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57화 (25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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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불사

잔치가 끝난 뒤.

나는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선화는 잔치의 시작부터 끝까지 내 뒤를 따르며 나를 보좌했다.

"계속 그렇게 서있으면 힘들지 않습니까?"

"말씀을 낮추십시오. 저는 일개 여종에 불과합니다."

"여종이기 이전에 사람이지요. 제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아니면...말투를 원래대로 할테니 앉겠습니까? 아니, 앉으시오."

나는 내 방의 원형 탁자에 앉으며 내 옆의 자리를 권했다. 앉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엄한 눈빛을 보내자, 선화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의자에 앉았다.

실수 하나.

'여종은 절대 앉지 않아.'

울며 애걸하는 한이 있더라도 손님과 겸상하지 않는다.

'제갈량도 어렸을 때부터 무후 수준의 지능은 아니었을테지.'

처음 입신양명할 때부터 지혜를 뽐냈으나, 약관 전후의 시점에는 말년처럼 천기를 읽는 수준까지는 아닐 것이다.

'아직 미숙하구나.'

선화는 그걸 아는 지 모르는 지, 나와 나란히 앉아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미모 만큼은 출중하구나.'

와백봉 제갈선.

아무리 정체를 숨겼다고 한들, 설마 그녀를 가까이에서 봤던 내가 정체를 모르겠는가?

머리 모양을 다르게 하고 이름을 숨기고, 얼굴이 비슷한 제갈세가의 여인들 사이에 숨는다고 한들 하등 군계일학을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중단전은 조금 아쉽지만, 그거야 키우면 그만.'

전체적으로 선이 길쭉한 그녀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우아함과 기품이 묻어났다. 누가 이 여자를 시종으로 생각할까?

시종으로 분장한 아가씨로 생각하지. 나는 묵묵히 차를 마시며 선화의 미모를 계속 살폈다.

"대협께서는."

내가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자, 선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용봉지회에 출전하는 것이 목표입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토록 강인한 힘을 널리 떨칠 좋은 기회가 용봉지회니까요."

나는 선화가 따르는 차를 받았다. 이미 술기운은 날려버렸고, 나는 따뜻한 용정차를 마시며 속을 달랬다.

"당장은 그렇소. 스승께서도 용봉지회에는 한 번 나가보라고 하셨지. 희아연월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자들과 검을 맞대어봐야 한다고."

"희아연월검이라.... 송구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그럴 수밖에. 아직 미완성이라, 원래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검이오."

정체불명의 청년 의협에 신비주의 한 숟갈 추가.

"희아연월검은 총 8성으로 이루어져있소. 나는 5성에 다다랐으나, 아쉽게도 아직 남은 3성을 이루지 못했소.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강호를 돌아다니고 있지."

희아연월 OOO검.

나라는 검(劍)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천가장의 팔괘가 바로 내 무림행의 목표다. 마지막 검의 앞에 자리를 잡을 이는 내심 한 명 정해놓았지만.

"무공의 완성입니까...."

선화의 눈에 얼핏 실망감이 스쳤다.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영달과 목표에 불과하오. 내가 강호에 나온 궁극적인 목표는 마...아니, 그만하지."

나는 일부러 뒷말을 흘렸다. 마치 말을 해놓고 실수를 해서 넘기는 것처럼.

"......마?"

사람을 미치게 하는 두 가지 방법.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또 하나는.

"흘려들으시오. 후후."

"......."

광마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니, 선화는 신경을 쓰지 않는 척 하며 눈썹을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아마 가장 처음 생각나는 건 마교일테지만, 신비주의문파 마망문(魔妄門)에 복수를 하는 건지 누가 알겠는가?

"으음...."

궁금하여 미칠 것 같은데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여러 이유가 있소만 당장은 제갈세가에서 지내고자 하오. 내가 유세를 떨고자 하는게 아니라, 황산에서의 소식이 들어오는 바에 따라 달리 행동하고자 하니."

"황산이라면...."

"나는 여인들을 구했으나, 남자들을 구하지는 못했소. 사실 있는지도 몰랐지. 당시에는 경황이 없었고, 다 죽은 줄 알았거든."

