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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강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제갈선이라는 여인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미래에서도 딱히 이름을 날리지는 않았다. 제갈세가에서 가장 이름을 날린 사람은 용제검을 얻은 검제였고, 제갈선은 그저 산동 제갈세가에서 혈교인들을 막으려고 용을 썼던 한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
내가 팽유월을 안휘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그냥 ‘그런 여인이 있었지’하고 넘어갔을 여인이었다. 이번에 산동으로 온 근본적인 이유도 악녀를 범하기 위함이었지, 제갈선을 찾아서 범하거나 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산동에 왔더니 제갈선이 있었고, 모처럼 온 김에 혹시 천무명으로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싶어서 개수작을 부려본 것 뿐이다.
다행히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 제갈선은 천무명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제갈시연이라는 난관을 무리없이 해결하여 나중을 기약하면 될 일이었다.
- 제갈선과는 인연을 쌓은 것으로 만족하자.
그게 천무명으로서의 내가 제갈선과 맺고자 한 관계였다.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도 좋지만, 아무리 제갈시연의 일이 있다고 한들 육봉 중 한 명인 와백봉이 이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청년에게 몸을 허락하겠는가?
- 어디에 있는지 알았으니, 생각나면 비천색마로서 범하러 오면 되겠지.
숨어있는 장소를 알았으니 언제든지 범하면 그만이었다. 그냥 꼴려서 범하기에는 상대가 와백봉이라는 것 자체에 부담이 있었다.
와백봉을 범하는 건 제갈세가의 가주와 본격적으로 척을 진다는 것과 일맥상통이다. 추색살이 한창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 무림맹의 군사가 추색살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제갈선은 범하기에는 긁어 부스럼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사람이 범하기에는 너무 순하지.’
나는 선화라는 모습을 봄으로써 그녀가 가진 본성을 엿볼 수 있었다.
‘똑똑한 것도 그렇지만 착하고 순해. 제갈시연처럼 가문의 사람을 희생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어디 남궁유린처럼 남들에게 패악질을 부려서 괘씸하여 범해야 했다면 모를까, 제갈선은 본성이 흉악하여 정의구현을 한다거나 할 대상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차갑지만 속으로는 무척 여려서, 함부로 범했다가는 분명 자결할 여인이야.’
외강내유.
그녀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또 어디있을까?
와백봉으로서의 모습은 이시아가 대외적으로 예의바른 소공녀를 표방하는 것처럼 제갈선이 본성을 숨기고 만들어낸 인피면구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인피면구 아래, 인피면구가 또 하나 있었다.
“......선, 이것은?”
“.......”
창백해졌던 제갈선은 이제 전신에 천마신공을 일으키기라도 한 듯 시뻘게졌다.
살짝만 찔러도 피가 푸슈슛 튀어오를 것만 같은 귓불부터 시작하여, 얼굴이 화끈거리는게 옥황정에 질렀던 중려신화정의 불꽃보다도 더 뜨거운 열기를 자아냈다.
스르륵.
우리가 가만히 있자, 세필이 옆으로 밀리며 서서히 책자가 앞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표지에 적힌 세글자를 보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천색록(千色錄)...?”
“!!”
일천 개에 이르는 천 가지 색에 대한 이야기. 나는 바른 정자로 쓰여진 글자를 보고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 제갈선은 모른다.
하지만 천색록은 알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신세를 진 성인소설!’
세간에 퍼진 민간소설 중 최고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싼 맛에 한 권 사서 읽기에 색담(色譚) 모음집이었다. 천색록이라는 이름 하에 ‘제 OOO번째 이야기’라는 식으로 색을 주제로 한 소설이 바로 천색록이었다.
‘마교에서 일할 때 한창 신세졌었지.’
시간을 때우기에 딱 좋았고, 무엇보다 작가가 스스로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저자를 남기지 않아 누구나 필사하여 대중에 널리 퍼져나간 책이다.
나중에는 관에 의해 불온서적으로 풍기문란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분서당했으나, 이야기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또다른 책으로 전해졌다. 기존의 이야기에 자신의 성경험을 추가하거나 보태어 2차, 3차 창작이 널리 이루어진 희대의 색소설!
‘근데 그것도 미래에 가서야 널리 퍼지는 이야기지.’
즉, 지금 시점에는 시중에 ‘존재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책의 제목이 같다고 하기에는 안의 내용물도 내가 알고 있는 천색록의 전개나 묘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물이니 남근이니 하는 것과 달리, 다소 천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지니 보지니 좆물이니 씹질이니 하는 거친 표현들이 난무하는 책이었다.
이걸 제갈선이 썼다? 생각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제갈선이 천색록을 우연찮게 손에 넣어 수첩 같은 작은 책에 필사하여 들고다닌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
‘필체도 똑같고, 글 쓰는 방식도 똑같고, 뭣보다 책에 제갈선의 기운이 가득해.’
