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35화 (235/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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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파 습격 사건

동이에 가면 동이의 법을 따라라.

혈교주가 한 말이다. 그는 그 지역 특유의 문화나 관습, 그리고 법도가 있으면 결코 외지의 상식을 잣대로 판단하고 행동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니 혈교의 영역에서는 혈교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 옳다. 이시아에게는 답답해서 목이 막힐 정도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혈교의 손님으로서 스쳐지나가는 존재로 남고자 했다.

“벽라도는 끝입니다. 이제 남은 건 금사도입니다. ...다만 두 분의 도움은 이제 더 없어도 될 듯 합니다.”

혈규령은 마지막 복주머니를 꺼내들었다. 복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는 안에 든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줄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남화노검은 어떻게 할 생각이시죠?”

“걱정마세요. 다 대책이 있습니다. 현경 고수가 미쳐 날뛴다고 한들, 저희는 후방이 안정된 것 만으로 이미 승리했습니다.”

금사도가 혈해남파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사이, 우리가 벽라도를 무장해제시킨 것이 혈해남파의 승리를 가져왔다더라. 무슨 이야기냐하면, 이미 혈해남파는 승기를 붙잡고 있었다.

단지 금사도와 정면전을 펼치기에는 벽라도의 해적들이 후방을 급습하고 약탈할 것이 걱정되어 현상유지를 하고 있었을 뿐.

이제 후방의 문제가 안정된 이상,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다더라.

“결코 당신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음양합일을 나눈다거나, 그것 때문에 본 문의 사람들이 불편해한다거나, 그것 때문에 제가 골치가 아프다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

마교의 소공녀와 비천색마까지 나서기에는 과잉전력이다.

우리는 혈규령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남화노검이라는 불안 요소가 충분히 있었지만, 우리는 혈규령의 자신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혈교가 잠정적으로 적이라고 한다면, 남화노검이 혈해남파를 도모하는 것이 마교에 썩 나쁜 일은 아니다.

우리는 혈규령으로부터 벽라도를 무너뜨린 것으로 인정을 받았고, 그 뒤에 혈규령이 자승자박하여 몰락하는 건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그래도 걱정되기는 하군. 그대는 광마의 여자가 아닌가?”

“...훗. 그러니까 더 걱정말라는 겁니다.”

은근슬쩍 추켜세우며 떠보니, 혈규령인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그분의 여자이기도 하지만, 남화노검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뭐...?”

“설마.”

“예. 실은-”

“남화노검의 제자?”

“아니야. 딸이 아닐까?”

“.......”

혈규령은 그저 웃기만 했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소공녀께서 괜히 혈교에 관심을 가지실까봐 말을 못하겠습니다만, 괜찮을까요?”

“허. 그런 말을 해놓고 말을 하지 마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니오?”

“예의상 하는 말이라도 절차라는 것이 있지요. 후후, 허락으로 알고 말하겠습니다.”

혈규령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다소곳한 자세로 웃는 그녀는 아무리 살펴봐도 20대 초반의 젊은 여인이었다.

“저는 그분의 월녀가 되기 위해 ‘대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육체 나이를 ‘고정’할 수 있게 되었지요.”

“뭐...?”

이시아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왜 수많은 무림의 여인들이 혈교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월녀가 되려고 했었는지 새삼 떠올랐다.

“영원한 젊음.”

“...혈선녀가 되면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건가요?”

“예. 정확히는 노화를 죽기 전까지 미루는 셈입니다. 수명이 10년이 남아있다고 한다면, 단 하루를 남겨두고 젊게 살다가 남은 하루에 모든 노화를 받아들이고 죽는 거지요.”

“.......”

이시아는 여러모로 내게 할 말이 많아보였다. 여인으로서 부럽지 않을 수 없는 조건에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영원한 젊음이라. 확실히 부럽긴 하지.”

나는 이시아의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따지자면 너무 어린 것보다는 적당히 나이든 쪽이 취향이라서.”

혈강시로서 내가 그 나이대의 여인들을 많이 범하고 다녀서 그랬을까. 아니면 무공을 익힌 덕분에 적당한 나이를 먹고도 젊음을 유지하는 모습을 많이 봐와서 그런 걸까.

“젊음을 성형하는 것은 보기에는 아름다울지 몰라도, 내 취향은 아니야.”

혈규령의 인위적인 고정된 젊음보다, 굳이 따지자면 마검비처럼 자연스러운 중년미부의 모습이 더 내 취향을 자극하는 맛이 있었다.

“흥, 당신 취향에 맞추려고 월녀가 된 게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광마가 그런 쪽으로 취향을 가진 것도 아닐텐데?”

“윽....”

혈규령은 더 이상 반박을 하지 못했다. 결국 젊어보이고 예뻐보이고 싶어하는 건 만국 여성들의 공통적인 사항일 것이다.

