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47화 (24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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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아연월검(熙牙燃月劍)

청랑채가 뒤집어진 그 시각.

황산을 주름잡는 일곱 연합 중 세 연합의 늑대가 한 자리에 모였다.

한 명은 주황색의 두건을, 한 명은 황색의 두건을, 그리고 또다른 한 명은 감람색의 두건을 머리에 둘렀다.

전부 수염을 아무렇게나 기르거나 몸에 사나운 상처가 많은 산적의 전형이었으나, 적어도 두건의 색을 다르게 함으로써 그들은 서로 차별을 줬다.

"황랑채주, 우리 들고 일어납시다."

"주랑채주, 그게 무슨 위험한 말이오? 안 됩니다."

두 채주는 누가 들을까봐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서로 옥신각신 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제갈 세가를 습격하는데 어디 청랑채 놈들만 일했소? 우리도 같이 거들지 않았소?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이요. 놈들은 여자들 다 챙겨가서 재미보고, 우리는 남정네 새끼들 잡아다가 산이나 파고 있으니."

"하지만 청랑채주 그 놈이 가만히 있겠소? 이번 습격을 주도한 자도 청랑채주고, 모든 계획을 짜온 것도 그 놈이오. 우리는 그냥 식탁에 젓가락 올려둔 셈이나 마찬가지란 거요."

"쓰벌. 젓가락을 음식 집어먹으려고 올려뒀지, 어디 고사 지내려고 올려둔 건가? 우리가 좀 먹으면 어때서?"

"그랬다가는 칠채 연합이고 뭐고 바로 예전처럼 서로 너 죽네 나 죽네 하고 싸우는 거요."

둘의 대화는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자신의 의견을 강고히 하고자, 침묵하고 있던 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감람채주.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염치가 있다면, 청랑채에 여자들 싹다 넘겨주는 게 맞지."

감람채주는 턱수염을 손으로 다듬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근데 산적 놈들이 염치가 있었나?"

"그렇지!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 구만."

"끙.... 방책은 있소?"

대새는 기울었다. 길이 정해진 이상, 나머지는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방법밖에 없다. 애초에 녹림 72채 처럼 연계가 끈끈한 것도 아니고, 그저 황산의 이름난 도적들이 서로 피보기 싫어서 칠색랑이니 뭐니 엮였을 뿐이다.

도적들에게 의리란 없었다.

"......."

"......."

그리고 당연히 이 자리에 모인 셋도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함께 모였을 뿐, 서로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올 수 있을까 눈치만 볼 뿐이다.

"...조조와 청주병의 고사를 아시오?"

감람채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두 남자는 표정을 썩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놈 또 먹물 티를 내는구나'하는 표정이었으나, 감람채주는 고갤를 치켜들며 자신의 지식을 뽐냈다.

"농민들이었던 이들이 먹고 살기가 힘들어 도적이 되었고, 조맹덕은 그들을 거두어 병사로 양성했지. 우리도 똑같은 것이오. 언제까지 도적질 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하지만 우리의 과거가 들키면?"

"우리가 어디 관에 도적이라고 등록하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과거를 전부 지워버리면 누가 알기나 하겠소? 우리를 고용할 고용주만 알 일이지."

감람채주는 손으로 스스로의 목을 움켜쥐었다.

"괜히 허튼짓 했다가는 제 목숨도 같이 날아가게 생기는 거요. 야생의 늑대를 집에다가 길들이려고 했으니. 흐흐."

"하아...씨발. 제갈 세가 놈들 괜히 여기까지 날아와서 황산 뒤집어 엎는 건 아닐까 몰라."

"상관 없지 않소? 우리가 먼저 엎어버릴 건데."

감람채주는 손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청랑채 놈들의 뒷통수를 치고, 제갈 세가 년들을 우리가 전부 따먹어버립시다."

"오오!"

"그래, 갑시다. 어차피 '계약'은 우리 칠색채이니...."

세 채주는 여인들을 범할 생각만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그들의 색스러운 꿈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허사가 되었다.

"채주님!! 급보입니다! 청랑채가 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안으로 들어온 부하의 표정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절정 고수가 칼부림을 벌인 모양입니다!!"

"뭐? 도대체 누가?!"

"아, 아무래도…."

부하는 울상을 지었다.

"지나가던…고수인 듯 합니다…."

"......."

***

강호에 처음 등판하는 무림 초졸로서, '나' 천무명은 한 가지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정도로 강하게 설정하면 좋을까?"

없던 존재를 만들어 내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아무 무공이나 적당히 꺼낸 다음, 흔한 이름을 붙이면 끝이다.

하지만 천무명은 다르다.

지금은 천무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름을 받아 다시 태어날 존재가 되어 천가장의 가주로서 너리 이름을 떨치게 될 자다.

