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25화 (225/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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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의 노래

백사장에서 돌아온 우리는 중원과는 다른 다소 특이한 양식의 건물에서 혈교주의 초대를 받았다. 혈교 특유의 검은 제복을 입은 그는 이시아에게 포권을 취했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드리지. 천마신교의 천마로부터 광마의 칭호를 받은 자요. ‘혈교’를 이끌고 있지.”

광마이자, 혈교주.

어울릴 수 없는 두 집단의 존재를 어떻게 맡고 있는지 이시아는 몹시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나도 궁금하긴 해.’

나는 그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개인적으로 기대가 되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젊은 시절 중원 무림을 돌아다니며 여행한 적이 있었소. 그때는 참으로 혈기왕성했지.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오....”

이시아는 조금 질린 눈으로 나를 향해 구원의 시선을 보냈다.

"...나 때는 말이야...."

‘비천, 좀 어떻게 해봐.’

나로서는 그의 과거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이시아가 질려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언검의 틈을 노렸다.

"...그래서 그 때, 그 놈을 만나서-"

“천마를 만나서 광마의 칭호를 받은 것이로구려.”

“그렇지."

그는 나를 바라보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시아의 얼굴을 보고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혈마(血魔)라는 칭호가 더 부르기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 놈은 나보고 광마라고 하더군. 하는 말 하나하나가 중원 무림은 받아들일 수 없는 미친 개소리라면서 말이야.”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아버님께서 그러셨습니까?”

“음....”

광마는 손으로 턱을 쓸었다. 가지런하게 정리한 턱수염이 내심 부러웠다.

“착한 무림인은 죽은 무림인이다.”

“......예?”

“강호를 돌아다니며 든 생각이오, 소공녀. 무림의 존재들은 중원 땅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깡패집단이지. 백도도 마교도 마찬가지요. 국치에 전혀 의미가 없는, 오히려 행정에 방해가 되는 조폭 집단이지.”

적나라하고 냉소적인 발언에 이시아는 사색이 되었다. 광마의 말은 마교 뿐만 아니라, 백도 무림을 아울러 중원 무림 전체를 싸잡아 비하하는 말이었다.

“툭하면 서로 시비가 붙어 칼부림을 일으키는 무리들을 누가 좋아하겠소? 아, 무기장인은 좋아하겠군. 약장수들도 좋아하겠어. 금창약 하나는 기깔나게 팔리지 않겠는가?”

“그게 무슨....”

“라고, 나는 그 때 지껄이고 다녔소.”

광마는 시원하게 웃으며 급선회했다.

“이야, 역시 이런 얘기를 하고 다니니까 죄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더군. 그런데 어디 내가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덤비는 족족 하나 둘 패죽이다가 보니, 어느새 천마와 마주치게 되었지.”

“.......”

발언에 다소 문제가 있으나, 초고수의 과거 이야기는 흥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 없다.

하물며 이시아로서는 천마가 광마를 마교 십마로 끌어들인 이야기이니,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흘인가, 나흘인가. 밤낮이 바뀌어도 쉬지도 않고 비무를 펼쳤소. 사실 서로 죽이려고 작정하고 싸웠지. 놈의 천마신권에 당한 것 때문에 아직도 비오는 날마다 허리가 아프단 말이지.”

“그럼....”

“근데 내가 그 놈의 머리칼을 전부 뽑아버렸으니 내 승리였다네. 나와의 싸움에서 모든 내공을 전부 써버린 바람에, 놈은 머리칼을 잃었지.”

“.......”

이시아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설마 천마에게 천마신공의 부작용을 앓게 만든 장본인이 이 자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천마는 그냥 벗겨진 줄 알았는데.”

“그 정도 무인이면 젊었을 때도 재능이 출중하여 그런 부작용은 있지도 않았을걸? 그래서 나랑 한바탕 하고 난 다음에, 결착이 나지 않아서 무승부가 되었단 말이지? 그 때 그 놈이 이렇게 얘기하더군.”

광마는 진중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흉내냈다.

“너! 내 부하가 되어라!”

“아버님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아니. 그냥 그런 느낌으로 말했다는 거요. 했던 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 리가 없지 않소? 소공녀, 그대는 지금까지 먹은...에이, 됐소.”

광마는 손사레를 쳤다.

“나중에 인연이 닿아 남해로 내려왔더니, 어느새 놈은 내게도 묻지 않고 나를 광마로 만들었더군. 직접 천산에 찾아가서 어찌된 영문이냐고 따지려고 했는데, 거리가 어디 옆집 찾아갈 정도는 아니지 않소? 따지러 가기 귀찮아서 그냥 포기했지.”

“.......”

