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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색마-240화 (240/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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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가도래

추색살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뒤, 무림맹주 독고자영은 어떤 무사와 독대를 나눴다.

"이렇게 참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군."

맹주는 무사에게 '장군'이라 칭했다. 검은 삿갓과 검은 무복으로 정체를 가린 무사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근처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저 뿐입니다."

"......실례."

삿갓 아래에는 아름다운 미성이 흘러나왔다. 다소 딱딱하기는 하지만, 미성의 주인은 갓을 벗어 옆으로 내려놓았다.

"정말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 장군."

"예. 이곳 인근의 도적들을 토벌하던 때 만난 뒤로 정말 오랜만이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맹주."

장군이라고 불린 흑발의 여인은 무림의 방식대로 포권을 취했다. 여인은 머리를 길게 말총처럼 묶었다. 남자 무인들이 흔히들 묶는 방식으로 묶어, 자신이 남자처럼 보이게 하려는 위장이었다.

"더욱 강해지셨군요."

"복수를 위해 강해져야만 했습니다. 꼭 찾아서 죽여야 할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님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관에서도 찾고 있으니, 금방 꼬리가 잡힐 겁니다."

"...예, 부디 좋은 소식 부탁드립니다."

쪼르르.

맹주는 직접 차를 다기에 따랐다. 여인은 맹주가 따르는 뜨거운 차를 마치 술잔 넘기듯 단번에 입에 털어넣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맹주."

"무엇입니까?"

"추색살이라는 부대는 분명 무림인이 모인 집단입니다. 그들을 정말 제가 감찰해도 되겠습니까? 제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요."

여인은 자신의 삿갓에 단 금빛 단추를 가리켰다. 황금빛 용은 중원 어떤 무가에서도 사용할 수 없는 누군가의 표식이며, 여인은 황룡의 당사자로부터 사용을 허가받은 자였다.

"한 나라의 장군이시며 금의위에도 속하신 분인데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걱정마십시오, 분명 장군의 지시대로 잘 따를 것입니다."

"제가 장군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여인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도 그렇지만, 무인들은 그런 기질이 더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몇몇 이들도 그렇고요."

"하하, 걱정마십시오. 신궁께서 원하신다면, 끝까지 정체를 숨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신궁, 여옥희.

그녀는 무림의 무공으로 치자면 현경 급 고수다. 그러나 그녀는 대외적으로 '남자'로 알려져있으며, 무림에서는 무림맹주를 비롯하여 손에 꼽을 정도로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평소에는 남장을 하여 정체를 숨기지만, 무림에서의 일이 길어지게 되면 자연히 정체를 노출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남장으로 외형을 속인다고 한들, 결국 장기간 같이 지내게 되면 여인으로서의 생리적 현상을 들킬 수밖에 없다.

"신궁께서는 하실 수 있을 때까지 저희를 도와주시면 됩니다. 신창께서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오면, 이제 그 다음은 신창께서 추색살에 도움을 주시겠지요."

"...예. 백 장군은 강호에서 색마에게 큰 변을 당했지요."

사천검담. 신창 백주흔을 패퇴시켰던 남자.

단순히 이상한 검을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감히 황궁의 상징과도 같은 황룡을 검으로 만들어내는 역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청성파의 여제자 한 명과 아미파의 여제자 한 명을 납치하여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더라.

"색마와의 싸움 이후 백 장군은 지금 무공이 일취월장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색마에게 감사를 해야할 부분이지요. 노력 빼고는 다 하던 천재가 수련을 하게 만들다니 말입니다."

"예. ...어쩌면 천하제일이 검이 아닌 창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겸양은."

여옥희는 쓰게 웃으며 자신의 의자 옆에 놓아둔 검은색 활을 들어올렸다. 독고자영은 익숙한 활의 모습에

"동예궁(東羿弓)이로군요."

"맹주. 그 날, 당신의 도움으로 저는 이 활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역적을 소탕하는 동안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를 도둑질했던 그 빌어먹, 흠흠. 쳐죽일 자를 잡는 데 큰 도움을 주셨지요."

여옥희는 살벌하게 웃으며 현을 튕겼다.

"알겠습니다. 정체가 드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날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다행히 천자께서는 제 정체가 드러날 일이 있어도 감수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신궁."

독고자영은 잠시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곳도 아닌 황궁의 지원을 받은 독고자영은 금방이라도 딸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부디, 제 딸아이를 되찾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맹주. 추색살의 단원들 앞에서 제 성별이 드러난다고 해도, 성별과 관계 없이 저를 신뢰하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신궁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정체가 드러나는 걸 오히려 역으로 이용해, 그 색마라는 자를 꾀어낼 수도 있겠지요."

