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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가도래
<하남, 허창 무림맹.>
남궁가의 후계자, 남궁패는 동생인 남궁유린과 함께 부친의 뒤를 따라 걸었다.
"패, 유린."
""예, 아버님.""
중후하게 울리는 가주의 말에 둘은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황제의 앞에서도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것이 남궁의 매력이라고는 하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여러모로 자중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부터 그 어떤 말도 하는 것을 불허한다."
다소 딱딱하기까지 한 가주의 말에 둘은 울컥했으나 숨을 죽였다. 가주는 부친이 아닌 초절정, 아니 화경 고수로서 둘에게 확실한 힘의 격차를 보이며 경고했다.
"너희는 그저 듣기만 해라. 너희는 그저 참관인일 뿐."
둘은 고개만 끄덕였다. 가주는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고, 둘은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원형의 넓은 공간. 가운데가 뻥 뚫린 고층 객잔을 통째로 빌려 칸막이를 설치한 회의장은 각 문파나 세가마다 지정된 자리가 있었다.
남궁세가처럼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세가가 있는 반면, 가면을 쓰거나 앞에 발을 쳐놓는 등 모습을 숨긴 이들도 있었다.
그 수만 무려 40이 훌쩍 넘었다.
그리고 모습을 가려 정체를 숨긴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사이함이나 마기에 두 남매는 긴장으로 입이 바싹 말랐다.
무림맹에서 모이지만, 백도의 세력만 모인 것이 아니다.
색마는 마교와 사파에도 피해를 입혔고, 그들 중 일부가 무림맹주의 정식 초청을 받아 한 자리에 모였다.
"...미친."
남궁세가 가주는 정면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이죽거렸다. 가주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작은 소녀의 인영이 얇은 천 너머로 비쳤다.
"패야. 질문에 답하거라. 이곳에 있는 무인들 중 절정 이상이 몇이나 될 것 같으냐?"
"...절정이 아닌 자들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남궁패의 대답에 가주는 씩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유린아, 그럼 화경은?"
"......서른 분은 넘지 않을까요?"
"그렇다. 나를 포함하여, 이곳에는 서른 셋의 화경 고수가 모여있다."
가주의 말에 두 남매는 핏기가 가셨다. 아직 초절정에도 닿지 못한 자신들이 감히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아득한 경지의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이다. ...현경 고수는 몇이나 있는 것 같으냐?"
"현경이...또 있습니까?"
"소녀는 모르겠습니다."
"열 다섯."
두 남매는 비명을 지를뻔 했다가 참았다.
"강호에는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초절정과 화경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들이 현경에 이르러서도 조용히 삶을 마감하는 이들이 천지지. ...이 자리에 이렇게 모인 게 참으로 가관이로구나."
가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금의위의 신궁(神弓)까지 왔다. 검각주이자 마교의 마검비까지 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느냐?"
가주는 진득한 살기를 내비쳤다.
"색마를 퇴치하자는 대의로 모인 이들이 이리도 많다니, 나는 감격스럽구나."
저벅, 저벅.
"모두 모였군."
원형 공간의 중앙, 무대에 선 남자는 한 자루의 칼처럼 기세가 날카로웠다. 무림에서 가장 강한 남자로 널리 알려졌던 남자는 어느새 더 강해져, 이 자리에 모인 누구보다도 더 강해져있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리오. 한 분 한 분 말씀을 드려야 하나, 정체를 숨기기를 바라는 분들이 있어 소개는 생략하겠소. 본인, 무림맹주 독고자영이오."
독고자영은 사방으로 포권을 취했다.
"이미 알려드린대로, 우리는 색마 격살의 대의를 위해 이 자리에 모였소."
독고자영은 핏발 선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우리의 아내와 딸을 건드린 색마를 반드시 죽일 것이오."
* * *
색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남자가 빙색마인이기는 하지만, 빙색마인만 중원의 색마가 아니다.
색마는 어디에도 있고, 언제든지 있다.
빙색마인이 독고자영의 딸, 독고연을 납치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로 인해 천하 곳곳에는 수많은 색마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그로 인한 문제로 무림 뿐만 아니라 관아까지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이에 독고자영은 오랜 기간 동안 웅크리고 있었다. 생사가 불분명한 딸을 찾으러다니는 것이 아니라, 물밑에서 색마를 향한 반격을 크게 준비하고 있었다.
관과의 연계.
천하의 색마들을 사로잡기 위해, 무림맹은 한 가지 수를 꺼내들었다.
무림공적!
