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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강림
제갈시연은 가버렸다.
나의 화려한 제령술에 의해, 그녀는 인간으로서 성불했다.
“...결국 와백봉은 구출하지 못했군.”
결과론적으로 보면 우리는 와백봉을 구출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와백봉을 납치한 일련의 과정이 제갈시연을 비롯한 마인들의 자작극임을 증명해내지 못했다.
반마와 악마는 죽었다. 내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을 정도로 그들은 내 어검술에 즉사했다.
황마는 실종되었다. 마지막 순간 내가 검을 집어던져 가슴을 꿰뚫었지만, 검에 찔려 절벽에 떨어졌으니 아마 십중팔구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 명의 마인과 결탁한 제갈시연은 유감스럽게도 갔다.
그리하여 와백봉 납치 자작극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난감하군. 이대로라면 와백봉은 실종된 상태로 끝나버릴텐데….”
“그것 뿐만이 아니에요. ...분가의 대모님도 이대로 둘 수는 없어요.”
제갈시연의 혼백이 빠져나간 육신, 한 마디로 시체는 고요히 잠들어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더할 나위없이 만족한 얼굴이었으나, 남아있는 사람들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난감하군요.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그대로 믿을 지.”
“그게 문제기는 하지만….”
상황이 여러모로 꼬여버렸다. 단순한 납치사건이 아니라 여럿이 얽혀 칡덩굴처럼 인과가 꼬여버렸다.
천무명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해야할 일을 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줄까?
‘천무명은 폐기하기 너무 아까운데?’
천무명을 천붕 따위로 버리는 건 희아연월검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천무명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천 대협. 저기, 혹시 사람들이 말이에요.”
선화는 제갈시연의 하복부를 가리켰다.
“...천 대협이 대모님을 겁간했다고 사람들이 오해하지는 않겠죠?”
“음? 그게 무슨 말이오.”
“그야 지금 저기 흐르는게….”
나는 선화의 말에 뒷골이 아파왔다. 내 남근에는 제갈시연의 체액이 묻어있고, 제갈시연의 몸속에는 내 정기가 남아있다.
아무리 저 정기가 내 것이라고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하지만, 누가 나를 색마로 몰고 가버리면 꼼짝없이 색마로 몰리게 될 상황이었다.
“젠장, 미쳐버리겠군. 어떻게 하면 좋지?”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부우욱.
선화는 말을 하기 무섭게 자신의 무복 아래를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뒷머리를 묶어둔 장식을 풀어버렸다.
사라락.
긴머리가 아래로 휘날렸고,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순간 변모했다. 나는 손바닥 뒤집듯 변화한 그녀의 분위기에 침이 넘어갔다.
“선화 소저?”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겠죠. 천 대협. 제갈세가에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저 또한 은혜를 갚겠습니다.”
선화는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여기서 저를 구하신 거로 하시죠.”
“뭐요?”
“정식으로 인사 드릴게요. 소녀....”
선화는 순식간에 표정이 변했다. 순박하고 순수한 소녀와 차갑고 이지적인 여인을 삽시간에 오가는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와백봉, 제갈선이라고 하옵니다.”
* * *
그 시각, 태산 협곡.
“뭐라고…?”
산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인들 중 한 명이 산 위에서 들려온 소식을 듣고 표정이 굳었다.
“반마 님과 악마 님이 둘 다 돌아가시고, 황마는 행방불명…?”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마침 근처에 있던 월영문의 제자, 제갈시연처럼 변장한 여인이 전령의 소식에 기겁을 했다.
“황마께서 행방이 묘연하시다니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추색살에게 당했습니다. 정상을 습격한 자는 천가장의 천무명. 그는 정상에서 와백봉 제갈선을 구출하고 쓰러졌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제갈시연 직속 사조직, 월영문의 첫 제자인 일월영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헛웃음을 지었다.
“와백봉이 왜 거기서 구출됩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추색살 사람들이 모두 와백봉이라고 하는데, 설마 변장한 사람이 거기 있었겠습니까?”
“안주인께서는 어찌 되었는지 아십니까?”
“...제갈시연 님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
일월영은 자신의 복색을 위아래로 가리켰다.
“안주인께서 돌아가셨다고요? 왜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추색살 단원들 중 시신을 수습한 자들도 시신의 상태에 대해 함구했다고 합니다.”
“......설마, 들킨 건가?”
일월영을 비롯한 마인들은 조마조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마교와 내통한 것이 들켜서 자결한 건 아니겠지요?”
“모르는 일입니다. 만약 그랬다면...저희도 무사하지는 못하겠군요.”
