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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파 습격 사건
우리가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동안, 벽라도는 뜨겁게 불타올랐다. 약 2천여명 가량의 사람을 태운 십 수 척의 배는 본섬을 향했고, 우리는 미리 준비된 쪽배를 통해 혈규령의 배에 올랐다.
"섬을 이렇게 불태워버려도 되는 것이오?"
"걱정마세요, 사람은 태우지 않았습니다."
동문서답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안심이 드는 말이었다. 혈규령은 불타오르는 벽라도를 안주삼아 술잔을 들어올렸다.
"벽라도의 노예들은 해남성주도 예전부터 골머리를 썩히던 자들이죠. 본인이 원해서 해적이 된 이들은 거의 없을테니, 이들은 해남성과의 연계를 통해 새 사람으로 거듭날 겁니다."
"벽라도에 있던 원주민들은?"
"그들 또한 새로운 거주지를 마련하여 살아야지요. 이미 벽라도에는 해남벽라파가 설치해둔 온갖 기관진식과 그들이 뿌려둔 피로 인해 사람이 살 곳이 아닙니다. 다시 사람이 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불꽃으로 정화하여 수십 년이 지나면 다시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예."
혈규령은 부정하지 않았다.
"평생을 해적들의 노예로 살다 죽는 것보다 목숨을 이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노예들에 대해서는 그대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그럼 무사들은 어떻게 할 것이오?"
"...."
혈규령은 손날을 세워 목을 그었다.
"저들은 해적입니다.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자들이죠. 당연히 그에 대한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이겠다?"
"예. 저들의 목을 효시하여-"
"거짓말."
이시아는 혈규령의 말을 잘랐다.
"애초에 죽일 거라면 그냥 섬에 가둬놓고 나오지 못하게 했을 거예요. 굳이 저들을 일일이 구분하여 본섬에 데려올 이유도 없지요."
"...후후, 역시 소천마 님은 방심하지 못하겠군요. 예, 맞습니다. 죽인 다는 건 농담입니다. 마음같아선 죽여버리고 싶지만."
혈규령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목소리로 복주머니 하나를 꺼내들었다. 혈교주의 편지가 담겨있는 물건으로, 혈규령은 '벽라'라는 문구가 적힌 복주머니의 편지를 꺼냈다.
"......시한부 관노(官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집행 유예."
나는 혈교주가 하고자 하는 말을 바로 이해했다.
"해적들을 관노로 일하게 하면서 그들의 형을 유예해준다는 말인 듯 하오. 그 사이에 다른 죄를 저질러 잡히면 원래의 형을 가중처벌하고, 유예기간까지는 형을 미룬다는 말이지."
"...반성할 시간을 준다고 반성하겠어요? 해적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보는 거지. 설령 다시 문제를 일으킨다고 하면...그 때는 효시는 커녕 오체분시를 해도 좋을 명분이 서니까."
"예. 그게 해남성주와의 거래였습니다."
혈해남파는 해남벽라파를 제거하고 와해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위신을 세운다.
해남성은 해적 무리를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코를 파듯 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무림인 출신의 관노를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다.
"내공은 이류 이하로 금제를 받을 것입니다. 일류는 위험하고, 삼류는 너무 약하니까요."
물론 당연하게도 관노들은 무공이 금제당한 상태로 혈해남파 무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일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해적질을 하며 관무를 넘나들며 피해를 끼친 걸 생각하면 딱히 불쌍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관노들은 무엇을 하는데요?"
"그건...."
"장문인, 뒷 장이 더 있소."
복주머니 안에 또다른 편지가 함께 겹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듯, 일필휘지로 쓴 문구가 적혀있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무림인을 이용해서 농사를 지으려고 하다니, 광마도 참 비상한 사람이야."
그렇게, 벽라도의 해적들은 모두 해남성의 관노가, 농노(農奴)가 되었다.
10년.
농노들의 집행유예는 10년이었다.
* * *
"...혈교의 사상은 잘 모르겠어."
이시아는 내 위에 몸을 겹치며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굳이 10년이나 더 지켜볼 필요가 있을까? 그냥 죄다 달아버리면 되는 거 아닐까?"
"그들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이지.”
광마의 사상인지, 아니면 혈교가 원래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혈교주는 사람을 믿었다.
-인간은 본디 악한 존재야.