즉, 한 번 쓰고 버릴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천무명이라는 존재를 내세우는데 나 스스로도 고민을 많이 했지만, 주변인들의 도움을 정말로 많이 받았다.

- 상공, 장로님들이 젊은 시절에 입던 무복을 참고해서 새로 한 벌 만들어봤어요. 이걸 입어주세요.

- 일단 강하기는 해야지? 무림 초졸이 삼류인 척은 할 수 있어도, 삼류부터 이름을 떨치는 건 안 돼. 뭐든지 첫인상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 그리고 천무명은 마인이 아니야. 백도 무림의 고수가 되어야 해.

- 가가, 17살에 초절정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소녀도 있는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대신 검으로, 무조건 검으로 해주셔야 해요. 알겠죠?

천가장에 있는 세 여인의 도움을 받아, 나는 천무명이라는 의협을 만들어냈다.

- 상공. 걸음걸이는 항상 호쾌하게. 어른의 앞에서는 진중하게. 천 대협은 제 부군이자 월아의 아버지가 될 분입니다. 제 방에서는 저를 상대로 폭군에 색마짓에 추대광 처럼 행동하셔도 얼마든지 좋지만, 방 밖에서는 월아의 아버지이자 수많은 천하 미녀들의 부군이자 천하제일인으로서 행동하셔야 해요.

- 예법하면 역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팔대 세가, 그 중에서도 하북 팽가지! 걱정마시게, 내 천무명이라는 의협을 정의감 넘치는 호쾌하고 호방한 청년으로 만들어줄테니.

사실 천무명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이는 역시 근본있는 전통을 가진 세가의 사람들이었다. 어지간한 황실 예법 저리가라 할 정도로 강호 무림에서 '백도 청년'이 할 법한 행동거지를 익힌 나는 정의로운 협객이 되었다.

어느 정도로 정의롭냐고 하면, 지나가다가 제갈 세가가 습격을 당하길래 무시하지 않고 여인들을 혈혈단신으로 구하러 올 정도로!

'이게 의협이지.'

나는 녹림의 색마들을 모조리 죽였다. 손속이 잔인하다고 뭐라고 할 수는 있지만, 내가 워낙 강한 덕분에 별 수가 없었다.

희아연월검의 무림 초졸, 천무명은 초절정 고수니까!

왜 하필 초절정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 절정은 너무 약하지 않아요?

- 구룡 중 으뜸이라고 하는 폭룡 남궁패가 절정 고수인데, 우리 남편이 절정이라고? 안 돼. 내가 용납 못 해.

- 가가, 17살에 초절정으로 나온 소녀 검사도 있대요! 심지어 15살에 이미 초절정이었다나 뭐라나~

절정 고수가 결코 약한 건 아니다.

내가 범한, 아니 내가 지나가다 발견한 제갈소소만 하더라도 일류 고수고, 산공독에 당하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산적들을 퇴치한 것처럼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호에는 수많은 절정 고수들이 있다. 그들의 앞에서 검을 맞대며 힘겹게 이기느니, 차라리 초절정이 되어 단칼에 베어넘기는 편이 속이 편했다.

내가 검사로서 낼 수 있는 전력은 현경 최상급.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생사경을 넘어가는 수준의 검기를 쓸 수 있으나, 파천신검이나 광천수라검 등과 같이 원형이 드러나는 무공이다. 나는 검선과의 싸움에서 같은 현경급 고수의 앞에서는 정체를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경험했다.

그래서 내가 사용할 희아연월검은 무림 전역의 무공을 적당히 섞은, 이른바 잡탕 검술이다.

무당파의 태극검의 묘리가 실려있고, 패도에 있어서 쌍두마차를 달리는 천마신검과 독고구검이 섞여있고, 미약하게나마 팽가의 검법도 함께 담겨있다.

- 적당한 무공인 척 하는 법? 그냥 적당히 네 자로 이름을 붙이면서 검을 휘두르시오.

현타 도사 사정후는 희아연월검을 백도 무림의 무공으로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줬다.

- 어차피 그대는 검을 휘두르는 데 검리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목부터 날리려고 하지 않소. 하지만 이왕 휘두르는 검, 조금 멋과 여유를 부려도 되는 거 아니오? 예를 들어 종횡으로 빠르게 한 번 휘두르는 검이 있다면, 허공에 열 자(十)를 그린다는 의미에서 패천십문참(覇天十文斬)이라는 식으로 대충 가져다 붙이시오.

- 그러니까 화산처럼 검을 쓰라?

- 그렇소. 어차피 그대의 무공은 근본이 없는 게 근본이 아니오?

이 말에 나는 다소 울컥했다.

