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36화 (236/568)

--------------------

팽가도래

<그 시각, 무당파 응접실.>

"참으로 반갑소, 장문인."

"...예. 정말 신수가 훤해지셨군요."

무당파 장문인 현철도사는 눈앞의 청년에게 존대를 해야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속이 뒤틀렸다.

겉으로 봐도 자신이 응당 존대를 받아야 하는 게 물론이거니와, 이곳 무당파의 장문인실은 자신이 주인인 곳이다. 그런 곳에서 손님을 상대로 존대를 해야한다는 것이 현철 도사의 속을 연신 뒤틀리게 만들었다.

"참으로 믿기지 않습니다."

현타 도사는 입을 꾹 다문 현철 도사 대신 대화를 이어나갔다.

"현기 사형과 같은 배분이신 악참도 어르신께서 이렇게 되다니. 존경스럽습니다, 선배님."

"하하, 별말씀을. 현기 도사님께는 이 팽 모, 오래전에 큰 신세를 졌었지. 면목은 없으나 내 지금이라도 등선하신 분께 술 한 잔 바치러 왔다네."

"괜찮습니다. 현기 사형도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무당파 전대 당문인 현기 도사는 악참도 팽이왕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서로 검을 몇 번 섞어봤을 만큼 둘은 인연이 있었고, 둘다 큰 병을 앓게 되었다.

다만 팽이왕은 살아남았다. 병환을 이겨내고 2년간 폐인과도 같이 목숨을 연명하며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았으나,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으로도 모자라 반로환동까지 했다.

마치 나비가 오랜 시간 번데기가 되어 우화를 하듯, 그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이름을 '팽도황(彭刀皇)'이라는, 다소 광오하다고 할 정도의 이름으로 바꿨다.

그러므로 그의 무당파 방문은 하북팽가의 부활을 알리는 동시에, 팽도황과 팽가의 건재함을 천하에 과시하고자 함에 의미가 있었다.

"현기 도사님을 모신 곳으로 안내해주시오. 생전에 좋아하시던 걸로 한 잔 바치오리다."

"...현기 사형은 술을 하지 않으셨소만."

"장문인."

현타 도사는 뚱한 목소리의 현철 도사를 나무랐다. 괜찮다 싶다가도 그는 자신보다 강한 선배 고수들을 눈앞에 두고 장문인 답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다.

그리고 상대는 하필 팽가였다. 성질이 지랄, 아니 불 같기로는 황보세가와 쌍벽을 이루는 가문이 아니던가?

"방금 그 말은...."

팔대세가 가문의 수장과 구파일방 문파의 장문인. 대외적인 배분으로 치면 둘은 동급이었고, 무림의 선후배 관계로 따지면 악참도가 훨씬 높았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현철 도사의 명백한 결례였다.

"하하하! 실례했소. 그래,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이해해주시구려. 한 때 검과 술을 나눴던 벗으로서 무덤에 올리는 것일 뿐이니."

그러나 팽도황은 다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로환동을 하며 무공만 깊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는 마음까지 넓어졌다.

"그러면 현타 후배. 내가 현기 도사님께 못다한 인사를 하는 동안 내 딸아이를 맡겨도 되겠소?"

"예. ...그런데 가주님, 제가 알기로는 가주님의 따님은-"

"이번에 양녀로 들였소."

팽도황은 먼저 선수를 쳤다.

"방계의 아이에 양친을 모두 잃은데다가, 지아비까지 잃은 아이지. 상황이 그렇다보니 팽가에서 3년상을 치르고 있었네. 지아비의 일은 참으로 안타깝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를 아비 없이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야. 그래서 그 아이를 내 양녀로 맞이했다네."

"...크흠, 알겠습니다."

다소 구구절절하기 까지 한 팽도황의 말에 현타 도사는 미묘하고도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뭔가 찝찝한, 그러면서도 익숙한, 그리고 꼭 누군가가 관계되어 있는 듯한 느낌에 현타 도사는 기억을 곱씹어야했다.

"이름이...팽유월이라고 했었지요?"

"하하! 그렇다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딸도 같이 있지."

팽도황은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했다. 손녀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양녀임에도 불구하고 긍지와 사랑이 느껴졌다.

"혹시나하는 말이지만, 무당파의 후배들이 행여나라도 내 딸에게 흑심을 품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군."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가주."

현철 도사는 입꼬리를 비틀며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리 무당파에는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고 한들, 흑심에 미혹되어 그릇된 행동을 하는 자가 없소이다!!"

