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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의 노래
팔초어 튀김을 비롯하여 혈교주의 온갖 찬란한 동이식 음식을 대접받은 우리는 이제 안남을 떠나려고 했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 우리는 천가장의 대표로서 혈교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탁자 하나를 두고 마주 앉았다.
"혈교는 비천색마와 소천마의 뜻을 존중하겠소. 이 혈교주는 혈겁난세까지 중원 밖에서 자연을 만끽하리다."
최소한 10년.
혈겁이 일어나기 전까지 혈교주는 특별히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북팽가의 일은 내 충분히 이해했으니 넘어가지. 하지만 그에 준하는 적합한 이유가 없다면, 혈교의 수하들은 그대와 대적할 것이오."
"명심하리다."
혈교주는 선을 정했다.
하북팽가의 경우처럼, '내 아내와 아이'가 있는 곳에 대해서는 혈교에 대해 간섭해도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을가장의 경우처럼 내가 일방적으로 혈교에게 칼을 들이민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혈교도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을가장의 대모를 범했으니 을가장의 후계자가 나를 추살하려고 벼르고 있는 것처럼, 혈교주는 내 편의를 봐주면서도 내 행동에 대한 확실한 복수를 언급했다.
"타인을 검으로 찌를 자는?"
"자신도 칼에 찔릴 각오를 해야한다."
혈교주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칼이 아니라 다른 거지만...어차피 이해하지도 못할테니 넘어가도록 하세. 그러니 그대도 좀 자중하시게."
"명심하겠소."
천가장이 혈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으면, 혈교 또한 천가장을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
천가장은 천가장에 피해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혈교의 암약을 직접 방해하지 않고, 혈교 또한 천가장의 영역에 대해서는 피의 제물을 모으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 기묘한 불가침조약은 내가 혈교주에게 나의 피를 제공하는 것으로 맺어졌다.
나는 다가올 미래를 팔았고, 혈교와의 동맹을 샀다.
"서로 싸울 필요는 없지만, 먼저 얼굴 맞았는데 가만히 있는 등신이 될 수는 없지. 앞으로 잘 부탁하오, 비천색마."
"물론이오, 혈교주."
혈교주와 물리적으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는 때가 있다면, 그가 정해진 미래대로 진정한 광마(狂魔)가 되어 미쳐 날뛰게 될 때가 되리라.
"부디 그런 미래는 없기를 바라오."
"주화입마가 어디 마음대로 되는 건가? 흐흐."
혈교주는 자신의 몰락한 미래를 나를 통해 확인했다.
혈겁난세에 편승하여 월녀를 지상에 강림시키려는 그의 의지가 계속 이어져 폭주한다면, 그의 딸인 혈소예가 혈교의 모든 것을 이어받는 미래로 나아가게 되리라.
"걱정마시게. 나는 알고도 당하는 멍청이가 아니야."
혈교주의 폭주와 적극적인 개입을 막기 위한 방책이 바로 나의 기억을 넘겨주는 것이었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져 폭주하게 될 지.
아니면 적절히 현실과 타협하여 자신의 꿈을 포기하게 될 지.
어느쪽이든 설령 혈교주가 폭주하더라도, 우리는 천가장이 혈교를 막아낼 만큼 성장할 시간을 벌었다.
"언젠가 내가 미쳐 날뛰거든, 그 때는 그대가 꼭 죽여주시게."
"얼마든지 믿고 맏기시오. 죽이는 것 만큼 내가 또 잘하는 게 없지."
나와 혈교주의 대화에 이시아와 혈규령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 너희들끼리만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에게도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라.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우리를 쏘아봤지만, 나도 혈교주도 모든 것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혈교의 문제는 정리가 되었고...그럼 이제 광마에 대한 문제를 나누어보실까."
나와 혈교주 사이의 문제는 끝났다. 이제는 광마와 이시아 사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차례다.
"소공녀. 그대는 십마의 충성을 필요로 하지만, 광마는 애초에 충성으로 마교 십마에 들어간 자가 아니오."
광마는 대공자에게도 소공녀에게도 충성할 수 없다. 애초에 천마에게도 충성하는 자가 아니니까.
"예,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과의 일이 바깥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니 광마의 힘을 빌릴 생각은 하지 마시오. 혈교는 마교의 하위집단이 아니니까."
"하지만 광마의 지지는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시아의 말에 광마는 눈을 빛내며 흥미를 가졌다.
"호오?"
"직접 천산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대공자 주지를 지지하지 않는다. 모든 결과가 정해지고 제가 진정한 '소천마'로서 정해지는 날, 그 때 편지 한 장만 적어서 보내주시면 됩니다."
