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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백봉 유설라
“하하하! 천무명이라고 하였는가?! 반갑네! 본 좌는 황보세가의 가주, 벽력신권 황보염일세!”
“풍운문의 강아성입니다. 세간에서는 저를 삭룡이라고 부릅니다. 영광스럽게도 추색살의 산동지부를 맡게 되었습니다.”
“빙백봉, 유설라에요. 같은 추색살의 대원으로...저는 비천여대를 맡고 있답니다.”
우리는 강 근처에 있는 객잔에 들러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가장 배분이 높은 황보염부터 자기 소개를 이어나갔고, 나는 이미 어느정도 전해들은 정보가 크게 다르지 않음에 감사했다.
추색살.
마교의 배후성과 비슷하게, 무림맹은 추색살이라는 단체를 중원 전체에 넓게 파견했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OO지부’라는 명목으로 색마를 찾아 죽이는 단원들을 파견했다.
산동성의 지부장은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구룡 중 말석, 삭룡 강아성.
그리고 똑같은 단원이지만 조금은 특별한 부대, 굳이 구분하자면 하남 무림맹주 직속의 별동대와도 같은 비천여대(飛天女隊)의 대원인 빙마 유설라까지.
왜 하필 비천여대인가? 이건 무림맹주의 음습한 욕구가 아니라, 모종의 이유가 숨어있다. 물론 나야 들리는 바가 전혀 다르게 들리지만.
“제갈세가의 제갈소소라고 합니다.”
“희아연월검을 사용하는 검수, 천가장의 천무명이라고 합니다.”
“천가장? 희아연월검? 들은 적이 없는데...?”
강아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연히 기분이 나쁜 혼잣말이었고, 그게 나를 면박주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들은 적이 없어서 나온 말이라 더 기분이 나빴다.
‘아직은 무명이긴 해.’
명성을 쌓으면 중원 전체에 퍼지게 되리라. 산동은 천무명의 명예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하하, 아직 별호도 없는 무림초졸입니다. 들어본 적이 없는 게 당연하지요.”
“허, 천 형 같은 분이 초졸이라고요? 하아, 역시 강호는 넓군요. 이러다가 다음 구룡쟁패에서 밀리는 게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하하, 설마요.”
또다시 미래의 존재로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 미래에는 삭풍고랑(削風孤狼)이라고 불리우는 낭인왕이었지만, 청년 시절의 그는 그냥 순수한 바보였다.
‘그래도 역시 재능은 있군. 상대를 보는 눈은 정확해.’
내가 산적들을 상대로 싸우는 걸 직접 봤기에, 그는 내 무공의 수위를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적어도 자신보다 강하다는 건 어렴풋이 알테지만, 정확한 경지는 모를 것이다.
“흐음....”
문제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벽력신권 황보염.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도끼눈으로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보게, 천 소협.”
“말씀하시지요, 선배님.”
“혹시 우리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은가?”
황보염은 나를 추궁하는 눈빛이었다. 얼굴도 생김새도 사용하는 무공도 다르 건만, 그는 내게서 뭔가를 캐내려고 하는 낌새가 강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가주님을 처음뵙습니다.”
“그런가? 끙, 내 착각이면 좋으련만.”
황보염은 웃어넘겼지만 눈은 여전히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를 의심하는 건지 의문이었지만,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시선을 피했다.
“한 잔 받아요, 천 소협.”
유설라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서 빈 잔에 잔을 채웠다. 자리로 따지면 당연히 내가 제갈세가 쪽에 앉아야 했지만, 유설라는 당연하다는 듯 내 옆에 앉아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유 소저, 혹시 아는 사이오?”
“네. 오래전부터 사귄 사이입니다. 제가 정말 많은 신세를 졌었지요. 워낙 몰라보게 변해서, 이름을 듣고 무공을 보고 나서야 알아챘답니다. 부끄럽게도.”
“사귄....”
