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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습니다
류미아.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이름이다.
하지만 들어본 적도 없다. 겉으로 보아하니 이제 막 성인이 된 듯한, 앳된 기가 아직 남아있는 여인이다.
즉, 이대로 성장한다면 정마대전에 더불어 혈겁난세에서도 제법 유명세를 떨쳤을 재능있는 존재다. 그런데 왜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걸까?
'미래에는 없기 때문이지.'
류미아라는 여인은 없다. 가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나처럼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말.
'무공을 확인해보는 수밖에.'
다소 도박이긴 하지만 큰 문제는 없다. 여차하면 천무명으로서 범한 다음, 섭혼술로 기억을 지워버리고 적당한 곳에 던져두면 그만이니까.
내게 범해졌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게 기억을 조작하면 된다. 내공은 많이 사용하겠지만, 어차피 그 내공은 류미아 본인으로부터 채음해서 사용하면 된다.
'나에게 상당히 불만이 많아보이는 눈빛이다.'
그녀는 눈과 검기로 내게 말하고 있다.
- 꼭 그렇게까지 해야해?
나는 내 아래에 쓰러진 흑의인의 상태를 확인했다. 간헐적으로 몸을 떠는 흑의인은 아직 의식이 남아있었고, 나는 흑의인의 복면을 단번에 벗겨냈다.
"커흑...!"
"여자군."
나를 쫓아온 흑의인들은 전부 남자였다. 이 여자를 빼고. 나는 일부러 다른 흑의인들을 무시하고 이 자를 선택하여 습격했다.
누가보면 내가 여인을 겁탈하려고 습격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뒤에 나를 쫓아오는 이가 버젓이 눈뜨고 있는데 멍청히 범할 바보가 아니다.
흑의인들, 그리고 류미아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색마짓을 했겠지만!
"한 가지 물어보지. 칼든 자에게 남녀의 구분이 있나?"
나는 흑의인의 가슴을 짓밟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살포시 발로 누를 뿐이었지만, 류미아의 눈썹이 일그러지며 나를 향해 살기를 내비쳤다.
"분명 손속이 과하다고 말했을텐데요."
"인정하지. 이 정도로 하지 않으면 내가 죽었을테니까. 이거 봐봐."
나는 여인이 떨어뜨린 무기를 들어올렸다. 제법 날카롭게 벼려진 도(刀)는 조금만 스쳐도 베일 것처럼 날카로웠다.
"내가 대처하지 않았다면 이걸로 내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자비라는 게 없나요?"
"적어도 나를 죽이려고 한 자에 대해서는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지."
나는 흑의인의 허리를 발 뒷꿈치로 걷어차 옆으로 굴렸다. 자비를 베풀라고 했으니, 나는 흑의인이 혹시나 전투의 여파로 다치지 않을 곳까지 밀어냈다.
"방해를 하고자 하면 베겠다."
"복수귀로군요. 당신은."
"나에 대해 알고 있나? ...분명 나를 추궁하는 자리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네, 맞아요. 역시...아는 군요?"
"모르는 게 이상하지. 삭룡과 자룡의 발을 묶은 진법을 단번에 파훼한 미소녀 검사. 사람들을 구출해내고 마인들을 단칼에 베어 제압한 검기에 매료된 추색살 이들이 한 둘이 아니더군."
류미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자신을 향한 칭찬에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듯 보였다.
"내가 만약 다른 길로 먼저 가지 않았다면 아마 와백봉을 구한 건 당신이 되었을 지도 몰라. 그래. 나는 너를 충분히 인정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여기에 간섭하는 건 아니야."
퍼-억.
나는 칼집에서 도를 꺼내며, 칼집을 흑의인의 관자놀이를 향해 던졌다. 뭉툭한 칼집끝에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흑의인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봐라. 너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지금 이쪽으로 시선이 몰렸지 않느냐."
파바바밧.
사방에서 암기가 날아왔다. 독이 잔뜩 발린 암기는 나 뿐만 아니라 류미아 또한 노리며 함께 날아왔다.
