경 고수에 이르렀다는 평을 받는 왕소현에 대해 사람들은 감탄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 내공만 받쳐줬어도!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고 한들, 검강을 둘둘 두른 검과 싸우면 검이 망가지는 법.

검사로서는 하늘의 축복을 받은 몸이지만, 무림인으로서는 검사만큼의 재능을 이어받지 못한 존재.

그런 여인이 호북성의 색마를 모조리 도모하기 위해, 몸소 호북성을 찾았다.

검각의 여인들을 이끌고.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쿨럭. 저는 호북성의 성주, 유광이라고 합니다."

"성주께서 이리 환대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검각의 당대 주인, 왕소현이라고 해요."

관무불가침이라고 하지만, 불가'침'이지 교류가 없는 건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해당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지낸 문파라면 모를까, 타 지역의 거대 문파가 새로이 한 지역에 이사를 오면 당연히 관에서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무림인들끼리 시비가 붙어 소란이 발생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건 주변에 있던 백성들과 관이다.

"하하,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습니다. 무림맹에서 설마...소문의 마검비와 이야기를 나눴을 줄이야."

"강호...아니 천하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죠. 색마라는 자들은 무공으로 약한 여인들을 핍박하는 범죄자들. 무림에서 나온 벌레들은 무림인이 처리해야 도리 아니겠어요?"

"어린 시절부터 마검비께서 삼미(三美)를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더니, 하하. 오늘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습니다."

"어머, 세 가지나요?"

"검술, 용모, 그리고 마음가짐."

"훗."

왕소현은 쓰게 웃으며 차로 미소를 가렸다.

뛰어난 검술에 내공이 따라가지 못하고, 용모는 빼어나나 시간은 피할 수 없으며, 나이를 먹어가니 마음가짐은 누구나 그 나이대면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이 되었다.

"감사해요, 성주님."

"별말씀을. 그런데 각주, 분파는 어디에 자리를 잡으실 겁니까?"

호북성주가 본론을 꺼냈다. 왕소현 본인도 길게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녀는 호북성주를 찬찬히 살피며 슬쩍 운을 띄웠다.

"제갈세가 바로 옆은 곤란하고, 무당파 바로 옆도 곤란하죠. 그리고 성도(城都)는 조금...."

"하하,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실 저도 지금 살고는 있지만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거든요."

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해도 과거 불과 몇 년 전에 큰 역병이 돌았던 지역에 분파를 만드는 건 여러모로 꺼려지는 입장이었다. 검각을 호북성에 넣고 싶어 안달이 난 건 호북성주지 왕소현이 아니다.

"장소는...조금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호북성 안의 어디가 좋을 지, 직접 돌아다니면서 판단을 해야할 것 같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오랫동안 머무를 장소가 필요하시겠군요."

호북성주는 눈을 빛내며 밖을 향해 손뼉을 쳤다. 그러자 관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탁자 위에 두루마리를 여럿 펼쳤다.

"검각주께서 함께 데리고 오신 여인의 수가 대략 열 분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분들이 각자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객잔을 여럿 수배했습니다. 관에서 대여료를 지불할 것이니, 편히 사용하십시오."

"흐음...다들 객잔이네요...."

왕소현은 다소 탐탁찮은 얼굴로 두루마리를 훑었다.

"무가의 분파를 세우는 건 나름 오랫동안 살펴야 하는 일이라, 최소 1년은 이곳에서 지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저희도 염치가 있는지라, 1년동안 객잔의 영업을 방해하고 관의 녹을 먹을 수는 없지요."

"아, 그, 그 정도로 오래 지내십니까...?"

호북성주는 당황하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한 두 달 정도 지내며 적당히 빈 장원을 사들일 것으로 예상했겠지만, 왕소현은 그런 이들과는 사뭇 달랐다.

"1년동안 살면서 주변을 살피고, 5년을 더 살면서 바닥부터 천장까지 새로이 공사를 할 겁니다. 이 이야기는...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혹시 검각을 이곳에...?"

"...훗."

왕소현은 그저 슬며시 웃으며 호북성주를 압박했다. 무언의 압박에 고개를 끄덕인 호북성주는 두루마리를 전부 둘둘 말아 옆으로 치웠다.

"후우, 이것참. 설마 그렇게 오래 계실 줄이야...."

"걱정마세요. 장원을 하나 살 겁니다. 예전에 터가 좋은 곳에 있는 장원을 봐둔 게 있는데, 거기가 잠시 지내기에는 좋을 것 같더라고요."

"예전이라하시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15...."

왕소현은 차로 홀짝였다.

"아무튼 그곳을 사고자 합니다. 한 3년 전에 들었던 건데, 원래 집주인이 워낙 비싼 값에 내놓아서 안 팔렸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을 사고자 합니다."

"......아."

호북성주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호, 혹시 다른 곳은 어떠신지요?"