혈교주는 말했다.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악함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무리 악한 자라도 곁에서 잘 보살피고 돌보면 언젠가는 선함을 깨닫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자라면서 선을 깨달아가는 존재라고 보았다. 사람은 자라는 환경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악행을 저지른 이들에게 10년이라는 시간을 주었다. 그들이 자신의 악행을 반성하고 선을 자각할 시간을 주었다.
여러모로, 이시아의 방식과는 맞지 않는 방식이다.
“...난 잘 모르겠는데. 해적들이잖아. 그냥 깔끔하게 처리해도 누가 뭐라고 할 일도 아닌데.”
“마교와 혈교의 방식은 다르지.”
오직 힘만을 숭상하며, 힘있는 자의 선택이 곧 법인 마교의 관점에서 시작하면 혈교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다.
“이시아 그대는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나는 그대가 어떤 길을 걷더라도 지지할 것이오.”
“흥, 바로 옆에서 자기 마음대로 나를 바꿔가면서 무슨 말이람.”
이시아는 툴툴거리며 내 품에 기대었다.
“은근히 나를 자기 입맛대로 행동하도록 만들면서 그런 말이 나와?”
“흐흐, 크게 바꾸지는 않았소.”
십만 마인의 여자를 한 사람의 여인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이시아라는 여인의 근본은 변하지 않을 지 몰라도, 내 곁에 있는 이시아는 미래천마와는 다른 존재다.
‘하지만 변하기는 했지.’
그녀의 곁에 비천삼마가 아닌, 비천색마가 존재하는 것으로 그녀는 변할 수 있었다. 나 또한 이들을 곁에 둠으로써 변할 수 있었다.
이게 좋은 변화인가, 나쁜 변화인가.
그건 미래가 말해줄 것이다.
내가 이시아를 곁에 둠으로써 정마대전이 더 크게 발발하고 난리가 나면 내 실패고, 미래와는 다른 건전하고 행복하고 화목한 결과가 일어나면 내 성공이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일은 그저 기억 속에 묻어두시오. 이시아는 이시아답게. 소천마는 소천마답게.”
“...그래. 가로막는 거 다 정면에서 박살내고 이기는 게 내가 갈 길이지.”
이시아는 내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래도 끝까지 같이 가줄 거지?”
“물론.”
이시아의 패도는, 이제 나의 패도가 되었다.
“부부는 함께 평생을 걷는 동반자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부끄러운데.”
“뭘 부끄러워하시오. 남들 앞에서는 남편이라고 크게 소리쳤으면서.”
“그건 별호를 부르지 않으려고 나름 애를 쓴 거야.”
나는 볼을 부풀린 이시아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부인.”
“왜.”
삐졌어도 부인이라는 말에 반응은 한다. 나는 까칠한 고양이처럼 행동하는 이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절대 우리 때문에 저들이 관노가 된 게 아니오.”
“...알고 있어. 단지, 조금 마음이 싱숭생숭 할 뿐이야.”
이시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조했다.
“아직 내가 전부 보지 못한 중원은 넓구나...하는 생각?”
“그래서 이번에 이렇게 나온 거 아니겠소?”
나는 넓은 하늘을 가리켰다.
“다음에는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오? 내 어디든 데려다주겠소.”
“당신이 가장 가기 꺼려하는 곳?”
“.......”
이시아는 정권을 직격으로 찔러넣었다.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공희나 우물쭈물하면서 은근하게 말하도록 유도하려는 독고연과 달리, 이시아는 거침이 없었다.
“현천 백가의 죽은 후계자 님의 과거가 얼마나 복잡한 지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역시 제일 궁금한 건 거기지.”
이시아는 미안한 얼굴로 내 손을 붙잡았다.
“그냥 해본 소리야. 마음에 담아두지마.”
“어떻게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겠소? ...흐흐.”
바다가 사람을 이리 감성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광마와의 만남으로 내게 심정적인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까.
“천산에 가려면 곤륜산맥을 넘어야 하지.”
나는 멀리 서쪽을 바라보며 이시아의 말에 답했다.
“장인어른을 뵈러 갔다가 돌아오는 날, 잠깐 곤륜산맥을 들려보도록 합시다.”
곤륜.
내게 있어서 여러 감정을 숨길 수 없는 그곳.
“...장문인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더군.”
곤륜산 안에서만큼은 천하제일검인 그녀가 사는 그곳에서, 나는 혈강시로서 숨을 거두었다.