같은 자리에 앉은 제갈소소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다른 식탁에 앉아 귀를 쫑긋이던 제갈세가의 여인들도 도끼눈을 부라리기 시작했다.
“훗.”
유설라는 어깨를 피며 자신의 잔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녀와 자연스레 잔을 부딪혔다.
“그, 혹시 천 소협은-”
“혹시 두 분은 연인이십니까?”
“.......”
순수하고도 멍청하고도 직선적인 강아성의 질문에 유설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은근하고 교묘한 말로 혼란을 주려고 한 듯 보였지만, 유감스럽게도 마음도 머리도 순수한 강아성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주인은 나며, 괜히 이상한 말을 했다가 천무명을 곤란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
“벗입니다. 모종의 오해로 서로 검을 나눴던 적이 있었습니다.”
“네. 그 뒤로 정-말 친해졌지요. 제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난 뒤에 제 급소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강대한 검기에 저는 단번에 패배하고 말았답니다.”
“.......”
“와아, 대단하시군요! 천 형의 검기가 어느 정도인지 직접 검을 맞대고 싶을 정도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행히 유설라의 말에 강아성을 포함한 모두가 알아서 오해를 했다. 하지만 강아성의 말에 더러운 생각이 들어, 나는 더 이상 이상한 소리를 하지 말라는 의미로 유설라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전음은 차마 보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미묘한 기의 흐름을 눈치챈 천하제일권이 나를 의심할테니.
“천 소협 덕분에 정의가 바로 설 수 있었소. 참으로 고맙소. 마음같아서는 내 사위로 삼고 싶군 그래.”
“황보 가주님...?”
유설라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황보염을 향해 옅게 웃었다. 그러자 황보염은 눈치 좋은 사람답게, 유설라와 나의 관계를 아주 적절하게 ‘오해’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그만큼 사람 좋다는 얘기야. 좋은 인연을 이어나가시게, 유 소저.”
유설라 덕분에 곤혹을 겪기도 하고, 유설라 덕분에 곤혹을 떨치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백발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빙백신공 안 쓰고 있으면 저런 머리도 없겠지.’
빙백신공을 쓰고 있으니 그만큼 이성도 차가워져서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평소처럼 가만히 있으면 멍하니 있다가-
- 주인님 자지 주세요. 저 왜 안 따먹어요?
...와 같은 말을 하며 맹한 모습을 보일 게 분명하다. 빙색마인에게 당한 것으로 위장한 것에 참으로 나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다.
“그런데 황보 가주님, 추색살의 고문으로 들어가신 건...?”
“아, 그거? 별 것 없네. 맹에서 우리 가문의 사람을 오해해서 말이야.”
황보염은 입꼬리를 비틀며 피식 웃었다.
“아 글쎄, 무사 수행을 나간 우리 사위를 두고 색마가 아니냐고 의심하지 않는가?”
“사위라면...탈혼붕권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네, 유 소저. 우리 딸아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방화범이라면 모를까, 감히 몸을 목적으로 취한 다음 몰래 야반도주를 한 색마라고 의심하지 않던가? 쯧쯧, 사람을 잘못봐도 유분수지. 다만....”
황보염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사납게 웃었다.
“혹시나 그가 색마라고 오해를 받는다면 안 되지 않겠소? 그래서 추색살의 고문 자리를 받아들였지. 혹시나 탈혼붕권을 두고 색마라고 오해하게 되더라도, 이 귀에 들어오는 정보는 있을 것 아닌가. 하하하.”
황보염의 말에 나는 연신 술만 기울였다. 벌써 유설라가 몇 번이나 술잔을 채웠는 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가주님. 왜 하필 색마라고 오해받을 거라 생각하시는 지요?”
“하하! 그야 내 사위가 워낙 절륜해서 말이지. 괜히 어디 바깥에서 여인을 품다가 기절시키기라도 한다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유 소저?”
“...그런 색마라면 차라리 다행이네요.”
