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봉승천(臥鳳昇天)
안주인 제갈시연의 사망 소식에 따라, 제갈세가는 하루동안 피객패를 걸었다.
시신은 모조리 불에 타 수습조차 할 수 없었다. 수습하려고 손을 건드린 순간, 뼈조차 불에 탄 것 마냥 바스라져서 흩어지고 말았다.
“용서할 수 없다...황마!”
천무명의 증언에 따라, 동자신공의 황혼은 산동과 안휘 일대를 뒤흔든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배후로 지목되었다.
제갈소소를 위시한 분가 여인들을 습격한 산적들에 대한 사주.
제갈시연을 납치하고 여종을 제갈시연으로 둔갑시킨 것.
그리고 산동 분가에 숨어있던 제갈선을 납치한 것 까지.
천무명이라는 청년이 아니었다면, 황마는 자신의 계획대로 제갈세가의 두 여인을 불에 태워 죽였을 것이다.
아무리 육봉이라고 한들, 초절정의 마인이 금지된 술법인 꼭두각시술까지 쓰면서 인질을 잡아 납치를 하는데 이길 수 있을까?
“이번 일은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되오. 추색살 산동 지부의 장으로서, 감히 황마를 무림공적의 색마로 지정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태산에 펼쳐진 진법을 직접 상대한 강우성의 말에 모두가 동조했다. 특히 계단에서 황마 일당의 지독한 진법에 당한 무인들은 강우성의 주장에 적극 동조했다.
동자신공의 황혼.
검에 가슴이 찔리고 불길을 달려나간 흔적이 절벽으로 이어져 아래로 떨어진 듯 하지만, 혹시나 살아있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 운명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나. 황혼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평생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거나.
둘. 황마로 계속 악행을 일삼는다면, 추색살에 의해 ‘죽여도 되는 색마’로 분류되어 쉬이 살해당한다거나.
이미 죽은 반마나 악마에 대해서도 조치가 이루어졌다.
화장.
제갈시연의 자식들은 양어머니의 죽음에 진심으로 분개했고, 그들의 시체를 태우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했다.
일부러 태산 아래로 끌고 내려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기름을 끼얹고 불에 태웠다. 불길은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활활 타올랐고, 그들은 연옥에 떨어지는 죄인처럼 숯검정이 되었다.
그리하여.
제갈세가를 덮친 암운은 사라졌다.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도 남아있고 사건으로 인한 문제도 산적해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건이 일단락 된 것에 기뻐했다.
와백봉 제갈선을 구출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안도했다.
새액, 새액.
정작 당사자는 한 남자의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있었지만.
* * *
짹, 째액.
“우으응…공자….”
아침을 여는 맑은 새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제갈선은 몽롱한 의식을 되찾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
“일어났어요?”
제갈선은 눈앞에 떠있는 하얗고 푸른 존재에 기겁을 하며 놀랐다.
“유...소저?”
“벌써 아침해가 중천에 떠올랐어요, 선화.”
“......그, 여기는?”
“천 ‘공자’의 방이죠.”
제갈선은 뜨끔했다. 자신의 대외적인 모습에 준할 정도로 무표정한-다소 차가워보이기까지한 유설라는 곱게 다려진 소복을 제갈선에게 건넸다.
“갈아입어요. 그 옷으로는 나갈 수 없을 거예요.”
“그 옷이라면…앗.”
제갈선은 흐트러진 자신의 꼴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쇄골부터 가슴, 아랫배, 허벅지에 이르기까지 남자의 잇자국과 손자국이 강렬히 남아있었다.
“유 소저, 이건 그러니까….”
“저는 괜찮아요. 저도 같은 관계니까요.”
“...혹시 어제?”
“바로 옆방에서 다 들렸어요. 저는.”
제갈선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유설라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아뇨, 죄송할 것 없어요. 천 공자가 매력적인 분이라서 그런 거니까. 충분히 이해해요.”
제갈선은 포용적인 유설라의 태도에 고마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속이 울컥했다. 이래서야 마치 유설라가 정실 부인이고 자신이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첩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 저는 천 공자를….”
“연심을 품어도 돼요. 천 공자, 오는 여자 막지 않으니까요. 저한테도 결혼하자고 얘기는 했는 걸요.”
“.......”
제갈선은 말문이 막혔다. 유설라는 해탈한 얼굴로 제갈선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반한 쪽이 지는 거, 알고 있죠?”
“......반했다기 보다는, 아니에요.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분명, 하기 전에도 어느정도 마음에 들었지만.”