"......."

"그런 자가 있다면, 내 당장 장문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오! 무당을 모욕하지 마시오!!"

현타 도사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 * *

- 세상에서 가장 꼴리는 여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첫째가 처녀이며, 둘째는 예전에 먹지 못했던 여자이며, 셋째는 유부녀이니라.

혈교주는 말했다.

남자의 음심을 자극하는 여인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가지지 못한 대상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남자의 아내'라는 특성을 지닌 유부녀를 건드릴 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 남편이 살아있다면 모가지 날아갈 각오를 해야지. 불륜하다 걸리면 복날 개패듯 맞아도 싸다.

혈교주는 말했다. 남의 것을 건드리는 자, 그에 대한 각오를 해야한다고. 엄연히 순리를 거스르는 짓인 만큼, 천벌을 받을 각오를 해야한다고.

벽라도는 예외다. 그들은 해적이고, 이미 천륜을 저버린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해서는 업보가 쌓여도 인간 대 인간으로서 쌓일 뿐, 하늘이 노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의 유부녀라면 사정이 다르다. 실제로 나는 을가장의 대모를 건드렸고, 을가장의 후계자는 지금도 빙색마인을 찾아 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은원이 하나 둘 쌓이면 결국 터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유부녀를 건드리고자 한다면, 한 남자와 생사지적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이면 유부녀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을가장의 대모를 건드린 이유는 단 하나.

- 하지만 미망인이라면 어떨까!

'가능.'

이미 지아비가 사라진 여인에게 남자의 기쁨을 깨우쳐주는 것 만큼 짜릿한 것이 또 어디있으랴! 나는 그저 색마로서 색마가 '색마했다'는 행동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색마로서 행동해야만 했다.

그래야 내 결백을 증명할 수 있다.

"가가, 팽유월이라는 분은...어떻게 하실 거예요?"

독고구검이 가장 먼저 나를 찔렀다.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어, 음. ...애가 지금 몇 살이라고 했지?"

"이제 세살도 안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한 번 봐줘야 하나?"

내가 이 말을 한 순간, 내 곁에 둘러앉은 세 여인의 눈초리가 다소 따가워졌다. 팽유월을 왜 범하지 않느냐하는 눈초리가 아니라, 내가 뭔가 잘못 먹었나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시아 언니. 가가를 도대체 어떻게 모신 거예요?"

"무슨 소리야? 나 얘 먹고 싶다는 거 원없이 먹이고 왔어. 지금 배불러서 하는 소리 아니야?"

"가가가 미녀 마다한다고요? 말이 안 되잖아요."

"미녀도 미녀 나름이지. 알아보니까 조금 기구한 운명이던데."

독고연과 이시아는 설전을 벌였다. 나는 묵묵히 나물을 입에 넣고 씹어삼켰다. 밥상머리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그다지 좋지 않으나, 그걸 말려야 할 나는 쉽사리 말을 하기 쉽지 않았다.

"그 여자, 천환단에 관계가 있는 여자야. 여러모로 불쌍하기는 하더라고."

"네. 그런데...엄청 미인이잖아요. 꽃도감 번외편에 실려있던데요. 그러니까...."

"혼인만 하지 않았더라면 육봉에도 들었을 미인이라고 했지."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아예 입을 다물고 있는 건 의심을 살 여지가 많았다.

"가가, 안휘에 계실 때 혹시 보시지 않았나요? 추소표국, 안휘에 있었잖아요."

"...확실히 얼굴은 예쁘기는 했지."

무공은 몰라도 얼굴은 여기있는 셋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미녀다. 더군다나 아이를 낳고 기혈이 제자리를 잡았기에, 그녀의 미모는 한층 더 아름다워졌다.

"흠...어찌해야하나...하북이 아니라 멀리 이곳까지 와서 색마에게 범해진 걸 알면, 팽도황이 난리가 나지 않을까?"

"하긴. 새로 양녀로 들인만큼, 더 신경을 쓰겠지."

"떠나가는 길에 습격을 해야하나, 아니면 하북까지 몰래 쫓아가서 하북에서 범해야 하나."

나는 하지도 않을 계획을 아무렇게나 떠들었다. 마치 내가 팽유월을 범하는 데 이것저것 조건을 따지는 것처럼, 의심의 눈초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애를 써야만 했다.

외줄타기.