"...으허허허!!"
광마는 배를 잡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광마의 이름값을 얻겠다?"
"예. 대공자는 당신의 이름을 사칭하여 '지린광마가 자신을 지지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저는 정당하게 당신의 지지를 받고자 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천마가 진짜 광마는 누구인지 알 수 있게끔 하는 표식이 필요하겠군."
광마는 목패를 하나 꺼내들었다. 그리고 손에서 뿜어낸 핏빛 강기를 이용해, 무언가를 새겨넣었다.
金雨盛.
"금우성...?"
"암어일세. 소공녀, 그대가 소천마가 되는 날. 광마의 지지를 얻고자 한다면 비천색마에게 이 패를 천마의 앞에서 읽어보라고 하시오. 그러면 천마는 광마가 소공녀를 지지한다고 금방 알아들을테니."
"광마의 지지를 색마에게 맡기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시아는 광마의 함정을 바로 이해했다. 광마의 지지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끝까지 그녀의 곁에 남아있어야 했다.
"알겠습니다. 금빛의 비를 뿌려 천하를 아름답게 만든다.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겠군요. 초마교인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 음, 뭐. 그렇지?"
이시아는 틀렸다. 나는 정답을 알고 있었지만, 내 여자의 자존심을 위해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하지만 말로서 증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니 이 패를 맡기겠소. 이곳에는 나의 내공이 깃들어있으니, 이중 삼중으로 광마임을 인증할 방법이 될 테지."
광마의 말대로 목패 안의 글씨는 인주를 칠해놓은 것처럼 붉었다. 이시아는 느끼지 못하는 듯 하지만, 나는 목패 안에 진득하게 남아있는 혈기(血氣)에 광마의 지독함을 알 수 있었다.
광마 본인의 혈향은 곧 천리추종향이 될 것이다. 나는 이걸 당장 받기에는 다소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건 규령, 그대가 맡아주시오."
"예, 교주."
광마를 직접 모시는 혈선녀, 혈규령은 두 손으로 공손히 목패를 받았다. 혈규령은 목패에 새겨진 문구를 착잡하게 보며, 이시아와 나를 향해 맹렬한 질투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규령."
"...죄송합니다, 교주."
혈교주는 단 한 마디로 혈규령의 기세를 억눌렀다. 이시아도 긴장하고, 나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내가 미쳤지.'
아무리 광마가 나를 상대로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지만, 화경과 현경 고수를 상대로 무턱대고 찾아온 건 확실히 무모했다.
'진천뢰신공 아니었으면 만날 생각도 못했을 거다.'
뢰마의 내공을 채음한 덕분에 설령 싸움이 벌어져도 이시아를 데리고 무사히 도망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올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걸 그냥 줄 수는 없지."
"...예, 그냥 순순히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규령, 마침 잘 됐군. 그대도 이들의 힘을 보기에 딱 좋은 기회인데다가, 골칫거리를 치우기에도 좋지 않나?"
"......예, 교주. 그럼 지금부터 제가 인도하도록 하겠습니다."
혈규령은 반듯한 자세로 포권을 취했다.
"혈교주님을 모시는 혈선녀 중 한 명, 혈규령입니다. 속세에서는 해남파의 장문인을 맡고 있지요."
그렇다.
혈교는 중원에서 벗어난 남쪽 지방을 근거지로 삼고 있고, 공동파에 밀린 전 구파일방의 하나인 해남파를 점거하여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다.
뱃길이 아니면 중원인들의 눈이 닿지 않는 섬에.
* * *
비천색마와 소공녀는 혈선녀와 함께 안남을 떠났다.
홀로 남은 광마는 다시 백사장으로 나와 평상에 술병과 빈 술 잔 두 개를 꺼내놓았다.
"교주. 죽일까요?"
"닥쳐라."
급작스러운 말과 급작스러운 답변. 광마의 뒤에 나타난 흑의인은 광마의 명령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불안함은 충분히 알고 있다. 혈신혜와 혈소미가 둘 다 저 색마에게 범해졌으니, 저자가 우리의 대계를 망가뜨리는 게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있겠지."
"......."
흑의인은 아무 말없이 광마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걱정마라. 나는 놈의 피를 통해 그의 성정을 살폈다. 그는 목숨을 걸고 내 앞에 나왔다. 내가 그를 살려주기로 하였는데, 네가 감히 죽이냐 마느냐 떠드느냐?"
"죄송합니다, 교주."
"대가리 박아."
"예!"
흑의인은 백사장에 머리를 박았다. 두 발과 머리만 땅에 디디며 팔 자(八)를 몸으로 그렸고, 손을 허리 뒤에 뒷짐졌다.
