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백봉 납치사건
천무명이 선화를 납치하듯 갑자기 데려간 뒤.
"...허, 저것 봐라?"
제갈시연은 차갑게 웃으며 발을 가볍게 털었다. 붓기는 금방 사그라들었고, 곁에 있던 여종들은 허리를 피며 살기를 내뿜었다.
"쫓을까요?"
"아니, 놔둬라. 어차피 먼저 도착해도 태산을 지키고 있는 수비병들에게 잠시 막히게 될테니."
제갈시연은 시종이 건넨 부채를 받아 펼쳤다. 검은 까마귀의 깃털로 엮은 흑선으로 입을 가리며, 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셋이 떠난 길을 노려봤다.
"천무명, 그리고 유설라. 변수는 절대 용납할 수 없지."
척보기에도 초절정에 준하는 두 남녀를 상대로 본색을 함부로 드러낼 수는 없다. 하물며 태산도 아닌 일반 평야에서라면 더더욱.
"적당히 강한 녀석이었으면 이 자리에서 죽이는 건데 아쉽구나."
끼릭, 끼릭.
제갈시연이 흑선을 튕기자, 근처의 나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십 년 묵은 듯한 아름드리 나무의 껍질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안에서 붉은 빛이 번뜩였다.
"일월영(一月英)."
"예, 월영대주."
여종들은 제갈시연을 월영대주라고 불렀다. 월영(月影)이라는 문구는 강호에서 주로 살수나 마인 등 사파에서 주로 쓰는 단어이나, 월영(月英)이라는 문구는 흔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 너는 나를 연기하거라."
제갈시연은 자신의 외투를 훌러덩 벗어던졌다. 일월영 또한 외투를 벗으며 제갈시연과 교환했다.
사락.
머리장식까지 풀어헤친 제갈시연은 품에서 흰 종이 한 첩을 꺼내들었다. 손바닥 위에 놓고 곱게 펼치니, 안에는 하얀 가루가 잔뜩 담겨있었다.
"해독약을 복용해라."
"예!"
제갈시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종, 월영대의 대원들은 약을 복용했다. 그러자 일류, 이류에 준하던 내공이 순식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니, 흩어졌던 내공이 원래대로 맺히기 시작했다. 제갈시연은 절정이 기세를 갈무리하며, 일류 끝자락에 이른 여종들에게 세 남녀가 떠난 길을 가리켰다.
"너희들은 저들을 쫓아라. 최대한 시간을 지연시켜 늦게 도착하도록 계산하라."
"알겠습니다. 대주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유마(流馬)로 달려가마. 너희는 대법을 준비하라."
제갈시연은 붉은 안광을 뿌리는 나무를 향해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나무껍질이 떨어지며, 안에 보관된 나무통 안에 철로 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갈시연은 앞뒤로 원형의 바퀴가 달린 널리 펼쳤다. 앞뒤로 두 개의 바퀴가 달린 수레는 삼각형의 철로된 몸통이 바퀴와 연동되어 있었다.
정체불명의 기계장치.
"미안해요, 은공. 그대가 제갈세가에 준 선물을 이렇게 사용해서."
부우욱!
제갈시연은 치마를 손으로 찢어버렸다. 두 다리가 훤히 드러나게 되었으나 그녀는 전혀 수치스러운 기색 없이 삼각형의 안장에 엉덩이를 붙였다.
"후우우...."
제갈시연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공이 그녀의 두 다리와 전신 혈맥을 맴돌기 시작했다.
"천기미리보(天機迷離步)!"
빙글.
제갈시연은 차체 옆에 달린 발걸이에 발을 집어넣어 강하게 아래로 굴렀다. 차체에 걸린 사슬이 돌아가며 바퀴가 빙글 돌았고, 바퀴는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규칙적으로 밟는 보법은 아래로 다리를 뻗으면 뻗을수록 더 움직임이 빨라졌다.
덜그럭, 덜그럭!
절정고수의 움직임에 발걸이도 빠르게 돌아가고, 사슬과 바퀴도 함께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연히 차체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그 속도는 점차 어지간한 무사들의 전력질주보다 빨랐다.
"철마여, 가자---!!
덜커덕, 덜커덕!
흙길과 바위를 아무 무리없이 바퀴가 굴러가며, 제갈시연은 천무명이 달려나가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태산을 향해 우회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덜커덕, 덜커덕!
산악을 아무 무리없이 달리는 이륜철마의 몸통에는 암투이비(巖鬪離飛)라는 거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 * *
"...어흐, 술 맛 좋다. 역시 배 위에서 술 마시는 게 최고야."
"어머, 교주님. 날씨가 많이 차갑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래. 아...그러고보니 산동에서 사고가 터졌다고? 육봉 중 와백봉이 사라져? 흐음...산동이라.... 황보...제갈...."
