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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불사
무림세가가 은혜를 입었을 때, 이 은혜를 갚기 위한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환영합니다, 제갈세가를 도와주신 의협 여러분. 그리고 정의를 위해 몸소 나선 추색살의 단원 여러분. 분가장의 장주를 대신하여, 이 제갈시연이 여러분께 인사 드립니다."
짝짝짝.
제법 이름난 객잔 하나를 통째로 빌린 제갈시연은 우리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했다.
대부분의 무림 세력이 그렇지만, 우선 은혜를 갚는 가장 빠른 방법은 좋은 식사 한 끼를 대접하는 것이다.
[특히 팔대세가는 더 하지. 쌓아둔 금전이 많아서 과시하기에 딱 좋거든.]
[그렇군요.]
유설라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눈앞에 펼쳐진 산해진미에 시선이 꽂혀있었다. 나야 황보세가에서 한 번 즐겨봤던 산해진미라 딱히 흥미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안좋은 인연이 자꾸 스쳐가기만 해서 오한이 들었다.
'그 때 그 숙수다.'
요리의 구성과 배치를 보아하니, 황보세가의 무투대회에 출장을 와서 온갖 음식을 대접했던 바로 그 숙수가 이곳에 있었다.
'해남에서 먹었던 팔초어 튀김보다 못하군.'
새삼스럽지만 광마에게 대접받은 음식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거 진짜 괜찮았는데.'
팔초어를 특별한 양념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튀겨버리고 장에 찍어 먹던데, 술 안주로 그것만큼 맛있는 게 없더라.
물론 눈앞의 산해진미가 맛이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여러가지 요리를 접하고 독고연에게 가르쳤을 때, 상대적으로 독고연이 하기 쉬우면서 편한 요리가 팔초어 튀김이었다.
내가 요리를 하는 게 아니고, 독고연이 한다. 이게 상당히 중요하다.
'역시 밥은 남이 해주는 밥이 최고지.'
나도 그다지 산해진미는 자주 즐기지 못했지만, 내가 만들어 먹는 것과 남이 해주는 걸 먹는 것은 천지차이다.
광마가 만든 팔초어 튀김도 광마가 해준 거니까 맛있게 먹었지, 내가 직접 다리를 자르고 튀겼다면 짜증만 났을 것이다.
'나중에 팔초어 잡아간다음 연이한테 잘라달라고 해야겠다.'
그러니 지금은 식사를 즐기면 된다.
제갈세가가 독을 타거나 했을 리도 없고 누군가 춘약을 뿌리지도 않았으니,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츄릅."
다만, 유설라처럼 군침을 삼키며 수저를 들 때만 노리는 건 다소 눈치가 보였다.
[진정해라. 누가 보면 걸신들린 줄 알겠다.]
[죄송합니다.]
그나마 내가 가장 가까이에 있어 그녀의 치태를 제지할 수 있어서 망정이지, 신비주의를 표방하는 빙백봉에 대한 평판이 개방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무림맹에서 식사를 잘 즐기지 못했느냐?]
[이런 고급진 음식을 먹는 건 처음입니다. 맹에서는 매일 나오는 식단대로 먹었었는데...그냥 공짜로 나오니까 먹었죠.]
혈교주의 말을 빌리면, 그녀는 아마 짬밥으로 끼니를 때웠을 것이다. 그마저도 남들의 앞에서 조신하게 먹느라 아주 조금씩 먹었을테지.
[빙궁에서는?]
[...얼음을 갈아 배를 채웠습니다. 백습광아의 기운이 강하여 주변에는 씨앗이나 열매가 자라지 않으나, 물은 정말 쉽게 얻을 수 있었거든요.]
이건 은근히 백습광아를 죽여달라는 부탁으로 들어야 할까, 아니면 빈궁한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들어야 할까.
실제로 북해빙궁은 중원에 비하면 상당히 척박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천 대협, 벽곡단도 소금찍어 먹으면 나름 맛있답니다?]
나는 점점 우울해지는 유설라의 표정에 괜한 말을 했나 미안해졌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한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젓가락을 놀리기로 마음먹었다.
"...마음껏 드십시오. 오늘은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
제갈시연의 건배사와 함께 우리는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나는 내 잔을 채우려는 유설라를 제지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유 소저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이리 종류가 다양하니, 무엇부터 손을 뻗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네? 어...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하하, 가장 어려운 답을 주시는 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물고기 요리를 참으로 좋아한답니다. 특히 이 탕추리위(糖醋鲤鱼)는 이전에 산동에 왔을 때 한 번 먹어본 적도 있지요."
기름에 튀긴 잉어가 그릇에 휘어진 자태를 뽐내며 뻐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젓가락을 이용해, 잉어의 살을 가지런히 발라냈다.
"통째로 튀겨서 그런지 잔뼈가 많습니다. 드실 때 조심하시지요."