내 말에 선화는 고개를 떨구었다. 여인들을 구한 것에 잔치가 벌어졌지만, 그들을 지키기 위해 모였던 무사들 또한 제갈세가의 사람들이었다.

"다행히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황산으로 떠났으니 그들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를 기다립시다. 행여나라도 그들이 살아있다면, 무사들이 그들을 구해 돌아올 것이오. 그러면 나 또한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지. 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따라선?"

"내가 직접 황산으로 내려가야 할지도 모르지."

찻잔을 잡는 선화의 손등에 핏줄이 섰다. 계속 속을 모른척 긁어대니 속이 뒤틀린 모양이다.

"...백약대는 결코 약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보좌하는 분가의 무사들 또한 그렇습니다. 산적들에게 궤멸당할 자들이 아닙니다."

선화는 다소 울컥하며 내게 반론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을까?

"미안하오.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소."

단어 하나 하나에는 정말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그리고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보좌라...?"

"......!"

그녀는 아차싶은 얼굴로 잔을 들었다. 차를 삼키며 동요를 감추려는 듯한 모습이었고, 내 은근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듯 했다.

본가의 사람과 분가의 사람이 가지는 시각은 미묘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사실 이것도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선화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인지라 나는 일부러 그녀가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후훗, 그렇군."

그리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차를 마시면, 이제 알아서 착각을 하게 되어있다. 선화는 조금씩 긴장하며 나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백영대는 아마 좋은 소식을 가져올 것이오. 그러면 나도 미련없이 떠날 수 있겠지. 하지만 왠지 그걸로 끝날 것 같지는 않군."

"또다른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분명 뭔가 큰 일이 벌어질 것이오.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았소."

"근거는 무엇입니까?"

선화는 나를 추궁했고, 나는 침묵했다.

근거.

고작 산적들이 제갈세가를 습격했다는 것.

방계라고는 하지만 팔대세가에서 분가로 떠나는데 행적을 최대한 숨기지 않을 리가 없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습격을 당했다. 심지어 객잔에서 대기하다가 음식에 산공독을 뿌렸다고 하더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지.'

나야 마교의 배후성주들이 사주를 했다고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고작 마교 배후성주만 이 일에 관계가 있을까?

'동선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게 큰 단서가 되지.'

내통자. 혹은 배신자.

제갈세가의 영민한 두뇌라면 아주 작은 단서만으로도 사건의 본질을 깨닫게 되리라. 선화는 나를 주시하며 초조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훗, 감이오."

"대협."

누가봐도 말을 얼버무리는 듯한 말에 선화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가 나와 이야기를 계속 나누고 싶어하는 건 알겠지만, 이제 시간이 되어서 말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화도 부랴부랴 몸을 일으켰다.

"자기 전에 한 번 몸을 담글 것이오. 준비해주시오."

"아, 네, 네. 금방 채비하겠...몸을 담그신다고요? 어디에요?"

"물에. 몸을."

아주 홀딱 벗고 몸을 집어넣을 것이다.

"갈아입을 옷 한 벌 준비해주시오. 아, 그리고...이 옆방이 유 소저가 있는 방이었던가?"

나는 옆방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 함께 씻겠나?

우당탕.

옆방에서 들린 둔탁한 소리에 나는 그저 미소만 나올 뿐이었다.

* * *

"소소야...!!"

제갈시연은 여동생, 제갈소소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다. 제갈소소는 언니의 환대에 눈물이 맺혔지만, 눈물샘이 말라서 그런지 더는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아닙니다, 언니. 이렇게 살아온 것만 하더라도 천운이죠."

"...그래. 하늘이 너희를 도왔구나. 이렇게 살아돌아와줘서 고맙다."

제갈시연은 붉어진 눈가를 소매로 훔쳤다.

"아이들 모두 충격이 컸을테지. 당분간 쭉 세가 안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자꾸나."

"예. ...그리고 황산에서의 일은."

제갈소소는 살기를 일으켰다.

"산에 남아있던 산적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물증도 지웠습니다. 저희만 함구하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래. 당연하지. 누구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황산에서의 악몽같은 시간에 대해 의심하는 자는 있어도 정확한 증거를 제시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만약 황산에서의 일에 대해 음모론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제갈세가가 나서서 힘으로 찍어누를 것이다.

한 가지 걱정되는 요소가 있다면-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천 소협 말고 또 누가 있는가?"

