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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불사
중원인들은 기본적으로 몸을 잘 씻지 않는다.
태생이 더럽다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땅이 넓은데 사용할 물은 적다보니, 음용수를 비롯하여 세신에 필요한 물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그래도 씻을 건 씻어야지!
혈교주는 말했다.
몸을 단정하게 하고 씻는 건 아무리 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 해남은 그래도 물이 풍부해서 씻기는 편했는데, 중원은 도대체 씻을 만한 게 뭐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하나도 없어!
혈교가 천하를 평정하며 피로 역사를 쓸 때, 혈교주는 사로잡은 무림인들을 노예로 삼아 수맥을 파내어 저수지를 만들었다.
- 지금부터 나한테 보고할 때는 한 번 씻고 와. 뭐? 물로 한 번 헹구고 오면 되냐고? 어디 네 몸을 피로 한 번 헹궈줄까?
혈교주는 중원인의 관점에서 보면 병적으로 씻는데 집착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머리부터 감는 건 기본이었고, 하루에 두 번은 꼭 몸에 물을 끼얹고 쌀겨로 거품을 내며 씻었다. 그리고 언제나 일주일이 돌아올 때마다 달아오른 온수에 알몸을 담가 피로를 씻어냈다.
'매일같이 몸단장하고 다니니까 예쁘기는 했지.'
혈교주는 중원인들에게 한 때 요선혈녀(妖仙血女)라고 불리울 정도로 미모 만큼은 인정을 받았다. 언제 어디서나 가꾼 모습으로 돌아다니며 과하지 않은 꽃향기를 뿌리고 다니니, 혈교주에게 반해 혈교에 들어가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비무?
- 가라, 혈강시! 창궁무애검!
전투야 혈강시인 내게 전부 맡겼으니 옷에 먼지 묻을 일이 없었다. 혈교주에게는 항상 꽃향기가 났고, 혈교주는 항상 깨끗하고 예쁜 모습을 유지했다.
그래서 나는 혈교주의 옆에서 몸을 씻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알게 되었다. 씻는 게 단지 미용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개인의 위생에도 큰 영향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혈강시를 알몸으로 목욕 시중을 들게 하는 건 좀 그랬지만.'
- 내가 씻는데 누가 암살하러 오면 어떡해?
혈강시는 혈교주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했다.
혈강시는 언제 어디서나 혈교주를 지켜야했다.
- 나 씻기는 김에 당신도 좀 씻기고. 어서 와서 머리 좀 감겨.
혈교주는 혈강시에게 자신의 머리를 감게 만들었고, 쌀겨를 이용해 거품을 만들어 몸을 씻기게 하였고, 온탕에 몸을 담글 때는 항상 같은 탕에 들어가 혈교주를 지켰다.
‘개인 위생은 중요하지.’
그렇게 혈교주의 위생에 관한 주입 사상 덕분에 나는 자라면서 위생 하나는 철저하게 지켰다. 천가장에 욕탕을 만든 것도 나 뿐만 아니라 내 아내, 내 자식들도 자주 씻는 생활습관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머리 사나흘에 한 번 감는 여자를 내 아내로 들일 수는 없지.’
내가 아내로 맞이하는 여인들이 나름 유명한 세가의 여인들인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중원에서 가난한 자는 상대적으로 물을 적게 사용한다. 하지만 나름 자본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유명 세가의 여식일 경우, 물을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곳에서 살기 마련이다.
‘일부러 구파일방이랑 팔대세가 여자들만 취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최소 이틀에 한 번은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다. 위생이라는 개념을 알아버린 나에게, 여자를 선택하는 기준은 위생에 대한 관념이었다.
‘물론 진흙에 파묻힌 진주라면 씻어서 취하겠지만.’
그런 여자가 있다면 녹림왕의 딸 방영희나 그 외 몇몇 존재가 전부가 아닐까. 나는 기억 속의 여인들을 더듬으며 괜히 웃음만 나왔다.
‘어찌됐든, 씻는 건 중요하지.’
그래서 나는 씻으러 왔고, ‘그녀’를 불렀다. 내 부름에 따라 한걸음에 달려온 그녀는 욕탕의 입구에서 제지를 당했다.
- ...안 됩니다! 어찌 남녀가 같이 들어간단 말입니까?
- 같이 들어간다는 게 아니라, 천 소협의 세신을 돕겠다는 것 아니에요? 제갈세가에 목욕 시중이 없으니, 저라도 해야지요.
밖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이냐, 와백봉.’
나는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기대하며 뜨끈한 물속에서 피로를 풀었다.
‘진퇴양난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와백봉.’
- ...제, 제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선화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렸다. 목욕 시중이 있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했지만, 그건 분명히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그러니 유 소저께서는 부디 발길을 돌려주십시오.