카앙, 카앙, 카앙!
나는 도를 빠르게 휘둘러 암기를 쳐냈다. 적어도 휘두르고 베기에 있어서 만큼은 도가 검보다 더 쓰기에 편하다.
'도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써보는데.'
마교 추마귀 시절 암살을 위해 단도를 썼던 게 아마 가장 도를 많이 썼던 시대가 아닐까. 회귀 이후로 검을 주로 썼던 나는 오랜만에 잡는 도의 손맛에 짜릿함을 느꼈다.
'진정, 진정.'
괜히 잘못해서 마교의 도법이라도 나오는 순간 바로 류미아와 생사결을 벌이게 된다. 아직 류미아가 내게 접근한 이유를 알아내지 못한 이상, 가벼이 선택을 내려선 안 된다.
'아기색마가 반응하는 거 봐서는 그냥 먹으면 안 될 여자야.'
허겁지겁 날 것 그대로 먹을 게 아니다. 분명 아주 특별한, 최고의 조리방법이 정해진 여인이다. 일단 빨딱 세우기만 하던 아기색마는 정말 오랜만에 정복을 갖추고 오만하게 고개를 세워 예의를 갖췄다.
미식(美食).
결코 놓칠 수 없다. 나는 마지막 암기를 쳐내며 칼을 밖으로 겨눴다.
"...이건 죄송해요."
류미아는 나와 등을 맞대며 검을 숲쪽으로 겨눴다. 대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흑의인들은 짙은 살기를 내비치며 핏발 선 눈동자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뭘. 어차피 다 처리해야할 자들이었소. 제갈세가 나오기 전부터 나를 노리고 있던 자들이었으니."
"마교 대공자와 본격적으로 척을 지셨으니...."
"호, 그 자리에 없었으면서?"
"그 자리에서 함구령이 떨어졌지만 어디 사람들이 쉬쉬하나요."
맞는 말이다. 나는 금방이라도 싸우기 직전이었던 류미아와 등을 맞대고 공투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짜 익숙한데.'
무공, 무공을 보자. 사용하는 무공을 본다면 대략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을테지. 나는 전방에서 나를 노리는 놈들에게는 대충 기감만 퍼뜨려 살기만 읽어낸 뒤, 온 정신을 등을 맞대고 선 류미아에게-
'어쭈?'
류미아가 살짝 뒷걸음질 치며 몸을 붙였다. 내 둔부 아래에 닿는 묘한 촉감은 분명 그쪽이리라.
"천 소협.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무엇이오?"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라 나와 진짜로 등을 마주댄 류미아는 나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은 강자입니다. 설령 저들이 다시 쫓는다고 해도 충분히 떨쳐낼강자. 그러니...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괜히 그랬다가 절치부심해서 죽이러 오는 놈들에게 피본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닌데."
"소협."
"후후, 알겠소. ...그대가 간곡히 청하니 어쩔 수 없지."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대신 나중에 부탁 한 번 들어주시겠소? 류 소저?"
"저들의 목숨을 부탁 한 번으로 살릴 수 있다면."
사아아.
류미아의 몸에서 내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에게 온 신경을 쏟았다. 등 뒤, 그녀의 하단전에서 끌어오르는 기운은 분명-
'나한복호신공(羅漢伏虎神功)?'
아미파의 무공이다. 더군다나 그녀가 움켜쥔 검의 초식은 복호대라검(伏虎大羅劍).
다리 한쪽을 앞으로 뻗어 자세를 낮추는 모습이 호랑이가 도약하기 직전인 모습과 흡사 비슷했다. 평범한 제자들은 배우지 못하는 아미파의 비전신공과 비전무공을 함께 사용하는 걸 보아하니....
류, 미아.
아미파의 류.
'류서시의 숨겨둔 딸인가?'
나의 색벗, 류서시. 그녀가 강호에 처음 나왔을 때 색마들에게 당해 아이를 낳았다면 딱 류미아만큼의 나이대에 이르는 딸이 있으리라.