"없어요, 언니. 적어도 지금까지는."

피해를 입은 여인들은 모두 제갈세가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가문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한 명 이 일을 알고 있는 이상, 조치가 필요했다.

"...살인멸구."

"예?! 언니, 그게 무슨!"

"가장 깔끔한 방법이다, 소소야."

제갈시연의 서슬퍼런 말에 제갈소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금수가 되고자 하십니까? 어찌 은공의 배려를!"

"그러면 어찌하자는 말이더냐. 사내 따위를 믿으란 말이니? 그 자가 행여나 술에 취해 밖에 나가서 '그런 일이 있었지'하면서 소문이라도 내면 어쩔 셈이더냐?"

"천 소협은...."

제갈소소는 불안한 목소리로 기어가듯 말했다.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하. 너 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어찌 그리 대답을 해."

"하지만 언니도 보셨잖습니까. 술자리에서도 진중하게 임하는 모습을. 그는 분명-"

"그가 제갈세가의 사람이더냐? 그가 제갈세가의 사람이 되기로 하였느냐? 오히려 아미파의 사람이 될 것 같더구나."

"윽...!"

제갈소소는 차마 반론하지 못했다.

같은 여인이기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둘이 간밤에 긴 시간을 같이 보냈다고 했지...?"

천무명을 바라보는 빙백봉의 눈빛을.

다른 남자들에게는 시선 조차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남자가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고 말았다.

"여인이 추문을 감내하면서까지 옆에 붙었다. 그 눈빛을 너도 보았지 않느냐?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자신의 모든 걸 내던져서라도, 강대한 벽과 맞서 싸우더라도 가지고 싶다는 애틋한 눈빛을. ......그 여아는 자신이 빙백봉인 걸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더구나. 아니, 오히려 더 그럴싸하지."

제갈시연은 자조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원래 육봉의 가장 좋은 결말은 천하에서 가장 잘난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더냐."

"언니...."

두 여인은 쓰게 웃었다.

"...어쨌든 지금은 빙백봉이 붙어있으니 여러모로 어떻게 도모해볼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만약 빙백봉과 떨어지는 순간이 온다면...손을 쓰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아니지, 아니야. ...흐음...."

제갈시연은 손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 방법이 좋겠어...."

"...언니?"

"너도 제갈세가의 사람으로서 마음의 준비를 하거라. 그 자가 제갈세가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전적으로 파멸시켜야 한다는 것을."

제갈시연의 눈에는 광기가 엿보였다.

"황산에서 제갈세가의 여인들이 납치를 당해? 그런 것...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어야 한다. 알겠느냐?"

제갈소소는 등허리에 식은 땀이 흘렀다.

* * *

쏴아아-

안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선화는 고민에 빠졌다.

문틈 사이로 슬며시 빠져나오는 뜨거운 김은 선화의 머리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

그녀의 옆, 바구니에는 천무명이 벗어놓은 옷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세가에 도착한 뒤 한 번 몸에 물을 끼얹기는 했지만, 그 뒤로 계속 입고있던 옷이 담겨있었다.

즉, 얇은 나무벽 뒤에는 천무명이 알몸으로 온기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다른 여종들은 열심히 아래에서 장작을 넣고 불을 지피고 있었고, 선화는 문앞을 지켜야만 했다.

벗어놓은 옷 옆에는 갈아입을 옷이 바구니에 담겨있었다. 즉, 천무명에게 옷을 건네주려면 누군가가 밖에서 안으로 옷을 넣어줘야만 했다.

또한 누군가가 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 또한 막아야만 했다.

저벅, 저벅.

멀리서 조용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선화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여인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빙백봉 님이 아니십니까. 이곳에는 어쩐 일로...?"

"천 소협의 방에 들렀더니, 씻고있다고 해서요."

선화는 빙백봉의 거침없는 행보에 속으로 감탄했다. 아무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이라는 게 그래도 그렇지, 빙백봉이라는 여인을 이렇게 조신하지 못하게 움직이게 할 정도인가 싶었다.

"그런데...."

빙백봉 유설라의 이어지는 말에, 선화는 손발이 굳었다.

"제갈세가는 목욕 시중을 따로 안 하나봐요?"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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