- ......이보세요. 지금 제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모르시겠어요?
쾅.
밖에서 유설라가 선화를 압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선화도 당황스러우리라. 빙백봉이라는 자가 이리도 거칠게 나오는 것에.
‘지금이다.’
- 천 소협, 들어가도 되죠?
“들어오십시오.”
나는 안에서 유설라를 환영했고, 유설라는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라락.
따스한 열기에 얼음이 녹아내리듯, 유설라는 아래로 흘러내린 긴 머리칼을 단정히 정돈하며 머리 뒤로 땋아올렸다. 그녀는 소복 한 벌만 걸친 채 내가 이미 자리잡은 탕으로 다가왔다.
“아, 이, 이런...!”
선화는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했다. 귓등까지 벌게진 것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듯 보였다.
“문을 닫아주시오, 선화. 모처럼 데워진 열기가 빠져나가는군.”
“아, 네, 네.”
선화는 내 부탁을 듣고 문을 닫았다. 이제 욕탕이라는 닫힌 공간에는 나와 두 명의 봉황이 남게 되었다.
“천 소협, 실례하겠습니다.”
유설라는 천천히 탕으로 다가와 발끝부터 천천히 물에 담갔다. 소복은 물에 젖어 피부와 닿기 시작했고, 유설라는 당연하다는 듯한 분위기로 쇄골까지 몸을 담갔다.
“좋군요....”
“아, 아으, 이건....”
남녀가 같은 탕에 몸을 넣고 있는 건 분명 비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당사자 둘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있으니 선화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물론 유설라도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다. 그녀의 붉게 상기된 피부는 온탕의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화 소저. 미안하지만 이야기를 전해주시오. 이제 더 불을 지피지 않아도 된다고.”
첨벙, 첨벙. 유설라는 엉덩이를 옆으로 옮기며 내쪽으로 다가왔다. 서로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선화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굳어버렸다.
“서, 설마 두 분은...?”
“오해하지 마시오. 벗일 뿐이니.”
천하의 어떤 벗이 서로 알몸으로 같은 욕조에 몸을 담근단 말인가---!!
“유 소저, 우리는 친한 벗이지요?”
“...물론이지요. 천 소협. 벗끼리 함께 혼욕을 하는 정도야 으레 있는 일 아니겠어요?”
“그렇지. 우리가 엄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니, 그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소. 설마 우리가 제갈세가에서 엄한 짓을 하겠소?”
하지만 당사자들이 벗이라고 주장하니, 선화는 눈을 좌우로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 소저. 목욕 시중을 들지 않을 거라면, 제가 천 소협을 모시겠습니다. 그러니...나가주시겠어요?”
유설라는 날카로운 기세까지 뿌리며 선화를 쫓아내려고 했다. 그에 혼란에 빠진 선화의 선택은-
“아, 알겠습니다.... 조, 좋은 시간을...? 무,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전략적 후퇴. 선화는 몸에 착 달라붙는 소복을 과시하는 유설라의 패기에 허리를 꾸벅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쿵.
문이 닫히자, 나는 작게 속삭였다.
“목욕 시중을 들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내가 너를 씻겨주는 게 아닌가?”
“...저, 진짜 큰 맘 먹고 들어온 거거든요?”
유설라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머리...직접 감겨주신다면서요.”
“물론.”
그간 마음고생이 심해서 그랬을까. 유설라의 머리칼은 다소 거칠었다. 내 정기를 주기적으로 받는 천가장의 여인들과 달리 다소 헝클어지는 기운이 역력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내가 손 좀 봐줘야지.’
혈교주는 말했다.
- 여자는 머리가 생명이야.
천마신공 때문에 머리가 상하는 것에 더불어, 무림맹 한 가운데에 정체를 숨기고 사는 것 때문에 고생하는 유설라를 위해 나는 양손에 기를 불어넣었다.
‘내가 고생은 좀 해도 탈모는 안 되지.’
첨벙.
나는 유설라의 아리따운 머리칼을 위해 직접 미염신공을 운용하며 그녀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 * *
“.......”
선화, 아니 제갈선은 정신적 충격에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육봉!
중원 전체를 둘러봐도 단 여섯 명뿐인 무림의 꽃이다. 가장 꽃다운 나이에 누구보다도 밝게 피어나 만개한 만큼, 온갖 자존심과 허영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다.
색마만 아니었다면, 제갈선 또한 자신의 미모와 지혜, 무공을 뽐내며 자신의 미를 천하에 널리 알렸을 것이다.
뭇 사내들에게 있어서는 흠모의 대상이 되고, 같은 여인들에게는 질시의 대상이 되며, 무림 전체에 있어 천하에 손꼽히는 미인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을 것이다.
육봉이라함은,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뭐야?’