야인삼마 중 광마에 대한 궁금증이 해갈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왜 광마인지는 이제 이해를 했을 것이고, 나의 진정한 정체에 대하여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광마는 나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미 그는 나의 기억을 읽은 만큼, 나를 상당히 배려하고 존중해주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한 것 보다, 내가 왜 그런 짓을 저지를 건지 궁금한 거 아닌가?”

“그렇소. 혈겁이 일어날 미래는 확정되어있으며, 그걸 알면서도 왜 거기에 편승해서 중원을 혼란에 빠뜨렸는지 말해주시오.”

그는 내가 추마귀였던 시절부터 그 이전 시절, 그리고 혈강시였던 모든 순간을 피로써 확인했다.

“음...간단해.”

광마는 자신의 심장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내 심장이 아직 불타고 있기 때문이지.”

“.......”

이시아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내게 구원을 요청했다. 역시 별호인 ‘광마’답게, 그의 말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흐흐. 정말 많은 것이 궁금하겠지만, 나는 이미 혈겁을 일으킬 배경이 누군지 알려준 것 만으로도 이미 천기를 누설했어. 나 정도 되니까 이 정도로 얘기해준 거지, 여기서 더 얘기를 했다가는 나도 망가진단 말일세.”

광마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대들 주변에도 천기를 읽고, 그걸 누설하려고 했다가 정신이 나간 존재가 있지 않은가?”

“환마.”

환마의 정신이상은 그가 섭혼술을 사용한 반동이기도 하지만, 천기를 읽고 그걸 자기 좋을 대로 쓰다가 경을 친 경우였다.

“그나마 이곳은 중원에서 조금 벗어난 공간이고, 그대의 피로서 내가 기억을 읽었기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에 말할 수 있었다네. 그러니까 요화를 찾으면 된다는 건데....”

광마는 손으로 턱을 쓸었다.

“나도 그게 누군지는 몰라.”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요화’라는 이름의 존재가 진범이라는 것만 알지, 내가 요화라는 자를 만나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그럼 요화라는 이름은 어떻게 나온 것이오?”

“산해경(山海經).”

뜬금없는 이름이 등장했다.

“그리고 현녀(玄女).”

그리고 나는 그 이름에 손발이 굳었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게 시선만으로 칼을 찌르듯 노려봤다.

“현녀는 말했다. 산해경에 나오는 ‘요화’라는 자가 천하를 피로 물들일 것이라고. 그게 내가 요화라는 단어를 들은 배경이다.”

“현녀는 곤륜의 장문인을 지칭하는게 아닙니까?”

내가 입을 닫고 있으니, 이시아가 대신 질문했다. 이시아는 내가 현녀에 대해 잘 모르기에 물어본 것 같았지만, 나는 이들 중 누구보다도 현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색마여.”

광마는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만약 진정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거든, 운명을 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네가 바라는 이상향을 위한 열쇠가 그곳에 있는데,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그건 네 업보이며, 운명이다. 네가 반드시 치러야 할 혼의 속죄이니라. 평생을 피해다니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느냐?”

“.......”

살면서 이처럼 속마음을 후벼파는 말이 또 있을까. 광마는 마치 나의 기억이 나를 향해 외치는 것처럼, 내 속내를 전부 다 끄집어냈다.

“소공녀께서는 모르시는 것 같아 더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명심하라. 네가 저지를 업보는 중원 무림에서 더없는 중죄이며, 그것만큼은 ‘우리’가 아닌 너 스스로 저지를 짓임을.”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나는 광마의 세심한 배려를 느꼈다. 광마는 슬며시 웃으며 술잔을 다시 채웠다.

“알아들었으니 다행인 듯 하고, 소공녀께는 부탁을 드려야겠군.”

광마는 이시아에게 다시 포권을 취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가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시오. 이미 본인이 주절댄 덕분에 소공녀께서는 온갖 추측을 하시는 듯하나, 내 입으로 듣는 것보다 당사자의 입으로 듣는 게 더 올바를 것이오.”

“...예, 알겠습니다. 광마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시아는 탁자 아래에서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피했다가, 이시아의 손길에 조용히 손을 맡겼다.

“고맙소, 시아.”

“사랑하면 기다려달라고 하시잖습니까.”

“후후, 보기 좋군. 이 촌부가 할 말은 더 없소이다. 십마 중 광마를 영입하러 온 것이라 하면, 광마의 자리는 소공녀께서 천마에 오르시면 자유롭게 바꾸...아니지.”

광마는 음흉한 얼굴로 내게 웃었다.

“그대, 솔직히 책임은 져야지?”

“예?”

“우리 딸 말이야.”

꽈아악.