‘걸리면 좆 된다.’
나는 황보염의 경지가 보인다. 맹호패왕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그는, 이제 진정으로 천하제일권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현경.
‘젠장, 강호에 현경이 무슨 구역마다 한 명씩 있어? 현경 할당제도 아니고 도대체 뭐야?’
내가 처음 황보세가를 방문했던 당시, 이미 화경으로서 완숙한 경지에 있던 그는 아주 사소한 계기로 현경으로 각성했다. 그리고 그가 현경으로 이르는 계기는 바로 맹호패왕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적당한 거 남겨두고 튀는 건데.’
그러니까 내가 황보세가에 남긴 무공 덕분이다. 녹림의 융성을 이끌었던 맹호패왕권은 벽력신권을 현경 초입에 밀어넣고야 말았다.
“천 소협, 혹시 탈혼붕권이라는 자를 만나게 되면 꼭 내게 알려주시게. 내 그대에게 크게 사례하지.”
“하하, 만날 기회가 있다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가주님, 만나게 되면 혹시 어떻게...?”
“뭘. 별 거 있나.”
황보염은 지긋한 미소로 어깨를 으쓱였다.
“내 딸들이 가락지에 예단 맞춰놓고 망부석처럼 기다리고 있으니, 황보세가로 내가 직접 잡아오는 수밖에.”
“.......”
색마를 물리적으로 죽이는 게 아니라 색마를 혼인으로 강제로 무릎꿇려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색마를 죽이는 행위가 아닐까.
“크으, 그런데 정말 아쉽군. 천 소협. 자네 혹시 우리 딸 만나볼 생각 없나?”
“가주님!!”
“하하, 유 소저가 그렇게 소리지르는 건 처음 보는구려!!”
왁자지껄 웃는 황보염 덕분에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는 내가 자신이 찾는 탈혼붕권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그래도 모처럼 산동에 왔는데 황보세가를 들리지 않는 건 섭하지. 어떻게, 한 번 들려보시겠나?”
...강자를 식객으로 들이려는 끈질김에, 나는 유설라에게 도움을 요청해야했다. 유설라는 꼭 자신이 해야하냐고 눈으로 물었지만, 곧 눈을 감고 연기를 시작했다.
“...하아암.”
유설라는 반쯤 감긴 눈으로 내게 스르르 머리를 기댔다.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몇 번 숙였고, 곧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으며 표정을 굳혔다.
누가봐도 완벽하게 술에 취해 잠이 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역시 연기력 하나는 출중했다.
“이런, 시간이 많이 지난 듯 하군. 유 소저도 많이 취한 듯 하니 이만 자리를 파합시다.”
“예. ...이런.”
스륵. 유설라는 내게 안기듯 넘어졌다. 그녀는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뒤에서 제갈세가의 여인들과 다른 추색살의 단원들이 나를 노려보는 눈매가 심상찮았다.
“하하! 유 소저가 정말로 천 소협과 신뢰가 두터운 듯하오. 이건 어쩔 수 없군. 유 소저의 방까지 부축해주시겠소?”
“제가요?”
“그럼 여기서 천 소협 말고 누가 있는가?”
“...예, 알겠습니다.”
정말로 다행히, 황보염은 눈치좋게 나와 유설라를 둘이서 보냈다. 나는 잠든 유설라를 안아들고 객잔의 윗층으로 향했다.
“...제일 안쪽 방.”
눈을 감고 있던 유설라는 내게 슬며시 웃었다. 나는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눈웃음을 치는 유설라에게 엄포를 놓았다.
“장난 치면 혼난다.”
“뭐로요, 자지로요?”
“...자지로 혼나고 싶어?”
남들이 듣고 있지 않기에, 천무명이 아닌 비천색마로서 나는 그녀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녀는 싱긋 미소지으며 방 안을 가리켰다.
“술을 좀 깨고 싶은데...바람 좀 쐬러 다녀오는 건 어떠세요?”