제갈선은 자신의 상식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고작 남자 하나에 뭐가 그렇게 안달이 나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제갈선은 이미 빙백봉 유설라가 천무명에게 품은 마음을 알아챘다.
알아채지 못하는 게 바보였다. 하지만 설마 밤늦게 몸을 씻으러 온 것을 알아채고 육탄공격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미파면 좀 조신해야 하는 거 아니야?’
불가의 여인이라면 어느정도 보수적이어야 하는데, 유설라에게는 그런 조신함이 전혀 없었다.
아니다.
유설라는 극도로 조신했다. 제갈선은 분가에 숨어있으면서도 무림 전역의 일들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특히 자신과 같은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육봉에 대한 것이라면 더 귀를 기울였다.
왜 유설라가 빙백봉(氷白鳳)이라는 별호가 붙었겠는가?
단지 그녀의 절기, 설화난영 때문에?
아니다.
- 유설라는 차갑다. 같이 식사 한 번 하자는 말을 했더니 사나흘간 식당에 오지도 않더라.
- 빙백봉은 무공만큼이나 마음씨가 차갑다.
- 빙백봉이 남자와 같이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철벽녀.
그 어떤 남자도 감히 말조차 건네기 쉽지 않았던 만년설같은 여인이 천무명이라는 남자를 만나자마자 녹아내렸다.
‘봄이라도 온 거야 뭐야?’
유설라의 마음에는 봄꽃이 피었다. 제갈선은 유설라가 여인으로서의 조신함과 자존심을 모두 내던지게 만든 천무명이라는 남자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희아연월검. 그 어느 곳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무공의 소유자.
그런데 무공의 경지는 자신조차 가늠할 수 없는 정도.
최소한, 초절정.
구룡쟁패에 나왔다면 천하제일룡은 응당 그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같이 제갈세가에 방문한 삭룡 강우상은 아쉽게도 구룡에도 들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지.”
설령 천무명이 구룡쟁패에 나왔더라도 구룡 중 으뜸은 남궁패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사공희가 태극무봉을 떨쳐내고 태극화, 백도제일화가 된 것처럼, 여느 문파의 장문인 급 실력을 가졌을 지도 모르는 그에게 백도제일룡이라는 칭호가 나왔을 것이다.
구룡의 으뜸이 아닌, 구룡보다 더 높은 하늘을 거니는 자.
‘그 정도면 육봉에 구구절절 매달릴 법도 하지.’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제갈선은 점점 빙백봉의 행동에 스스로 이유를 붙이기 시작했다.
‘만약 빙백봉이 천무명이라는 남자에게 미래를 건 거라면? 다음 용봉지회에 나왔을 때, 자신의 연인으로 알려지게끔 선수를 치는 거라면?’
제갈선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다. 맹렬히 돌아가는 두뇌는 금방 다음 용봉지회의 결과를 도출해냈다.
제갈선이 와백봉으로 자리를 유지하는 건 당연하지만, 유설라 또한 빙백봉으로서 자리를 유지하리라.
하지만 구룡의 위치는 크게 바뀔 것이고, 천무명은 모두가 탐내는 인재로 널리 이름을 떨칠 것이다.
‘나는 빙백봉과 혼약을 맺고자 하오.’
우승자로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청혼한다?
강호 무림 전체가 칭송하는 최고의 한쌍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호사가들에게 다음 용봉지회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니 그 뒤로도 이어지는 전설이 될 것이다.
“...아흐.”
제갈선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서 침이 꿀꺽 넘어갔다. 비무장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천하대장군같은 사자후를 터뜨린 청년이 성큼성큼 걸어와, 여인의 앞에 서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인다.
‘나의 검은 당신의 것이오.’
“......스읍.”
그 자리에, 자신이 있다면 어떨까? 제갈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을 가장 가능성 높은 자가 빙백봉 유설라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큰거렸다.
어쩌면 지금 안에서 벌어지는 일도-
첨벙, 첨벙.
"......!!"
안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제갈선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 천 소협...앞으로는 천 가가라고 불러도 될까요?
물에 젖은 소복을 서서히 들어올리며 고백하는 유설라와, 그녀를 끌어당기며 마주안는 천무명-
"...쓰읍."
제갈선은 품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적을 수 있게, 책자에는 손에 딱 맞는 세필이 실에 달려있었다.
"이건...못 참죠."
달빛 아래, 순백 여인의 젖은 옷 끝에는 연분홍빛 꽃이-
"아니, 아니야."
제갈선은 큰 맘을 먹고 세필을 강하게 눌렀다.
그것은, 물 속에서 벌어진 짐승같은 사랑이었다.
제갈선은 첫 구절을 적고, 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백색 소음 삼아 빠르게 뒤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작품후기]
Q : 쟤 뭐죠?
A : 색협 작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