이미 빙색마인은 무림의 공적이다. 하지만 이 공공의 적을 단 한 명에게 국한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색마라고 칭하는 자.
색마로서 행동하는 자.
색마를 옆에서 돕는 자.
그들 모두를 무림의 공적으로 두었다.
멸색(滅色).
섬서에서 마검비의 행동이 계기가 되었을까. 중원 전역의 고수들은 자신의 힘을 뽐내거나 명예를 차지하기 위해, 색마들을 쓰러뜨리는데 힘을 보태겠노라고 선언했다.
관에서도 색마를 주살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타인을 겁탈하거나 성적으로 희롱하는 자에 대해서는 제법 강한 형량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고, 각 지역마다 색마 추살에 나선 무림인들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거점 객잔을 마련하여 무림을 지원했다.
색마는 무림인만을 덮치지 않는다.
색마는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이를 덮치며, 무림인을 덮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화경 고수에게 초절정 고수가 겁탈을 당한다면, 삼류 무사에게 겁탈을 당하는 건 결국 무공을 익히지 않은 힘없는 양민인 셈이었으니까.
그리하여, 중원 전역에는 색마를 추살하자는 여론이 팽배했다.
나날이 늘어만가는 색마 피해자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색마는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자는 과격한 의견까지 빗발치기 시작했다.
- 색마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어떤 짓을 해도 좋다!!
그리하여, 이런 분위기 하에 무림맹은 팔대세가와 구파일방의 협조를 구했다. 색마를 무조건 죽이자는 분위기 자체를 무림맹에서 형성한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중원에서 피해가 극심했는지는 선후를 따질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많은 이들이 이에 동조한다는 것.
그리고 색마들을 완전히 억누르고 제거하지 않으면, 무림의 큰 행사는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용봉지회!
- 내가 용봉지회에 어여쁜 소저들 보러 왔지, 고추 새끼들 보러 온 줄 아느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용봉지회가 용들의 축제가 될 것이다. 물론 용들의 비무도 나름 훌륭하고 손색이 없지만, 이미 사람들은 용봉지회 당시 육봉쟁패를 보고 눈이 높아져있었다.
- 최소한 절정 고수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겠어?
- 남궁패 말고 절정이 된 고수가 있기는 하나?
- 육봉쟁패를 안 한다고? 그럼 왜 그걸 보러 멀리까지 가나?
용봉지회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았지, 구룡지회로 끝나게 된다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힘이 반토막나고 말 것이다.
설령 억지로 육봉쟁패를 진행해도 문제.
- 무림맹주의 딸도 거기 갔다가 납치당하고 생사불명이 되었는데 어떻게 우리 딸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 아무리 고수들이 있다고 한들, 그 때도 빙색마인을 죽이지 못해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오?
- 우리 아이는 아직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괜히 부담을 지지 맙시다. 육봉의 명예보다 처녀를 잃은 불명예가 더 클 지도 모르오.
딸가진 아버지가 그 누가 용봉지회에 자식을 보내겠는가!
누구나 참여하고 싶어하던 용봉지회는 참가자 본인이 원치 않거나, 참가자가 원하더라도 세가와 문파에서 적극적으로 만류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출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대대적인 색마 색출 작업을 진행해야만 했다.
악의 근원은 뿌리를 뽑아 제거하는 것.
관과 무림이 하나가 되어 합동작전을 펼치는 가운데, 무림맹은 각 문파와 세가에 본격적인 추색단 소집을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 우리 어머니를 범한 색마를 반드시 죽여버리고 말겠소!
선룡 을지상을 비롯한 색마 피해자들이 주로 추색단에 합류했다. 또한 정의와 협을 추구하는 무사들도 추색단에 하나 둘 합류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무림맹의 목적 단체에 불과했던 추색단은 여기에 금빛 날개를 달게 되었다.
- 짐의 이름으로 명한다. 치안을 무너뜨리는 범죄자들을 모조리 척결하라.
추색단의 활동으로 인해 격렬히 저항하는 색마를 주살할 경우, 이 살인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친다.
황제의 교서가 떨어졌다.
아무리 관무불가침이라고 한들, 황제의 명령을 감히 무시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황제는 금의위의 무사 중 한 명을 추색단에 직접 보내어 관리감독을 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리하여, 진실로 만들어진 것이다.
<추색살(追色殺)>.
색마를 찾아 죽이기 위한 공식적인 집단이, 중원 전체에 나타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 * *
"몹시 위험하군."
"네, 엄청 위험하죠. 그것 때문에 직접 내려왔어요. 그 말씀을 전달하려고."
