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67화 (26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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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강림

"......!!"

흑발의 여인은 흰 돌을 내려놓다가 화들짝 놀랐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기이한 바람은 사이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뭐해. 안 둬?"

여인의 맞은편, 적발 여인은 검은 돌을 강하게 내려놓았다. 선과 선이 만나 교차하는 점의 정중앙에 놓인 검은 돌은 빙그르르 돌며 떨렸다.

"이러면 내가 이기는 거 맞지?"

"...그대는 눈치가 참으로 없군."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여자가 사랑 좀 찾아보겠다는데 자꾸 눈치가 없이 이러기야?"

두 여인은 서로를 지긋이 노려봤다. 둘 사이에는 검으로 깎아 만든 바둑판이 놓여있었다.

철컹, 철컹!

두 여인의 주변에는 두 자루의 검이 이기어검으로 날아다니며 검을 부딪쳤다. 마치 두 명의 검선이 날아다니며 검을 겨루는 것 같았다.

"태산의 하늘이 열렸다."

"오호. 거기에 내 반쪽이 있다는 거야?"

"...누가 네 반쪽이라는 건지는 차치하고, 태산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하늘이 열렸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기나 하느냐?"

"알 게 뭐야. 주먹으로 뚫린 것도 아니고 고작 바늘 하나 들어갈 만큼 작은 구멍 따위."

적발 여인은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거기로 누구 하나 내려와 봐야 힘도 못 쓰고 제압당할걸? 애초에 그런 작은 통로로 내려올 놈들이 있을까?"

"내려올 상황일 수밖에 없다면 내려오겠지."

"그런 상황이면 애초에 당신이 여기서 이러고 있지 않았겠지? 이 바둑판, 엎어버리고 바로 조처했을 거야."

"......."

흑발 여인의 푸른 눈에 짜증이 스쳤다. 적발 여인은 옆에 놓인 검은 돌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 두고 손장난을 쳤다.

"이래도 내가 눈치가 없어? 내가 한때는 눈치 하나로 중원을 통일한 여자야. 이거 왜 이래?"

"그대의 패도에는 관심 없다. 그리고 그대는 눈치 없는 게 맞아."

달칵.

흑발 여인은 흰 돌을 검은 돌 옆에 붙였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적발 여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끝까지 따라붙으며 덤비는 건 좋았다. 하지만 순리를 거스르는 건 결국 무너지기 마련."

순식간에 흑과 백의 전세가 역전되었다. 흐름을 끊으러 들어간 백돌은 전부 각개격파를 당하는 형국이 되었고, 길게 하나로 이어진 흑돌은 마치 용이 여의주를 품은 것 마냥 똬리를 틀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장강 물이 넘칠지언정, 마르지는 않는다."

"흐응, 그래? 그러면 이렇게 하면 되지."

적발 여인은 비릿하게 웃으며 손을 아래로 뻗어-

"얍."

쏴아아아---

바둑판을 엎었다. 흑과 백의 돌은 바닥을 구르며 섞여 혼돈이 되었다. 평평한 바둑판은 세로로 우뚝 서, 땅이 뒤집히고 말았다.

"어차피 판 위에서 노는 거라면, 판을 엎어버리면 그만 아니야? 후후."

"......후후."

철컹!

허공을 뛰어다니던 두 검이 각자 주인의 손에 날아들었다.

"졸렬하구나, 정말. 그렇게 추악하게 승리를 따내고 싶으냐?"

"흥! 내가 이기고 있던 판이었는데 내가 엎은 데 뭐가 잘못이야!! 아니꼬우면 이기시든가!"

카---앙.

“내가 이긴 싸움이다!”

“시끄러워!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둘의 검이 다시 불꽃을 튀며 부딪히기 시작했다.

* * *

“왠지 모르게 등허리에 오한이 드는군.”

“제가 옆으로 비켜설까요?”

“아닙니다, 유 소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몸서리를 친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나는 주변에 가득한 이상한 기운에 자꾸 몸에 한기가 들었다.

“유 소저, 춥지 않...묻는 게 의미가 없겠군.”

“?”

빙백신공을 운용하고 있는 유설라는 한기를 느끼지 못한다. 체외의 기온보다 몸 안의 한기가 더 차가울 것이며, 북해의 기온은 이곳보다 더 차가워 이 정도는 약과일 것이다.

“어...산 위로 올라가서 그런 거 아닐까요?”

선화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지식을 뽐냈다.

