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27화 (22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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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파 습격 사건

강호에는 녹림이 있다.

좋게 말해서 녹림이지, 그냥 도적이다. 지나가는 이들을 무기로 위협하여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때로는 생명까지 앗아가는 범죄자들이다.

그리고 이런 도적들은 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장강수로십이채라고 넓게 펼쳐져 있는 수적들도 있고, 지금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배 위에 올라탄 해적들도 있다.

“남해에는 해적들이 그리도 많다더니. 흐흐, 저들이 전부 다 해적이란 말이오? 해남파가 나설 게 아니라 해군이 필요하겠는데.”

“음...아닌 것 같은데? 도적 같지는 않아.”

이시아는 배 위의 사람들을 보자마자 해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뭔가 도적들 특유의 음흉함이 느껴지지 않아. 노략질을 하겠다는 그런...야생성? 그런 게 전혀 없어. 배들이 움직이는 게 하나같이 체계가 잡혀있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저들은 해적 따위가 아니오.”

우리는 혈규령을 향해 추궁의 시선을 보냈다. 배 위에 올라타 우리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해적들은 분명 우리를 습격하기 위해 온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금은보화를 훔치려는 기색은 없었다.

“설명이 필요하오. 저들이 왜 해적이오?”

“해적이 꼭 금은보화를 약탈해야만 해적이 아니지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저들은 우리의 ‘생명’을 앗아가려고 하는 암살자에 가까웠다. 단지 배를 타고 나타났을 뿐.

“저들은 해적이 맞습니다.”

혈규령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지 저희 목숨을 앗아갈 목적으로 해적이 된 자들입니다. 저들은 전 해남파의 잔존세력입니다.”

“그건 무슨 말이오?”

해남파의 잔존세력. 현 해남파의 장문인인 혈규령을 상대로 왜 해남파의 ‘잔존’세력이 선단을 이끌고 혈규령을 죽이러 온단 말인가.

“현 해남파의 장문인이 혈선녀이니, 그걸 통해서 유추해보십시오.”

혈규령은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건넸다. 광마가 내 피를 통해 나를 이해한 것과 달리, 혈규령은 혈규령 나름 우리를 시험할 계기가 필요했다.

“내분이네요.”

하지만 내가 굳이 답을 찾아낼 필요도 없이, 이시아는 바로 정답을 도출해냈다.

“현 해남파가 혈교에 투신했으니, 원래 기존에 백도를 추구하던 세력들이 현 해남파에 반발하여 탈주한 거네요. 그리고 장문인인 당신을 죽이려고 저렇게 오는 거고.”

“정답입니다. 제가 이끄는 혈교 해남파와 척을 지고 떠난 자들입니다.”

쏴아아-

배는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배의 선원들은 하나같이 거친 무복을 입은 채 우리를 향해 흉흉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저들은 저를, 그리고 저희를 죽이고 싶어하지요."

저들은 금방이라도 바다를 건너와 우리 배에 올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죽여버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안개 너머에서 느껴지는 찐득한 살기에 나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 해남파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백도의 무사들이 해적이 되어 이리 짙은 살기를 뿜는 것이오?”

“지난 10년간 해남파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무림맹을 정식으로 탈퇴하고 난 뒤, 내분이 엄청 많았죠. 해남파를 습격한 괴물로부터 해남파를 지켜줄 그 분을 따를지, 아니면 사파의 존재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로 구명지은을 무시하고 원래의 길을 갈지.”

“난감하군.”

10년 전의 사건이 무엇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건 해남파를 구원한 자가 광마라는데 있었다.

광마가 백도의 사람이었다면 해남파는 여전히 구파일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혈교라는 극강의 사파인이었기에, 해남파는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구명지은을 무시하고 백도의 길을 걸을 것이냐.

은혜를 갚기 위해 혈교에 투신할 것이냐.

백도 무림에 있어서는 큰 손실이나, 해남파의 대세는 혈교를 지지하는 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그래서 해남파는 무림맹에 다시 들어가지 않았고,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내분이 계속 이어진 채 10년이 흐른 셈이었다.

‘해남이면 관심 밖이기는 하지.’

중원 대륙에 붙어있기라도 했다면 누구 하나는 알고 소문을 퍼뜨렸겠지만, 섬이라는 곳은 의외로 상당히 폐쇄성이 강한 곳이다.

“사실상 9할이 빠져나갔습니다.”