"산동에 무슨 연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지금 무림맹 군사 놈 있지 않느냐. 그놈이 하도 자기가 대 제갈세가의 후손이니 뭐니, 기계장치의 신이니 뭐니, 목우유마 어쩌고 하면서 자랑질을 하길래 내가 산악을 달리는데 거뜬한 물건을 하나 만들어줬었지."
"...지금 그거 어디에 있습니까?"
"어, 음, 녹슬어서 망가지지 않았을까? 몰라. 놈이 하도 만드는 방법 가르쳐달라고 해서 그냥 주고 치워버렸어."
"......."
* * *
아마도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나와 유설라가 달리는 속도를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하거나, 우리가 달려가는 속도를 늦추게 하면 된다.
"슬슬 태산이 보이는 군."
멀리 태산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숲의 공터에 우선 멈춰섰다.
"유 소저, 힘들지는 않소?"
"전혀요. 지금 몸에 힘이 펄펄 넘쳐요."
유설라는 자신의 하단전을 쓰다듬으며 주먹을 불끈쥐었다. 지난 밤 유설라는 내 양기를 잔뜩 머금었기에, 이런 장거리 이동에도 지치지 않을 체력을 가질 수 있었다.
"선화 소저는...."
덜덜덜.
선화는 내 품에 안겨 입술을 떨고 있었다. 어지간한 맹금류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달렸을테니, 아마 그 속도를 이기지 못해 바들바들 떠는 듯 보였다.
"선화 소저. 잠시 내려놓겠소."
"네, 네...."
나는 선화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간신히 제자리에 섰으나, 내 어깨를 지지대 삼아 붙잡으며 호흡을 골랐다.
"뛴 건 난데 그대가 힘들어 하는군."
"하아, 하아, 이건 뛰는 게 아니라, 허억, 날아가는 셈이잖아요...."
"조금 빠르게 달리기는 했지."
제갈세가의 분가에서 태산까지 고작 한 시진도 되지 않는 시간만에 도착했으니, 그녀는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더 빨리 나를 타고 달려온 셈이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나름 편안했을텐데. 마치 침대처럼."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선화 소저, 괜찮으세요?"
"네, 네네...."
선화는 유설라의 부축을 받으며 진정했다. 우리는 그녀가 마음을 가다듬기까지 충분히 기다렸고, 선화는 약 반 각의 시간동안 호흡을 고르며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실례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두 분."
"괜찮소. 그럼 이제 봉선당이라고 하는 곳을 알려주시오."
내가 굳이 선화를 데려온 이유는 제갈시연을 비롯한 여인들의 낌새가 이상한 것도 있었지만, 진짜로 봉선당이라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냥 정상일까? 아니면 당(堂)이라는 이름처럼 특별한 건물이 있는 걸까. 귀동냥으로 들은 말에 따르면 작은 제단이 있다고 하던데, 정작 위치는 내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봉선당이라고 하는 곳은 그냥 역대 황제들이 의식을 치뤘던 곳이에요. 천하에 태산보다 높은 산은 많지만, 태산이 오악 중 동악(東岳)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진시황이 천하를 평정하고 의식을 치뤘던 것부터 시작이었죠."
의도치않게 역사 강의를 듣게 되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통해 봉선당이 어디인지 알아챘다.
"정상인 건가?"
"예. 옥황봉(玉皇峰)일 거예요. 그곳에 아마 와백봉 님을...납치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정상까지 가는 길은 그리 험준하지 않다. 태산이 오악 중 하나라고 하지만 실제 높이로 따지면 10등 안에도 들지 못할 것이다. 단지 주변에 넓게 펼쳐진 평야에 우뚝 솟아있는 산이라 높게 보일 뿐.
자연 그 자체인 태산은 다리만 조금 고생하면 험준하지 않다. 하지만 가는 길을 막아선 이들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아무래도 싸우지 않고는 그냥 못 갈 듯 합니다. 유 소저, 선화 소저를 부탁합니다."
"예, 선화 소저. 이쪽으로."
유설라는 선화를 지키듯 검을 들고 한기를 뿌렸다. 그리고 나는 주변에 살기가 가득 깔리는 것을 체감하며 약속의 대사를 읊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파바바밧.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가 나온 공터를 에워싸는 한 무리의 흑의인이 나타났다.
* * *
'습격자는 마교의 무리. 제갈세가 분가의 안주인 제갈시연의 사주를 받은 자들.'
선화, 와백봉 제갈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거짓으로 나를 끌어들인 다음 납치하려고 했구나.'
같은 제갈세가의 사람이기에 제갈선은 제갈시연의 계략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제갈시연이 자신에게 가진 '악의'를 감안하여, 그녀가 자신을 파멸시키려고 한다면 어떻게 망가뜨릴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다 결론을 도출해냈다.
'나를 납치하면 납치하는 대로 좋고, 추색살이 와백봉을 구출하지 못하고 찾지도 못하면 그거대로 수작을 부리겠지.'