“.......”
아무래도 혼을 좀 세게 내줘야 할 것 같았다.
사락.
나는 그녀를 안고 객잔을 빠져나왔다.
* * *
제갈세가의 여인들이 황보염을 위시한 추색살 단원들에게 구조받아 객잔에서 피로를 풀고 있던 그 시각, 추색살을 피해 간신히 도망친 마교의 졸개들은 한 자리에 모여 엎드려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성주님!!”
그들은 모두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산동배후성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휘저었다.
“일어나라. 내 판단 착오로 벌어진 일이니 대가리를 박아도 내가 박을 일이다. 너희들은 죄가 없다.”
“성주님…!”
마인들은 성주의 용서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산동배후성주는 머리만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씁. 역시 산동성에 들어왔을 때 저질렀어야 하는데. 너무 멀리 있어서 대처가 늦었어.”
황산은 산동성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다. 그래서 마교의 산동 분파, 산동배후성에 청랑채의 궤멸 소식이 전해진 시점에는 이미 개입하기에 많이 늦어버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천운까지 닿았으니, 이번 작전은 실패가 확정된 작전이었다.”
간신히 추격하는데 성공했지만, 하필 산동성으로 오던 추색살과 마주칠 게 뭐란 말인가.
“운이 너무 좋았군. 정말...이상할 정도로 말이야.”
“성주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일단 계속 알아봐야지. 정말 이곳 산동에 와백봉이 숨어있는지. 산동에 들어온 방계 여인들이 어디 계속 틀어박혀 있을까? 아니야. 일단 아무나 납치한 다음 부르면 되는 거라고.”
산동배후성주는 검은 부채를 펄럭였다.
“제갈세가의 여식을 인질로 삼고 있다. 제갈선에게 은원이 있으니, 제갈선이 직접 약속된 장소로 와라. 아직 이 계획은 걸리지 않았으니 다른 작전으로 이어나가도 된다. 음, 물론이고 말고.”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일부러 산동에서 하지 않으려고 황산에서 일을 꾸미셨지 않습니까.”
“괜찮다. 어차피 마교가 뒷배인 줄은 모르고 있을 거야. ...젠장, 모처럼 와백봉을 잡아다가 바칠 좋은 기회였는데.”
산동배후성주는 입맛을 계속 다셨다.
“황보염이 붙은 이상 이제 더 습격하는 건 무의미하다. 습격을 하더라도 여인들이 분가로 돌아간 다음 저질러야 해. 그리고 변수도 차단해야하고.”
“변수라 하심은…?”
“그 청년 검사.”
산동배후성주는 이를 갈았다.
“너희는 몸을 회복하고 난 다음, 청랑채를 궤멸시킨 그 자에 대해 조사하라. 이름은 천무명. 천가장의 가주라고 했다. 그리고...사용하는 무공은 희아연월검!”
“존명!”
마인들은 포권을 취한 뒤 하나 둘 빠르게 사라졌다. 산동배후성주는 흑우선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변수가 하나 더 있기는 한데.”
그의 앞에는 얼어붙은 시체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강호에 빙공을 사용하는 이들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정도의 빙공을 사용하는 세력은 단 한 명 뿐이었다.
그리고 그 세력은 마교와 깊은 연관을 맺은 동맹과도 같은 곳이다.
“......젠장, 더 복잡해지는군. 줄을 어디다가 대야하지?”
산동배후성주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명확하게 답이 나오지 않음에 그는 골머리를 썩혔다.
“빙마. 그대는 비천이오, 지린이오…?”
“비천여빙마.”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 가운데, 산동배후성주의 앞에 백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동배후성주는 모습을 드러낸 여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빙마를 뵙습니다. ...그 옆에있는 분은?”
“나?”
백발의 거한은 살기 등등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강호에서는 나를 빙색마인이라고 부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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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권왕 누가 키움??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