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69화 (269/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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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강림

목각인형을 쓰러뜨린 우리는 드디어 정상이 보이는 위치까지 도달했다.

태산은 다른 오악에 비해 엄청 높지는 않았고, 중간중간 우리를 습격한 마인들이나 나무인형들만 아니었으면 금방 정상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이상하군.”

“그렇죠?”

우리는 을씨년스러운 주변 분위기에 바로 이상을 감지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주변에 인기척이 없어.”

“네. 이미 지나갔으면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라도 있을텐데, 이 주변은 동물 지나간 흔적밖에 없어요.”

사람의 흔적이 없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먼저 출발한 추색살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것.

또 하나는 추색살의 대원들이 우리가 걸렸던 미혼구궁진과 마찬가지로 진법에 걸려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

“선화 소저. 만약에 추색살 대원들이 정상을 올라간다고 하면, 남쪽에서 가장 빨리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길은 어디요?”

“아무래도 계단을 이용하는 길이 가장 빠르겠죠? 9천 계단이 있는 곳이요.”

“계단이 9천 개?”

“네. 태산의 정상은 과거 봉선의식이 수 차례 진행되었던 곳이에요. 황제들이 태산 정상까지 직접 올라왔을 만큼, 어느정도 길을 잘 닦아놓았죠. 정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계단을 만들어놓았을 거예요.”

선화의 말에 따르면, 남쪽에서 올라오는 길에는 정상까지 일직선에 가깝게 올라갈 수 있는 오르막길이 있다고 했다. 긴 협곡을 깎아 만들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인 계단은 좌우로 깎아지른 절벽 사이를 지난다고 했다.

[진법을 치기에 딱 좋은 곳이군.]

[높은 곳에서 습격을 하거나 원거리 공격을 하면 맥을 추리지 못할 거예요.]

아무리 무림의 전투가 무공을 이용한 전투라고 한들, 이런 다 대 다 전투는 과거 성현들의 병법을 참고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높은 곳에 진을 치고 적이 공격하지 못하는 곳에서 공격을 하라. 습격자들이 대부분 마인이라고 가정한다면, 절벽 위에서 돌을 떨어뜨리거나 암기를 뿌리는 등 온갖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것이다.

“선화 소저, 만약 그 계단에 우리가 아까 당했던 진법과 똑같은 진법을 설치해놓는다면 어떻겠소?”

“...아마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거예요. 안에서 화경급 고수가 진법의 핵이 되는 곳을 파괴하거나, 밖에서 누군가가 진을 해체하지 않으면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거예요.”

“제가 가보겠습니다.”

유설라는 멀리 계단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제가 가서 진법이 있는지 확인해보겠습니다. 만약 진법이 있다면...파훼하겠습니다.”

“네? 빙백봉 님, 아무리 그래도-”

“유 소저.”

나는 유설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에게 내 내공을 밀어넣어, 유사시에 대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치지 말기를.”

“후후, 걱정마세요. 제 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습니다.”

사락!

유설라는 한기를 내뿜으며 빠르게 땅을 박차고 달렸다. 산길을 뛰어다니는 그녀의 빠른 움직임은 마치 백호가 산을 달리는 것 같았다.

“저게...빙백봉...?”

“강호의 사람들은 실력의 3할 정도는 숨기라고 하지 않소.”

선화는 큰 충격을 받았다. 눈앞에서 절정 고수로 알려진 여인이 초절정의 기세로 산을 달리니, 같은 육봉으로서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예쁘다....”

정정. 그녀는 유설라가 떠나며 흘린 한기에 넋을 잃고 있었다. 유설라가 땅을 디딜 때마다 주변의 수증기가 얼어 나풀거리는 게 꼭 얼음가루가 흩날리는 것 같았다.

“선화 소저. 우리는 정상으로 갑시다.”

나는 선화의 손을 붙잡고 정상으로 달렸다. 선화는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며 습격자의 도래에 주의했으나, 다행이라면 다행스럽게도 습격자는 없었다.

왜냐면, 그들은 산 중턱이 아닌 산 정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기다리고 있었다!”

마교 간부들이 으레 말하는 18번 대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의 노인이 팔짱을 낀 채 정상에서 나를 맞이했다.

“두고보라고 하더니 이렇게 빨리 재회할 줄은 몰랐는데.”

“하하하! 본좌가 그리 쉽게 당할 것 같으냐? 아까는 방심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누구나 그런 얘기를 하지. 칼침맞기 전에는. 이번에는 꼭 심장에 칼을 박아넣어주마.”