“시아.”

나는 이시아가 괜히 혹하지 않도록 그녀를 설득했다.

“지금 육체를 고정하면 가슴이 성장하지 않을 지도 모르오.”

“그럼 안 할래.”

이시아의 확고한 대답에 혈규령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이번 만이오. 그런 장난은.”

“...아쉽네요. 당신과 소천마, 둘 다 혈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혈교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는 있어도, 긴밀한 관계를 넘어 혈교의 사람이 될 수는 없지. 나나 시아나 혈마가 아닌 천마, 색마니까.”

혈규령은 두 손을 들었다. 그녀는 우리를 영입하려는 시도를 순순히 포기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마지막 질문. 당신은 남화노검의 뭐죠?”

“저요?”

혈규령은 차를 홀짝이며 웃었다.

“혈교 들어오면 알려드리죠.”

“.......”

아마, 저 특유의 사람을 열받게 하는 화법의 범인은 광마가 분명하리라.

* * *

쏴아아.

열두 척의 배가 연결된 선단에서 작은 쪽배가 북쪽으로 떠났다. 사람 둘을 태운 배는 전운을 피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귀갓길에 올랐고, 혈규령은 그들을 배웅하며 기를 가다듬었다.

쏴아아.

하얀 안개를 걷어내며 또다른 선단이 나타났다. 혈해남파의 세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십 척의 배들은 하나같이 분위기가 흉흉했다.

“......왔군.”

혈규령은 정중앙의 배에 있는 백발의 노인을 보며 이죽거렸다. 남화노검 또한 혈규령을 보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너희들이 오늘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건 그쪽이고.”

혈규령은 족자 하나를 꺼내 당당히 펼쳤다. 제법 거리가 멀었지만, 배 위에 오른 무인들은 족자 안의 내용을 충분히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해남성주---- 대독-----!!”

사자후로 내지르는 혈규령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철철 넘쳤다.

“금사도를 점령한 역적들은 들으라----!!”

“뭐, 뭐라고?!”

남화노검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해남금사파의 무사들 또한 좀처럼 당황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사기치지마라!!”

“사기라니, 여기 해남성주의 관인이 보이지 않는가!!”

사기일 리가 없었다. 천하의 누가 성주의 인장을 위조하거나 그걸로 허세를 부린단 말인가.

“이 놈들...비겁하게 성주를 매수했구나!!”

“훗, 매수일 리가 있나.”

혈규령은 해남파의 잔당을 비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남성주께서 직접 관인을 찍어서 전령에게 보내주신 것을.”

족자에 붙은 역적 토벌의 교서는, 왠지 모르게 꼬깃꼬깃 접힌 흔적이 역력했다.

* * *

"...흐음."

광마는 낚싯대를 걷었다. 아무리 더 미끼를 던져봐야 물고기는 낚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 참."

"금 형,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오?"

"아, 성주님."

광마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혈교의 교주라거나 광마라거나 하는 무림에서의 별호와 달리, 그의 몸에는 본능과도 같은 예의가 묻어있었다.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내 금 형을 만나러 오는데 꼭 일이 있어서 와야하는가? 껄껄."

"...실례했습니다."

광마는 빈 잔을 들어올리며 껄껄 웃는 해남성주를 위아래로 훑었다. 중원의 관복을 벗어던지고 안남 전통 복장을 차려입은 그는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다.

"복귀는 내일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벽라도에서 소식이 들어왔다네. 해남파의 무사들이 벽라도의 해적들을 모조리 추포했다더군."

"......."

광마의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해남성주는 껄껄 웃으며 광마의 어깨를 두드렸다.

"휴가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하더니, 금 형의 말이 틀렸군. 휴가가 끝나기도 전에 일이 터지지 않았는가?"

"송구합니다."

"송구할 게 무엇있나? 안남도 즐길 거 다 즐겼네.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지."

해남성주는 안남 전통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뒤에 시립한 호위무사들로부터 관복을 받아 챙겨입었다.

"곧 배가 올 걸세. 금 형도 해남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게."

"알겠습니다, 성주님."

"...거 참. 일에 복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기 그렇지만, 언제까지 나를 그리 딱딱하게 대할 건가?"

"저는 그저 평범한 무사일 뿐입니다. 관에서 일하시는 분께 어찌 사사로이 대할 수 있겠습니까?"

"해남제일인, 아니 천하제일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

광마는 슬그머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앞으로는 아닐 겁니다."

"...응?"

"천하는 넓고, 저와 비슷한 자들이 앞으로 더 나타날 겁니다. 그들이 있는 한 천하제일이라는 자리를 두고 다툼을 벌이게 되겠지요."

광마는 호위무사들로부터 무복을 건네받았다. 자신의 외투 위에 무복을 차려입은 그는 날카로운 기감을 드러내며 손을 옆으로 뻗었다.