"혈영대주. 잘 들어라. 우리는 마교와 척을 질 이유가 없다. 그저 여인네들의 피를 모으면 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그건 중요치 않다."
쪼르르.
광마는 두 개의 술잔에 술을 각각 채웠다.
"처녀든 아니든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피를 모으는 것이다. 비천색마는 결과적으로 우리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말씀은...?"
"안 알려 주지. 흐흐. ...오, 그래. 네가 할 일이 생겼다. 차렷."
흑의인은 반듯한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머리에 묻은 모래를 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광마의 지시를 기다렸다.
"소예의 식도락 여행에 누가 붙어있지?"
"월영문주가 붙었습니다."
"그래? 그럼 너도 같이 가서 소예를 지켜라."
"......."
흑의인의 눈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저보고...월영문과 함께 하시라는 말씀이십니까?"
"사영문(死影門)과 월영문의 관계는 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임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화목해지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구나. 월영문주에게도 일러두거라. 내가 두 문주를 동시에 붙이는 이유는...그만큼 소예에게 방해가 되는 자들을 모두 쳐내라는 말이다."
광마의 눈에 살기가 비쳤다. 흑의인, 사영문주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존명."
"그리고 소예한테 전해라. 음...."
광마는 복잡한 얼굴로 제법 오래 고민을 하다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아빠가 네 취향에 딱 맞는 남자 하나 찾아놨으니까, 혹시 생각 있으면 만나 볼 생각 있냐고."
"교주님? 진심이십니까? 그 자를 소예 아가씨의 부군으로 삼을 생각이십니까?"
"안 될 것도 없지. 그리고...."
광마는 피식 웃었다.
"이미 소예가 자기 평생 반려로 정할 남자일세. 벌써 혼에다가 자기 것이라고 침 잔뜩 발라놨는데, 내가 설마 모르겠는가?"
"......예?"
"식도락 여행은 개뿔. 에휴, 이래서 딸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 없다고 하더니…."
사영문주는 광마의 기이한 말을 이해하느라 몇 번이고 곱씹어야만 했다.
* * *
"해남파 장문인이 설마 혈교의 일원일 줄이야."
"몰랐어?"
"음. 나라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니니."
내가 알고 있는 혈선녀는 내가 혈강시가 되고 난 뒤, 혈소예가 본격적으로 혈교주로서 활동하던 때에 만난 이들이 전부였다.
내가 전대 십마들을 모두 알지는 못하는 것처럼, 나는 현 시점의 혈교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다.
따라서 구파일방의 하나였던 해남파가 혈교와 붙었다는 건 나름 큰 충격이었다.
"시아, 혹시 해남파가 왜 구파일방에서 나온 지 알고 있소?"
"10년 전 즈음에 해남파에 큰 피해가 있었다고 했어. 그리고 맹에서는 해남파를 돕지 않았지. 그것 때문에 분개해서 맹을 탈퇴했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저희를 도와주신 분이 바로 교주님이시죠."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혈규령은 고개를 치켜올리며 우쭐거렸다. 우리에게 질투만 하던 그녀는 혈교주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마자 바로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부르면 되겠소? 장문인? 혈선녀?"
"장문인이라고 부르세요."
"알겠소. 그래서 혈교주께서 해남파의 큰 피해를 수습하셨군?"
"그래요! 그 분께서는 해남파를 습격한 악적들의 틈에 파고들어 피바다를 일으킨...흠흠."
혈규령은 헛기침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나는 새삼 혈교주가 왜 혈규령을 아끼는 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혈교주를 사랑하오?"
"네."
다소 무례할 수 있는 질문에도, 혈규령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제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내어드릴 수 있답니다."
"설령 그대의 육신에 월녀가 깃든다고 하더라도?"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혈규령의 각오는 보통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가 월녀에게 덧씌워지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혈규령은 혈선녀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다.
광기마저 느껴지는 뒤틀린 사랑에 우리는 다소 질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광마의 지지를 받기 위해 혈교주의 시련을 통과해야했고, 시련의 감시자가 바로 혈규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주께서 해남파를 지켜주셨는데, 그 때 미처 밟아두지 못하고 도망간 놈들이 있어요."
"혹시 저들이오?"
나는 안개 너머에서 다가오는 배를 가리켰다. 혈규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왼손에 움켜쥐었다.
"예. 남해의 해적들이죠."
"...해적? 해군이 아니고?"
구구구.
안개 속에 가려진 검은 배들은 족히 십수 척이 넘어보였다.
"조심하세요. 저기 해적선에 타있는 자들, 전부 무림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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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우성! 금우성! 금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