팽유월 왈, 팽가는 호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하남을 거쳐간다고 했다. 즉, 팽가로서는 추색살에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거부하는 것이 이상했다. 팽가는 을가장과 독고세가와 마찬가지로 빙색마인이 직접 다녀간 곳이므로.
팽신혜를 범한 것을 끝으로 빙색마인은 더이상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으나, 누구도 빙색마인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용봉지회를 반드시 성공적으로 이루려고 하는 의지가 담겨있군 그래. 죽어도 용봉지회의 명맥이 끊기는 건 못 보겠다 이거지?"
"역사적 상징이기도 하지만, 용봉지회는 중원 전체 평화의 상징이에요. 용봉지회가 끝나는 즉시, 혈겁이 일어날 거예요. 혈교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혈겁이."
미래에서도 용봉지회의 끝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주 작은 불씨로부터 시작된 흑백의 다툼은 정마대전으로 확전되었고, 결국 무림 전체의 전쟁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겠죠. 특히 무고한 사람이 엄청 많이 나올 거예요."
"...그래, 무고한 사람."
추색살에 누가 들어가든 문제는 없다. 검선같은 자가 아무리 많이 튀어나온다고 한들, 내가 죽이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조금 어렵긴 해도 이길 수는 있다.
하지만 대중의 사고는, 중원 전체에 퍼져버린 잘못된 사상은 한 개인이 이기기에는 힘들다. 내가 무림맹주와 같은 발언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비천색마로서 천하에 내 생각을 주장하기에는 발언력이 너무 미천했다.
"추색살에게 색마를 주살할 권한을 부여한다? 그것도 황제의 명으로? 너무나도 위험해."
"네? 색마를 격살하는 건...그래도 당연한 거 잖아요. 상공을 나무라는 게 아니라, 중원 전체의 인식이 그런 거 잖아요."
"그래. 유월아. 그게 핵심인 것이다."
색마는 무조건 죽인다.
다만.
"...누군가 악의를 품고, 무고한 자를 피흘리게 만든다면 어찌하겠느냐?"
"여인이 피를 흘리게 되었는데 무고한...? 상공, 저 이건 잘 이해 못하겠어요."
팽유월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이게 맞는 반응이었다. 천하의 그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실제로 저지른다쳐도,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악의어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하나 있다.
대공자 주지.
"유월아. 이름을 꺼내기 싫지만 추소광의 이름을 꺼내야겠구나. 만약 네가 불운한 약혼이 아닌,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으로 추소광을 만났다고 치자."
"으으, 그건 진짜 싫은데요...."
팽유월이 워낙 기함을 했으나, 나는 가정을 위해 팽유월을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가정이다, 가정. 네가 그렇게 혐오하는 자가 네게 그 때처럼 껄떡거린다고 생각해보거라. 어찌하겠느냐?"
"다시는 곁에 오지 못하게 혼쭐을 내거나, 아니면 자리를 피하고 영영 무시하겠죠? 너무 심하면 관아에 고발한다거나."
"그래. 관아에 고발. 그것이 제일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혈교주는 말했다.
- '나 저 놈한테 강간당했어요!'라고 거짓으로 말하고 다니는 악녀가 있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남자를 파멸시키기 위해 자신도 속이고 천하도 속이는 자가 있다면, 과연 온 천하 사람들은 누구를 믿을까?
"......여인네가 일부러 남자를 색마로 몰아가고, 제대로 된 물증이 마련되기 전에 색마로 몰려 주살당하는 자가 있다면?"
"천하에 그런 일이 어디있어요? 말도 안 돼요."
팽유월은 고개를 격하게 가로저었다. 그녀는 인간의 악의에 대해 무지했다. 인간이 악의를 품으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색마가 아닌 자를 색마로 몰고가서 죽이게 된다면, 강호는 어찌 되겠느냐?"
"......."
팽유월은 숨을 죽였다. 내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그녀는 경악하여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어쩔 수 없군. 강호의 도리를 위해서, 이 한 몸 희생하는 수밖에."
"상공. 그건...."
"걱정마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이 있지 않느냐."
최선, 최고의 해결 방법.
"내가 다 따버리면 되겠어."
"...네?"
"천하의 모든 색마를 죽이고, 오롯이 나만이 색마가 된다."
강호에 색마라고 불리우는 자, 모두 내가 될 것이니.
"나 이외의 모든 색마를 죽이고, 꽃뱀들은 내가 다 범하고 다니면 되겠어."
너무나도 간단명료한 해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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