제갈선은 자신의 배를 살포시 붙잡으며 씩 웃었다. 간밤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조금, 진심이 될 것 같아요….”
“...어휴. 이렇게 또 피해자가 늘어났네요. 제갈세가에만 지금….”
유설라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나는 여자마다 마음을 훔치고 다니니, 이러다가 추색살이 천 공자를 잡으러다니는 게 아닐까 걱정되네요.”
“설마 그런 일은…. 그런데 천 공자는 어디로 가셨어요?”
“떠날 채비요.”
“네?”
제갈선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자세히 보니, 유설라도 제갈세가 내에서 입던 경장이 아닌 멀리 나가려는 외출복으로 입고 있었다.
“황마가 살아있을 지도 모르니, 그의 흔적을 찾아서 떠난다고 했답니다.”
“아…!”
제갈선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돈할 새도 없이, 그녀는 허둥지둥대며 어쩔 줄 몰라했다.
“설라. 장난치지 마라.”
끼이익.
문이 열리며 방의 주인이 나타났다. 손에 쥔 찜통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롱포가 가득 담겨있었다.
“괜찮소, 선화?”
“어...떠나신다고…?”
“떠날 것이오. 몸을 회복하고, 인사를 한 뒤에.”
천무명은 자신의 옷깃을 살짝 들췄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입술자국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제갈선은 간밤의 일이 떠올라 얼굴이 다시 시뻘게졌다.
딱.
천무명이 탁자에 통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튕기자, 방 안에 훈풍이 일었다. 순식간에 청명한 공기가 방안을 채웠고, 제갈선은 유설라를 흘기며 그녀가 건넨 소복을 받았다.
“유 소저….”
“흥. 이 정도 투기는 부려도 되잖아요?”
유설라는 남녀가 뒹군 흔적이 가득한 침대 위 이불을 수 겹 포개었다. 그리고 검을 뽑아 한기를 뿌리며 이불을 굳게 만들었다.
“...나도 아직 뒤로 해본 적 없는데.”
유설라는 툴툴거리며 천무명이 앉은 책상으로 다가갔다. 제갈선은 소복으로 얼굴을 가리며 배시시 웃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갈아입어야 하는데.”
“여기서 갈아입어도 되지 않소?”
“이미 서로 볼만큼 본 사인데 뭐 어떠세요. 입혀드릴까요? 아니면 방으로 돌아가서 환복하고 오시겠어요?”
“아니, 그….”
제갈선은 말문이 막혔다. 남들의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문제는 그녀가 이 방에 올 때 ‘속옷없이’ 왔다는 것이다.
“.......”
제갈선은 천무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설라는 천무명의 옆에 바싹 달라붙어 강아지처럼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 대협.”
“왜.”
“저, 아앙이 하고 싶어요.”
“...나 참. 그래, 간밤에 고생했다.”
천무명은 직접 젓가락을 들어 유설라의 입에 소롱포를 넣었다. 제갈선은 자신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는 둘이 어이가 없었지만, 울분을 참고 땀에 젖은 소복을 벗어던졌다.
사락.
결국 그녀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옷을 갈아입은 채 유설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가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천무명 바로 옆에 둘이 함께 앉아있는 형국이 될 뻔 했다.
“천 공자. ...윽?”
제갈선은 의자에 앉자마자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에 보이는 시야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역시 빠르군. 선기가 보이는 것이오.”
천무명은 제갈선의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그러자 제갈선은 눈의 고통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철컹.
유설라가 검을 뽑아 검신을 비스듬히 세웠다. 얼음처럼 깨끗한 그녀의 검신은 동경처럼 사물을 비췄고, 제갈선은 유설라의 검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눈동자가…?”
“제갈시연을 통한 의식은 성공했소. 그리고 그 금구슬에 깃든 신산의 힘은 그대에게로 이어졌지. 그래. 굳이 말하자면…."
천무명은 한쪽 눈동자를 손으로 가렸다. 제갈선은 천무명의 눈동자 색을 보고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용안. 가장 기본이 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소."
천무명의 눈동자에는 황룡이 똬리를 틀고있었다.
* * *
제갈시연의 사망, 배후는 황마.
쾅!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길은 주먹을 움켜쥐며 책상을 때렸다. 책상을 치는 행위가 자신의 주먹만 아프고 가문의 재산만 손상시킬 뿐 아무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비, 이 미친 놈...!”
본가에 전해진 소식에 제갈길은 길게 탄식했다.
분가에 숨어있던 제갈선이 들켰다? 추색살과 천무명에게 빚을 졌다? 그런 건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다.
