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44화 (244/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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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아연월검(熙牙燃月劍)

산동으로 가는 길.

“허억, 허억.”

산발이 된 여인은 힘겨운 발걸음으로 숲길을 달렸다. 겨울 날 앙상한 가지에 옷이 긁히고 날카로운 자상이 생겼으나, 여인은 상처에도 아랑곳 않고 앞으로 달렸다.

“하악, 하악…!”

여인은 마치 겁에 질린 사슴과도 같았다. 포식자로부터 피해 도망가는 여인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의 추적을 주시하고 있었다.

“크하하하!”

거친 웃음소리가 숲을 가득 채웠다. 여인은 너무나도 소름 돋는 목소리에 핏기가 가셨다.

“어딜 그리 급히 도망가는 것이냐! 이 녹랑채의 채주, 귀열랑님께서 서라고 하지 않느냐!!”

“이…!”

여인은 눈을 질끈 감으며 숲을 달렸다. 귀열랑이라는 이름의 산적은 날카로운 도를 휘두르며 여인을 쫓았다.

“아악!”

여인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발을 접질러 넘어졌으나, 앞으로 기어가며 어떻게든 추적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푸욱---!

여인의 옷에 날카로운 비도가 박혔다. 다리 사이를 정확히 노린 비도는 여인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땅에 묶어두려하는 듯 했다.

“이익…!!”

부우욱.

여인은 하의를 잡아 찢었다. 허벅지 아래 옷이 찢어져 하얀 다리가 훤히 드러나게 되었고, 여인은 흙바닥을 손으로 짚고 도망쳤다.

“흐하하!”

하지만 여인이 녹림의 산적들의 추적을 떨쳐내기란 몹시 어려웠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는 것이냐? 응?”

“이 놈들…내가 누군지 아느냐!!”

여인은 핏발 선 눈으로 호통을 내질렀다. 귀열랑을 비롯한 산적들은 하나 둘 껄렁한 자세로 걸어오며 여인을 향해 무기를 겨눴다.

“알지. 똑똑하기로 이름난 제갈 세가의 <옥낭호(玉娘狐)>가 아니신가!”

“그래, 그래. 전대 와백봉! 흐흐흐, 팔대 세가의 여인들은 맨날 뭘 먹길래 이렇게 어여쁜지 몰라. 내가 처음 보고 20대인 줄 알았다니까?"

"아아, 그 나이만 하더라도 올해로 3-"

“닥쳐라, 이 놈들!!”

여인, 옥낭호 제갈소소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산적들에게 겨눴다. 끝이 날카로운 철로 된 붓에 산적들을 껄껄 웃으며 그녀를 비웃었다.

“그거로 뭘 하려고! 검을 잃은 네가 그걸로 어찌하겠다는 말이냐!”

“진법이라도 여기서 그려보려고? 남자의 혈기를 왕성하게 하는 진법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하마! 하하하!”

“이..천하의 악적들!”

제갈소소는 철필을 휘두르며 산적들을 위협했다. 여차하면 자결할 각오까지 하며, 제갈소소는 억울함에 치를 떨었다.

“산공독만 아니었어도…!”

일류 고수인 그녀가 이류는 커녕 삼류에도 이르지 못하는 산적 잡배들의 추격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

제갈세가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대천성신공은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하도록 산적들은 제갈소소를 산공독으로 중독시켰다.

“객잔으로 위장하여 음식에 독을 타다니, 비겁하다!”

“비겁? 어쩌라고. 색마가 비겁 따지는 거 봤어?”

“!!”

제갈소소는 색마라는 말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설마 했지만, 강호에서 여인들이 흔히 겪는 일을 설마 자신이 겪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그만둬라! 아니, 그만두세요…! 저는 딸아이와 지아비가 있는 몸입니다!!”

“흐흐, 딸아이가 지금의 와백봉과 비슷한 나이대라지? 그럼 어디 딸을 바치든가.”

“이, 이 놈들이…!”

자비를 구했으나 산적들은 자비 따위 없었다. 제갈소소는 마지막 수단을 생각하며, 간신히 끌어모은 내공을 손에 끌어모았다.

모욕을 당할 바에는 자진하는 수밖에.

“흐읍-!”

제갈소소는 스스로의 목을 향해 철필의 끝을 겨눴다. 산적들은 놀라서 달려들려고 했으나, 귀열랑은 부하들을 제지하며 그녀를 비웃었다.

“냅둬라.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는 년이다. 흐흐.”

부들부들. 제갈소소의 철필은 그녀의 목젖을 찌르기 전에 멈췄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철필의 끝에 떨어졌다.