“높은 산 위로 올라가면 기온이 낮아진다고 했어요.”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내려가는 게 자연의 섭리 아니오? 온기가 위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

논점을 벗어난 헛소리에 선화는 인상을 찌푸렸다. 선화는 자신의 지식을 정돈하여 나를 이해시킬 논리를 찾고 있었고, 나는 그녀를 괜히 골탕 먹인 것 같아 미안했다.

“유 소저, 우리가 올라갈수록 추운 이유를 혹시 아십니까?”

“그냥 추운데요.”

“......아니, 논리적인 근거는?”

“몸으로 느끼고 있으니 올라갈수록 춥다는 근거가 되지요.”

“그것참 논리적이군.”

몸이 알고 있다고 하니 내가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우리의 몸은 산으로 올라갈수록 체온이 내려가고 있었고, 입에서 서서히 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알았어요. 그러니까-”

“스승께서 말씀해주시길, 태양의 기운이 땅 아래에는 많이 모이지만 산 위에는 잘 모이지 않는다고 하더군.”

“.......”

선화가 내 옷깃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아시면서....”

“그런데 이상하지 않소? 올라갈수록 기온이 올라가 봐야 그냥 서늘한 정도일 텐데....”

나는 주변을 가리켰다.

“서늘해도 너무 서늘하지.”

주변의 분위기는 싸늘하다 못해 을씨년스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기온이 낮은 편인데, 주변의 분위기까지 이러니 한기가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것 참...으스스한데.”

“유령이라도 나오는 거 아닙니까?”

“유, 유령이요?”

선화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령이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 그럴듯하게 만들어낸 미신일 뿐이라고요.”

“후후, 선화 소저. 유령을 무서워하십니까?”

“유령, 있는데.”

단호한 내 말에 선화와 유설라 모두 표정이 굳었다. 나는 유령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을 차치하고, 유설라가 표정이 굳는 게 어이가 없었다.

[백습광아 같은 괴물도 존재하는데 유령이라고 존재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내 전음에 유설라는 웃으며 굳어버렸다. 선화는 상당히 당황하며 나를 채근했다.

“그, 그런 말씀을 왜 하시는 거예요. 지금 와백봉을 구하러 가는 이 중요한 상황에.”

“그러니까 하는 말이오.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한기...보통 한기가 아니거든.”

똑똑한 여자들이라 내 말을 금방 이해했다. 그래서 둘은 더 사색이 되었다.

“유령이...나온다는 말인가요?”

“음.”

적어도 혼백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도 혼백이 과거로 돌아온 걸지도 모르고, 혼령이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냐를 두고 따지라면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월녀강림의 대법이 바로 월녀의 혼을 지상의 육체에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뭔가 께름칙하군.”

기억이 날 것 같으면서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다. 뭔가 주변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으나, 좀처럼 말하기 힘든 감각이 나를 채웠다.

“예전에 이런 비슷한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느끼지 못하는데 다른 이는 워낙 잘 느껴서 구박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다른 이가 누구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카앙-!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선화가 깜짝 놀라 철필을 들었고, 유설라는 내 등을 지키듯 몸을 돌렸다.

“적습이군.”

“소협, 이상합니다. 생기가-”

“사람이 아닌 거지요.”

나는 우리를 향해 암기를 날린 자를 눈으로 확인했다. 나무 사이 사이에 숨어있는 자들은 주변의 나무색과 비슷한 보호색의 무복을 착용한이들이었다.

“생기가...느껴지지 않는 건...?”

“한 번 더 말하지만, 사람이 아닌 거지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적들의 모습을 보고 기시감의 출처를 깨달았다.

빙의술(憑依術)

영혼을 불러와 대상에게 깃들게 하는 사술로, 무림 내에서도 마교 중에서도 악질적인 자들이 쓰는 흔치 않은 술법이다.

‘혈교인가?’

혈교에서도 빙의술을 쓰기는 한다. 하지만 빙의술이 혈교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들에 씌인 놈들은 혈교의 방식으로 들러붙은 영혼이 아니다.

혈교는 피를 매개체로 혼을 다룬다. 차라리 강시를 다루면 다뤘지, 아무 생명의 근원도 없는 나무인형 따위에게 혼을 씌우지는 않는다.

“지옥문이 열렸군. 그러니까 산 전체가 이렇게 춥지.”

즉, 생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저 나무인형들에 씌인 유령들이 문제였다.

“아, 갑자기 뭔데 이거.”

나는 색마를 죽이러 왔을 뿐인데, 왜 살아있는 사람도 아닌 목각인형들을 상대해야 하는 걸까.