이시아가 갑자기 내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녀는 무언으로 나와 혈교주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후후, 소공녀. 너무 그러지 마시오. 내 딸아이가 가출을 했는데, 저 자를 만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거짓말이시죠?”

“글세.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아.”

“...왜곡된 진실도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광마는 술잔으로 입을 가리며 웃기만 했다. 그리고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혈교라는 집단은 마교의 하위 집단이 아니오. 마교와는 엄연히 별개의 집단이며, 나는 내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오.”

“광마...혈교주께선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계신 겁니까?”

“사랑?”

혈교주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잃어버린 사랑을 찾고 있소.”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하여, 거짓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 * *

광마와의 대화는 상당한 이득이 있었다.

“최소한 혈교주는 당장 우리의 적이 될 자는 아니오.”

“그건 다행이네.”

혈교주는 말했다.

-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 자고로 과일이란 풋것을 먹는 맛도 있지만, 역시 잘 익었을 때 먹는 게 최고가 아니겠는가?

“혈교주는 아마 혈겁에 편승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 것이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해? 혈교의 목적은 뭐야?”

“월녀강림. 10만 여인의 피를 제물로 바쳐, 특정 여인의 몸에 신녀를 강림시키는 것.”

내 말에 이시아는 사색이 되었다.

“미쳤어. 혈겁을 일으킨다는 게 무차별 학살을 하겠다는 거야?”

“...한 가지 오해를 풀고자 하오. 10만 여인의 피를 제물로 바친다는 말은 문구 그대로이나, 그걸 위해 꼭 죽이거나 할 필요는 없소.”

“혈겁에 편승한다는 말은...이미 죽은 여자 10만의 피를 모으겠다는 거야?”

“그런 셈이지.”

그게 ‘원래’ 혈교주의 계획이었다. 어차피 혈겁난세는 확정되어있고, 그걸 막을 수 없다면 거기에 편승하여 죽은 여인들의 피를 수집하는 게 혈교주의 목적이었다.

10만 여인의 피를 수집하는 피주머니가 바로 나, 혈강시.

월녀의 후보로 선정된 여인이 바로 12 혈선녀.

그리고 광마의 뜻을 이어받아 다음 대 혈교주가 된 혈교 소공녀는 유지를 이어받았기도 했지만, 진정으로 월녀를 강림시키고 싶어했다.

지금의 혈교주-아비가 월녀를 보고 싶어하듯, 미래의 혈교주-딸도 월녀와 만나고 싶어했다.

“그럼 마지막 질문이야.”

이시아는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내 얼굴을 붙잡고 웃었다.

“마교의 소공녀도 색마부인이 되었는데, 혈교 소공녀도 색마부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무슨 소리일까...?”

“.......”

“너, 혈교 소공녀랑 무슨 관계야?”

* * *

“교주, 비천색마라는 자와 도대체 무슨 관계입니까?”

“오늘 처음 본 사이지.”

혈선녀, 혈규령은 혈교주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처음 본 사이인데 그렇게 각별히 대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그냥 그러려니 하거라.”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혈교주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해야하며, 하나뿐인 진실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신다고.”

“.......”

혈교주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뭔가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듯 하면서도, 좀처럼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음.... 미래에 소예랑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될 사이?”

“아가씨랑요?”

“그래. 어떻게 보면 내 사위라고 할 수 있지.”

“교주. 따님이 어떤 남자를 데려오든 죽여버릴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렇긴 한데.”

혈교주는 쓰게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소예한테 꽉 잡혀 살 미래가 보이니, 내가 불쌍해서 어디 건드릴 수 있겠나. 내가 안 죽여도 소예가 알아서 죽여버릴텐데.”

“...제가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간단해. 둘은 운명과도 같은 붉은 실(紅線)로 이어져 있다네. 하늘이 이미 둘을 짝으로 정해놓았는데, 내가 어찌 강제로 갈라놓을 수 있겠나?”

“아....”

혈규령은 애틋한 눈으로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혈교주는 속으로 안도하며, 혈규령에게 다가갔다.

“네 불안감이 무엇인지 안다. 행여나 저자가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행여나 이곳에서의 만남이 대세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행여나 저자와의 만남으로 내 뜻이 흔들리지 않을까.”

혈규령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어느새 그녀는 벽에 등이 닿았고, 혈교주는 혈규령과 시선을 맞췄다.

“규령아.”

혈교주는 혈규령의 옆, 벽에 손을 짚으며 사납게 웃었다.

“오빠 믿지?”

혈교주의 말에, 혈규령은 모든 분노를 잠재우고 항복하고 말았다.

[작품후기]

혈교주 무공 수위 = 천마 대머리 만든 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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