"...일부러 이것부터 권하신 건가요?"
유설라는 조금 놀란 눈으로 푸른 눈동자를 뻐끔거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큼지막한 살덩어리 한 점과 함께 수저를 회수했다.
'그래도 북해 바로 근처에서 물고기는 많이 먹었겠지.'
중원 요리 중에 유설라에게 익숙한 요리가 있다면 물고기가 그나마 익숙할 것이다. 실제로 유설라는 어육류에 시선이 꽂혀있었다.
"숙수의 정성이 느껴지는 요리가 아닐 수 없군요. 하하, 제가 발라드리겠습니다."
다행히, 튀긴 잉어는 우리 식탁에 한 마리 뿐이었다. 여러 마리가 있었다면 여인의 생선이나 발라주는 놈이라며 눈총을 받았겠지만, 이 정도는 민폐가 아니다.
'황보세가에 있을 때, 무사놈들 정말 더럽게 먹더라.'
먹던 젓가락으로 잉어 튀김을 해체해놓으니, 튀김에 뿌린 기름이 떠다니는 건지 놈들의 침이 떠다니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 음식을 건드릴 때는 침발린 젓가락으로 건드리면 안 돼. 차라리 설거지 한 번 더 해도 다른 젓가락 쓰는 게 낫지.
혈교주는 말했다.
- 여자를 취할 때 다른 여자 안에 쑤셔넣던 걸 그대로 쑤셔넣지는 않잖아? 최소한 입으로 한 번 빨게 하고 난 다음에 넣어야지. 그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고 예의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혈교주, 역시 당신이 옳소.'
나는 순식간에 탕추리위를 해체했다. 젓가락 두 개를 검처럼 휘두르며 뼈와 살을 분리하니, 앙상한 잉어의 뼈 옆으로 하얀 살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오고 있었다.
'보기에도 좋은 것이 먹기에도 좋지.'
얼마나 깔끔하고 보기 좋은가. 그리고 이런 사소한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큰 호감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천 형...! 제가 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오. 내가 오지랖을 부린 것이오. 하하, 이거 어육만 보면 꼭 발라놓고 싶어서 원. 한 잔 주시겠소?"
나는 내 옆에 서있는 시종에게 빈 잔을 뻗었다.
"천 소협, 제가-"
"괜찮습니다, 하하.'
유설라는 다소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고, 시종-선화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내 잔을 가득 채웠다.
출렁.
조금만 크게 움직여도 한 방울이 옆으로 흐를 만큼 가득했다. 나는 잔에 내기를 불어넣어 진정시킨 다음 잔을 내려놓았다.
"고맙소, 선화."
"...별말씀을."
나는 그녀의 귀여운 시험에 호쾌히 응했다. 술이 흐르는 지 흐르지 않는 지, 내 손에 약간의 떨림이라도 있으면 바로 그녀는 나에 대한 시험을 끝낼 것이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는 술을 한 입에 털어넣었다.
"하하, 선화 소저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저는 대협을 모셔야하는 입장이라. 송구합니다."
한 잔 하자는 말에 당장은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내심 속으로 웃으며 강우성, 유설라와 즐거운 시간을 나눴다.
"...그런데 천 형, 정말 저희는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됩니까?"
"무슨 말씀이시오?"
"황산에 아직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을까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와중에 초를 치는 말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여자들을 구했으니, 혹시 남자 무사들도 살아있는 건 아닐까? 나와 유설라야 산동배후성주를 채근하여 어떤 상황인지 대충은 전해들었지만,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자세히 모른다.
"제갈세가의 일류 고수로 구성된 백약대에서 황산으로 무사들을 이끌고 내려갔다고 하니, 그들이 소식을 전해주기를 기다립시다. 그들이 산적들 따위에게 당할 만큼 약한 이들은 아니지 않소?"
"예, 천 형의 말이 옳습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한 듯 하군요."
"...백약대라면, 제갈세가 본가의 무사들이 아닙니까?"
유설라는 알면서도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허어, 그렇습니까? 그냥 분가의 고수들로만 알고 있었는데."
"본가에서 잠시 파견을 나온 듯 합니다. 이유는...."
유설라는 뒷 말을 흘렸다. 강우성 또한 나와 앞서 이야기를 나눈 것을 떠올렸는지, 입을 꾹 닫고 고기만 씹어삼켰다.
"...본가의 무사들이야 어쨌든, 저희는 저희의 일을 하면 됩니다."
"예. 그렇군요. 천 형은 이제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원래는 유 소저를 만나려고 산동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하하. 유 소저를 만나는 것도 그렇지만, 산동을 방문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나는 은근슬쩍 잔치의 호위를 나선 무사들의 검을 가리켰다.
"이 천 모는 아직 경험이 일천하여, 천하를 주유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천하 오악을 이 두 눈에 담고, 강호의 여러 협객 분들을 만나 검론(劍論)을 나누는 것이 제 여행의 이유입니다."
