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50화 (250/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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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아연월검(熙牙燃月劍)

아무래도 강한 정도를 잘못 설정한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너무 강한 힘을 보인 게 화근이라거나.

'너무 안심하는데.'

빈 집 안에 누워있는 여인들은 다소 안일하다 싶을 정도로 빈 집을 떠날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론 그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만, 벌써 이 집에 들어온 지 한나절 가량 지나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음에도 그들은 몸 단장에 애를 쓰고 있었다.

'이해는 해.'

도적들에게 범해진 여인들이다. 이들이 만약 이대로 사람들이 많은 곳에 들어간다면 누구나 그 행색을 보고 수군거릴 것이다.

하지만 산적들에게 당했으나 그 행색이 흙먼지 좀 묻은 정도로 끝난다면?

- 산적들에게 납치당했다더니?

- 용케 몸을 피한 모양이로군.

- 호위 무사들이 안 됐지...쯧쯧.

최소한 남자들에게 겁탈당한 것은 숨길 수 있다. 최대한 몸단장을 가지런히 할수록 불필요한 오해는 불식시킬 수 있다. 처녀 여부에 따라 혼약을 맞은 상대 가문의 등급이 달라지는 걸 생각하면, 여인들의 몸단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두 가지 사항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칠랑채 중 하나를 무너뜨렸을 뿐.'

우리는 청랑채를 궤멸시켰다. 그리고 내가 다른 채주들을 몇몇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곱 곳을 전부 궤멸시키지는 않았다. 엄연히 세 개의 산적 세력들이 남아있었고, 우리는 흔적을 감춘다고 감췄지만 금방 들킬 수밖에 없다.

평균 무공이 삼~이류 수준의 여인들이 어찌 꼬리를 완벽하게 감출 수 있겠는가? 산적들은 여인들이 다녀간 흔적을 살펴 금방 추격해 올 것이다.

여인들이 도망치는 속도보다 산적들이 산을 타서 추적하는 속도가 훨씬 빠른데다가, 우리가 이곳에서 내공을 회복할 시간을 가진 만큼 추적을 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실 이건 상황에 기인한 어쩔 수 없는 요소다.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두번째 요소 때문이다.

'나란 남자 때문이지.'

천무명은 엄청 강하다.

천무명은 더럽게 강하다.

천무명은 산적 수 백 명이 몰려와도 단칼에 베어넘길 수 있을 만큼 강하다.

그런 천무명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데, 심리적 안정감과 여유가 생기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된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천무명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따른 부작용이 벌어진 만큼, 나는 여인들의 늑장을 십분 이해했다.

중간중간 불안한 마음에 몸 단장의 동태를 살폈지만, 남자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닿은 흔적이나 찢어진 옷의 중요부위가 노출되지 않게 기우는 등의 수선만 할 뿐 화장을 한다거나 맵시를 꾸민다거나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천 소협. 저희가 좀 많이 늦죠?"

제갈소소는 가장 먼저 몸단장을 마치고 내게 양해를 구했다. 상대적으로 연륜도 있고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가져서 그런지, 그녀는 상대적으로 자신을 꾸미는 데에는 소홀했다.

"정말로 죄송해요. 하지만...황산에서의 일을 숨기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괜찮습니다.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죠. 선배님께서는 더 준비를 안 하셔도 됩니까?"

"예. 저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전쟁 났는데 분칠할 시간이 어디있겠어요? 다만...잇자국이나 손자국 같은 건 덮어야하니까. 이해해주세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히려 시간이 넉넉하다면, 여러분의 붓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휴식을 취하다 산동으로 올라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배려에...감사드려요, 소협."

제갈소소는 범해지지 않은 것처럼 꾸미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것에 대단히 미안해했다. 그녀 또한 강호에 대한 경험이 많은 여인으로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안 오면 그만이지.'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완벽하게 몸단장을 하여 산동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무 일이 없다면 이곳에서의 시간이 값진 시간이 된다.

하지만 만약 제갈세가에 도착하기 전에 산길에서 추적대에게 추적을 당하게 된다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몹시 안일하고 저승으로 가기 전에 몸단장을 하고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는 셈이 되고 만다.

'조금 미안하긴 하네.'

만약 내가 진정한 천무명으로서 이들의 안전을 생각했다면, 나는 한 시진도 전에 이제 떠날 채비를 해야한다고 이들을 채근했을 것이다.

- 네? 지금요? 조금만 더....

- 남쪽에서 올라오는 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필히 산적들이 쫓아오고 있는 셈이겠지요. 이곳에서 더 지체했다가는 뒤가 잡힐 지 모릅니다. 어서 나오세요.

- ...네, 알겠습니다. 얘들아, 나오너라!

내가 강하게 그들을 재촉했다면 제갈소소가 나서서 이들을 이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버려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산 아래쪽에 들썩거리는 기를 느꼈으면서도 일부러 함구했다.

'한 시진 전에 떠났으면 산적들도 여기를 눈치채지 못했겠지.'

