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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색마-255화 (255/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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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불사

유설라와의 관계를 가진 이후, 나는 유설라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냈다.

“이것이 바로 설라빙정(雪羅氷精)!”

나는 물방울 모양으로 맺힌 뿌연색의 빙정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햇빛에 비친 빙정의 색깔은 눈보다 더 하얗고 잡티 하나 없는 순수한 백옥이었다.

“그냥 하단전에서 기를 뽑아내 결석으로 맺는 것보다 훨씬 더 음기가 많이 남아있구나. 성공이다, 설라야.”

“다행이네요. 중간에 내공 손실이 일어나면 어쩌나 했는데.”

유설라의 몸에는 하나의 기맥이 개통되었다. 그녀의 몸 안에 쌓인 빙정이 하단전에서부터 중단전을 거슬러와, 유선으로 흘러들어오도록 새로운 기맥이 열린 것이다.

“손가락 한 마디 보다 작은 이 빙정에 최소한 10년 공력이 남아있구나. 이것을 양산한다고 하면....”

“아, 그거 말인데요.”

유설라는 애매하게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스스로 착유를 하듯 가슴을 움켜쥐었으나, 어떤 내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누가 아래에서 찔러올려주셔야 나오는 것 같은데요.”

“하하, 그것도 당연하군. 음기를 뽑아내려면 그만큼 정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게 당연한건가? 흐흐.”

“그도 그렇지만, 역시 그냥 내공을 뽑아내려면 효율이 너무 낮은 것 같아요.”

유설라는 간신히 한 방울의 빙정을 짜냈다. 나는 그녀의 꼭지 끝에 맺힌 빙정을 혀로 낼름 삼켰다.

고작 1년은커녕, 1개월도 채 되지 않는 적은 공력이었다. 이건 섭취해봐야 약방에서 파는 단약 수준만도 못한 정도였다.

“최고의 빙정을 짜내기 위해선 아무래도 제 몸의 준비가 필요한 것 같아요. ...역시 그걸 하면서 빙정을 채음하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죠?”

“은근슬쩍 다음에도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냐?”

“천 대협은 싫으세요?”

“싫을 리가. 빙궁주께서 내 양기를 원하시는데 응당 해야지. 다만....”

나는 유설라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너는 지금 비천여빙마가 아니더냐. 나 또한 지금은 천무명으로 너를 만나러 왔지만, 아직까지는 비천색마이니라.”

“그 때까지는 색마와 빙마로서 본분을 다하자는 것이지요? ...후후, 네. 알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큰 진척이네요.”

유설라는 내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리며 옅게 웃었다.

“얼어붙은 제 심장을 뜨겁게 달궈주셨으니, 꼭 저를 품어주셔요. 천가장이든 진가장이든, 저는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비천여랍니다.”

飛天(之)女.

나는 유설라의 고백 아닌 고백을 받아들였다.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지금 이곳에 온 사람은 비천색마가 아니라 천무명이라는 것 정도.

'원래 이국의 여인 한 명 정도는 아내 중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스스로 북해빙궁주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빙마라는 시녀이자 진가장의 여인으로 들어오겠다고 다짐하는 여인을 내가 어찌 막을 수 있으랴? 이제 진가장에서 천가장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에 대한 여부는 온전히 유설라 본인에게 달렸다.

"그래도 천 대협, 지금은 빙백봉과 천 대협으로서 지내도 되죠?"

"물론. 이 산동을 떠날 때까지, 그대는 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것이다."

천무명과 유설라. 누가봐도 선남선녀 사이의 만남이고, 유설라는 천무명과 과거에 만난 적이 있다는 식으로 나의 신원을 증명했다.

언젠가 천무명이 천가장의 장주로서 빙백봉 유설라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지금부터 우리가 쌓아갈 관계는 강호에 널리 퍼져 미담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빙백봉과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 과거에 만난 사이로 인연을 꾸며냈다.

"후후, 이제 저는 시집 다 갔네요. 천 대협과 하룻밤을 밖에서 지새웠으니, 다들 그렇고 그런 오해를 하지 않겠어요?"

"오해는 무슨. 사실인데. 네 뱃속에 내 정기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거늘 누가 오해를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오해라는 거죠. 이미 찐득하게 볼장 다 봤는데, 그냥 밤산책을 다녀온 거라고 오해할 순진한 여자들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 오해라면...흐흐흐. 이렇게 하면 되겠군."

나는 내공을 끌어올려 설라빙정의 물방울 꼬리 끝에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 옷자락의 일부를 잘라 그럴듯한 끈을 만들었다.

"선물이다."

나는 설라빙정을 목걸이처럼 그녀의 목에 걸었다. 유설라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제 몸에서 나온 빙정인데 이걸로 선물을 주신다고요?"