“그리고 자결해도 그건 그거 나름대로 좋지. 사람이 죽어도 어느 정도는 안쪽이 따뜻하거든.”

“이...인륜을 저버린 쓰레기들이…!”

“인륜? 그딴 게 밥 먹여주나?”

귀열랑은 제갈소소의 가슴을 걷어찼다. 내공을 쓰지 못하는 여인이 이류 무사의 공격을 막아내기란 어불성설이었다.

“아악!”

제갈소소는 바닥에 엎어졌다. 두 다리가 훤히 드러났고, 귀열랑은 제갈소소의 다리를 강제로 벌렸다.

“씁, 하아. 야. 이렇게 딱 달라붙는 옷 입고 궁둥이 씰룩거리면 누가 예쁘게 봐줄줄 알았냐? 이렇게 따먹어 달라고 신호 보내는 거로 생각하지.”

귀열랑의 모욕에 제갈소소는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게 혀를 깨물어도 사람은 바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녀는 자진할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살해라도 당한다면. 제갈소소는 마지막 의지를 다잡고, 자신을 향해 양물을 꺼내려는 귀열랑을 향해 침을 뱉었다.

“퉷!”

“...흐흐. 앙칼진 것.”

귀열랑은 제갈소소의 머리를 움켜쥐고 나무에 강하게 처박았다. 제갈소소는 뒷통수가 아린 고통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야, 너, 이제부터-”

“뭐야?!”

어디선가 들려온 비명과 함께, 제갈소소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이 드시오?”

그리고 의식을 차렸을 때는, 검은 갓을 쓴 회색 무복의 청년이 걱정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여긴….”

“산동으로 가는 길에 그대가 보여 구하러 왔소. ...다만.”

청년은 갓을 내려 가슴에 올렸다. 훤칠한 얼굴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청년은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늦어서 미안하오.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이런 일이 있지 않았을텐데.”

“아….”

제갈소소는 주변을 살폈다. 사방에 피가 난자해있고, 제갈소소를 습격한 산적들은 가슴에 난 검흔과 함께 한 자리에 반듯하게 누워져 있었다.

“...우욱.”

그리고 제갈소소는 자신의 아래에 찐득하게 묻어있는 하얀 액체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청년의 것으로 보이는 외투가 아니었다면, 제갈소소는 사실상 알몸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위로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잠시 자리를 비켜드리리다."

청년은 다시 갓을 눌러쓰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엄청난 경신법에 제갈소소는 다소 놀랐으나, 자신이 산적들에게 범해졌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물이 주룩 흘렀다.

"흐, 흐윽…!"

내공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내공이 돌아와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어헉, 허어억…!"

제갈소소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그녀는 천하를 향해 목 놓아 울었다.

"가가…! 유아야…! 나는, 어허윽…!"

제갈소소의 한맺힌 통곡은 한동안 숲 전체에 널리 울려퍼졌다.

* * *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협. 저는 제갈세가의 제갈소소라고 합니다."

"예. 이리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저는 천가장의 천무명이라고 합니다."

청년은 몹시도 예의바른 태도로 포권을 취했다. 그의 말대로 이렇게 만나지만 않았다면, 정말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령, 딸아이의 부군이라거나.

"색마...들은 어찌된 겁니까?"

"전부 죽였습니다."

다소 손속이 잔혹하다 싶었으나, 제갈소소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천무명이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쫓아가 그들의 목에 철필을 꽂아넣었을 것이다.

"소협. 정의를 좇는 것은 좋으나 과도한 살생은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죽인다면 은원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죽여야 업보가 쌓이지 않는다. 제갈소소는 자신으로 인해 살겁의 업이 쌓인 것에 미안함을 느꼈다.

"하하, 괜찮습니다. 저들은 앞으로도 수많은 살겁을 일으킬 자들이었을 겁니다. 그들을 죽여 다른 이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저는 제 손에 피가 묻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천 소협...."

제갈소소는 천무명을 위아래로 훑었다. 키도 훤칠하고 체구도 다부진데다가, 얼굴도 미형이라 자신이 괜히 두근거릴 정도였다. 강호에 어디 이런 미남이 있었던가?

"혹시 별호는 어떻게 되시는 지요?"

"무명 초졸입니다. 스승님께서 이번에 천하를 구경하며 견식을 쌓으라고 하셔서, 바람 따라 부평초처럼 떠도는 길입니다."

"그렇다면...지금은 따로 목적지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하하, 예. 그렇습니다. 나중에 '그 대회'라도 시작되면 모를까...."

천무명은 머쓱하게 말하며 뒷말을 흘렸다. 하지만 제갈소소는 천무명이 말하는 대회가 무엇인지 금방 깨달았다.