"......."

독고자영은 차마 그런 불안한 말을 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신궁 여옥희, 천리 밖에 떨어진 색마의 두 고환을 화살 한 번으로 꿰뚫어보겠습니다."

여옥희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 * *

무림맹주가 모은 추색살 발족에 대한 회합에는 정말 많은 이들이 모였다.

개중에는 정체를 숨긴 이들이 태반이었고, 참가자들은 서로의 기세와 무공의 수위를 통해 누가 왔는 지 서로 가늠했다.

"...흠."

흑발의 소녀는 자신의 칸에 기막을 펼쳐 아무도 안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회합에 모인 이들 중 소녀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자는 무림맹주를 포함하여 고작 서넛밖에 되지 않았다.

"쯧, 집안 애들 대신 왔더니...."

"이야, 누님이 아니십니까."

백발이 정정한 노인은 소녀를 향해 껄렁한 목소리로 포권을 취했다. 소녀는 주변을 살핀 뒤 이를 갈며 답했다.

"어르신, 누님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허어, 아무리 반로환동했다고 한들 너무 많이 어리게 된 거 아닙니까?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너 이 새끼, 죽는다?"

소녀, 독선(毒仙) 당예진은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노인은 껄껄 웃으며 부채를 펼쳤다.

"누님에게 죽는다면 하늘에 가서도 당당히 말할 수 있겠군요. 허허."

"말이라도 못하면."

당예진은 손을 슬쩍 들어올렸다. 노인 또한 부채를 펄럭여 기막을 덧씌웠다.

"독선 누님. 10년 만에 뵙습니다."

"그래, 복마(伏魔)야, 팔은 좀 어떻느냐?"

"하하, 그저 살아있는 것에 만족합니다."

노인, 복마진인(伏魔眞人)은 부채를 잡고 펄럭였다. 그의 반대쪽 팔은 도포자락만 나부낄 뿐이었다.

"...강호에 색마들이 준동한다 하더이다. 누님은 뭔가 짐작가는 바가 있습니까?"

"보았다. ...맹주가 찾는 색마를 보기도 했다."

복마진인의 눈이 빛났다.

"호오, 그 자를 죽이면 되는 겁니까?"

"...그래. 그런데 이상하더구나. 녀석에게서...그 녀석의 기운이 느껴지더구나."

"그 녀석?"

"적성자."

"......."

복마진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미친. 독고 맹주의 딸을 납치한 자가 형님의 안배란 말이오?"

"안배라기보다는, 비무로 진 것 같더구나. 나도 정체를 숨기는데 급급했다."

"...검선이 졌다고? 허, 자하신공까지 직접 내어줬다는 건, 순수하게 비무로 졌다는 것 아니오?"

"그래. 복마야, 부탁이 있다. 네가 추색살에 합류하여 이들을 도와다오. 그러면 분명 그 자에게 닿게 될 것이다."

당예진은 복마진인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흰 수염이 서서히 피부와 함께 뜯어지려고 했다.

"누님, 그러면 누님은 어쩔 것이오?"

"나는 현녀님께 가보겠다."

당예진은 굳은 얼굴로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든 색마가 우리가 찾던 이가 맞는지. 천기를 거스를 수 있는 자라면...왜 현녀님께서는 그 자를."

당예진은 손날을 세웠다.

"왜 그 자를 아직도 죽이지 않는 건지, 내 직접 현녀님께 여쭤보고 오마."

"알겠소. ...그, 누님. 조심하시오."

복마진인은 복잡한 얼굴로 당예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누님도 당할 수 있으니."

"...하하! 걱정마라, 내가 설마 색마에게 당하겠느냐."

당예진은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가리켰다.

"소녀, 열 두 살이옵니다."

"......뒤에 영이 하나 더 붙-"

퍼-억.

당예진의 매서운 발길질이 복마진인의 정강이에 닿았다.

* * *

팽도황은 제법 많은 시간을 벌어줬다.

덕분에 나는 팽유월과 가볍게 서로 여흥을 즐길 수 있었고, 팽가가 호북까지 내려온 이유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들을 무난하게 보내는 것 뿐.

“...아붕이 아이를 안고 있다고?”

사정후는 내가 월아를 안아든 걸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내가 팽유월을 범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그를 안심시켰다.

그냥 나는 젖 좀 빨고 팽유월은 좆 좀 빨았을 뿐이다. 그 이상은 시간의 문제로 하지 않았다.

“허허허! 월아가 이리도 잘 안겨 있는 건 처음보는구려.”

“제자님, 그 사이에 무슨 일 없었죠?”