철컥, 철컥.

"혈교에 들어가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이들의 수는 현저히 적었으며, 절대적인 수로 따지면 저희보다 10배는 더 많을 겁니다."

갑판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혈규령의 휘하 무사들이 갑판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전부 혈교 특유의 검은색 바탕에 적색의 선이 강조된 무복을 입은 채 해적들을 향해 살기를 가다듬고 있었다.

“저를 비롯한 해남파의 숱한 이들은 혈교에 직접 투신했지만, 기존의 장문인을 비롯한 자들은 모조리 주변 섬으로 떠났죠. 그래서 지금 해남에는 해남파의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문파가 셋이나 됩니다.”

“그건 그대를 포함한 것이오?”

“예. 해남도(海南島), 금사도(金沙島), 벽라도(碧螺島). 본 섬이자 기존 주류가 살고 있던 섬에 저희 혈교가 자리를 잡았고, 각기 두 섬에 해남파에서 도망친 이들이 숨어들었습니다.”

“이제야 저들의 정체를 알겠군.”

쏴아아.

파도를 헤치고 달려오는 선박들의 위에는 해남금사(海南金沙)라는 문구가 박혀있었다. 선박 위에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날카롭게 벼려놓은 칼과도 같았다.

“혈교에게서 해남파의 주류를 되찾기 위해 칼을 들었구만.”

낡고 망가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직검과도 같은 기세에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선두에 서서 우리를 노려보는 백발의 노인을 보고 나는 광마가 왜 나를 이곳으로 보냈는지 알게 되었다.

다른 이들보다 체구가 크고 명치까지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은 살얼음 같은 검기를 뿌리며 혈규령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자, 현경이군.”

“예. 전 해남파 장문인, <남화노검(南華老劍)>입니다.”

나는 그의 기를 멀리서 느꼈고, 혈규령은 그의 정체를 바로 밝혔다.

“남화노검...들은 적 있어요. 젊은 시절에는 구룡의 한 명으로 좌수룡(左手龍)으로 불렸고, 한 때 천하를 호령하던 좌수검의 달인이라고.”

“참으로 거창한 별호로군.”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다. 난화신검이라는 별호는 들어본 적이 있어도, 남화노선도 아니고 남화노검은 처음들어본다.

즉, 현대에 현경이라고 한들 내가 미래에 들어보지 못했다면 그는 혈겁난세 이전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혈겁난세에서 혈교가 중원 전체를 도모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 금사도와 벽라도의 해남파 잔당들은 진작에 소탕을 당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저 정도 무인이면 중원에 알려질 법도 한데, 왜 알려지지 않았지?”

"저들은 해남파를 혈교에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걸 몹시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해남파를 진정으로 되찾는 날, 대외적으로 해남파가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천하에 천명하겠죠."

"그러니까 일부러 해남의 소요를 10년간 숨겼다는 것인가?"

"그런 셈입니다. 전 장문인...남화노검도 원래는 화경 초입 정도의 고수였습니다. 하지만 금사도로 넘어간 이후, 교주님을 감히 도모하고자 무공을 갈고 닦았지요."

10년간 은둔한 것으로 알려진 자가 10년간의 노력 끝에 현경에 이르렀다. 자신이 강해진 걸 대외적으로 알리지도 않고 해적질이나 하고 있으니 부끄러움에 포기한 것이리라.

‘혈교주 이 자가?’

어차피 혈교가 나중에 다 알아서 정리하겠지만, 모처럼 나라는 좋은 칼이 생겼으니 그걸로 잔당을 처리하겠다는 건가?

“젠장, 외통수로군.”

“꼭 그대들에게 나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분의 지지를 얻는 것 만으로도 큰 이득이 되겠지만...그대들에게도 좋은 성장의 밑거름이 되겠지요.”

“지금 우리보고 당신들이 해야할 일을 대신 하라는 거예요?”

이시아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내비쳤다. 이건 소위 뭐라더라, 혈교주 식으로 표현하면 ‘짬을 때리다’라는 상황과 비슷했다.

막내나 제자에게 귀찮은 무언가를 시키는 행동에 우리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혈규령은 우리의 불만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이건 그대들에게도 좋은 성장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좋은 말로 포장하려는 거 아니오?”

“흠.... 역시 그 분이시군요.”

혈규령은 품에서 무언가 주머니를 꺼냈다. 각기 색이 다른 세 개의 복주머니 중 노란 복주머니를 꺼낸 그녀는 안에 들어있던 작은 종이를 꺼냈다.

