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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강림
"크하하! 포기해라, 이름없는 자여!"
황마는 날카롭게 벼려진 지팡이 끝을 앞으로 내질렀다. 구불구불한 지팡이 끝은 파공성을 내며 번개처럼 나아갔다.
초절정 고수의 일격!
노도와도 같은 찌르기는 내지른 물건이 지팡이라고 한들 충분한 살초였다.
"큭!"
천무명은 검기를 두른 검을 휘둘러 급히 지팡이를 튕겨냈다. 지팡이 찌르기는 어지간한 창의 고수보다 더 날카로웠다. 지팡이를 튕겨낸 천무명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고작 그 정도의 힘으로 나의 복수를 막으려고 하는 것이냐!"
카앙, 카앙.
황마의 찌르기에 천무명은 점차 수세에 몰렸다. 초식을 사용할 틈도 없이 자세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유가 넘치는 황마와 달리, 천무명은 점차 초조해졌다.
"왜?! 저들을 구할 수 없어서 당황스럽나?! 하하하! 너는 아무도 구하지 못해!"
화르륵.
옥황정은 온통 불꽃에 휩싸였다. 나무와 제단을 태우는 불씨가 천무명의 눈가에 스쳤다.
"흐하하! 타올라라! 전부 불타버려! 이곳 태산에서 나 황마의 복수는 완성되는 것이다!"
"이 악적! 제갈세가의 여인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크하하하!!"
천무명의 외침에 황마는 배를 잡으며 광소했다. 그리고는 제단에 묶여있는 두 명의 여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게 처녀를 바치지 않으려한 죄! 감히 나를 받아들이지 않은 죄! 감히 나와의 입맞춤을 거부한 죄! 불경하다! 죽어 마땅하다! 감히 나를,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통정하다니!!"
"고작 그런 이유로...!"
"네놈 같은 상판떼기는 평생가도 모를테지! 크흐흐, 하지만 천하에는 나같은 이유로 미쳐버린 자도 있는 법이니라!"
황마는 천무명의 앞을 가로막았다.
"와백봉에게는 미안하지만 같이 죽어줘야겠다. 남들에 의해 처녀가 짓밟히느니, 차라리 처녀인 채로 죽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 거기서 꼼짝없이 두 여자가 불에 타오르는 걸 보기나 하거라!"
"으으읍!!"
황마의 너머, 제단에는 두 명의 여인이 구속되어있었다.
제갈시연은 제단에 반듯하게 누워 두 손을 반듯하게 모은 채 잠들어있었고, 제단 옆에는 와백봉 제갈선이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화르륵!
거대한 불길이 제단 근처를 덮쳤다. 제갈선은 뜨거운 불길에 눈을 찡긋였고, 천무명은 일그러진 얼굴로 호통을 내질렀다.
"기다리시오, 와백봉! 나 천무명이 그대를 반드시 구해내리다!"
"크하하! 나를 넘어가지도 못하면서?! 어디 덤벼봐라! 이 몸은-"
순간, 천장까지 치닫은 불길에 천장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큭, 무슨?!"
여인을 납치하여 불에 태워 죽이려는 이에 대한 천벌일까? 불꽃에 무너진 천장은 순간적으로 황마를 덮쳤다.
"으허어억!"
"하압!"
천무명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한 손에 내기를 모아 앞으로 검을 내던졌다.
새애액!
검끝은 황마의 심장을 노렸다.
"어딜!"
하지만 황마는 자신을 덮친 불길을 지팡이로 걷어내고 몸을 빙글 돌리며 공격을 피했다.
"하하, 유감이구나! 고작 그 정도로 나를 도모할 생각이었느냐?! 건방진 새끼! 나는 예전부터 너같이 생긴 놈들이 마음에 안들었어!"
퍼억.
"죽어라! 죽어버려! 여자들이 너한테 그렇게 말을 쉽게 걸어주니 천하가 다 네놈의 것인 것 같지! 하하하! 어디 얼굴이 개방 거지만도 못할 정도로 망가지고 나서도 이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황마는 지팡이를 뒤집어 천무명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주변의 나무판자를 방패처럼 들어올린 천무명은 무기를 잃고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
"크하하! 고작 이 정도로 나를 넘보려고 하다니, 큰 오산이다! 네놈은 결코 나를 이길 수 없어!"
"나는 안 될 지도 모르지."
파사삿!
마지막 판자가 망가졌다. 천무명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하지만...그녀라면 어떨까."
천무명은 입꼬리를 씩 들어올렸다. 황마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싸해져 몸을 돌렸고-
"어-?"
푸---욱.
천무명이 날렸던 검이 날아와 황마의 심장에 꽂혔다. 황마는 검이 날아온 곳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하아, 하아, 하아...!"