아무리 부정해도 결론은 하나 뿐이었다.
‘제갈선이 직접 쓴 거다.’
천무명이 욕탕에서 제갈선과 대면하여 안에서 흐르는 씹물을 욕탕 물 속에 흘려보내며 짐승처럼 교미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제갈선 본인이 직접 쓴 것이다!
즉, 천색록의 저자는 제갈선이었다!!
“저, 천 공자. 화...나셨나요?”
제갈선은 여차하면 무릎까지 꿇을 기세로 기어들어가듯 말했다.
“화? 화를 내다니. 내가 왜?”
“그, 그게 천 공자를 대상으로 이런 글을....”
“아.”
천색록의 작가가 와백봉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정신이 멍해있던 나는 제갈선이 무안해하는 이유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천색록의 이야기는 누군가를 대상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냐하는, 작가의 망상이 아닌 보고 들은 내용을 옮겨 적은 견문록이라는 설이 있었다.
비록 이름은 마치 피휘를 하듯 비틀어썼지만 실존 인물이 아닐까 의심되는 자들도 수두룩했다.
그리고 지금 제갈선이 떨어뜨린 천색록 속의 주인공 이름은 천무명.
과연 주인공의 이름을 정하지 못해 이름없음(無名)이라고 일부러 적었을까? 천(天)이라는 성까지 같은데? 심지어 천무명과 욕탕에서 아이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여자의 이름은 제갈선인데?
“화가 난다라....”
꿀꺽.
제갈선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졌다.
화?
솔직히 화가 난다.
‘설라, 어쩌지. 들켰는데.’
제갈선은 안을 몰래 훔쳐봤다. 나는 유설라의 머리를 감겨준 뒤, 남는 시간동안 그녀와 소리나지 않게 정사를 나누며 서로 정기를 교환했다.
그걸 제갈선은 직접 자신의 천색록 소재로 삼은 것이다! 나와 유설라가 살을 섞은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봐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모른척하다니, 이 얼마나 괘씸하랴!
‘아랫도리가 화가 난다.’
스륵, 스륵.
아기색마가 분통을 터뜨리며 후회하고 있다. 밖에서 제갈선이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면, 아마 유설라를 더 긴장되게 만들어 더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밖에서 사람이 문앞을 지키고 있다는 것보다, 밖에서 여인이 안을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것에 유설라는 더 흥분하여 나를 더 잘 조였을 것이다!
‘열받네.’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선화.”
“네....”
“남자와 여자가 나와 그대인 것은...혹시 그런 의미요?”
나는 제갈선에게 선택지를 제공했다.
“그대가, 나를...?”
“......!”
어떻게 할 것이냐, 와백봉.
이 모든 것은 오해라면서 색소설 작가로서의 자신을 드러낼 것이냐.
아니면 나에 대한 연심으로 이런 망상을 끄적였다고 할 것이냐.
턱.
나는 제갈선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었다. 벽을 손으로 짚으며, 허리를 낮추고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나를 오해하지 않게 해주시오, 선화.”
제갈선은 뒤로 물러섰지만 벽에 바싹 붙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와 숨결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그대를 대함에 있어서 내가 그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해주시오.”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순간, 그녀는 내게 호감을 가진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소설은 현실이 될 것이다.
그러면 바로-
“......실망하셨나요?”
“응?”
“죄송합니다, 천 공자. 당신을 대상으로 이런 글을 써서. 저는...배우고 싶을 뿐이었어요.”
“호오?”
내가 생각한 두 길에 대해 제갈선은 완전히 다른 해답지를 제시했다.
“언젠가 저도 지아비를 맞이하여 성교를 하게 될 날이 오겠죠. 여인은 지아비를 섬김에 있어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부엌일이나 적삼을 수선하거나 그런 건 얼마든지 연습할 수 있지만...밤 일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렇긴...하지?”
“그래서 저는 주변에서 보고 들은 성교를 기록하는 거예요. 지식으로나마 배우면서 알아가는 거죠.”
“흐음....”
변명같지만 그냥 가만히 듣기로 했다. 제갈선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점점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두 분을 소재로 견학한 걸 쓴 건 죄송했어요. 하지만...두 분도 그 때 제게 은근히 보여주고 싶어하셨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랬지. 하지만 그건 여종 선화에게 그랬던 거고, 설마 그녀가 제갈선이라고 그때 상상이나 했겠소?”
“정체를 숨긴 것도 죄송해요. 그리고 이런 걸 쓴 것도 죄송해요. 만약 공자께서 원하신다면...이걸 태워서 없애겠어요.”
제갈선은 바로 천색록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천색록을 불태우겠다는 그녀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증거인멸인가.’