그러나 나는 알면서도 침묵했다.

'제갈세가에 빚을 지울 절호의 기회!'

단순히 구출한 것 만으로는 그림이 밋밋하다. 도망을 쳤으면 추격을 따돌리는 맛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제갈 선배님. 준비는 아직입니까?"

"네, 조금만 더-"

"더이상은 위험한 것 같습니다. 어서 채비를 하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얘들아, 나오너라! 어서!!"

내 예상대로, 제갈소소는 내 말에 여인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직 몇몇 여인들은 목덜미에 난 손자국이나 찢어진 옷자락을 마저 기우지 못했다.

'산적 옷은 아무리 그래도 아니긴 하지.'

급히 빠져나올 때야 입고 나올 수 있어도, 산적들의 가죽옷을 그대로 입고 산동에 들어갔다가는 이상한 의심을 사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찢어진 무복에 산적들의 옷 중 일부를 잘라 덧댈 필요가 있었다.

"제가 뒤를 지키겠습니다. 어서 가시죠."

나는 맨 뒤에서 여인들과 함께 산동으로 달렸다. 산길을 헤치며 오르는 여인들의 움직임은 결코 느리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근데 늦었지.'

아주 멀리서, 산적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햣하! 어딜 도망가느냐!"

우리는 안휘를 넘어 산동에 도착하기 직전, 산적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 * *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포구의 한 객잔에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몰려있었다. 대부분 뱃일을 하는 남정네들로, 그들은 항구에 서서 배를 기다리는 여인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우야...얼굴 봐라. 내 마누라가 저 정도만 되었으면 내가 수발들고 모시고 살겠다."

"그랬으면 네 놈이랑 결혼하지도 않았지. 씁, 어느 세가 아가씬가?"

"멍청이들아. 무복에 검차고 있는 거 보면 모르겠냐. 무림인 아니냐."

남자들은 하나 둘 옥신각신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체불명의 여인에게 말을 붙이기 쉽지 않았다.

"흐흐흥-"

여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검을 예리하게 갈고 있었다. 여인이 쥔 검은 누가 봐도 명공이 만든 듯한 검으로, 항구에 드나드는 뱃사람이 1년을 모아야 살 수 있을까 말까한 보검이었다.

철컹.

여인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몸을 돌렸다.

"실례합니다, 어르신!"

그리고 쾌활한 목소리로 나이 든 노인을 찾았다. 그물을 정리하던 노인은 방금 전까지 칼을 갈던 여인이 다가오자 화들짝 놀랐다.

"무, 무슨 일이오?"

"안휘로 올라가는 배는 언제쯤 오나요?"

"안휘? ...요즘 수적들이 너무 많아서 아마 오늘은 더 없을 걸?"

"네? 진짜요? 아이, 그러면 안 되는데...."

여인은 움켜쥔 손을 입술에 붙이며 주위를 살폈다. 쪽배를 이용해 넘어가기에는 노인이 말한 '수적'이 마음에 걸렸다.

"어르신, 혹시-"

"안휘까지 태워달라는 거라면 사양하겠소. 그대가 강대한 무공을 익힌 여인이라 갈 때는 안전할 지 몰라도, 올 때는 내가 괜히 덮어 쓸 수 있으니."

"아...죄송해요."

여인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옷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에 노인은 안 서던 것도 서는 듯한 착각에 자세가 불편해졌다.

"크흠. 안휘에는 무슨 일이오? 요즘 그곳, 분위기가 엄청 뒤숭숭한데."

"어...안휘는 아니고, 그 위에 산동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니요?"

"황산에 글쎄, 도적떼가 기승을 부린다고 하더군."

"도적이요?"

여인은 눈을 깜빡이며 놀랐다. 노인은 내심 그녀가 일부러 놀란 척하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소. 스스로를 황산 칠랑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도적 놈들이 거대한 연합을 형성했소이다. 저마다 적색부터 자색까지 색을 하나 정하고 황산을 일곱 구역으로 나눠서 지배하고 있지."

"남궁세가는 뭘 하고 있죠?"

"남궁세가는...."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가주는 폐관수련에 들어갔고, 남궁세가의 여식은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하더이다. 호랑이가 떠나니 늑대가 산의 주인 행세를 하는 꼴 아니겠소?"

"흐응...."

"그대도 혹시 살 생각이라면 조심하시오. 그곳의 무리들은 통행하는 자들의 전낭이나 터는 자들이 아니라, 목숨을 빼앗고 간살하기로 소문난 악질들이오."

"호오."

순간, 여인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색마들이라는 거죠?"

"...그렇지?"

"후후, 알겠어요. 고마워요, 어르신."

여인은 노인에게 눈을 찡긋이며 강물 위로 살포시 발을 내딛었다. 무슨 짓을 하나 싶어 노인은 황급히 여인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여인의 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

그리고 노인은 보았다. 노인 근처에 모인 구경꾼들도 두 눈에 새겼다.

"수상비...!"