마인들, 정확히는 ‘제갈세가의 분가에서 마교로 투신하려고 하던 이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대로 몰래 분가에 아무런 소리소문없이 스며들 것이냐, 아니면 당장 세가를 떠나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줄 수 있는 이가 올 때 까지 기다리느냐.
“비 어르신께서는 언제 오신답니까?”
“황산의 일이 발생한 이후로 파발이 날아갔으니, 아마 사나흘 내로 도착하실 겁니다.”
“그러면 비 어르신께서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입시다. 우리는-”
“하하하! 여기 있었구나!!”
산 전체를 호령하는 통쾌한 목소리에 마인들은 검을 사방으로 겨눴다.
마인들을 둘러싼 갈색 무복을 입은 남자들의 중심에는 호랑이같은 외형의 남자와 산뜻함이 물씬 풍기는 여고수가 있었다.
“같은 팔대세가의 사람으로서 곤경을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는 법! 나 벽력신권 황보염이 여기있느니라!”
황보염의 사자후에 마인들은 하나 둘 이를 악물며 뒷걸음질쳤다. 강대한 포식자를 앞에 두고 겁에 질리는 것은 생물의 본능이었다.
“보아하니 네놈들이 이번 일의 배후와 큰 관련이 있으렸다! 한 놈도 놓치지 않겠다!”
“크윽...! 벽력신권이 왜 여기에...!”
“우리 집 안방에서 이런 개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설마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철컥, 철컥.
황보세가의 무사들은 손에 권갑을 채웠다. 아직 권기(拳氣)를 다루지 못하는 무사들은 권갑으로 파괴력을 더했고, 황보염과 그 옆에 있던 여인은 권갑 없이 맨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자, 혜지야! 저들을 모두 붙잡아 마교와 결탁했다는 증거를 찾아내자!”
“...예, 아버님.”
옆에 서있던 여인, 황보혜지는 갈색빛이 나는 권기를 주먹에 두르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를 분질러놓겠습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분명 눈앞의 복면인들을 향해 한 말이리라.
“쳐라!”
“““우오오!!”””
황보염의 지시 하에, 황보세가의 무사들이 흑의인들을 덮쳤다.
* * *
구천 계단의 아래, 삭룡과 자룡은 마지막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이곳은 진법이 펼쳐진 곳이오. 그래서 앞으로 달려가도 계속 계단이 이어진 거지.”
그들은 발이 날랜 무사들과 함께 계단을 소수 정예로 돌파하고자 했다. 하지만 돌파하는 즉시 다시 아래로 돌아온다는, 자연현상을 무시한 기이한 현상에 정면으로 돌파하기를 포기했다.
“다행히 악마는 중간에 사라졌습니다. 저들은 우리를 다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음. 저들이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나설 때!”
추색살 산동, 하북 지부에 있던 절정고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수는 비록 10명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짜내어 진법을 파훼할 수단을 찾아냈다.
“절벽 위에 있는 저들이 전부 진법의 축에 해당하오. 저들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아니면 죽이는 것이 해법이오.”
“역시 흔한(炘翰) 대사님. 상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수들은 저마다 절벽 위에 있는 자들을 점찍었다. 그리고 절벽을 날아올라, 그들을 하나씩 맡아 쓰러뜨리기로 마음먹었다.
“반드시, 성공하여 이곳을 돌파하도록 합시다!”
고수들은 무기를 움켜쥐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암기가 떨어지고 있었고, 절벽을 깎아 만든 임시 사각지대를 벗어나면 즉시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저격에 노출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뚫지 못하면 납치당한 와백봉을 구할 수 없다!
“우오오!!”
삭룡 강우성의 힘찬 외침과 함께 절정 고수들은 사각지대를 박차고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계단의 아래에서 달려오는 두 개의 빛무리에 발이 굳어버렸다.
타다다닥!
한걸음에 계단을 열 개씩 뛰어오르며 달리는 흑백의 빛은 신속과도 같았다. 삭룡은 백색의 한기를 뿜어내며 달리는 여인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빙백봉?!”
빙백봉, 유설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절벽을 향해 뛰어올랐다. 절벽에 튀어나온 부분을 하나 둘 디디며 번개처럼 빠르게 절벽을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런...말도 안 되는...?!”
절정 고수들은 방금 막 자신들이 하려고 했던 파훼법을 순식간에 사용하는 빙백봉의 경신술에 놀랐다.
그리고 반대편.
타다닷!
그나마 절벽을 뛰고 뛰는 빙백봉과 달리, 흑발의 소녀는 절벽을 수직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몸이 아래로 떨어지기도 전에 앞으로 뛰어오른 소녀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보였다.
“저런...!”
무사들은 경악했다.
빙백봉의 경신술은 자신들이 따라할 수 있는 충분한 수준이었다. 비록 속도는 느리더라도 ‘가능’은 했다.
