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48화 (248/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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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아연월검(熙牙燃月劍)

와장창!

백자가 바닥에 나뒹굴며 산산조각났다. 최소한 금 몇 개는 지불했어야 했을도자기를 깨뜨린 중년의 여인은 독기 어린 눈빛으로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서슬퍼런 여인의 호통에 이미 바닥에 고개를 조아린 무사들은 더 몸을 바짝 조아렸다.

"소소와 아이들이 습격을 당했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 그게...."

"황산을 넘어오던 도중, 한 객잔에 들렀는데...."

무사들은 횡설수설하며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

자신들은 휴계 중에 밖에서 계집질이나 하며 한 잔 걸치고 있었는데, 일행이 머무른 객잔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고 하더라. 그래서 황급히 검을 들고 돌아오려던 찰나, 몸에 피를 흘리던 선배 무사가 소리를 지르며 명령했다.

- 산동에 있는 분가에 가서 빨리 구원을 요청하라.

선배 무사는 등에 칼침을 맞고 쓰러졌다. 두 무사는 수 십이 넘는 일곱색깔 두건을 두른 산적들을 피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간신히 제갈세가의 분가에 도착했다.

그 습격이 벌써 이틀도 전의 일이었다. 제갈세가의 산동 분가 가주의 아내, 제갈시연은 호통을 내지르려다 그만 뒷목을 잡고 제자리에 쓰러졌다.

"어머님!!"

곁에 서있던 아들딸들이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제갈시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다가 이를 갈며 말했다.

"당장 구조대를 편성하라. 어서! 발이 날랜 무사들을 불러 본가에도 이 상황을 알리고! 장소는 어디라고 했지?!"

"화, 황산입니다!!"

"안휘의 황산이라면...산동과 호북의 중간 즈음이다! 우리가 위에서 쫓으면 놈들은 분명 남하할 터! 안휘라면 남궁세가에는...."

제갈시연은 뒷말을 삼켰다. 안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남궁세가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참으로 복잡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황산에 자리잡은 도적 때가 객잔에 함정을 파고 제갈세가의 사람들을 습격했다.

이것을 두고 안휘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남궁세가에 문책을 해야할까? 그건 참으로 미묘한 문제다.

그렇다고 남궁세가에 도움을 요청하자니 제갈세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같은 팔대세가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도 으뜸인 세가를 두고 서로 자존심대결을 벌이는 만큼, 제갈시연은 남궁세가에 쉽게 지원을 요청할 수 없었다.

"...이건 제갈세가의 일! 지원은 요청하지 않는다!"

"네? 하지만 어머님, 이럴 때 같은 팔대 세가로서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이 미덕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제갈시연의 아들, 제갈웅은 순수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제갈시연은 아들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면박을 주려고 했으나, 곧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다독였다.

"아들아. 황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 지 모른다. 그러니 아는 사람은 최대한 적은 게 최선이며, 세가의 일은 세가에서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어머님, 황산에는 도적 떼가-"

"제갈세가가 고작 황산에 있는 도적 따위를 도모하지 못해 도움을 요청해야한다는 말이더냐?"

"아, 아닙니다!"

제갈시연은 주변의 불만을 잠재운 뒤, 급히 구조대를 만들었다. 하나같이 이류 고수들로 구성된 구조대들은 당장이라도 세가를 떠나고자 발을 동동 굴렀다.

"끙...."

하지만 그들 중 일류 고수 다섯은 서로 눈치를 보며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호북의 '본가'에서 분가로 파견된 호위무사로, 모종의 이유로 분가를 떠나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제갈시연 님, 저희는 그게...."

"허, 설마 같은 제갈 세가의 사람들끼리 어찌 이리 매정하단 말입니까?"

"하지만 저희는 그게 그러니까...."

제갈시연의 말에 일류 고수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인륜과 명령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들의 귓가에 작은 전음이 스쳤다.

[가세요.]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저희가 다녀오는 동안, 이곳을 꼭 지켜주십시오."

"흥, 걱정마세요. 이곳 또한 제갈세가입니다. 여러분들이 있어야만이 지켜지는 곳이 아니란 말이지요."

분가의 안주인고 본가의 호위무사들은 잠시간의 쓸데없는 자존심 대결을 펼쳤다. 시간이 급박한 와중에도 본가와 분가 사이에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감정의 골이 상당히 깊게 파여있었다.

"어차피 맹에서 사람들이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믿고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이죠. 백약대주! 그대가 구조대의 대장이 되어주세요. 최우선은 세가의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으로 하되, 만약 큰 사단이 일어났을 경우...."

제갈시연은 핏발 선 눈을 빛내며 명령했다.

"황산의 도적들에게 감히 제갈 세가를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세요. 알겠습니까?"

"존명!!"

무사들은 산동을 급히 떠났다. 제갈시연은 가족들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몸을 눕힌 뒤, 가족들을 물렸다.