"저는 천하제일 같은 거, 관심없습니다."

"...성주님, 저기!!"

호위무사들이 급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들을 데리러 온 군함을 향해, 남쪽에서 십수 척 규모의 배가 달려오고 있었다.

"저 놈들이!"

안남보다도 더 남쪽에서 올라온 것으로 보이는 해적들은 중원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금 형!"

"성주님, 저는."

광마는, 돌멩이 하나를 허공섭물로 집어들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냥, 무공 좀 쓸 줄 아는 이방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쪽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어깨 너머로 넘긴 돌멩이를 앞으로 세게 집어던졌다. 몸이 앞으로 쏠릴 정도로 강하게 던진 돌멩이는 정확히 해적선을 향해 쇄도했고-

콰------앙!!

바다를 둘로 가르며, 해적선 전체를 덮치는 파랑을 일으켰다. 돌멩이에 직격당한 해적선은 반파되어, 해적들은 바다로 굴러떨어져야만 했다.

"...무공 좀 쓰는 이방인?"

"예. 남들보다 조금 더 잘 쓰는 정도."

해남성주는 떨떠름하게 웃었고, 광마는 그저 옅게 웃기만 했다.

"저는 그냥 중원의 흔한 금가놈일 뿐입니다."

돌멩이는, 백사장에 차고 넘쳤다. 광마는 다른 돌멩이를 집어들고 바다를 향해 다시금 겨눴다.

"가시지요. 역적들을 토벌하러."

* * *

남해를 거쳐, 우리는 북쪽으로 직진하여 호북으로 돌아오는 귀환길에 올랐다.

"비천, 그래서 혈규령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

"해남파 장문인이자 혈교주의 여자이자 대법을 받은 월녀 후보."

"비천."

이시아는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한 번만 더 장난치면 재미없을 줄 알아."

"장난이라기보다는 그게 사실이오. 반전 같은 건 없소. 단지...그래. 내가 보기에는 마검비와 비슷한 연배 같더군."

수많은 여인을 취해봤기에 나는 겉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혈교 여인 특유의 육향은 원래 나이에 따라 저마다 달랐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화노검에게는 사생아가 있다고 하더군. 그런 이야기오."

"...뭔가 복잡해보이네."

"그렇소. 나머지는 혈교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된다.

"우리는 더 많은 여자를 취하고, 더 많은 내공을 모으고, 더 높이 성장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오. 흐흐."

"대공자의 음모를 저지하고 이시아를 천마로 등극시킨다는 건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야?"

"천마인 아내를 두기 위한 길이지. 천하제일검도, 검후도 마찬가지고."

"나 참...."

어느새 익숙한 길이 나타나자, 이시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래서 이번 색마행의 성과로 얻은 건 많은데, 마음에 드는 부인 후보는 있었어?"

"...허?"

순간, 나는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시아는 벌써 저만치 앞으로 달려가, 나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역시 나만한 여자 없지?"

"......설마?"

사공희는 선주희라는 여자를 엮어왔다. 독고연은 황보혜지라는 여인을 엮어왔다.

...하지만 이시아는 내가 마검비와 뢰마, 그리고 기타 수많은 여자들을 취하게 했을 지언정, 내가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거나 할 일은 없었다.

"...역시 이시아."

계략을 펼침에 있어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교활함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시아의 앙큼한 계략에 순순히 넘어가주기로 했다.

"그래도 어차피 내가 아내로 들이겠다면 받아줄 것 아니오?"

"......마검비 즈음 되면?"

이시아는 한참을 고민하다 답을 내렸다. 나는 제자리에 선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앞을 가리켰다.

"갑시다. 저기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군."

미혼표식구궁진의 경계를 가리키는 천가장의 대문에는 사공희와 독고연,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상공."

"사천에서의 일은 들었답니다, 가가."

"그래. 다녀왔다."

나는 두 여인을 함께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맡는 둘의 살내음에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역시 집이 최고지."

"네. ...아 참, 상공. 무당파에 손님이 들었어요."

"손님?"

손님이야 많이 찾아오는 거 아닌가? 나는 괜히 궁금했지만, 듣지 말았어야 했다.

"네. ...하북팽가에서 호북에 잠시 내려왔어요."

"......."

나는 한참을 생각에 잠겨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답을 내렸다.

"......혹시 예쁜 여자들도 왔나?"

"네. 팽가의 가주님과 더불어 따님도 같이 오셨대요."

나는 안도했다.

"그런데 가가...."

사공희와 독고연은 걱정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혹시 유아 데리고 있는 유부녀도 건드리실 건가요?"

"미망인에 엄청 예쁘시던데...."

"어머? 야, 너 왜 내 엉덩이 잡은 손에 힘이 빠져?"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작품후기]

사공희 턴

독고연 턴

이시아 턴

이제 팽유월 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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