와백봉, 제갈선은 거친 호흡을 내쉬며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녀의 아래에는 날카로운 검기로 잘린 밧줄이 떨어져있었다.
"설마...."
"내 검은, 사람을 살리는 검이다. 하아...."
천무명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황마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을 보고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그 검은 분명히 천무명이 쥐고 있던 검이었다.
"...크, 흐흐, 투검을...나를 죽이는게 아니라 구하는데 썼다고...? 무인이 무기를 버려가면서...?"
황마는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게 의협인가...."
쿵. 황마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지팡이를 떨어뜨리자, 천무명은 황마의 옆으로 달려 제갈선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와백봉! 정신차리시오!"
"...구해주러, 오셨...."
풀썩. 제갈선은 천무명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죄송합...더는 견딜 수 없...."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것에 안심하며 고개를 묻은 그녀는 피로로 쓰러져버렸다. 정신을 차려 함께 빠져나가야 했지만, 그녀는 마지막 검을 던진 것으로 남은 힘을 모두 짜냈다.
"크흐, 흐흐흐! 두고...보자!"
황마는 가슴에 칼이 박힌 채 밖으로 내달렸다.
"오늘은 비록 실패했으나, 언젠가 다시 오마! 제갈세가! 내 너희를 반드시 몰락시키고 말 것이다!!"
황마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어디선가 우지끈 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화마가 밖으로 빠져나가며 잠시 안쪽의 길이 열렸다.
"지금 이 길이라면...!"
홀로 남아버린 천무명은 기절한 와백봉과 제갈시연을 함께 안으려했다.
태산을 급히 오르고 중간중간 목각인형들과 싸우고, 반마와 악마를 상대로 간신히 승리를 따내고 들어왔지만 아직 힘은 아주 약간 남아있었다.
하지만.
화륵!
불길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황마가 떠나도 황마의 의지는 남아있는 건지, 천무명이 두 여인을 구해 도망칠 수 없게 화마가 천무명을 덮쳤다.
"크으윽...!!"
천무명은 이를 갈았다. 급히 외투를 벗어 번지는 불씨를 털어내며 두 여인을 함께 구조하려고 했다. 제갈선을 다독이며, 제단에 묶인 제갈시연을 구하려 했다.
"천...공자...."
덥썩. 제갈시연의 앙상한 손이 천무명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죽어가는 눈으로 간신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늦었습니다...."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제 몸은, 허억, 제가 잘 압니다.... 저는 이미 극독에 당해, 흐윽, 이대로 나가도 살지 못할 겁니다."
제갈시연은 흐려지는 눈동자로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제갈선...와백봉을 데리고 탈출하세요.... 제갈세가의 미래를, 허윽, 지켜주세요.... 그리고...."
제갈시연의 눈에 눈물이 주룩 흘렀다.
"제 아이들에게, 흐윽, 사랑한다고...!"
화르륵!
불길에 기둥이 옆으로 무너져내렸다. 천무명은 기둥을 막으려고 손을 들었지만, 제갈시연은 손을 펼쳐 천무명을 장법으로 밀어냈다.
"커헉?!"
천무명은 이미 안고있던 제갈선과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마지막 힘을 짜내며 자신을 밀친 제갈시연을 믿기지 않는 눈으로 쳐다봤다.
"어째서!"
"......."
제갈시연은 그저 웃기만했다. 그리고 천무명이 다시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천장이 무너져내리며 주변을 덮쳤다.
화르륵!
더이상 천무명이 앞으로 달려나갈 수 없게 되었다. 무너진 천장과 기둥에 의해 제갈시연에게로 닿는 길은 막혀버렸다.
"젠장...젠장...!"
천무명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 제갈선에게 불길이 닿지 않도록 그녀의 위에 웃옷을 덮고, 자신은 등에 외투를 덮개처럼 둘렀다.
"젠자-------앙!!"
천무명은 울분을 토하며, 몸을 돌려 밖으로 달렸다.
그리고 천무명이 옥황정을 빠져나가는 순간
화르르륵!!
화마가 거세지며 하늘을 뒤덮었다.
* * *
"...아주 새빨간 거짓말로 가득하군."
나는 눈앞에 적힌 종이의 내용을 모조리 외운 뒤 촛불 위에 올렸다.
"벌써 다 외우셨습니까?"
선화, 아니 제갈선은 내가 종이를 태우는 것에 놀랐다.
"보통은 왜 태우냐고 놀라지 않소?"
"하지만 천 공자이신 걸요. 공자께서 저와 직접 입을 맞추셨으니, 공자께서 틀리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제갈선은 나를 신뢰했다. 천무명이라는 청년의 무공과 지혜를 신뢰했다.
"앞 뒤 말이 다르면 괜한 오해가 생길 수 있죠. 저와 공자의 말이 다르다면 그 차이를 눈치채고 파고들 자들이 있을 겁니다. 부디 저와 입을 맞춘 걸 잊지 말아주세요."