"...끅."

혼자 남게된 제갈시연은 이불을 덮고 홀로 끅끅거리기 시작했다.

흐느낌은, 마치 웃는 것 과도 같았다.

* * *

안휘에서 산동을 향해 올라가는 길. 나는 중간에 잠깐 휴식을 위해 버려진 집에 자리를 잡았다.

- 객잔은 결코 안 됩니다!

편안하게 객잔에서 휴식을 취하는 건 어떨까 싶었지만, 객잔에서 습격을 당한 만큼 객잔은 상당히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우리는 졸지에 버려진 집에 노숙을 하게 되었다.

설령 이곳에서 다시 습격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대처는 가능하다. 우리는 충분히 휴식을 취했고, 제갈소소를 비롯한 여인들은 충분한 내공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허어. 데릴사위라. 그래서 성씨가 같은 것이었구려."

"네. 아무리 방계의 여인이라고 한들 꼭 출가하라는 법은 없지요. 남편은 제갈세가의 사람이 되기로 했답니다."

나는 두 모녀의 설명을 적당히 들으며 내 기억과의 정보를 더듬었다. 황산에서 둘을 한 번 씩 취하기는 했지만, 내가 미래에서도 이들을 취했는가 곰곰이 살폈다.

'이번에 처음인 것 같은데?'

하지만 제갈소소나 제갈유나 둘 다 내가 아는 여인들은 아니었다. 딱히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고수는 아닌 듯 했고, 그냥 미래에 혈겁난세에 휘말려 죽은 이들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혈강시는 혈강시가 다녀간 곳을 기억하지, 다녀가기도 전에 쑥대밭이 된 곳은 기억하지 못한다.

'다른 건 몰라도 아기색마가 기억을 못할 리가 없지.'

내가 까먹은 거라면 모를까, 아기색마는 한 번 넣어본 여자의 감각은 잊지 않는다. 혈강시 시절에 느꼈던 감각이 기억으로 남아 지금의 내게로도 이어진 만큼, 나는 과거로 돌아온 지금에서 미래와 현재의 여인들을 비교하는 재미를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아는 맛도 좋지만 모르는 맛을 처음 맛보는 것도 좋았다. 둘을 한 번씩 취하고 안에 사정한 나로서는 처음 맛보는 제갈 세가의 맛에 잠시 취해있었다.

'기다려라, 와백봉.'

이들이 이렇게 맛있으면, 과연 와백봉은 얼마나 맛있을까.

다름아닌 제갈세가의 직계가 아니던가!

'꼬리까지 감추면 내가 못 찾을 줄 알고?'

지난 용봉지회 이후 독고연이 실종되면서, 그녀는 강호 무림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

가문의 행사나 공식석상에도 단 한 번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틀어박혀, 이제는 아예 그녀의 생사를 운운해야 할 정도였다.

색마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죽은 듯이 사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는 무림의 여식들은 간혹 색마들에게 습격을 받고는 하지만, 아예 행적을 파악할 수 없다면 색마들도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

'똑똑한 것.'

죽지 않고 살아있으나 활동을 하지 않는 이상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육봉이 되기 위해 도전하는 자들도 감히 제갈세가를 방문할 수 없다. 제갈선이 어디있냐고 묻는다?

- 네 이 놈! 빙색마인의 첩자가 분명하렷다!

바로 추궁에 들어가거나 쫓아내기 십상일 것이다.

'내가 지금 천무명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에 감사해라.'

만약 내가 빙색마인으로 나섰다면, 지금쯤 나는 사천당가와 황보세가를 습격했던 작전을 그대로 써먹을 것이다.

'비천색마에게 걸리면 꼼짝도 못하고 당하게 되겠지.'

제갈세가에 불만을 품은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세가를 습격하고, 나는 그들을 화살받이로 내민 다음 제갈선을 찾아 박을 것이다.

'천무명에게 걸려도 마찬가지.'

일방적으로 범하는 비천색마가 무서울까, 아니면 천무명이 무서울까.

천무명의 방식은 굳이 말하자면 독고연을 취한 약붕의 형태와 비슷했다.

- 가가. 가가가 저한테 했던 것처럼 하시면 어지간한 여자들은 금방 넘어올 거예요!

- 그럼. 얼굴만 들이밀어도 싫다는 여자 없을 걸?

- 상공, 정말 저희가 얼굴 바꿔도 되나요?

하북팽가가 천무명의 내실을 다졌다면, 천가장의 세 여인은 천무명의 외형을 다듬었다.

물론 혈교주가 가꾼 외형으로 자라는 내 본판과 비교하면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희아연월의 사심이 듬뿍 담긴 얼굴은 여인에게 호감을 사기 정말 쉬운 외형이었다.

- 음...나는 별로인데? 기녀 오라비같이 생기지 않았느냐.