“으하하! 의기는 가상하구나! 허나 네놈 혼자서 우리를 막을 수 있을까?!”

반마의 광소와 함께 주변에 목각인형 다섯이 튀어나왔다. 산 중턱에서 싸웠던 다른 목각인형들과 달리, 인형 주제에 저마다 다른 무기를 들고 기수식을 취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건 뭐지?”

“하하하! 네놈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다!”

덜컹, 덜컹.

다섯 목각인형은 다른 목각인형들과 마찬가지로 고간에 달린 각좆이 덜컹거리며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근을 쑤셔박고 빼는 노골적인 움직임에 선화는 치를 떨었다.

“선화 소저, 눈을 가리시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제가 짐이 될 수는 없어요.”

이미 이곳까지 와서 본 실력을 보이지 않는 것이 짐이 아닐까라고 말하려던 찰나, 선화는 품에서 철필을 뽑아 손에 쥐었다.

“적어도 제 몸은 제가 간수하겠어요. 그러니 천 대협,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저 인형들, 초절정이군.”

“...네?”

선화의 표정이 굳었다. 절정 정도면 최소한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를 포위하는 인형들은 전부 초절정이었다.

“초절정 고수 다섯...아니 사람까지 포함하면 ‘일곱’이군.”

“크하하, 그렇다!”

들켜서 그런 건지, 광소와 함께 내 뒤에서 살기가 날아왔다. 나는 선화를 내 쪽으로 당기며 뒤로 검을 휘둘러 참격을 막았다.

카---앙!!

“감이 좋구나, 젊은 놈!”

“쓸데없이 강하구나, 늙은 놈.”

“이 놈이?!”

중년의 남자는 악귀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제야 아는 얼굴이 나와 조금은 반가웠다.

“악마. 그리고 반마.... 그렇군. 네놈들, 파촉삼마로구나.”

격검의 달인, 악마.

태도의 달인, 반마.

그리고 이 사건의 원흉으로 추정될 빙의술의 달인, 황마.

사천을 아우르는 파촉 일대에서 맹활약한 마교의 마인들로, 지금은 십마 자리에서 물러난 자들, 아니 쫓겨난 자들이다.

“검각의 여제자들을 겁간했다가 마검비에게 걸려 셋 다 마교에서 쫓겨난 거로 들었는데, 설마 이런 곳에서 개버릇 떨치지 못했을 줄이야.”

“호오. 젊은 놈이 생각보다 마교에 대해서 잘 아는 구나.”

“당연하지. 모든 마인들을 죽이는 것이 내 목표니까.”

(색)마.

“천 대협....”

선화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악마와 반마는 나를 앞뒤로 포위하며, 동시에 황마가 조종하는 일곱 인형들은 오각형의 거리를 벌리며 나를 포위했다.

“하하하! 혼자서 우리를 모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있으니까 혼자서 올라왔지. 설마 네놈들이 정상에서 진을 치고 있는 걸 모를 것 같았느냐?”

“허세는 정말이지 하늘을 찌르는 구나! 하하, 좋다. 내 네놈같은 젊은 놈들이 살려달라고 질질 짜는 걸 보는 게 취미거든.”

악마는 검을 빙글 돌리며 나를 조롱했다. 기수식도 제대로 취하지 않는 그의 움직임에는 아주 여유로움이 넘쳤다.

“악마, 조심해라. 놈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흐흐, 이보시오. 고작 한 번 어깨에 칼침 좀 맞았다고 그리 두려워하는 것이오? 반마 위문연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

악마는 나와 직접 검을 맞대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강한 지 모른다.

‘빨리 명성을 높여야겠어.’

명성이 아예 없으니 나를 괄시하는 게 영 아니꼽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천무명이 마인들에게, 심지어 여제자를 겁간했다가 마검비에게 살해당하는 게 두려워서 도망친 놈들에게 괄시받을 이유는 없다.

‘내가 이미 마검비를 검으로 따먹고 왔다 이 말이야.’

마검비조차도 나를 검으로 도모할 수 없는데, 고작 초절정 일곱 명이서 나 천무명을 이긴다?

“.......”

나는 관객, 선화가 있음에 난감해졌다.

‘이걸 어쩐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상황을 타파할 좋은 방안을 찾다가, 선화에게 눈을 찡긋이며 속삭였다.

“선화 소저. 이곳에서의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오.”

“네?”

사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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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에 내기를 불어넣었다. 내 피에 깃들어있는 수많은 무공 중, 일곱 명의 초절정 고수들을 빠르게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는 한다. 나는 반마와 악마가 개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검을 수평으로 뻗으며 내려놓았다.