"소협께서는 다음 용봉지회에 출전하려고 하시는 군요."

"예! 부끄럽지만, 감히 제 힘을 천하에 널리 떨치고 싶습니다.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무공을 널리 알리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제 개인의 영달도 추구하고 싶습니다."

"영달이라 함은?"

"...뭐, 좋은 색시를 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너무나도 솔직하고 순수한 욕구에 제갈소소는 가벼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소협. 제갈세가는 은혜를 입고 결코 잊지 않습니다. 마침 산동으로 가는 방향에 저희 분가가 있으니, 저와 함께 제갈세가의 분가에 가주시지요. 부디 가는 길까지 저를 호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런데 선배님, 다른 일행은 없으십니까?"

"일행은...."

제갈소소는 고개를 떨구었다.

"일행은 모두 붙잡혔습니다. 저는 산적들로부터 도망쳐 가문에 구원을 요청하려고 했습니다."

"예? 아니, 도대체 어떤 미친 자들이 제갈 세가의 분들을 습격한다는 말입니까?"

"......색마들입니다. 그들 중 가장 강한 자는 자신을 빙색마인이라 칭했습니다."

순간, 천무명의 표정이 굳었다. 제갈소소는 그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무림맹주로부터 딸을 납치해간 장본인이 아니던가!

"저 혼자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하여...세가에 지원을 요청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무림맹은...아니, 그렇군요."

지리상, 무림맹보다 제갈세가의 분가가 더 가까웠다. 그리고 무림맹이 있는 하남으로 가기에는 길을 거꾸로 올라갔어야 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선배님, 안심하십시오."

철컹.

천무명은 검을 뽑아들었다. 제갈소소는 흔하기는 하지만 잘 벼려진 철검에 감탄과 동시에 실망이 들었다.

천무명의 검기는 자신보다 약해보였다.

"소협, 부탁드립-"

"제가 일행 분들을 구출해오겠습니다."

"...예?"

제갈소소는 당황했다. 지금 이 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지금도 어떤 고통을 받고 계실지 모르는 상황인데 이렇게 눈을 돌리고 떠날 수 없습니다. 제가 가서 제갈 세가의 분들을 구출하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소협!! 상대는 색마들입니다! 빙색마인이라고요!"

"그래봐야 아녀자를 겁탈하는 더러운 쓰레기일 뿐입니다. 제가 그들을 죽여 강호의 도리를 바로잡겠습니다. 그리고...어차피 도망쳐봐야 의미는 없을 것 같군요."

천무명은 제갈소소를 지키듯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카앙--!!

멀리서 날아온 암기는 천무명의 검에 튕겨나갔다. 제갈소소는 그에 한 번 더 당황했다.

"어...?"

자신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암기를 천무명은 인지하고 튕겨냈다. 등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는 자신감으로 철철 넘쳐 흐르는 것만 같았다.

"흐하하! 이 구열랑 님의 암기를 막...귀 형님!!"

새롭게 나타난 산적들은 땅에 반듯하게 누워있는 산적들을 보고 절규했다.

"네, 네 놈이냐! 네 놈이 우리 귀 형님을 죽인 것이냐?!"

"닥쳐라, 이 악적."

천무명의 목소리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사람을 납치하고 여인을 겁탈한 죄! 이 천무명이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크하하하! 별호도 없이 어린 놈이 방자하기 그지없구나! 얘들아, 쳐라!"

구열랑의 지시에 덩치 큰 산적 둘이 철퇴와 도끼를 들고 천무명을 덮쳤다. 제갈소소는 두 산적의 무위가 거의 이류에 육박하는 자들임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지마요!! 도망쳐!"

휘릭.

천무명은 제자리에서 가볍게 검을 한 번 휘둘렀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사선으로 휘두르는 베기는 청명하고 푸른 궤적을 그리며 빛이 번쩍였다.

"창천일섬(彰天一閃)."

천무명은 검을 손에서 빙글 돌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검을 먼저 휘두르고 자세를 잡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으나-

푸화아악----!!

두 산적의 몸에서 피분수가 뿜어져나왔다. 거리도 몇 걸음이나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적들의 몸은 천무명의 검이 닿은 궤적대로 갈라졌다.

"이, 이게 도대체...."

"희아연월검(熙牙燃月劍)."

천무명은 산적들을 향해 푸르게 빛나는 검을 겨눴다.

"강호의 정의를 위해, 이 천무명이 네놈들을 단죄하겠다!!"

털썩.

제갈소소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인해, 뱃속에 남아있던 하얀 것이 흘러나왔다.

"아, 아아...."

천무명의 압도적인 검기에, 그만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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