"이미 네 뱃속에 내 선물이 자리잡고 있거늘 더 욕심을 부리는 건가? 흐흐, 이건 그냥 상징에 불과하다. 남녀가 야밤에 따로 둘이서 갔다왔는데 장신구가 하나 늘었다면,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

유설라는 내 말을 금방 알아듣고 은은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골 사이에 설라빙정을 집어넣었다.

"소중히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언젠가 천 대협께서 내공이 부족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이 빙정으로 대협의 몸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그런 날이 오는 것 보다는, 그걸로 언젠가 천가장에서 패물로 사용하는 날을 기대하지."

"...네!"

유설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힘차게 웃었다. 나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중려신화정의 기운을 담은 손으로 가지런하게 정돈한 뒤,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슬슬 돌아가도록 하죠, 유 소저."

"네, 천 소협. ...그런데 말이에요."

유설라는 내 손을 맞잡으며 깍지를 꼈다. 하지만 앞섶을 한손으로 여미며 제법 애를 먹었다.

"...흐으, 부어서 그런 걸까요...? 옷이 저녁보다 더 당기는 것 같아요."

"......."

* * *

아침이 되었다.

제갈세가 분가 장주의 아내이자 분가의 안주인, 제갈시연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가 새벽에야 잠에 들었다.

"마님, 마님!"

하지만 밖에서 들려온 시종의 외침에 그나마 든 잠도 금방 깰 수 밖에 없었다. 고작 한 시진 정도 잠을 잤을까.

"...무슨 일이냐."

제갈시연은 화를 억누르고 잠에서 깨어났다. 화를 내기에는 시종의 표정이 워낙 급박해보였다.

"큰일났습니다!!"

"큰...일?"

제갈시연은 창백한 표정으로 입술을 떨었다.

"혹시...이미 늦었더냐?"

"네?"

"구조대가 황산에 갔으나...혹시 이미 손을 쓰기에 늦었더냐? 아아...소소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제갈시연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종은 그에 고개를 단호히 저으며 활기차게 웃었다.

"아닙니다!"

"...아니라니?"

제갈시연의 목소리가 살짝 싸늘해졌다.

"그럼 어떻게 되었느냐? 세가에 큰일이랍시고 호들갑을 떨만한 일이 그 일 말고 또 무엇이 있느냐? 너는 어찌 그리 즐거워 해?!"

"구출되었습니다!! 제갈소소 님을 비롯한 여식 분들 모두!!"

"......."

손으로 얼굴을 덮었던 제갈시연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손의 위치를 조종하며 입을 가렸다.

"소소가...살아있다고? 방계의 여식들 모두?"

"예! 조카분인 제갈유 아가씨를 비롯한 모두 살았습니다."

"어떻게?"

"무림맹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본인을 추색살이라고 소개한 무사가 직접 소식을 들고 왔습니다."

시종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활짝 웃었다.

"마침 황산을 지나가던 한 소협이 황산에 갇힌 저희 세가의 여인들을 구해 탈출에 시도했고, 무사히 산동 인근까지 도착했다고 합니다! 비록 산적들이 급히 뒤를 쫓아왔으나, 당시 인근을 지나던 추색살 단원들이 산적들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때마침 황보세가이 가주님께서도 동행하고 계셨구요. ...마님?"

"......."

제갈시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깊게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이곳으로 온다더냐?"

"예!"

"...알겠다. 내 곧 그들을 맞이할 채비를 하마. 너는 먹을 준비해다오. 황보세가와 본가에 편지를 써야할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마님!"

시종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제갈시연은 거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침...? 지나가던...? 그런 우연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정녕 이것이 천운인가?"

제갈시연의 눈동자에는 살기가 서려있었다.

그리고 약 반나절 뒤.

제갈세가 방계 여인들을 위시한 무림맹의 무사들이 정말로 '무사히' 제갈세가의 분가가 위치한 산동성 임기(臨沂)에 도착했다.

과거, 제갈세가의 시조 제갈량이 태어났다고 하는 곳에.

* * *

"하하! 이 황보염, 그리 염치없는 사람은 아니오. 나중에 길 형에게 안부 전해주시오. 좋은 술 한 잔이면 충분하다고."

황보염은 그 말과 함께 제갈세가의 분가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집으로 떠났다.

분가와 황보세가가 그리 멀지 않았지만, 자신이 제갈세가의 분가에 있는 것이 분가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며 그는 환대를 사양했다.

'길 형이라니, 설마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길을 말하는 건가?'

'그런 것 같아요. 무림맹의 군사 제갈길 말고 길 형이라고 부를 자가 없잖아요.'