“희아연월검, 태극, 파천.”

파천신검의 속도를 태극혜검의 어검술에 담아, 나는 어검을 쏘았다.

서걱-!

눈 깜짝할 새, 검과 가장 가까이 있던 목각인형의 목이 뎅겅 날아갔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떨어지자 몸이 뒤로 넘어간 목각인형은 뒤에서 빙글 돌아 아래에서 솟구치는 검을 피하지 못했다.

퍼—억.

어검은 목각인형의 각좆을 부수고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그 시간이 불과 속으로 셋을 세기도 전에 모든 게 정리될 정도였고, 나는 악마와 반마를 향해 눈썹을 으쓱였다.

“말을 정정하지. 혼자서 이길 자신은 조금 부족하니, 둘이서 함께 싸우는 거로.”

“이, 이 놈이...!”

사실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나는 일부러라도 선화를 북돋았다.

“함께 싸워주시겠소, 선화 소저?”

“...제가 도움이 될 지는 모르지만.”

철컥. 철필의 끝이 튀어올랐다. 그러자 말려있던 철선이 펼쳐지며 선화의 손에 잡혔다.

누가봐도 여종이 들고다니기에는 고급스러워보이는, 만년한철의 부채를 철필처럼 들고 다니도록 만들어놓은 고급품이었다.

“...천 대협,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말이에요.”

“잠깐.”

“제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왜요?”

나는 마지막 한 마디가 끝나기 전에 선화를 제지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밀은 여럿에게 퍼져나가서 좋을 게 없는 법이오.”

“.......”

선화는 얼굴을 푹 숙였다. 내가 선화가 누구인지 모르고 접근했어도 여러 정황에 따라 선화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게 이상했을 것이다.

선화는, 와백봉 제갈선이다. 상상도 못한 충격적인 정체.

“그대가 비밀로 하고자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러니 내게도 굳이 알리려고 하지 마시오.”

나는 천무명을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멍청이로 설정하지는 않았다.

“...그럼 말이에요.”

선화는 부채로 입을 가렸다.

“제가, 유 소저와 두 분을 함께 좋은 식사 자리에 초대해도 될까요?”

“기대하겠소.”

퍼---억.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내 손을 떠난 검은 또 다른 목각인형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아무리 초절정이라도 약점이 대놓고 덜렁거리는데 설마 죽이지 못할까. 나는 다시 검을 회수하며 기를 강하게 끌어올렸다.

“서로 비밀은 지켜줍시다, 선화 소저.”

“...선이라고 불러주세요.”

“알겠소. 선.”

나는 선에게 닿는 공격부터 우선 쳐내며 하나둘 나무인형들을 제거해나갔다.

* * *

“...저곳인가.”

유설라는 선화가 말한 구천 계단에 도착했다. 천무명과 함께 올라갔던 길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혼란이 계단에 펼쳐지고 있었다.

“크윽, 이 놈들은 뭐야?!”

“피하지말고 싸워! 사술일 뿐이다!”

계단을 앞뒤로 둘러싼 나무인형들은 추색살의 대원들을 포위했다. 인형들의 무공 수위는 삼류부터 일류까지 천차만별이었으나, 인형의 수가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족히 수백, 아니 천은 되지 않을까.

‘어떻게 이런 걸 준비한 거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를 한게 아니라면 분명 많은 목각인형들을 순식간에 준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알아봐야겠어.’

과연 이 일을 꾸민 배후는 어떻게 이 많은 목각인형들을 동원한 것일까. 유설라의 짐작이 맞다면, 배후로 추정되는 자-황마는 이 정도 인형들을 동원할 능력이 없을텐데.

아아악!

추색살의 대원들이 하나둘 목각인형에 의해 중상을 입기 시작했다. 인형에게는 통하지 않는 산공독의 안개가 계단에 자욱하게 깔려있었고, 추색살은 점점 좁혀지는 포위망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나설 차례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니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다. 유설라는 걸리지 않을 정도의 빙백신공을 일으키며 계단을 향해 뛰어올랐다.

아니, 뛰어오르려고 했다.

구구구구.

산 아래에서 달려오는 익숙한 기운만 아니었다면. 사이한 기운을 걷어내는 신묘하고도 성스러운 힘이-

“......어라?”

푸화아----악!!

계단 아래, 수백에 이르는 나무인형들이 하늘 높이 뻥뻥 날아오르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바야흐로 무림인들 모두가 꿈꾸는 무쌍(武雙).

"......파사현정?"

검 한 자루로 나무인형 수백을 도륙내는 흑발 소녀의 검에는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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