- 아버님이 원하는 쾌남은 녹림왕인가요? 상공, 걱정마세요. 이 팽유월이 장담합니다. 이 시대는 미청년의 시대에요.

역체변용술의 조형을 아내들에게 맡긴 결과, 천무명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여인들이 흘깃거리며 보다가 얼굴을 붉히는 외형이 되고 말았다.

바로 지금, 제갈세가의 여인들이 다소곳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미청년이 마음씨도 곱고 의협심도 깊다? 넘어오지 않고는 못 배기지.'

얼굴만 봐도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주게 생겼는데, 다음 대 용봉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의 실력자다?

- 상공. 걱정마세요. 상공이 눈빛만 보내도 어지간한 여인들은 바로 임신할 거예요. 제가 상공의 그 눈빛에 반해서 상공을 알아봤잖아요.

- 무슨 소리냐. 너 내가 박으니까 그걸로 알아챘-

- 상공? 무슨 말씀이셔요. 눈빛으로 알아챘으니까 몸을 허락한 거죠.

- .......

아무튼.

색마에게 붙잡히면 겁탈당할 것이고, 천무명으로서 마주하게 되면 상사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일단 사라진 와백봉을 찾아야만 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을 찾아가야지.'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해 세 번이나 융중을 찾아갔다. 한 나라의 황제도 그 정도의 노력을 했는데, 신기제갈을 얻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만큼의 성의는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지금 범하러 갑니다.'

나는 제갈선의 처녀를 얻기 위해 세 번 정도는 얼마든지 제갈 세가를 찾아갈 수 있다. 천무명으로서 애틋한 사랑을 나누려고 갔는데, 혹시나 문전박대를 당한다?

'천무명의 순정을 짓밟으면 그 때는 색마가 되는 거지.'

천무명을 화나게 하는 여자는 비천색마를 마주하게 되리라.

'제갈세가의 적녀 정도면 솔직히 진가장에 들일 격은 맞지.'

가문의 역사, 무공에 대한 재능, 처녀 여부, 현재 강호에서 얼마나 이름을 떨치고 있는지에 대한 유명세와 별호, 그리고 외모.

'적어도 애 낳으면 엄청 똑똑하기는 할 거 아니야?'

제갈선이 가진 깊은 지혜와 내가 가진 넓은 지식이 갖춰진다면, 분명 장량 뺨치는 천재가 태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제갈선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는가.

'다른 여자들 건드리기 전에 일단 이름난 여자들부터 확인해야지.'

남은 팔괘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는 강호에 소문난 맛집부터 들리는 게 정답이고, 가장 모범적인 정답지는 육봉이다.

모용란, 제갈선, 방철수, 중최미봉, 독고연, 유설라.

'방철수는 방영희 먹었으니까 제외.'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녹림왕 성별 반전녀를 취할 수 있단 말인가. 만한전석을 옆에 두고 털을 제대로 정리도 하지 않고 노린내 풀풀 나는 멧돼지구이를 먹을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남은 다섯 중, 나는 이미 둘을 취했다.

독고연과 유설라.

그러므로 내가 취한 육봉을 제외하고 남은 육봉은 이제 셋이다.

'중최미봉은 제외.'

한 명은 사실상 내가 범할 여자로도 보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모용란과 제갈선이 최우선 표적인 셈이다.

생각만해도 짜릿하다.

"그런데 천 소협, 산동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건가요?"

"응?"

너무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었기 때문일까. 제갈유가 어느새 다가와 내게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산동으로 가시는 길이라고 하셨잖아요."

"...아, 산동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소."

만날 생각만 하더라도 기분이 좋아진다. 과연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양의 내공을 쌓아뒀을까?

"어...혹시...."

"오래 전에 인연을 맺은 사람이오."

나는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먼산을 쳐다봤다. 천리안의 묘리를 살려 나뭇잎의 맥을 세고 있었지만, 제갈유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 상공. 고개는 이 각도로. 눈은 살짝 감고. 입꼬리는 슬쩍 올리고. 네, 지금 딱 좋아요. 손은 뒷짐을 지시되, 옷 소매로 손은 가리는 게 좋겠어요. 방향이요? 당연히 하북을 향하셔야죠.

"만나고자 하는 분이...혹시 여인인가요?"

- 가장 중요한 건, 말하지 않고 눈만 감아도 된다는 거예요. 네? 여자가 말 하는데 답을 안 해도 되냐고요? 이 얼굴이면 질문 같은 거 무시해도 됩니다!

"......."

말 하지 않아도 행동과 표정 만으로 나는 내 말을 전했다. 제갈유는 아예 눈물을 글썽거리며 물러났다.

'그러고보니 나오기 전에 목욕탕 새로 만들었는데 괜찮으려나?'

나는 우수에 젖은 청년을 연기하며, 천가장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이 몹시 걱정될 뿐이었다.

'터지진 않겠지.'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작품후기]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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