"안 됩니다. 그곳은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내공을 쌓기에 좋은 장소. 기맥이 흐르는 곳입니다. 원래 주인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비싼 값을 불렀겠죠. 후후, 걱정마십시오. 제가 젊은 시절부터 모은 돈이 꽤 됩니다."

"아, 아니. 그게...돈이 문제가 아니라."

호북성주는 눈을 질끈 감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곳, 팔렸습니다."

"......팔려요? 최소한 은자로 창고 하나는 쌓아야 할 만큼 비싼 값을 불렀던 그곳을요?"

"예. 지금 그곳은...진가장이라고 합니다."

"진가장...이요?"

"예. 그, 진가장의 가주는 여성분으로 이름은 진사월이라고 하는데 과거 기루에서 음악을 연주하셨다고 합니다. 그분이 구입을 했습니다. 호북성에 여러모로 기부도 많이 해주시는 분이고요."

호북성주는 자신의 집무실 한켠에 놓인 서책을 하나 펼쳤다. 지난 분기 호북성에 금전적 기부를 한 이들을 순위를 매겨 목록으로 만들어놓은 책자였다.

4. 진사월 님. (진가장의 장주).

다른 기관이나 문파, 세가를 제치고 진사월이라는 개인이 호북성에 '공식적'으로 기부한 금자가 무려 4번째에 이르렀다.

"......세상에."

왕소현은 진심으로 놀랐다. 진사월, 그녀가 지난 분기에 기부한 금액만 무려 검각이 석달은 쓰고도 남을 돈이었다.

부자.

천석꾼 정도로는 대문을 넘지도 못할, 만석꾼 이상 가는 부자였다.

"도대체 뭐하시는 분이세요?"

"진가장 내에 유명한 약초꾼이 한 명 있습니다. 백년하수오 같은 영약은 닷새에 한 번 꼴로 채취하는 자죠."

"약초꾼 한 명으로 이런 부를 축적한다고요? 그건 좀...."

"......공청석유."

"네?"

"약초꾼이 진사월 님에게 땅을 하나 추천했다고 합니다. 진사월 님이 약초꾼의 제안에 따라 은퇴 이후에 농사를 짓기 위해 작은 산을 하나 샀는데, 그곳에서 은거기인의 안배가 있었다지 뭡니까. 안에 공청석유가 잔뜩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걸...팔아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

아아.

자고로 인생은 기연 한 방이라 하더라.

* * *

가치 있는 영약은 아주 비싼 값에.

그리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약재는 아주 저렴한 값에.

일반 약재와 단약, 그리고 영약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진가장의 약방 <약선당>은 오늘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아이고, 어르신. 정말 괜찮겠습니까?"

"뭘. 나야 돈 받고 파는 것도 아닌데. 가주님 만나면 지나가다가 인사나 하시오."

"그거야 당연하지요! 하하, 진가주 님, 그리고 약선 어르신 덕분에 아들내미 금방 나을 것 같습니다! 흐흐."

"붓기 금방 빠지는 거 아니니까 조심하고."

약선이라 불린 노인은 마지막 환자를 보내고 괜히 멎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부리는 약선(藥宣)이라는 칭호가 썩 마음에 들었다.

약을 베푼다.

약이 없어서 제대로 몸을 치료하지도 못하는 이들을 위한 약을 만드는 건 그의 꿈이었다.

그러나 꿈과 현실은 엄연히 다른 법.

약재가 하늘에서 뿅 떨어지는 것도 아닌 만큼, 단약의 기본 재료를 만드는 최소한의 비용이 필요하다.

그런 비용을 이곳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디서 굴러들어오는 돈인지는 잘 모르지만-실은 관심도 쓰고 싶지 않지만-, 진가장은 약선이 바라는 대로 예산을 아끼지 않았다.

마치 약선이라는 존재를 영입하기 위한 비용처럼 약선을 위해 자금을 사용했다.

"...씁, 코가 잘못 꿰였어."

약선은 약 짓는 방에 앉아있던 소년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안휘에서 이어진 악연이 설마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막 문을 닫을 시간이 되기는 했지만, 이곳을 운영하는 것도 약선의 마음대로였기에 더 받아도 큰 상관은 없었다.

"흐음?"

처음 보는 '세 명'의 여인이었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괜히 들리는 게 아니구나 싶었고, 죄다 눈에 띄는 외모의 여인들이었다.

흰 갓을 눈까지 눌러쓴 여인, 아름다운 미소녀, 그리고 백발의 여인-

"......허어?"

"앗."

약선은 자신을 향해 놀란 소녀를 보고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대는 혹시-"

"어르신."

백발 여인이 빠르게 치고나왔다. 그녀는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약선의 앞으로 나섰다.

"...달거리 통증을 억누르는 약은...없을까요?"

백발 여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작품후기]

모두 모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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