- 검선 적성자는 내 근본을 한 눈에 알아보더니, 역시 다른 건 몰라도 검으로 짓는 풍류는 화산이 최고인 듯 하오, 현타!

- ......화산제일검이자 현경 고수, 적성자 대선배님과 검을 맞대셨다고? 잠깐. 우리 이야기를 잠시 나눠보도록 하실까?

아무튼.

희아연월검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파천신검을 근간으로 상대를 죽이거나 무력화하는 걸 근간으로 두되, 하나 둘 형(形)을 만들어나가며 초식으로 굳혀나갔다.

'초절정 천재 정도면 스스로 검법을 창안한다고 해도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지.'

결국 무림은 강자가 옳다.

내가 아무리 근본 없는 초식을 휘두른다고 해도, 그걸 막아내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아무 반박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내 눈앞에 널브러진 산적들처럼.

'고맙다.'

나는 죽어가는 산적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었다. 그는 머리에 자색(紫色)의 두건을 두르고 있었다.

'황산 칠채. 네 놈들 덕분에 지나가다가 간식 잘 먹고 간다.'

나는 삼매진화로 내 손등에 묻은 피를 제거했다. 제갈가 방계의 여자 '둘'에게서 얻은 내공은 삼매진화로 조금 낭비를 해도 될 정도로 제법 쏠쏠했다.

'산공독이 내공을 모으는 걸 방해하는 종류라서 천만 다행이었지.'

산적들이 사용한 산공독은 내공 자체를 없애는 종류의 극독은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둘의 몸에 오롯이 남아있는 내공을 아주 편하게 섭취, 채음할 수 있었다.

'모녀를 같이 취하지 못한 게 아쉽군.'

제갈유와 마찬가지로, 나는 제갈소소에게서도 채음했다. 닭을 먹고 달걀을 후식으로 먹은 셈이었다. 신선한 건 달걀이었지만, 역시 배가 든든한 건 닭이었다.

"소협."

뒤에서 닭, 아니 제갈소소가 여인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안에 있던 산적들의 옷으로 환복한 여인들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염치없지만 산동까지 부탁드립니다. 저는 소협만 믿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선배님."

제갈소소는 나를 향해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 아래에 깔린, 나를 향한 추악한 욕망도 살필 수 있었다.

'나를 딸내미 사위로 들이려고? 어림도 없지.'

제갈세가의 직계 여인도 내 첩이 될까말까한데, 어딜 데릴사위로 들인단 말인가? 아래에 흐르는 내 정액이나 마저 털어내고 그런 말이나 하지.

"제가, 여러분을 지키겠습니다."

나는 더없이 순수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팽도황이 젊은 시절에 여자 여럿 가랑이 젖게 만들었다고 하는 그 당찬 웃음에, 제갈유를 비롯한 여인들은 얼굴을 붉혔다.

"...예."

제갈소소마저도. 그녀는 은근히 내 아랫도리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남자를 아는 여자답게, 자신의 딸을 진정시키면서 그녀는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나 있을까?

일부러 그녀가 도적에게 덮쳐지는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그들을 덮치면서 기절시켰다는 것을.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제갈소소는 도적에게 습격을 당하여 의식을 잃었다.

천무명이 도적을 죽였다.

이 두 가지 명제 사이에, 천무명이 도적을 죽이고 도적 대신 제갈소소를 겁탈했다는 것을.

'아니지.'

겁탈할 때는 천무명이 아닌, 비천색마다.

들키면 어쩌냐고? 절대 그럴 일 없다. 천무명으로 지내다가 색마 짓을 하는 경우는 철저히 내가 들키지 않는다는 확신 하에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1할, 1푼, 아니 1리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색마로서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게 의협 천무명이다.

"가시죠, 천 소협. 갈 길이...멉니다."

"예. ...제갈 소저. 혹시 다리를 다치셨소?"

나는 제갈유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녀에게 묻지도 않고 번쩍 들어올렸다.

"꺅…?!"

"유아야, 소협께 얌전히 안기거라. 그래야 빨리 갈 수 있지 않겠니."

"네...어머님. ...잘 부탁드립니다, 은공."

"물론."

'산동으로 가는 동안 재미 좀 보겠어.'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심심한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제갈유의 등허리를 받친 손을 그녀의 옆가슴에 닿도록 붙였다.

"......."

제갈유는 아무 불평없이, 내 손가락이 닿는 걸 알면서도 내 목에 팔을 걸며 침묵했다.

황산.

칠랑채 중 하나, 청랑채를 완전히 궤멸시킨 나는 제갈 세가의 여식들을 구출해 산동으로 달렸다.

새하얀 날개를 펄럭이다 날개를 숨긴 봉황이 숨어있는, 산동 제갈 세가의 분가를 향해.

[작품후기]

봉 잡으러 갑니다

일러는 빙백봉 유설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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