“흠흠, 혈교주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와서 그런 종이로 말해봐야-”

“금사도와 벽라도에는 미녀가 많다. 해적들의 아내와 딸들이다. 남자가 바닷일을 나간 사이, 섬에는 여자들만 남아있다.”

“......오호.”

나와 이시아는 동시에 흥미가 돌았다.

“이렇게 말만 하면 알아들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더 설명이 필요한가요?”

“설명은 괜찮고, 부탁이 있소.”

나와 이시아는 입맛을 다셨다.

“금사도랑 벽라도, 둘 중 어디가 더 여자가 많습니까?”

“거기까지 우리 좀 데려다주시지요.”

채음보양의 성지.

두 섬은 바야흐로 내공의 노다지였다. 혈규령은 우리를 바라보며 그저 웃은 뒤, 앞에 넓게 펼쳐진 선단을 가리켰다.

“우선 저자들을 피해 본 섬으로 갈 것입니다. 지금부터 벽을 꽉 잡으세요.”

짝! 혈규령이 손뼉을 치기 무섭게, 배 옆면에서 뭔가가 떨어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이시아는 머리를 밖으로 내밀어 아래를 확인했다.

“...저건 설마?”

“혈비룡포(血飛龍砲). 그분께서 고안하신 해상전투의 새로운 전술입니다.”

철컥, 철컥.

아래에서 무거운 철덩어리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내공을 끌어올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나와 이시아는 혈규령의 허락하에 갑판 아래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기이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뚝, 뚝, 뚝.

해남파의 좌수검을 붙잡은 무인들은 자신의 검에 피를 뚝뚝 흘리며, 전방에 있는 검집과도 같은 물건을 향해 검을 찌르려고 기를 끌어올렸다.

“쇠뇌처럼 검집을 날리려고 하는 것인가? 왜?”

“...이럴 거면 화살을 날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이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하아압!”

검사들이 일제히 칼집처럼 생긴 곳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나는 검집 안에 실린 기운을 느끼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친?”

“저게 다 검기라고...?!”

무인들은 모두 절정 고수였다. 스무 명이 족히 넘는 무사들은 모두 피에 자신의 검기를 흘려내어, 검집 안으로 피를 찔러넣었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무림인 검사들을 궁병처럼 쓰는 자들이 혈교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지.”

혈교주는 말했다.

- 무림인은 절정 고수 쯤 되면 한 명 한 명이 전쟁에서 충차나 노포와도 전력을 발휘한단 말이야? 조금만 연구하고 개발하면, 아주 훌륭한 살상병기가 되지.

“.......”

검집 끝에 맺혀 쇠뇌처럼 날아가는 검기는 어지간한 화살이나 쇠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살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 * *

“검막을 펼쳐라!!”

남화노검의 노성과 함께 뱃머리 근처에 있던 무인들이 검을 휘두르며 검기를 요격했다.

"일류 이하는 모두 아래에 가서 배의 구멍을 막아라! 절정 이상은 모두 날아오는 검기를 요격해!"

남화노검의 외침에 무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절정 고수에게는 절정 고수로 대응을 해야하는 법이며, 유감스럽게도 일류들은 적의 기이한 사술에 대응할 수 없었다.

"큭...!"

사술은 아니다. 검기를 쏘아내보내는 거니까.

다만 해상에서, 바다에서 검기를 쏘아 날려보내는 방식은 상식을 뛰어넘는 기이함이 있었다.

투두두두두!!

검기가 교차하듯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검집의 끝부분을 잘라 비워두니, 검기를 타고 흐른 피가 화살처럼 날아왔다.

피가 곧 화살이며, 검기가 곧 화살촉이었다.

"아아악!"

무사 하나가 검막을 펼치다 어깨에 피의 검기가 박혔다. 그의 어깨에 피가 터져나왔고, 그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지혈을!"

"허, 허억, 허억...!"

주변에 있던 무사들은 황급히 그를 치료했다. 남화노검은 빠르게 빈 자리를 채우며 검을 휘둘렀다.

"어서 배를 붙여! 거리만 좁히면 된다!"

남화노검의 눈에는 살기가 번들거렸다.

"거리만 좁히면, 얼마든지 배 위로 뛰어오를 수 있다!"

해남파의 무사들을 태운 배는 서서히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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