* * *
“흥, 흥흥, 흥~”
적발의 여인, 금소예는 콧노래를 부르며 산길을 걸었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조용한 거리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의 손에는 꼬치 하나가 들려있었다.
“양꼬치엔~ ...뭐더라?”
금소예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양꼬치를 유심히 쳐다봤다. 야들야들한 살점이 잘 익은 꼬치는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에이, 몰라. 어울리는 술 찾아 마시다보면 뭔지 기억나겠지~”
금소예는 실실거리며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제법 산세가 험한 높은 곳까지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친 기색이 거의 없었다.
“흐흥, 뒤에 쫓아오는 놈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금소예는 춤을 추듯 땅을 밟았다. 참방거리는 물웅덩이를 피해, 가벼운 몸놀림으로 오솔길을 빠져나와 숲속을 향했다.
“...응?”
쏴아아.
하얀 안개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금소예는 양꼬치를 흔들며 안개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와….”
제법 긴 거리를 지나치자, 그곳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 산의 정상처럼 보이는 봉오리 위에는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지어진 누각이 하나 있었다.
“......멀리서 이곳까지 뭐하러 왔느냐.”
누각에 있던 하얀 도복의 여인은 반쯤 감긴 눈으로 금소예를 추궁했다. 금소예는 여인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으며 깜짝 놀랐다.
“와...진짜 예쁘시네요.”
“너는 귀를 먹었느냐? 나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아, 저 그냥 걷다보니까 여기 왔어요!”
금소예는 양꼬치를 흔들며 활짝 웃었다. 여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은 곤륜의 영역이다.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다.”
“어...표지판 같은 거 없었는데. 혹시 어디서부터 곤륜산이었죠? 제가 저를 쫓는 변태 때문에 요즘 통 잠을 못자서 정신이 없었어요.”
금소예는 하품을 하며 옅게 웃었다.
“죄송해요, 언니. 곤륜의 영역인 줄 몰랐어요.”
“......말로 알아들을 자가 아니군.”
여인은 금소예로부터 등을 돌렸다.
“더이상 천기를 망가뜨리지 말고 네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 돌아가라.”
“네?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데요? 모르니까 찾고 있는 거죠!”
한 마디 한 마디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금소예의 반박에 여인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귀찮게 하지 말고 이곳에서 썩 나가거라. 이곳은 너처럼 천기를 거스른 자가 올 곳이 아니다.”
“알려주지도 않고 나가래. 알려주면 나갈게요.”
“.......”
여인의 무표정에 서서히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금소예는 씩 웃으며 자리를 가볍게 달렸다.
“!!”
여인이 검에 손을 뻗기 무섭게, 금소예는 여인의 앞에 마주섰다. 여인의 검 위에 손을 살포시 얹으며, 한쪽 손을 여인의 허리에 휘감으며 여인을 올려다봤다.
“훗.”
“...뭐하자는 거지?”
“언니. 우리 이번에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금소예의 눈에는 뭔가 확신같은 것이 엿보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라. 너는-”
“곤륜을 떠나는 방법을 알고 싶지 않으세요?”
“.......”
여인의 표정이 미미하게 떨렸다. 금소예는 눈동자를 붉게 빛내며, 여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저랑 거래를 하시죠. 당신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에요. 어차피 저랑 나중에 동침할 사이가 될텐데!”
“그럴 일은 결코 없다.”
“후훗, 어차피 그건 저와 당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죠. 그건….”
금소예는 더욱 몸을 단단히 밀착했다.
“하늘의 뜻이니까요.”
“...지금 떨어지면 봐주겠다.”
“알려주면 떨어질게요.”
두 여인은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봤다.
“알고있으면서 못 가고 있으면, 그냥 저한테 알려주시라 이 말씀.”
“천지가 뒤틀리는 한이 있더라도 너 만큼은 알려줄 수 없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마지막 수단을 쓰는 수밖에.”
금소예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여인은 금소예의 기백에 긴장하며 검의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응애신공."
“뭣…?”
금소예는, 여인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알려줄 때까지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정녕 이 여자가 천하를 피로 물들일 여자란 말인가?”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작품후기]
(일러) 칠처 말고 첩라인(준히로인) 일러 주문하고 왔습니다. 기존 반실사와는 다른 2D구요, 괜찮으면 계속 뽑아보겠습니다.
사공희 팽유월 독고연 혈소예 이외에 원하시는 캐릭터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