서책으로 남아있지 않다면 천색록이 세상에 나올 일도 없다. 제갈선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야기만 있을 뿐, 소면 한 그릇 값에 싸게 살 수 있는 색담은 이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비밀을 지킨다면 제갈선의 은밀한 기록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녀의 약점을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 또한 내 약점을 잡았다.
나와 빙백봉 유설라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것을. 의심하고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제갈선은 내가 유설라의 안에 사정하는 것까지 보지 않았는가?
물속에서 사정했지만 그게 견문록에 그대로 남아있다.
‘약점을 잡다니, 비겁한데.’
내가 떠나는 즉시 비천색마가 제갈세가를 덮칠 것이다. 그리고 선량한 청년과 신진 여고수의 풋풋한 연애사를 천박한 육욕의 교류로 만들어버린 망상녀에게 현실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런데 천 공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걸 지우고 싶지 않아요.”
“응?”
“아니, 오히려 낳고 싶어요. 천하에 이 글을 널리 퍼뜨려, 제 글이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일까. 나는 나를 올려다보는 제갈선의 눈동자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제갈선은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잔뜩 긴장했지만, 올곧고 당찬 기세로 허리를 짚었던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저...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제갈선은 울먹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서로 모든 것을 비밀로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나와 비밀친구가 되자?”
“네. 이미 서로 많은 것을 덮기로 한 사이잖아요. 그러니까...이것도 같이 비밀로 하시는 건....”
나와 제갈선은 서로 많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라도 외부에 노출되면 서로의 존재와 명예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정도로 위험한 요소가 가득하다.
천무명은 초절정 이상일지도 모르는 검기를 지니고 있다.
제갈선은 산동 분가에 선화라는 여종으로 숨어있었다.
천무명은 제갈시연이 제갈선을 이용해 납치 계획을 꾸민 것을 알고 있다.
제갈선은 천무명이 추색살의 곤혹을 알면서 일부러 따로 정상으로 달려간 것을 알고 있다.
천무명은 제갈선이 야설 작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제갈선은 천무명이 제갈유, 제갈시연, 그리고 빙백봉 유설라와 살을 섞었다는 걸 알고 있다.
천무명은 제갈세가의 분사 중 몇몇이 마교의 무리와 손을 잡은 것을 알고 있다.
제갈선은 천무명이 강호에 나선 이유와 목적에 대해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다.
“...서로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묻는다는 건 그만큼 신뢰가 필요한 법이오. 선, 그대는 나를 믿소?”
“제가 먼저 믿고, 공자께 신뢰를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이 책은.”
제갈선은 천색록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눈을 깜빡였다.
“다양한 색에 관한 이야기를 품고 싶으나...제게는 경험이 없습니다.”
“앗. 설마?”
“그, 그렇다고 공자와 직접 관계를 맺는다는 건 아니어요! 아니, 그, 관계를 맺기는 할 건데....”
“...?”
횡설수설하는 제갈선은 얼굴이 폭발할 것처럼 붉어졌다. 나는 무릎을 낮추며 시선을 제갈선과 마주봤다.
“조금 자세히 이야기해주시겠소?”
“...그, 저도 제갈세가의 여인으로 시집을 가야하고, 지아비가 될 분이 제가 처녀가 아니면 크게 분노할지도 몰라요. 어쩌면...결혼 자체가 없었던 게 될지도 모르구요.”
충분히 가능성있다. 실제로 무림에서는 명망있는 여식이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혼당하는-물론 남자 쪽이 훨씬 더 세가 강한 가문이어야 하지만-사례가 제법 빈번했다.
제갈세가라고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미래에는 제갈세가가 직접 그 상황에 처하게 된다. 본가가 멸문당해 팔대세가의 말석으로 밀려버린 미래, 제갈세가는 분명 제갈선이 말한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인 관계는 맺지 않고 관계를 맺겠다고 하는 말은 무엇이오? 내가 그대를 부끄럽게 하려는 게 아니라, 오해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오.”
“...그, 공자께서는.”
제갈선은 내 가슴에 이마를 놓고 중얼거렸다.
“......저는 당신과 유 소저와 같은 관계를 맺고 싶은데, 제 입장상 진짜로 하는 건 어려워요. 대신 원하는 거 다 해드릴게요. 넣고 싸는 것만...뒤로 하는 건...어떠세요?”
“......하."
나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
"뒤로 해본 적 있소?"
"......."
제갈선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저, 입도 보지도 뒤도 전부 처녀에요."
[작품후기]
여작가
남편집자
제갈선 첫경험 기념으로 다음 일러(2D) 첫경험을 하게 될 히로인 조사를 하고자합니다.
#○○○ 으로 적어주세요!
(염마, 빙마, 제갈선, 구천현녀, 혈교주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