‘그냥 집에 갈까.’

라고, 생각한 순간.

철컥, 철컥, 철컥.

“히이익!!”

선화는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녀의 눈을 가리기 위해 앞으로 나서며 검을 겨눴다.

“...색마맞네.”

사람은 아니지만, 행동이 색마면 전부 색마다.

“어떤 미친 놈이 인형에다가 저런 걸 달아놓을 생각을 하는 거지?”

덜렁덜렁.

인형들에는 양물을 형상화한 각좆이 축 늘어져 흔들거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연결 부위가 헐거워져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아래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할만한 자는....”

[황마.]

내 귓가에 유설라의 전음이 스쳤다.

[분명 환마에게 십마의 자리를 빼앗긴 혼령술사일 겁니다.]

십마 중 검마가 한 자리를 꿰차고 빙마가 대대로 자리를 차지해 온 것처럼, 이름은 달라도 항상 ‘사술의 대가’는 존재했다.

당대에는 비천환마가 섭혼술의 대가로서 존재하지만, 그 이전에도 여러 환술사들이나 도사들이 존재해왔다.

“선화 소저. 이쪽으로 오시오.”

나는 선화의 허리를 당겨 내 품에 안았다. 유설라는 내 등에 자신의 등을 바싹 붙이며 기를 뿜어냈다.

“아까 전에 산 아래에서 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마시오.”

“절대 보기 싫어요...!!”

선화는 비명을 질렀다. 나도 보기가 몹시 싫었지만 그래도 저 색마인형들을 부수려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믿겠소.”

나는 한 번 더 선화가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붙였다.

“유 소저, ‘전력’으로.”

“...괜찮습니까?”

“물론.”

전력을 쓰지 않으면 오히려 난감하다. 우리 주변을 에워싼 수 십의 목각인형들은 하나같이 절정 고수에 준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왜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싸우기 힘들어지는 것 같지?’

내가 강해질수록 적들이 강해진다는 법칙이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나를 이렇게 피곤하게 하는 걸까.

‘일단 다 죽이고 보자.’

혼령이 깃들어있든 말든, 결국 인형 조종의 핵심이 되는 곳을 잘라버리면 된다.

“희아연월. 아류.”

나는 검을 어깨 너머로 넘겼다. 사용하는 무공은 희아연월검이지만, 이번에는 희아연월이 아닌 다른 이의 무공이다.

“...폐월경파(閉月鏡破)”

마검비 왕소현이 훗날 정마대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발전시킨 월영성희검의 도달점.

폐월경파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가르는 걸 넘어 부수는데 있어서, 미래 마검비를 따라올 자는 거의 없었다.

* * *

살면서 이토록 살초가 난무하는 싸움은 본 적이 없다.

제갈선이라는 여인은 세가의 금지옥엽이었고, 무언가가 죽는 광경이라고 해봐야 여름철 모기 죽는 것 정도밖에 보지 못했다.

때리고, 부수고, 파괴하고, 찌르고.

그런 폭력적인 광경은 살면서 그다지 겪어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용봉지회에서 여인들을 상대로 주먹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야만스러운 여인 한 명을 제외하면, 제갈선은 폭력과 살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퍼억, 퍼억---!!

그래서 제갈선은 공포에 질렸다. 납치당한 와백봉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올라왔으나, 태산의 상황은 그녀가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과격했다.

덜렁, 덜렁!

더군다나 주변을 둘러싼 인형들에게서 자신을 향한 끈적한 악의가 엿보였다. 덜렁거리는 각좆은 마치 자신을 범하겠다는 듯, 제갈선을 향해 꼿꼿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끔찍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안심하시오."

반마라는 자와 부하들이 습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갈선은 자신을 지켜주는 온기에 마음이 안정되었다.

"수가 많군."

밀려드는 살의 속에서 귀찮은 듯 검을 휘두르는 남자는 묵묵히 검을 휘두르며 나무인형들을 베어넘기고 있었다.

두근, 두근.

제갈선은 안되는 걸 알면서도 남자에게 꼭 달라붙었다. 자신을 범할 것 같은 무수한 색마인형들의 향연 속에서, 제갈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눈앞의 남자 뿐이었다.

"......."

아랫배에 닿은 단단한 무언가는, 그저 생리현상에 불과할 것이리라. 결코 자신에게 음심을 품어서 그런게 아니라, 남자라면 응당 여인이 붙어있으니 생긴 자연현상이리라.

두근, 두근.

제갈선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

그러면서도, 몸을 빼지는 않았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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