"검론...그, 그렇군요."
강우성은 은근히 무언가를 원하는 눈치가 강했다. 나를 향한 눈빛을 세 글자로 말하자면, 호승심.
'산적들을 상대하는 내 검기를 봤을테니 자기도 몸이 달아올랐을 거야.'
평소에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검법을 사용하는 검사가 자신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다? 검사로서 도전하지 않으면 수치다.
그러나 그에게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는 삭룡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고 나는 무명초졸이라는 것.
나와의 비무를 통해 검을 나누는 경험을 나누기에는 그가 잃을 것이 너무 크다.
아무리 일류를 넘어 절정 초입에 들어왔다고 한들, 나와의 격차에 대해서는 은연중에 느끼고 있을 것이다.
대등은커녕 압도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천 형, 그-"
"천 소협. 저랑 한 번 어떠세요?"
강우성이 뭉그적거리는 사이, 유설라가 먼저 파고들었다. 은근한 눈빛으로 내게 권유를 하자, 강우성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언제 하면 좋겠습니까?"
"글쎄요.... 어제에 이어서 오늘 밤?"
"헉."
강우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 지 우리가 대화를 이어나가기 민망할 정도였다.
"그, 두 분은 야밤에 혹시...?"
"오랜만에 만난 해후를 나눌 겸, 서로의 경지를 확인하기 위해 검을 나눴답니다."
나긋나긋한 유설라의 말에 강우성은 얼굴이 시뻘게졌다. 우리 쪽을 바라보는 몇몇 이들도 안심하거나 얼굴에 부채질을 하는 등 반응이 다양했다.
"강 형, 무슨 생각을 한 것이오?"
"...하하, 워낙 선남선녀 분들이라. 이 강 모가 큰 오해를 할 뻔 했습니다. 저는 두분이 연인 사이인줄-"
"아닙니다."
나는 다소 딱딱하다 싶을 정도로 단칼에 잘랐다.
"유 소저와 저는 과거에 한 번 만난 사이지,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
대외적으로 천무명과 유설라는 무언가 관계가 있을 듯 없을 듯, 그러면서도 유설라가 천무명에게 일방적인 호감을 가지는 관계여야한다.
'그래야 천무명이 다른 여자도 후릴 수 있지.'
유설라와 상호간에 호감을 가지고 지내다가 다른 여자와 사귄다? 그건 쓰레기다.
하지만 무공에만 관심이 깊고 여인의 마음에는 둔한 남자라면, 아무리 많은 여인과 관계를 맺어도 최소한 쓰레기라고 욕은 먹지 않는다.
'바람둥이보다는 둔탱이가 훨씬 낫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강우성의 오해를 단번에 해소했다.
하지만.
"......."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드러내는 유설라의 기세가 다소 차가웠다. 호감을 가진 대상이 자신을 연애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연기를 정말이지 너무 잘했다.
"...바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까지 완벽. 이제 주변의 눈치빠른 사람들은 우리의 관계를 완전히 이해했을 것이다.
감정의 교류에 있어서 누가 일직선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하하.... 그렇군요. 그럼 천 소협은 어떤 여인이 좋습니까?"
그리고 눈앞의 이 청년은 눈치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순박한 영혼의 소유자다. 유설라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지만, 술에 살짝 취한 그의 순수한 물음에 나는 슬쩍 잔을 들어올렸다.
"좋아하는 여성상이라....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저는 제 아내 될 사람은 지혜롭기를 바랍니다."
"예? 천 형,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허어, 큰일 날 소리."
강우성이 순수하고 중원 무림 남자들의 전형과도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 소리를 하면 싫어할 이들이 있을 것이오."
"하하, 누가 그렇습니까?"
쪼르르.
내 빈 잔에 술이 다시 차올랐다. 이번에는 한 잔을 비우기에 딱 좋은 양이었다.
"고맙소, 선화 소저. 그런데 계속 서있는 건 힘들지 않으시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천 대협."
나를 바라보는 선화의 눈에는 아주 약간의 호감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천 대협. 대협께서 생각하시는 지혜로운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가문의 대소사를 정함에 있어 함께 논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여인?"
"......그렇군요."
선화는 술병을 들어올렸다.
"한 잔 더 드리겠습니다, 천 대협."
"고맙소, 소저."
옆에서 유설라가 아무 표정없이 나를 바라보는 게 내심 뜨끔했지만, 나는 선화가 준 술을 들이키며 속을 달랬다.
'속에도 없는 말을 진실처럼 말하려고 하니 뒤집어지는군.'
어떤 여인이 좋냐. 그건 당연히 정해져있지 않은가?
미인(美人).
- 여자는 다른 거 필요없고 예쁘면 끝이야.
'혈교주, 역시 당신이 옳소.'
미인이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