'친구 딸은 좀 그런데.'
오랜만에 류서시를 만나러 갈까 했지만, 폐관수련에 들어간 무인을 상대로 만나러 가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폐관수련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설마 그 딸을 만나게 될 줄이야.
'보면 볼수록 엄마 많이 닮았네.'
아래쪽도 과연 닮았을까. 나는 괜한 잡념을 지우기 위해 도를 치켜들었다.
'적당히 힘만 좀 보여볼까.'
혈강시에게 깃든 무공은 검법만 있는게 아니니까. 나는 칼집에 납도를 하듯 허리 근처로 도를 밀어넣으며 자세를 잡았다.
'가장 살기가 적은 무공으로.'
한 때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며 누구보다도 마인스럽게 행동했지만, 나이를 먹고 연륜이 생기며 지난 날의 과오를 씻어내리기 위해 살기를 극한까지 지워버린 도법.
혼천무상도(混天無常刀).
누구의 무공이냐 하면, 훗날 정마대전에서 미친듯이 날뛰고 은거하였다가 혈겁난세에서 혈교의 진격을 막았던 화경 고수 도제(刀帝) 풍성한의 도법이다.
지금은, 탈혼추적도라는 극한의 살상도법을 쓰고있는 비천도마.
'어차피 다른 무공이니까 걸릴 일도 없지.'
안 걸리면 그만이다. 나는 암기를 쳐내며, 달려오는 흑의인들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서걱.
단칼에, 흑의인들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
"푸휏취! 어으, 바닷 바람 더럽게 서늘하네."
"뭐냐, 고뿔이냐? 저리 꺼져. 옮을라."
"쓰읍, 당 형. 요즘도 나한테 너무 차가운 거 아니요? 우리가 그렇게 뜨겁게 같이 개고생을 했는데?"
"시끄럽다. 네가 그 지랄만 안 했어도 진작에 중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 아오, 영감! 토할 거면 바다에다가 뿌려! 야, 종마! 영감 등 좀 두드려줘!"
"종마라니요, 저는 엄연히 삼구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닥쳐! 짐승 새끼, 너는 중원 밖에서 그짓해서 산 줄 알아!"
"아니, 저보고 무슨 수를 써서든 천마지루를 얻으라면서요! 그래서 했더니 저보고 왜 그러십니까?!"
"씨발, 그런 건 줄은 몰랐지! 짐승같은 새끼."
"짐승같은 것이 아니다...!"
"영감, 정신이 들어?"
"아주 먼 고대. 하은주...신화시대에는 짐승과 결혼한 자들도 있었다고 하더군. 예를 들어 말일세, 은나라를 멸망시킨 달기도 사실은 구미호였다거나, 흔히들 '용'과 관련이 깊은 가문들은 하나같이 용이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해서 진짜로 아이를 낳고 난 뒤에 하늘로 승천했다거나.... 아아! 사랑! 그 위대한 이름이여!!"
"그래! 그게 진짜였어! 됐어?! 그만 얘기하라고!"
"......하아, 스승님. 저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청년은 품에 흑백이 섞인 구슬을 쓰다듬으며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청명한 하늘 위에 떠다니는 하얀 구름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활짝 웃는 것 같았다.
"린아...흑...!"
"아오, 저 새끼 또 저지랄이네!"
"이해해주시오, 당 형. 사랑하던 여인네가 짐승일 거라고는 누가 알았겠소? 근데 나같으면 자살했다."
"흐흑, 으허어억, 허어엉...!! 린, 내 금방 가리다...!"
"야! 저 새끼 말려! 바다에 빠져죽으려하잖아!!"
"죽든 말든 일단 천마지루는 얻었으니까 된 거 아니오?"
"등신아! 저거 저새끼 몸에서 1장 이상 안 떨어진다고!"
"아."
풍덩.
"씨바아아아아알!!"
풍덩. 풍덩.
어느 바다.