단 한 번이라도 실패해서 나와 팽유월의 관계가 들통나는 순간.

팽유월이 나와 통정한 관계이고, 팽유월이 안고 있는 월아가 내 자식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화경은 커녕 초절정에도 이르지 못한 시절에 그녀가 내 아이를 가진 걸 알게 된 순간.

- 나, 나도 아이 가질 거예요!

착정당한다. 교배당한다. 나는 종마가 되어 세 여인의 달거리가 오지 않을 때까지 천가장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리라.

그러니까 지금 상황을 혈교주의 말을 빌어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좆 됐 다.'

원인을 따지고보면 예고도 없이 찾아온 팽가가 문제가 되겠지만, 나는 차마 팽유월이나 팽도황에게 따지고 들 수 없었다.

"애초에 호북에는 무슨 일로 방문한 거지? 혹시 중간에 다른 도시 거쳐서 여행 중인가?"

"아니요? 사월 언니가 전해들은 바로는 무당파에 직접 온 거래요. 명목은...현기 도사 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직접 인사를 하러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명분은 틀린 게 없다. 병환으로 하북은 커녕 팽가를 나서지도 못하던 팽이왕이었으니, 젊음을 되찾은 그가 팽가를 나서는 건 분명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그와의 약조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팽유월이랑 월아를 데리고, 호위무사들을 최소한으로 꾸려 단촐하게 호북에 찾아왔다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건 내게 보내는 신호였다.

그들은 무당파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왔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무당파에 직접 잠입할 수도 없고...."

나는 일부러 뒷말을 흘렸다. 이시아와 독고연은 내가 미망인 팽유월을 취했을 때의 이득과 위험성을 논하며 갑론을박하느라 바빴다.

"......."

그래서 나는 묵묵히 식사만 하는 사공희가 어떻게 반응을 할 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사공희의 눈치를 보면서도, 눈치를 보지 않는 척 해야만 했다.

"상공."

"음."

가만히 있던 사공희가 입을 열자, 이시아와 독고연도 입을 닫았다.

"왜 그러냐, 견희야."

"상공 덕분에 천하를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천하는 넓더라고요."

"갑자기 무슨 소리냐."

안다. 나는 사공희가 무슨 말을 할 지 알고 있다. 하지만 애써 모른쇠하며 답했다.

"저, 적수를 만난 것 같아요. 저는 확신할 수 있어요. 용봉지회 때 상공께서 숱한 여인들을 골르시면서, 누구는 간식이고 누구는 주식인 지 어떻게 구분하셨는 지 감으로 알 수 있어요."

젠장.

"팽유월 소저는, 상공께서 최소 진가장...어쩌면 천가장으로 들일 지도 모르는 분이더라고요."

빠득.

사공희의 말에 두 여인의 표정이 굳었다. 이시아나 독고연이나 딱히 위아래는 없지만, 나이로 보나 순서로 보나 이들 중 '천가장에서의 서열'은 사공희가 갑이었다.

"희, 그게 사실이야?"

"언니께서 직접 인사를 나누셨대요."

끝났다. 만나서는 안 될 두 대적자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만 만나버리고 말았다.

'이게 천벌인가.'

해적섬의 여인들을 희롱하고 능멸한 것에 대한 하늘의 벌이 아닐까. 나는 내공까지 일으키며 두근거리는 내 심장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상공. 저는 말이에요."

사공희는 마치 도를 깨우친 도사처럼, 현기가 깃든 눈으로 나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저랑 가슴 크기가 비슷하면서 형태까지 예쁜 여인을 처음 보았답니다. 그것도 저와 무공 수위가...비슷한."

호적수.

"상공.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무엇이냐?"

"의심받지 않고, 무당파에 당당히 들어오는 방법."

사공희는 의심이라고는 티끌만도 없는 나에 대한 순수한 믿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제 제자님으로, 아붕으로 접근하면 되지 않을까요?"

"......."

아, 나물 맛있다.

"그것 참...혜안이로구나."

나는 나를 위해 지혜를 발휘한 사공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으로 울었다.

[작품후기]

염마쟝 일러가 나왔습니다.

무협에 복장이 왜 저따위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혈교의 계략입니다.

염마쟝이 왜 먼저 나왔냐면요

아 글쎄 저는 22일 저녁에 외주를 넣었는데 23일 아침에 러프본이 도착한

이무튼 여러분의 후원금은 일러와 제 커피를 위한 자양분입니다. 감사합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