"알겠소. 그런데 공자라는 표현은-"
"싫으신가요? 이전처럼 대협이라고 부르는 건 제가 싫은데.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아니, 좋을대로 하시오."
상공이나 색마나 가가라고는 자주 들었어도 공자라고는 칭해진 적이 없기에, 나는 제갈선이 천무명을 부르는 칭호가 다소 어색했다.
"제갈 소저."
"선화라고 불러주세요."
"...선화 소저?"
"그냥 선화로 충분하답니다?"
"...하아, 선화. 묻고 싶은 걸 묻기 전에, 호칭이 무어 그리 중요하단 말이오?"
"제게는 몹시 중요하답니다."
제갈선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의 호칭을 집착했다. 내가 그녀를 선화 소저라고 부르던 것을 잇고자 하는지, 아니면 제갈선은 꽃이라고 부르고자 하는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알겠소.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제갈시연에 대한 건 어찌 되었소?"
"본가의 장로 분들이 온다면 그분들께는 진실을 밝힐 생각이에요.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안주인께서는 색마들에게 납치당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지겠죠. ...시신도 불에 타버렸으니, 겁간을 당했다거나 하는 흔적을 찾지도 못할 거예요. 이른바, 그나마 명예롭게 가버리신 거죠."
"죽은 자에 대한 배려인가?"
"그래요. 저를 목각인형에게 강간당하는 제물로 바쳐서 신선의 힘을 얻으려고 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까요."
제갈선의 배려 덕분에 제갈시연은 명예롭게 가게되었다.
"폭로하려면 얼마든지 폭로할 수 있지만, 그건 제갈세가의 수치로 번질테니까요. 분가 자체가 존립이 무너질 수 있어요."
제갈선은 책상 위에 올려둔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는 제갈시연이 누군가와 밀서를 주고받은 것들이 고이 모여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가주님께서 판단하실 거예요. 그러니...."
"함구하리다. 제갈세가의 모든 것에 대해. 나는 그저 지나가던 협객으로, 제갈세가의 위기를 지나칠 수 없었을 뿐이오."
"감사해요, 공자."
제갈선은 옅게 웃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제갈세가 및 와백봉 습격에 대한 일은 제갈선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다.
'미래가 바뀌는 게 아닐지.'
어쩌면 이 일로 제갈세가의 몰락이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안심이 된다.
추후에 일어날 미래를 바꿨다고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 잔인하고 피에 점철된 미래 따위, 일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그러면 이제 이 구슬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가가 관건인데."
나는 신산의 힘이 남아있는 여의주를 꺼냈다. 제갈선은 여의주를 향해 손을 뻗으며-
"이건 공자께서 가지셔요."
사양했다.
"공자께서 무슨 신묘한 방법을 쓰신 지는 모르겠지만, 공자님 덕분에 남은 힘입니다. 공자께서 쓰심이 옳은 줄 압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걸 사용하지 못하는데."
"...네? 왜요?"
"이거, 제갈세가의 핏줄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오."
무후가 자기 후손을 위해 내려준 힘인데 내가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역시 제갈무후.'
행여나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도 사용할 수 없게, 신산의 힘을 피에 연동시켜놓았다. 내가 이 힘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제갈세가의 여식에게 신산의 힘을 불어넣은 다음 채음보양으로 받아내는 방법 밖에 없다.
본인의 허락하에. 참으로 지독한 안전장치였다.
"그대가 가지시오. 내게는 이것이 부담일 뿐이오."
"그럴 수 없어요. 공자님께서 가지세요."
"아니, 나는 필요가 없다니까?"
"공자께서 가지지 않으시겠다면 누가 가진단 말입니까? 저는 이걸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가져주세요!"
나와 제갈선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에게 양보하기위해 옥신각신하려다 책상을 살짝 밀쳤다.
그리고 금구슬은 경사를 따라 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둘다 가지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땅에 떨어지는 건 놔둘 수 없었다.
탁.
나와 제갈선은 동시에 금구슬에 손을 뻗었다. 내가 더 빨라서 그런지, 내가 금구슬을 잡고 제갈선이 내 손등을 포개는 형국이 되었다.
"훗, 이러면 공자께서-"
툭.
제갈선의 품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손바닥만 한 작은 수첩에 제갈선은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허?"
책자가 사르르 넘어가며 세필이 들어간 장이 좌우로 펼쳐졌고, 나는 안의 글귀를 확인하고 말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유독 강한 글씨로 적혀있는 문구를 읽고 말았다.
"천무명의 우람한 자지가 제갈선의 보지를 꿰뚫었다...?"
"......."
얼굴이 하얗게 굳은 제갈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작품후기]
아
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