“예, 스승님의 말씀대로 옆에서 잘 보필했습니다. 다만….”

나는 내가 안아든 월아를 들썩였다. 월아는 깨어있었고, 바로 앞에 있는 사공희를 향해 앙증맞은 손을 내밀었다.

“마마!”

“...어머나.”

팽유월은 다소 날 선 목소리로 나를 째려봤다. 나는 그녀에게 급히 전음을 날렸다.

[가슴으로 마마라고 부른 게 아닐지?]

“하하, 아붕 소협의 스승님이라서 그런 걸까요? 아붕 소협의 기를 좋아하는 듯 한데, 태극화 님의 기도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해석.

-사공희 안에 얼마나 싸질렀으면 월아가 사공희보고 엄마라고 할 정도로 친숙해하는 건가.

유구무언이다. 굳이 따지자면 천하삼젖으로서 자웅을 겨루는 둘의 가슴이 막상막하라는 게 문제가 아닐까?

“와….”

정작 사공희는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는 월아를 향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손을 내밀었다. 월아는 사공희의 손을 이리저리 꾹꾹 붙잡으며 장난을 쳤다.

“...저도 아이가 가지고 싶네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는 처음 봐요.”

“월아가 좀 많이 사랑스럽긴 하지.”

팽도황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나는 괜히 이 자리가 불편했지만, 그래도 월아를 믿었다.

‘아빠 좀 살려다오.’

“...빠아!”

월아는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볼을 비볐다. 내 신호가 전해진 건지, 월아는 교묘하게 나를 부르며 애교를 부렸다.

“...빠?”

“자주 그런답니다.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데, 아직은 여러모로 부족해요.”

“빠, 빠아아. 엄마. 마마!”

월아는 나는 애매하게 부르며, 팽유월과 사공희에게는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불렀다. 어쩌면 월아는 천재가 아닐까? 나의 첫 자식은 신기를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닐까?

“팽 선배님, 저 월아를 조금 보고 가도 될까요?”

“내게 허락을 구하는 것도 좋지만, 유월이의 의사를 묻는 것도 중요하네. 어머니는 유월이니까.”

팽도황은 은근히 선을 그으며 팽유월에게 공을 넘겼다. 사공희는 다소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끄응….”

사공희는 팽유월에게 약간의 열패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공이나 다른 요소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모성에서 밀리는 것에 다소 불편해하고 있었다.

‘자기랑 비슷한데 젖까지 나온다? 끝났지.’

팽유월에게는 사공희에게 없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월아라는 자식이고, 또 하나는 월아를 먹이기 위해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모성의 상징이다. 사공희는 안타깝게도 아직 그게 한참 부족했다.

하지만 한 단계 정도는 가까워진 듯 보였다. 나는 팽도황을 향해 전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견희에게 오호단문도를 직접 보여주어 몹시 고맙소.]

사공희는 이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팽도황과의 비무가 분명 좋게 작용한 게 틀림없다.

“후후, 밖이 많이 어두워졌군. 월아가 많이 피곤해보이니 슬슬 재우도록 합시다. 유월아, 월아를.”

“네, 아버님.”

팽유월은 월아를 내게서 받아들려고 했다. 생각해보니 팽도황이 굳이 팽유월의 부친이 된 구체적인 이유는 못 들어서 궁금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떠나야 할 때다.

“아, 아앙!”

...그러나, 나는 떠날 수 없었다.

“월아야.”

“시, 러-!”

“흡…!”

팽유월은 어눌하지만 확실한 월아의 말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녀는 기쁨과 경악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당황했다.

“월아가 다른 말을...싫다는 말을…!!”

“빠!”

월아는 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누가 봐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몸짓이었고, 나는 월아의 등을 토닥이며 내 마음을 전했다.

지금은 잠깐만 떨어주지 않겠느냐.

도리도리.

월아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린 아이가 고집을 피우는 경우는 허다하게 있었지만, 나는 월아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걸 처음 보았다.

그리고 행복했다.

나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내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며, 함께 있어달라고 하는 말을 어찌 들어주지 않을 수 있으랴.

비록 천가장에 돌아가지는 못하겠지만, 다행히 오늘의 동침 당번은 비번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태극화 님?”

팽유월은 난처한 미소로 월아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월아가 아붕 소협이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이런 상태면, 자다가 깼을 때 어머니도 아니고 아붕 소협부터 찾을 것 같네요. 그래서 말인데요.”

팽유월은 뒤에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자신의 가슴을 내 머리 위에 올리며, 나를 뒤에서 끌어안 듯 안았다.

“아붕 소협을 오늘 밤 빌릴 수 있을까요?”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작품후기]

팽유월 선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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