하지만 흑발 소녀처럼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직선으로 달려올라가는 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저 소녀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아압!”
빙백봉과 소녀가 함께 기합을 내질렀다. 둘은 동시에 검을 휘두르며 진법의 축을 지키고 있던 흑의인들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파지직!
하늘에 번개가 울렸다. 마치 공간 자체가 깨지듯 하늘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계단의 위-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길도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조 형! 이건...!”
“진법이 무너지는 걸세! ...누군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우리 편인게 확실해! 모두들, 달립시다!”
자룡 조청홍을 위시한 무사들이 계단의 위로 달렸다. 공간의 어그러짐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고, 무사들은 여전히 날아오는 암기를 피하며 앞을 향해 달렸다.
“우오오오!!”
무사들은 일제히 앞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공간은 산산조각났고, 무사들은 한 번도 넘지 못한 진법의 너머를 향해 나아가는데 성공했다.
“위는...!”
휘리릭.
흑백의 여인들은 선녀처럼 계단의 위로 사뿐히 착지했다. 다소 호흡이 거칠어진 유설라와는 달리, 흑발 소녀는 여전히 차분한 상태로 계단의 끝을 가리켰다.
“소식은 이미 듣고 왔습니다. 무사님들, 이 위에 와백봉 언니가 납치되어있다면서요?”
“그, 그렇습니다. ...소저께서는 누구이시길래...?”
“아이 참,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어서 가요!”
소녀는 무사들을 채근하며 계단을 달렸다. 앞으로 남은 계단은 그리 많지 않았고, 무사들은 소녀와 빙백봉을 따라 뒤를 달렸다.
“조 형, 저기 정상에!!”
“!!”
밤하늘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정상에 가까워지니 훤히 잘 보였다.
화륵, 화르륵.
거대한 화마가 산 정상에서 무언가를 불태우고 있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는 마치 하늘을 뒤덮듯 메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건...!”
“칫, 늦었나...?!”
“천 소협!!”
유설라가 비명을 지르듯 앞으로 내달렸다. 강우성 또한 무언가 깨달은 듯 유설라의 뒤를 따라 전력으로 달렸다.
“혹시 천 형이...?!”
“다른 길로 먼저 정상으로 갔어요! 저를 이곳으로 보내고!”
“크윽...!”
강우성은 침음성을 흘리며 내달렸다. 어느덧 정상에 도착하자, 그곳은 태산의 정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산 위가 초토화되어있었다.
화르륵!
그리고 정상에 자리잡고 있던 사당, 옥황정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기둥이 불에 타 우지끈 무너지고, 자욱한 검은 연기가 더 심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앗, 기둥 뒤에 사람이!!”
무사들은 옥황정 안에서 보이는 인영에 손발이 굳었다. 도저히 사람이 진입할 수 없는 화마에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그들의 발을 멈춰세웠다.
“설화난영!”
유설라는 화마를 향해 한기가 섞인 검기를 흩뿌렸다. 그녀의 검기에 화마가 일시적으로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갈라진 화마의 안에서, 검은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불길을 잔뜩 머금은 인영은 품에 무언가를 안고 불타는 옥황정 안에서 빠져나왔다.
펄럭-!
흑발 소녀는 인영을 뒤덮은 불꽃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모포처럼 뒤덮은 불붙은 무복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바지 하나 간신히 두른 청년이 벌겋게 익은 상체로 거칠게 호흡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 하아....”
“천 소협!!”
청년은 품에 안아든 것을 내려놓았다. 청년의 것으로 보이는 하얀 웃옷이 아래로 흘러내리자, 의식을 잃은 흑발 여인이 팔 하나를 떨어뜨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와백봉?!”
무사들은 가슴이 뭉클했다. 겉옷으로 전신을 뒤집어 쓰고, 자신의 웃옷을 벗어 여인의 머리칼과 얼굴이 상하지 않게 감싸다니, 이 얼마나 멍청한 행동이란 말인가!
“천 소협, 괜찮아요?!”
유설라는 평소 모습과 달리 크게 당황하며 천무명에게 다가갔다. 천무명은 흐릿한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다, 유설라를 보며 헤벌쭉 웃었다.
“다...행....”
풀썩.
천무명은 유설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유설라는 급히 미끄러지는 천무명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품고 한기를 일으켰다.
사르르.
한기가 천무명의 달궈진 몸을 달래며 증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유설라는 조심스럽게 기절한 와백봉을 안아들었다.
“천 소협이...와백봉을 구하셨군요!”
와아아아아---------!!
천지를 뒤덮는 함성이 태산에 울려퍼졌다.
[작품후기]
와백봉 구출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