나와 유설라는 황보염의 대범함도 놀라웠지만, 제갈길을 길 형이라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더 놀라웠다.

'호방한 자와 이지적인 자가 의외로 또 합이 잘 맞지.'

'그렇지 않으면 분가가 산동에 떡하니 자리잡는데 호의적일 수 없겠죠.'

'그래. 특히 분가에 힘을 더 싣고 있는 와중이니.'

제갈세가의 본가는 호북에 있다. 이는 제갈세가의 시조, 무후 제갈량의 생애와도 관계가 깊다.

호북의 융중.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로 찾아갔다고 하는 제갈량이 살던 곳 인근에 제갈세가는 기틀을 잡았다.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사마씨의 진나라가 제갈량의 후손이 하나의 세가를 이룩하도록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사마씨의 진나라도 그리 오랜 기간 동안 제위를 유지하지 못했다.

또한 제갈량하면 우국충정의 화신이 아니던가?

무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에 더불어, 제갈세가가 나라를 위한 관료가 아닌 무림의 세력이 됨에 따라 제갈세가는 큰 무리 없이 무가(武家)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게 호북이었다.

나로서는 신세가 많은 훗날의 검제 제갈검담도 지금은 본가인 호북에서 서책을 읽으며 나날을 보낼 것이다.

즉, 제갈세가의 산동분가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곳이다. 넓은 장원을 하나 사들여 분가의 사람들을 보내 살게 한 것도 불과 십 수년이 채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일부러 분가를 이곳에 만들었다.'

제갈량이 살던 곳이라는 명목으로 호북이 아닌 다른 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무엇일까? 심지어 황보세가의 바로 아래에.

'이유는 간단하지.'

보험이다.

혹시나 '서쪽'에서 큰 변고가 터진다면, 호북에서의 기반을 모두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산동으로 도망치려고 보험을 들어놓은 셈이다.

'역시 신기제갈.'

천기를 읽고 미리 도망갈 수십 년 도 전에 해두다니, 이 얼마나 용의주도한 자들이란 말인가.

'가주가 직접 계획하는 게 아니면 절대 시도조차 못하지.'

그리고 나는 보험 계획의 기반을 마련한 자를 알고 있다. 나는 그녀를 직접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천 형, 혹시 소문 들었습니까?"

"무슨 소문?"

"제가 들은 바로는 이곳 분가에 와백봉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합니다."

"허허, 강 형. 그럴 리가 있겠소? 나는 와백봉이 당연히 호북 본가에 있을 것 같소만. 그 이유가 무엇이오?"

"생각의 반전이지요. 설마 상대적으로 위험한 분가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삭룡 강우성은 혹시나 와백봉과 만나는 게 아닐까 몹시 기대하고 있었다.

"강 형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진짜로 그렇다면 더 캐내서는 안 되지요. 알고도 모른척 해야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왜요?"

"그야 그 말이 진짜고 소문이 진짜가 되면, 색마가 이곳을 찾아올 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과연! 천 형의 말에 이 강 모가 크게 깨닫습니다."

너는 좀 많이 깨달아야 할 것 같다는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말을 삼켰다. 제갈세가의 시종들이 우리를 하나 둘 식객용 숙소로 안내했고, 나는 제법 넓은 방에 짐을 풀었다.

"행장은 이곳에 푸십시오. 은공께 저희 제갈세가가 큰 신세를 졌습니다. 은공께서 이곳에서 지내시는 동안 제가 은공을 모시겠습니다."

길고 단아한 흑발의 여인이 내게 허리를 숙였다. 여종의 복장을 갖춘 그녀는 다소곳한 자세로 내게 허리를 숙였다. 명목상, 제갈세가에서 나를 전담하는 여종이라고 하더라.

"소저는 제갈세가의 사람이오? 눈에 현기가 느껴지는구려."

"예. ...그저 한 명의 여종일 뿐입니다."

여종은 은은한 미소로 허리를 들었다.

"환복하시면 저를 불러주십시오. 곧 안주인께 모시겠습니다."

"잠깐."

나는 그녀를 불렀다.

"이름은?"

"...제 이름이 그리 궁금하십니까?"

"후후, 식객이 '여봐라'하거나 종을 울리면서 사람을 부를 수는 없지요. 소저를 부를 때는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이름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제 이름은."

여종은 고개를 살포시 숙였다.

"선화(善花)라고 하옵니다."

"선화 소저라."

너무나도 깜찍한 거짓말이었지만, 나는 강우성에게 했던 말 그대로 진실을 함구했다.

'설마 나를 직접 보러 올 줄이야.'

와백봉 제갈선, 그녀는 여종으로 위장하여 제갈세가의 분가에 숨어있었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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