제갈선의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 그만이고, 은인들에게는 영약이나 좋은 비급, 또는 좋은 보물을 보내는 등 물질적인 보상을 우선 지급하는 것으로 체면치레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이 확신이 되어버린 문제, ‘제갈비와 제갈시연이 황마와 결탁했다’는 것은 제갈세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끄으응...!”
무림맹의 군사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가문 내에 피바람이 불더라도,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야 가문의 기강을 다잡을 수 있다.
설령 같은 제갈씨의 핏줄이라고 하더라도.
“정녕...이것이 시대의 흐름이란 말인가.”
제갈길은 서슬퍼런 눈동자로 벽에 놓인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무나도 아끼던 동생이지만, 마교의 무리와 결탁하여 제갈세가에 피해를 끼치려고 했다면 결국 가문의 배신자이며 ‘적’이다.
“제갈비야...내가 가문을 위해 얼마나 지독해질 수 있는지 잊은게로구나....”
제갈길은 빠르게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편지를 적었다. 그리고 방 안에 조용히 앉아있던 전서응의 발목에 편지를 묶었다.
“맹주께 가다오.”
밀고.
무림맹의 군사로서, 그는 제갈비의 행위에 대해 조금의 가감없이 자신이 아는 바를 구체적으로 적었다. 나머지는 이제 추색살이 나서서 제갈비를 비롯한 분가의 ‘변절자’들을 추포할 일만 남았다.
“......휴.”
제갈길은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비틀거리듯 걸었다. 그가 마음의 편안을 얻기 위해 발길을 옮긴 곳은 부인이 있는 안채였다.
흐에에엥
----
“...!!”
제갈길은 크게 울려퍼지는 울음소리에 한걸음에 방 안으로 달렸다. 안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들, 제갈건담(諸葛乾談)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여, 여보...!”
“부인, 이게 무슨 일이오? 담아, 왜 그러느냐?”
“뱀이, 뱀이...!”
제갈건담은 서럽게 울었다.
“나랑 안놀아주고, 흐끅, 가버렸어...!”
“......!”
제갈길은 제갈건담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서럽게 우는 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두 부부에게 너무나도 신경쓰였던 문제가 조금은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금빛의 뱀도 집으로 간 게야. 언젠가 다시 올 것이야.”
“이제 나랑, 흐끅, 안 놀 거래...! 흐끅, 자기는 주인을 찾았다면서, 흐아앙...!!”
“...주인이 있는 아이였나보구나. 그래, 이 아비가 한 번 주인을 찾아보마. 어디로 갔는지 아니?”
“몰라...흐끅. 절로 날아갔어...흐끅.”
제갈건담은 동북쪽을 가리켰다. 그 방향이 마치 분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아 제갈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그는 아들을 연신 다독이며 진정시켰다.
‘다행이군, 부인.’
‘그러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상상의 동물을 친구삼아 놀고, 심지어 1년이 넘도록 금사(金蛇)를 친구삼아 노는데 어느 부모가 걱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무리 아이가 총명하여 또래와 어울리지 못한다고 한들, 상상의 동물 친구와 1년 넘게 벗이 되는 건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아들아, 걱정마라. 이 아비가 주인에게 양해를 구해, 언젠가 한 번 뱀을 만날 수 있게 해주마.”
“정말...?”
“물론이지. 아버지는 못하는 게 없단다. 지난 번에 물 위를 걷고 싶다고 해서 이 아비가 너를 안고 호수를 함께 걸었잖느냐?”
“......정말?”
제갈건담은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 부친의 약속에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제갈건담은 울음을 참고 떨리는 손으로 약속했다.
"휴우."
제갈가의 부부는 진정한 아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늘그막에 낳은 아들이라 여러모로 신경이 많이 쓰이는 터라, 다른 아이들과 다른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게 여러모로 신경이 많이 쓰였다.
"그럼 이제 황금이랑 놀래!"
"...저기 유씨세가의 장남 유황금?"
"으으응, 아니야! 뱀이 가기 전에 앞으로는 얘랑 놀라고 했어!"
제갈건담은 보물을 자랑하듯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제갈길과 아내의 눈에는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으, 으음.... 이 아이는 이름이 또 무엇이니?"
"웅...금봉추(金鳳雛)? 근데 그 이름 싫대! 그래서 황금이야!"
"......."
"아이 참, 아빠! 황금이가 인사하잖아. 받아줘!"
"오, 오냐. 만나서 반갑구나."
끼룩.
제갈건담의 손 위에는 금빛 날개를 단 작은 새가 펄럭이고 있었다.
오직, 제갈건담에게만 보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