세 남자가 어선에서 뛰어내리고, 한 노인만이 배에 남은 채 어느 해변가에 당도했다고 하더라.
"...이 놈들은 뭐야?"
"표류자들 같은데요. 죽일까요? 첩자일 수 있습니다."
"글쎄다. 어디 세외까지 다녀온 놈들 같은데...불쌍하니까 일단 깨워서 물어나 보자. 혹시 모르니까 싹다 점혈해두고."
"혈세."
어느 중년 남성과 여인에게 건져진 네 남자는 어딘가로 끌려갔다.
* * *
서걱.
복면의 잔해가 흩날렸다. 동시에 복면 아래에 있던 머리칼도 함께 나풀거리며 날아갔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했던가."
신체의 모든 곳은 부모가 내려준 것이니, 신체를 어찌 감히 함부로 할 수 있겠냐고 '공자'가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내게 대적하는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그들의 머리를 잘랐다.
정확히는 '머리카락'.
"네놈은 짧은게 보기 좋군."
나는 도신에 묻은 머리칼을 털어냈다. 흑의인은 좌우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쨍그랑!
손에 쥔 검조차 떨어뜨린 채, 그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자신의 머리칼에 경악했다. 마치 자신이 살해당한 것 마냥 그는 좌절했다.
"그런데 참 보기가 그래. 아예 밀어주랴?"
"이, 이...!"
"소협!"
뒤에서 류미아의 앙칼진 비명이 울려퍼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흑의인을 가리켰다.
"죽이지는 않았소."
"어찌 머리칼을...!"
"머리가 정돈되고 자라나기 전까지,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의미지."
나는 도를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모든 흑의인들이 흠칫하며 뒷걸음질쳤다.
"나의 칼날은 남녀를 가리지 않아. 몇몇...보이는 군."
"히익!"
흑의인 중 3할 가량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들을 향해 도를 세우며 위협했다.
"너희들에게 명령을 내린 자에게 돌아가라. 나 천무명, 이 소녀의 마음씨에 감복하여 너희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니. 만약 지금 후퇴하지 않는다면 머리카락을 벨 것이요, 우리를 향해 한 번 더 칼을 세우면...."
스릉.
나는 빠르게 도기를 날렸다. 반월처럼 날아간 칼날이 이미 상투가 잘린 흑의인의 목을 스치듯 날아갔다.
서걱.
"다음 번에는 진짜로 목을 날려버리겠다. 나는 이미 반마와 악마를 죽인 자. 너희라고 죽이지 못할 것 없지."
"아, 아아악...!!"
머리칼이 두 번 잘린 흑의인은 눈에 핏발이 선 상태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부모가 두 번이나 죽은 셈이 된 그는 폭혈까지 쓰며 내게 검을 겨눴다.
푸-욱.
나는 도를 아래로 내렸다. 내 옆에서 비스듬히 검을 찌른 류미아는 남자의 어깨에 검을 찔러넣었다. 그 움직임이 사냥감을 낚아채는 호랑이와도 같았다.
"이런 배려는 괜찮은데."
"안 그랬으면 죽일 거잖아요. 어서, 가세요!"
스륵. 류미아가 엄포를 터뜨렸다.
"천 소협이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목숨을 헛되이 하지 마세요! 제발!"
류미아의 진심 섞인 절규가 통했을까? 흑의인들은 모두 눈짓을 하며 물러났다.
"...실례하지."
습격자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머리칼이 잘린 남자를 부축했다. 그는 나를 향해 살기어린 눈빛을 보냈다.
"다음에 두고보자, 천무명."
사락.
모든 흑의인들이 빠르게 떠났다.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다음에는 더 예쁘게 잘라주도록 하마. 크큭."
"...천 공자."
류미아는 나를 향해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감사해요.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아니오. 나도 확실히 과했군."
나는 칼집을 들어 도를 집어넣었다.
"그런데 류 소저."
"네."
"...어머님이 혹시 누구시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언젠가 그대를 본 것 같은데...."
"......."
류미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작품후기]
어머님이 누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