여인은 물 위를 걷고 있었다. 마치 땅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느긋한 발걸음으로 호수 위를 걸으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허어, 정말로 아름답군. 꼭 누구를 생각나게 하는 미모였어...."

"영감, 누구?"

노인은 여인의 뒷모습을 곱씹으며 입맛을 다셨다.

"아미봉이 용봉지회 나오기 전에 딱 저 모습이었는데. 정말 닮았군. ...딸인가?"

노인은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의 정체에 고개만 연신 갸웃거렸다.

* * *

“들으라! 이 몸은 감람채의 채주, 보열랑(甫熱狼)! 너희들을 다시 잡아갈 황산의 주인이니라!”

보열랑이라는 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는 졸지에 배수진을 치게 되었다.

“크윽...조금만 더 빨리 출발했으면...!”

“죄송합니다, 소협....”

제갈세가의 여인들은 내게 연신 사과했다.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나는 여인들을 최대한 배려했지만, 그 배려가 독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죄송할 필요없는데. 내가 일부러 습격당하게 말 안하고 있었으니.’

물론 약이 썩어 독이 된 셈이지만.

“걱정마시오. 저들을 그래봐야 도적에 불과하오. 내가 그대들을 지켜주겠소.”

하지만 나는 ‘천무명’으로서, 정의를 추구하는 협객으로서 당당히 검을 들었다.

“천 소협...!”

등 뒤의 여인들은 나를 향해 달뜬 눈으로 바라보고, 우리를 둘러싼 사내 놈들은 나를 비웃었다.

“하하하! 네놈이 청랑채를 몰살시킨 주범이구나!”

“네놈들도 같은 길을 걷게 해주마.”

“하하! 네놈도 제갈세가의 호위무사 놈들과 똑같은 길을 걷게 해주지. 얘들아!!”

감람채주의 손짓에 산적들이 하나 둘 검을 들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보며, 청랑채를 몰살시킨 나라는 존재를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마교다.’

산적들의 3할 가량은 흑의를 벗고 산적옷을 입은 마교인이 틀림없다.

나머지 7할의 산적들은 내가 아닌 주변의 마교 무사들을 두려워하고 있고, 마교 무사들은 일종의 독전관이 되어 산적들을 칼받이로 내세우고 있었다.

‘하긴. 마교가 뒷배가 되니 산적 따위가 제갈 세가를 습격하지.’

마교가 아니고서야 누가 제갈세가의 사람들을 습격하겠냐 싶지만, 분명한 건 이시아와는 무관계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남은 후보는 셋.

‘대공자의 범행, 뢰마의 단독범행, 마지막 하나는 산동배후성주의 범행.’

어느 쪽이든 계획을 허투루 짜지 않는다. 행여나 지나가던 정의로운 협객에 의해 제갈세가가 도망치더라도 탈출할 수 있게 안배를 해두었다.

대규모 추적대.

나를 죽이기만 한다면, 제갈세가의 여인들은 모조리 다시 황산으로 잡혀갈 것이다.

“수가 많군.”

나는 산적들을 향해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하지만 많을 뿐이다.”

“하하! 네 놈 혼자서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당연히 혼자서 싸울 생각은 없다. 그래서 나는 응원군을 불렀다.

우리가 있는 곳은 안휘에서 산동으로 넘어가는 경계지.

정확히는 중간에 하남과 강서를 행정구역상 지나가게 되어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쩌적, 쩌적.

우리의 뒤.

강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아직 겨울이 오기에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강에 기다란 얼음의 길이 생기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 백발은...설마?!”

“기운이 흉흉하여 오니 도적 무리가 기승을 부린다라.... 그것도 여인들을 단체로 핍박하다니.”

타-앗.

백발의 여인은 내 옆을 보좌하듯 섰다. 감람채주를 비롯한 마교의 무사들은 여인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나, 빙백봉 유설라가 용서치 않겠다!”

청년이 위기에 처하면, 항상 아리따운 여인이 등장하는 법.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천무명이라고 합니다.”

“천 소협.... 그렇군요.”

내가 살짝 옆으로 서자, 유설라는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와 등을 맞대고 섰다. 은근슬쩍 엉덩이를 붙인 건 분명 내 착각이리라.

“우선, 이들을 쓰러뜨리고 나서 얘기하도록 하죠!”

유설라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아미파의 검기에 은근슬쩍 빙백신공을 일으키며 한기를 뿌리더니-

“설화난영(雪花亂影)!!”

자신의 절기를 기합과 함께 휘둘렀다. 나 또한 그녀의 반대편을 향해 뛰며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희아연월(熙牙燃月), 제 1초!”

나는 검을 수평으로 들며 막으려는 마교의 무사를 향해, 높이 치켜든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천붕일섬(天崩一閃)!”

검기를 두른 삼재검법에 마교 무사의 검이 반으로 갈렸다.

[작품후기]

추석연휴 기념 3연참

모두 즐겁고 안전한 연휴 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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