제갈선은 독고연과 마찬가지로 실종되었다. 여인이 납치를 당해 실종되었으니, 이제 그 결말은 뻔할 뻔 자 아닌가?
- 제갈선, 색마에게 당했다던데?
- 어이쿠, 큰일 날 소리. 제갈세가 근처에서 그런 얘기 하지를 말어.
- 이거로 육봉 중 두 명, 아니 세 명이나 색마에게 당한 건가? 쯧쯧쯧....
삼인성호라고 하였던가. 이 사건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제갈선은 납치를 당해 겁간당한 여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가장 빠른 해결방법은 제갈선이 선화의 변장을 벗어던지고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러면 자연히 제갈시연의 계획대로 이루어지게 된다.
‘나를 곤경에 빠드려서 색마에게 겁간당하게 하려고 하지.’
같은 제갈세가의 사람끼리 참담한 짓을 저지르는게 말이나 될까 싶지만, 제갈시연은 실제로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다. 마교와 손을 잡으면서까지 제갈선을 몰락시키려는 그녀의 행동 원리는 간단하다.
본가가 사라지면 분가가 본가가 된다.
그리고 자연히 자신의 아들이 제갈세가의 가주를 이어받을 것이다.
와백봉 제갈선은 본가의 상징과도 같은 여인이다. 와백봉이 실종되거나 죽거나 겁탈당하는 순간, 본가는 크게 흔들릴 것이다.
본가에 있는 유일한 후계자이자 제갈길이 늘그막에 낳은 적자, 제갈검담은 장성하려면 한참 남은 핏덩이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 아이도 변고를 당할 지도 모른다.
‘분가를 만들자고 했던 게 내 잘못이었을까?’
천기에 따라 서쪽에서 불어닥칠 흉악한 기운에 가문의 사람들이 살아남을 길을 모색하고자 했었는데, 그게 오히려 세가 내의 차별과 질시를 일으키게 되었다.
“.......”
제갈선은 자신의 품속에 있는 철필을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이봉결정전 이후, 제갈선은 분가에서 오랜 기간 홀로 시간을 보내며 자기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졌다. 1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의 자기관조를 통해 작게나마 깨달은 것이 있다면,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 말자는 것.
와백봉으로 인해, 제갈세가로 인해 벌어지는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설령 정체를 드러내어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빙색마인과도 같은 자들에게 표적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정체를 드러내 직접 싸워야 한다!
“제가-”
“선화 소저.”
천무명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고개를 돌렸다. 검을 옆으로 움켜쥔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봉선당으로 가는 길, 혹시 저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하오?"
"...네."
천무명이 가리킨 계단은 이미 흑의인들이 무기를 들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천무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검을 빙글 돌렸다.
"그럼 돌아가는 건 힘들겠군. 선화 소저를 업고 절벽을 산을 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고오오오.
천무명의 몸에서 막대한 기가 터져나왔다. 선화는 천무명에게서 뿜어져나오는 검기에 그만 넋을 잃었다.
"저것이...."
"희아연월검."
고개를 돌리니, 유설라는 애틋한 얼굴로 천무명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세요, 선화 소저. 저 분이...."
철컹!
천무명의 검에서 검기가 피어오르자, 흑의인들이 일제히 뛰어올랐다.
"천하제일인이 되실 분입니다."
* * *
선화는 우리의 눈치를 보며 손을 품속에 넣었지만, 나는 그녀가 제갈선으로 활약할 기회를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선화는 선화로 계속 남아있어야 해.’
그래야 내가 제갈선을 취하고 가는 게 아니라 천무명으로서 제갈세가의 여종과 하룻밤 뜨거운 관계를 맺고 시원하게 떠나지 않겠는가?
‘와백봉은 결코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돼.’
그러면 내 패배나 마찬가지다. 다른 색마들이 산동 분가를 노리게 될 것이고, 다음에 비천색마로서 와백봉을 진짜로 범하러 올 때 큰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자기가 나랑 하고 나서 나 처녀 천무명한테 줬어요 하고 말할 것도 아닐테니.’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사단은 그저 누군가의 악의어린 장난으로 끝나야 한다. 나는 검을 높이 치켜들며 목에 내공을 실었다.
" 나, 천무명. 와백봉을 구하러 왔다!"
여인을 납치하여 겁간하는 이들에게 정의로운 천벌을.
"죽어라, 이 더러운 색마들!"
나는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힘차게 검을 겨눴다.
“필색멸살아(必色滅殺亞)!”
색마 잡는데 최고의 검법, 멸색사태 류서시의 파사현정검으로 색마들의 목을 향해 검을 찔렀다.
[작품후기]
현대 치트!
는 누구 때문에 적의 강화수단이 되었습니다.
주인공에게 현대 치트는 없냐고요?
월녀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